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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중단편선

웹소설 > 작가연재 > 일반소설, 중·단편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13.06.30 21:22
최근연재일 :
2023.02.01 01:49
연재수 :
1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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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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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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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30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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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진실의 순간(1)

DUMMY

“레벤톤의 DNA를 찾아냈어.”

미구엘 루이스의 입이 술잔에서 떨어지며 말이 나왔다. 같이 앉아있던 투우사가 그를 쳐다보았다.


120층 높이 ‘그라나다 하시엔다’의 펜트하우스에 마련된 바(bar)는 360도가 유리로 둘러싸인 뉴마드리드 최고의 전망대였다. 화상패널이 아닌 진짜 통유리를 통해 뉴마드리드의 모습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바에 들어와서 그 광경을 만끽할 수 있는 사람 또한 몇 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구엘은 창 밖의 광경은 하도 봐서 넌더리가 난다는 듯 창을 등진 채 술잔을 손으로 까닥거리더니 다시 힘줘서 자신의 옆에 있는 투우사에게 방금 전 한 이야기를 반복했다.


“레벤톤의 뼈를 멕시코에서 공수해오는 중이라고 했어. 연락이 왔어.”


발타자르의 눈이 둥그래지는가 싶더니 곧 투우사의 입은 양 옆으로 히죽 벌어졌다. 발타자르는 감정을 관중 앞에서 숨기지 않는 타입의 사내였다.


“그 ‘레벤톤’ 말하는 거 맞지?”


미구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술잔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동차를 몰겠다고 떼쓰는 어린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었다.

“그래, 그 레벤톤 말이야. 위대한 투우사 펠릭스 구스만을 죽인 그 레벤톤.”


“사실이라면 대단한데. 언제쯤 DNA복구가 가능한 거지?”

미구엘은 딱 소리가 나게 술잔을 바에 내려놓았다. 흠칫 놀라는 발타자르를 바라보는 미구엘의 눈초리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후안이 어느 무너져가는 식당에서 얻어온 꼬리뼈인지 알 바 아니야. 1940년대에 활약하던 황소의 뼈다귀가 방사능 천지인 멕시코 흙더미 어디에서 나왔는지 누가 알겠나? 그게 레벤톤이라면 내 할아버지의 뼈가 바티칸에 있다고 믿는 게 낫지! 만에 하나, 그게 진짜 레벤톤의 뼈라면 더 큰 문제고.”


“무슨 소리야, 치코?”

미구엘은 슬쩍 발타자르를 노려보더니 술잔을 내려놓은 손을 방아쇠처럼 당겨 자신이 총애하는 투우사의 콧잔등을 노렸다.


“그게 진짜 레벤톤이라면 자네는 일 분도 못 버티고 모랫바닥에 내장을 쏟을 거야. 500kg에 가까운 진짜배기 황소가 덤벼드는 걸 본 적이 있어? 온순한 가축이 지옥에서 끌려 나온 야수가 되어 모랫바닥을 뛰어다니는 걸 본 적이 있느냐고.”


“자넨 있어?”


“본적은 없어도 그게 뭔지는 알아.”


“프로모터가 마타도르보다 야수에 대해 잘 안다는 건가?

발타자르의 눈이 슬쩍 반달처럼 올라가며 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모래가 휘날리는 아레나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보이던 그의 미소엔 격식을 모르는 아이와 요조숙녀의 몸매를 훑어보는 바람둥이가 같이 섞여 있었다.

사내들은 그의 동작에 찬사를 던졌고, 여인들의 그의 미소에 장미를 던졌다. 하지만 미구엘 루이스는 사내의 미소를 빤히 보더니 무겁게 도리질쳤다.


“자넨 아무것도 몰라.”


“치코, 내가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해야 하지?”

발타자르의 눈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입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부조로 새겨진 그리스 신화의 두상을 닮은 준수한 청년의 구릿빛 얼굴에 진지함이 돌아오자 루이스는 아까보다 더욱 험상궂은 얼굴이 되었다. 발타자르 데 베르가, 뉴마드리드 최고의 투우사는 자신의 프로모터에게 말했다.


“아레나에 들어선 순간부터 원했던 거야. 아니, 마타도르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라고 해야 옳은 말이겠지. 칩이 없는 황소 말이야.”


“그게 그렇게 중요해? 자네와 후안 회장의 고집은 미친 광대질로 끝날 거야.”


“난 뉴마드리드 최고의 광대야. 그래서 그 황소가 필요해.”

미구엘은 발타자르를 노려보던 눈을 돌려 바 위의 천장과 그 옆의 장식장을 수 놓은 수 많은 금빛 편액과 트로피들을 훑어보았다.

