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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중단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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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13.06.30 21:22
최근연재일 :
2023.02.01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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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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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3.06.3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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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글자
13쪽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1)

DUMMY

-1-


황성(皇城)의 목울대나 다름없는 대군령(對君嶺) 정상에 초옥이 하나 자리잡은 것이 언제인지 가늠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50년 전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몇 백년이 지난 고택이라고도 하였다. 혹자는 세월을 비껴가는 신이(神異)한 곳이라고도 말하던 바, 최소한 사람들의 명확한 기억 이전에 존재하던 것은 분명하였다.


고개 령자 쓰는 지명이라 하나 기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인 대군령은 황도에 드는 사람과 나는 사람이 늘 붐비는 곳이었다. 어찌 황도의 시장에 비하랴마는 작은 고을 중시(中市) 못지 않은 장터가 열렸고, 수도의 격 있는 거리에 미치지 못할 지언정 나름대로 지붕 올린 상가들이 줄을 선 곳이었으니 대군령이 아니라 대군로(對君路)라 해도 될 법한 광경이었다. 이리 북적이는 풍경 속에 초옥도 엄연히 함께 있었건만 기이하게도 초옥과 집 주인은 홀로 떨어진 양 호젓하게 있었으니, 그 집의 옆으로는 아무도 터를 잡고 장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그마한 텃밭이 뒤에 딸린 초옥에는 중년의 사내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건너편 주막의 모주꾼들은 그 사내를 사기꾼이라 불렀고 길 건너 술집의 작부들은 도인이라 하였다. 여차저차 사내에 대한 풍설은 부지런히 고개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적잖이 입에 오르내리는 안주였건만 정작 주인공은 일출부터 해거름까지 초옥 앞에 정좌한 채 가타부타 변명이 없었다. 저자사람들과 말 할 겨를이 없다 해야 옳을 것이다. 사내는 대군령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었다.


횡으로 열 아홉 줄이요, 종으로 열 아홉 줄, 생사현관 삼백하고 예순 하나의 점이 사내가 말없이 살아가는 이유였다. 멀리 원로장도에서 갓 상경한 사내가 황도의 첫 풍경으로 기억하는 것이 대군령의 기사(棋士)였고, 황도에서 객지로 먼 길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보는 광경도 초옥아래 정좌한 사내와 바둑돌이었다. 세사(世事)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작은 바둑판에 언제든 들어설 수 있었고, 바둑판의 주인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원하는 모두와 바둑을 겨루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에 승부가 나는 속기(速棋)도 있었고, 반나절에 한 수가 나오는 장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 판에 서 푼, 모주 한잔 값.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지는 사내의 바둑은 호구지책이었다.


-2-


-원래 이곳에 있던 이는 아니었지.


대군령의 터줏대감으로 자처하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원래 초옥의 임자는 이름 모를 노인의 것이었고, 그 노인 역시 바둑을 두는 것을 업으로 삼고 사는 이였다고 하였다. 사내가 처음 도착했을 때의 광경은 늙은이들이 종종 안주 삼아 술과 함께 먹는 이야깃거리였다. 서책 한 보따리를 옆에 끼고 정연했을 법한 옷 군데군데 얼룩이 진 상태로 대군령에 도착한 그는 한참 동안을 황성을 보며 긴 한숨을 쉬더니 혼자 고개를 파묻고 반나절을 앉아있다 성도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사마시(司馬試)가 열리는 봄날, 수많은 수험생이 고개를 내려갔지만 왠지 사내의 풀 죽은 모습은 주정꾼들의 뇌리에 오랫동안 남아있었고, 그 잔상은 며칠 뒤 사마시가 끝난 뒤 언덕에 터덜터덜 올라오는 사내를 보면서 확실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성도로 내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길에 주저앉아 한숨을 길게 내쉬고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앉아있었다 한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추슬러 터덜터덜 사내가 걸어 간 곳은 초옥의 바둑판 앞이었다. 마침 노인은 길 가던 상인과 대국을 하는 중이었고 무심하게 사내는 두 사람의 대국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꽤나 긴 장고바둑이었다. 사내는 한참을 보며 서 있었고, 결국 상인이 손을 털고 일어날 때까지도 노인의 뒤에서 바둑판을 보고 있었다. 저녁놀이 두 사내의 어깨에 비스듬히 떨어지는 중이었다.


- 아직도 보는가


- 달리 할 일도 없고 말입니다.


- 유생(儒生) 아니신가?


- 이젠 아닌 것 같습니다.


- 집에 가셔야지


- 갈 곳도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과거공부가 쉬운 적이 있었으랴, 오가는 대화로 미뤄보건대 사내는 나름대로 뜻을 품고 고향을 등 진 지 꽤 되는 듯싶었다. 그제서야 노인은 사내를 흘끗 쳐다보았는데 사내는 하늘을 바라보며 노인의 눈을 회피하였다. 쉴 새 없이 눈을 깜박이고 있는 것이 무언가 흐르는 것을 막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상심하였구먼, 한번 실패는 병가지 상사 아니런가


- 10년 공부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하였소.


- 시제가 무엇이었는가


- 천원지방(天圓地方)이었소.


- 쉽지만 어려운 것이지


그제서야 사내는 노인을 물기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그것은 동정을 구하는 눈이 아니라 경멸에 가까운 눈이었다. 거리의 바둑쟁이가 학문을 논할 손가


-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신 분인지 내 어깨 너머로 보면서 알지 못했소이다.


사내의 비아냥에도 노인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묘를 깨우쳐서 세상의 이치라도 통달하신 것이오?


- 하늘을 봐야 도리를 아는가. 땅을 봐도 그림자가 있는 것을.


사내는 말을 잊은 듯 물끄러미 노인을 쳐다보다 한숨을 내 쉬며 자신이 메고 있던 서책들을 길바닥에 던졌다. 이른 봄 마른 땅에 흙먼지가 풀썩였다.


- 사내로 태어나 두 가지 뜻이 있었으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가 되어 구세(救世)를 하는 것이 첫째였고, 또 하나는 학문의 극에 달해 황제를 모시고 궁궐 안에서 세상의 이치를 경연(經筵)하는 것이었소. 그런데 10년의 공부에도 천원지방 네 글자를 풀어내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길로 아예 실패자인 것이오. 세상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자이오. 식솔도 없고 부모도 계시지 않으니 무슨 미련이 한 가닥 남아 있으리오.


노인은 사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흰 돌과 검은 돌을 번갈아 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사내를 다시 쳐다보았다.


- 이것이 기억 나는가


- 방금 전의 기보(碁譜) 아니오


- 이 다음이 무엇이었던가


- 백의 좌상변이었소


- 이것을 아래로 내리면 어떻겠는가


- 위가 무너지겠지요


- 옆으로 내리면 어떠하겠는가


- 모르겠소이다.


- 세상을 보는 이치를 모르는 게 아니라 풀지 못하는구나.


노인은 말없이 손짓으로 사내를 앞에 앉혔고, 사내는 별 말 없이 노인의 앞에 좌정하였다. 상점이 하나 둘 문을 닫고 해가 들어가고 달이 자리를 대신할 때까지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좌정한 채였고, 다음날 이슬이 풀잎에 시나브로 맺힐 때에도 두 사내는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으니, 그 날 이후 사내는 노인의 뒤에 시립한 채 노인의 바둑을 보기 시작하였다. 그러기를 2년, 노인은 어느 날 별 말 없이 작은 짐을 꾸리고는 초옥을 나섰다. 사내는 무릎을 꿇고 노인의 떠나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으니 초옥의 주인은 새로운 주인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홀연히 자리를 뜬 것이었다.


- 2년의 견식이면 호구를 삼으리라, 기연이 닿으면 묘수를 익힐 것이고, 스스로 깨우치면 하늘과 땅을 알 것이니, 한 발짝 더 나가면 망집에서 벗어날 걸세.


그 뒤로 사내는 초옥의 새 주인이 된 것이었다. 삼백 예순 한 점 위에 흑백의 전장이 사시사철 열려 있었으니 한 판에 서 푼. 사내의 호구지책은 그것으로 시작된 것이고 그 후 10년의 세월은 덧없이 빨리만 지나갈 뿐이었다.



-3-


언제나 다가오는 춘삼월, 다시 사마시가 열리고 황도에서 인재를 뽑는 계절이 돌아오자 대군령은 몰려드는 서생들과 하인들로 분주함이 극에 달하였다. 지필묵과 서책을 사는 이들부터 황성을 보자 술부터 찾는 한량들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과거를 보겠다고 몰려들었으니 이 며칠이 상가에는 대목이고 호시절이었다. 사람이 많으면 기예를 찾는 이 또한 많은 법, 초옥의 사내에게도 많은 유생들이 몰려 바둑 한판으로 복잡한 머리를 다스리려 애쓰는 중이었으니 사내 역시 장고바둑보다는 빠른 속기로 판을 줄이며 돈을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난 10년의 세월은 사내에게서 서책을 빼앗아 갔고, 스승의 말을 잊게 했고, 남긴 것은 바둑의 수밖에 없었으나 어디까지나 바둑은 갈 곳 없는 자신에게 남겨진 초옥과 호구지책이었으니 그에게도 과거철은 남는 한철장사일 뿐이었다. 어느 샌가 나름대로 청수하던 얼굴에는 덥수룩한 수염이 잡혀있고 눈은 늘 아침의 한 사발 술에 충혈되어 있으니 바둑판 앞이 아니라면 아무 집 문 앞에서 늘어져 자는 걸인이나 다를 바 없는 인상이었다.


- 염병할 늙은이가 말로 호린 덕이지


누군가 내력을 물으면 쉰내 가득한 입으로 그렇게 말을 내뱉을 뿐, 더 이상 말이 없던 사내에게 한 청년이 다가온 것은 햇볕이 중천에 올라 정오에 다가설 무렵이었다. 붉은 비단에 우피를 덧댄 가죽신을 신고 얇은 호박장식이 붙은 허리띠까지 매고 나타난 청년은 잠시 저자거리를 둘러보다 거리낌없이 털썩 사내의 맞은 편에 좌정하고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 바둑 한 판에 얼마를 받으시오?