위대한 투우사, 이 달의 투우사. 올해의 명경기, 최고의 퍼포먼스, 수 많은 제목의 글귀와 수많은 형상의 조소가 놓여있었지만 맨 아래 적혀있는 이름은 동일한 인물의 것이었다.

발타자르 데 베르가. 마타도르 중의 마타도르, JMC의 화신과 같은 사나이. 프로모터 미구엘 루이스 최고의 작품.

그리고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


미구엘의 눈썹이 완만한 각도를 만들며 다시 수평에 가깝게 돌아왔다. 사내는 고개를 흔들더니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섰다. 미구엘은 아까보다 훨씬 우호적으로 변한 목소리를 바에 남겼다.


“잘 들어 발타자르, 네 말마따나 우리는 광대야. 옛 투우의 방식을 흉내내는 따라쟁이라고. 사람들이 동물의 죽음을 꺼리기 시작한 이후로 진정한 투우와 투우사의 대결이 뭔지, 그 비결이 뭔지 알려주던 사람들은 사라졌어. 우리는 책과 기록으로 그 족적을 따라 춤을 추는 것 뿐이라고.”


“내가 아레나 말고 댄스 플로어에서도 발군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 않나?”

발타자르의 눈부시게 하얀 이를 바라보던 미구엘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노인은 천천히 머리를 흔들고는 의자에 걸려있던 모자를 집었다.


“절대로 그 놈에게 등을 보이지마, 그랬다간 넌 그 날로 죽을거야.”

데킬라 한 병을 모두 비웠지만, 미구엘은 보폭하나 변하지 않은 걸음걸이로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발타자르는 빤히 그의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고, 그의 시선을 의식한 듯 미구엘은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그의 친애하는 투우사를 흘끗 쳐다보며 한마디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시는 치코라고 다시는 부르지도 말고. 알겠어. 빌?”

발타자르의 술잔이 인사처럼 하늘로 들렸고, 바의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바에 남은 것은 투우사 하나뿐이었다.


이미 해는 떨어지고 도시의 불빛이 석양을 대신하여 서서히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일몰시간에 맞춰 JMC발전소에서 만들어지는 전력이 빛의 형태로 변하며 중심부부터 완벽한 동심원의 형태로 확장되고 있었다.

곧 시커먼 도시의 외곽구역에 도달한 빛살은 그 성장을 멈추었다. ‘해바라기의 도시’ 뉴마드리드의 별명은 낮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창문 근처로 치적치적 걸어간 발타자르는 자신의 발 아래에서 밤의 거리로 탈바꿈하는 도시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사내의 힘에서 피식 웃음이 올라왔다.


“빌이라니.”



-2-




분홍과 노란색으로 양면이 덧대어진 카포테(투우를 흥분시키는 양면의 색이 다른 천)가 풍차처럼 아레나 안에서 돌아갔다. 새로 들어온 노비예로(Novillero: 견습투우사)는 자신의 어깨보다 훨씬 넓은 카포테를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투우를 도발하고 있었고, 투우는 가볍게 달려들며 분홍과 노란 색의 휘장을 젖혀올렸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파도소리처럼 여기저기서 들끓었다.


미구엘이 좋은 노비예로를 데려왔군.

발타자르는 조각 같은 구릿빛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얼굴이 아레나의 와이드 스크린에 잡히자 잦아들던 환호성이 갑자기 기름뿌린 장작불처럼 확 하니 타올랐다. 귀부인 하나가 그대로 혼절하며 부채를 손에서 떨구었다.

스크린 가득 잡힌 발타자르 데 베르가는 미소를 띠며 화난 듯 함성을 질러대는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늘 소가 좋아!”

엔리케가 말에 탄 채로 발타자르에게 인사를 했다. 가장 노련한 피카도르(Picador: 창잡이)중 하나인 엔리케의 입에는 알루미늄으로 된 앞니가 번쩍이고 있었다. 발타자르 역시 사내의 웃음에 이를 내보였다.


“저 노비예로는 누구야? 저렇게 카포테를 흔드는 미친 놈을 본 적이 없는데!”


“세비야에서 데려온 녀석이야! 물건이지! 뉴마드리에 온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벌써 만나는 여자가 세 명이더구먼!”


“세비야?”

이미 도시라고 불리기에 민망한 동네였다. 그리고 그 곳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난 곳이기도 했고······여전히 금지구역이었다. 엔리케는 발타자르의 의도를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예의 그 웃음을 지어보였다. 발타자르도 따라 웃었다.