- 서 푼이오.


- 서 푼짜리 바둑이면 서 푼짜리 값어치겠구먼.


사내는 번쩍 눈을 들어 젊은 청년을 쳐다보았다. 날듯이 뻗은 봉황 같은 눈썹에 날렵한 코와 서글서글한 눈매가 영준함을 그대로 내어 보이는 준수한 미공자였다. 차려 입은 품세 또한 귀티를 더하니 어느 지방 유력자의 자제가 분명했다. 사내는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는 것을 억누르며 귀공자에게 대답하였다.


- 서 푼짜리 바둑이 맘에 안 들면 공자께선 다른 유희를 찾아보시구려


- 그럴 필요 있겠는가. 어차피 책 보기 전이니 잠시 손이나 섞어보세.


사내가 눈을 홉떴고, 떨리는 손으로 흑돌을 집었다. 다른 때도 익히 들었던 비아냥이었지만 이렇게 어린 유생에게까지 모욕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노회한 어투에 사내는 선번(先番)을 잡아 박살을 내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우하귀에 검은 돌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미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 손님을 청해 놓고 흑돌을 잡았으니 겸손한 건 인정해 줌세.


소년의 백돌이 바둑판 한가운데 딱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 놈은 허풍만 가득 든 천둥벌거숭이로구나. 사내의 손이 다시 하단을 내리쳤고 점차 집의 모양을 갖추어 나갔다. 천하에 재주 없는 놈이 가진 걸 믿고 날뛰는 것이 가장 꼴사납다. 어린 것아, 중앙에서 집을 지어 언제 승부를 보겠느냐. 기초도 모르는 놈이 누각을 짓는구나. 사내는 일찌감치 승부를 짓고 쫓아버릴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빙그레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귀공자의 백은 중앙에서 시작하며 천변만화 하면서 흑돌을 가로막고 세를 불리고 패를 꺾으며 축을 말고 사방으로 뻗치고 있었다. 10년 기력이면 난전에서 밀리기가 오히려 어려운 법이거늘, 사내의 흑돌은 속수무책 기세를 잃고 사방에서 옥죔을 당하는 형국이었다.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어. 이게 무슨 묘수인가. 사내의 수가 두 수 앞을 보면 소년의 수는 열 수 앞을 보는 듯 하였다. 지리멸렬, 중반의 세력싸움부터 점차 밀리는 것처럼 보이던 흑돌은 종반이 되자 세력다운 형체를 찾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복기가 필요없을 정도의 완패였다. 소년은 천하의 기재였다.


- 서 푼짜리라더니 과연 그러하네


사내는 말을 잊지 못한 채 귀공자가 주섬주섬 일어서며 석 냥을 앞에 던져주는 것을 보고도 석상처럼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슬쩍 바둑판의 주인을 보던 소년은 히죽 웃으며 말하였다.


- 기력(碁歷)이 몇 년인가


- ……


- 10년이 안 되었으면 다른 일을 찾아보게. 설마 그 이상이라면 죽을 때까지 서 푼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네.


해가 아직 중천에서 내려오기 전에 끝나버린 대국이었다. 귀공자는 하인들과 함께 천천히 황도를 향해 내려가는 중이었고, 몇몇 모인 구경꾼들은 숙덕대며 사내와 사내 앞에 놓은 석 냥과 기이한 형세의 바둑판을 번갈아 쳐다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작 사내는 말이 없었다.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만이 그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사내는 하루 종일 손님을 받지 않았고, 단지 귀공자가 남겨두고 간 바둑의 형세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사내는 초옥 밖을 나서지 않았다.


며칠 뒤, 구성진 풍악소리와 함께 장원급제의 행렬이 대군령을 넘었다. 근래에 보기 드문 명필에 명문장, 천하를 아우르는 식견을 가진 약관의 천재가 장원을 하고 고향을 방문하는 길이라 하였다. 대군령의 장사치들은 모두 고개를 내밀고 봉황미(鳳凰眉)를 자랑하는 귀공자의 행렬을 찬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동떨어진 초옥만 문이 굳게 잠겨져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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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E in 켄타우리 23.02.01 63 4 22쪽
13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fin) 22.09.26 66 1 10쪽
12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2) 22.09.26 61 0 10쪽
11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1) 22.09.26 94 0 9쪽
10 진실의 순간(fin) +1 22.07.30 69 4 21쪽
9 진실의 순간(3) 22.07.30 64 0 14쪽
8 진실의 순간(2) 22.07.30 68 2 12쪽
7 진실의 순간(1) +1 22.07.30 138 2 17쪽
6 소울(soul)의 대부 (fin) +4 14.06.27 1,113 31 19쪽
5 소울(soul)의 대부 (2) +1 14.06.27 1,030 35 25쪽
4 소울(soul)의 대부 (1) +2 14.06.27 1,782 33 15쪽
3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完) +20 13.06.30 2,376 101 18쪽
2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2) +3 13.06.30 1,969 81 12쪽
»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1) +3 13.06.30 3,672 9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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