“최근에 너무 난민들이 많이 들어오는군 그래. 저 놈 팔다리는 제대로 붙어 있던가?”


“잡초 사이에서도 장미는 피어나는 법이야, 마타도르!”


재빨리 노비예로가 황소의 앞에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나팔이 우렁차게 다음 차례를 가리키며 아레나를 울렸다. 엔리케는 재빨리 말을 몰고 단창을 쥔 채로 흥분해 있는 투우를 향해 튀어나갔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투우는 고개를 들어 말을 타고 달려오는 창잡이를 쳐다보았다. 짐승 특유의 경계심을 발휘하며 투우는 투레질을 쳤다. 하지만 엔리케라면 아무 문제없이 원하는 곳에 창을 꽃을 것이다.

위험하지 않으니까.

발타자르는 먼지투성이 아레나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청명한 하늘 아래 JMC의 비행선이 날고 있었다. 거대한 풍선 아래 붙어있는 대형화면에서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점멸되며 땅의 사내들에게 계시를 내리고 있었다.


‘뉴마드리드, 이베리아의 혼이여, 축복받은 땅이여, 위대한 전통이여. 그대는 이 땅의 자랑이어라.’


늘 화창한 뉴마드리드의 하늘에 비는 오지 않았다. 태풍이 물려올 때에도, 어두운 구름이 몰아닥치며 검은 비를 뿌려댈 때에도 늘 천사 같은 날개를 지닌 비행선들이 작은 불꽃을 일으키며 위대한 도시를 자장(磁場)의 방패로 보호하고 있었다.

마치 신의 계시를 지상에 대언하는 천사들의 군집인 양, 수백 대의 은빛 비행선이 소리 없이 허공에 떠서 같은 글자들을 반복해서 내 보이고 있었다. 비행선 옆에서는 마천루들이 거울의 숲을 만들고 있었다. 아레나는 거대한 숲 사이에 위치한 오래된 사원이었다.


아레나는 ‘화염의 날’이 오기 전 유행했던 양식으로 적벽돌을 하나씩 붙여서 올려 놓은 유일한 건축물이었고, 모든 것이 유리로 만들어진 뉴마드리드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전적인 잔재였다. 아레나는 특별했다.

유려한 건축물에 고풍스러운 옷을 지어 입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만 받아들이는 곳이었다. 살찐 귀부인과 늙수그레한 부자들, 그리고 오직 이베리아인의 피와 혼을 담은 마타도르만이 함께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발타자르의 입술 한쪽이 묘하게 들렸다.



“위대한 발타자르 데 베르가!”


순간, 우렁찬 팡파레가 아레나를 진동시켰다. 그제야 시선을 돌린 발타자르는 자신의 얼굴을 향해 수많은 대중의 눈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옛 무어인들은 사람의 시선에 힘이 있다고 믿었다고 했지. 발타자르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었다. 수 많은 사람의 눈빛이 그의 가슴에 뜨거움을 선사하고, 그의 손과 발에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 때 어린 보조원이 발타자르의 뮬레타(붉은 천)을 들고 뛰어와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위대한 발타자르! 전 당신 팬이에요!”

반사적으로 발타자르는 천진한 소년의 얼굴대신, 그의 뮬레타를 잡고 있는 소년의 일곱 갈래 손가락을 먼저 쳐다보았다. 순간 소년의 얼굴에 번지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공포와 죄책감이 물들어 올라왔다.

발타자르는 소년의 손에서 뮬레타를 받고 싱긋 이를 드러내 보였다.


“고맙다, 어린 친구.”


발타자르는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붉은 천, 뮬레타를 한 손에 들고 천천히 아레나를 향해 걸어나왔다. 사람들의 입이 동시에 벌어지는 것이 발타자르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지금까지 노비예로와 피카도르에게 던져진 찬사는 일순간에 날려버릴 만큼 강렬한 함성이 벽돌로 지어진 아레나를 징징 울렸다. 어깨가 피로 흠뻑 젖은 투우가 사방에서 울려 나오는 함성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발타자르의 온 몸을 휘감은 금색과 은색, 적색의 갑옷이 움직일 때마다 햇빛이 그의 몸에 반사되어 마치 신이 아레나의 모래 위에 강림한 듯싶었다. 관중들의 손이 모두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발타자르는 그를 경배하는 신도들을 향해 모자를 던지고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붉은 물레타가 방황하는 야수의 눈 앞에 펼쳐졌다.

언제나 그렇듯, 뉴마드리드의 기사, 발타자르 데 베르가의 움직임은 바람같이 빠르고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다. 투우는 마치 발타자르의 신호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재빨리 투우사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전력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관중들의 환호가 비명을 바뀌는 순간, 뮬레타는 재빨리 발타자르의 등 뒤로 돌아갔다. 황소는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급격하게 틀며 발타자르의 등 뒤에서 나풀대는 뮬레타를 향해 돌진했고, 붉은 천은 황소의 머리를 휘감으며 허공에 휘날렸다.


발타자르의 허리는 유연하게 돌아가며 돌진하는 황소를 보내주었다. 투우사의 두 다리는 굳건하게 아레나를 밟은 채 흐트러지지 않았고, 붉은 뮬레타는 새파란 하늘 아래서 달려가는 황소를 배웅하듯 위로 들린 채였다.


“브라보!”

첫 번째 합이 지나기도 전에 아가씨들이 던지는 장미꽃이 아레나 안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발타자르의 서글서글하던 눈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운 칼처럼 버려져 있었고, 사내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아레나의 와이드스크린에 살아있는 신, 마타도르의 얼굴을 큼지막하게 그려지자 환호성이 일순간 잦아들며 오오 하는 경외감 섞인 신음이 관중석에서 일제히 새어 나왔다.

발타자르의 물레타가 다시 회전하자, 황소의 뿔이 성난 파도처럼 붉은 대지를 향해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발타자르의 몸이 가볍게 황소를 보내며 성난 파도를 희롱했다.


“언제 봐도 대단해요. 저건 춤이죠. 발타자르는 타고난 사냥꾼이에요.”


“타고났지.”

격벽 근처에서 대기하던 엔리케가 미구엘 루이스와 함께 발타자르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룩배기 황소가 붉은 장미를 뿔로 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붉은 꽃잎은 낭창한 금빛 뿌리와 은색 가지를 흔들며 꽃잎을 탐하는 황소의 뿔을 스치며 피해나갔다. 느껴지지 않는 미풍에 흔들리는 장미였다.


“저 정도면 타고난 재능이지. 진짜배기하고 붙어도 되는 진짜 투우사.”

발타자르의 오른손에 얇은 세검이 들리자, 관중들의 환호는 절정에 달했다. 왼손에 잡은 막대 달린 붉은 천이 천천히 황소의 눈을 향해 다가갔고, 오른손은 활시위를 당기듯 한껏 뒤로 돌아가며 새파랗게 벼려진 칼날이 조각 같은 투우사의 얼굴과 평행이 되게 놓였다.

화려한 무대의 마지막을 위한 마지막 한 순간을 위한 찰나였다. 황소는 온 몸에 피를 흘리면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위대한 마타도르, 발타자르의 기예는 흉맹한 야수의 육신에서 활력을 빼앗아가고, 심신을 피로하게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발타자르의 눈초리가 슬쩍 찌푸려지더니 조심스럽게 쥐고 있는 뮬레타의 지지대를 살짝 눌렀다. 황소의 눈이 거짓말처럼 마타도르의 눈과 마주쳤다.


황소의 발구름이 시작되자 일순간 관중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조용해졌다.

발타자르의 물레타가 모래판에 닿을 듯 낮춰지고, 칼날이 얼굴 앞으로 나오며 황소의 양 어깨 사이를 노렸다. 모래를 긁던 황소의 앞발이 앞으로 뻗는가 싶더니만, 순식간에 포탄이 튕기듯 발타자르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순간, 뮬레타를 향해 코를 처박는 황소의 어깨 사이로 은빛 칼날이 소리없이 박혔다. 괴성과 함께 황소의 입과 코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1-2m의 짧은 거리에서 십 초도 안 돼 벌어진 일이었다.

발타자르는 물레타를 젖히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검날은 견갑골 사이를 뚫고 황소의 심장을 일격에 관통한 뒤였다. 붉은 천을 왼손에 감고 천천히 오른손을 드는 마타도르의 모습이 와이드 스크린에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천둥 같은 환호성이 폭포처럼 하늘 위에서 떨어졌다. 쓰러지는 소와 그를 둘러싸는 노비예로와 피카도르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아레나 사방에서 붉은 장미꽃이 노란 모래위로 쉴새 없이 쏟아졌다.



“브라보! 발타자르!”


신의 향한 찬양과 진배없는 관중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발타자르 데 베르가는 조각 같은 미소를 드러내고 그들을 향해 깊게 허리를 굽혔다.

뉴마드리드에서 이런 찬양이 허락된 사람은 발타자르 데 베르가 하나뿐이었다. 투우사의 미소는 없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사내의 웃는 얼굴 미간에 깊은 주름이 하나 만들어지고 있음을 와이드스크린은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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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fin) 22.09.26 65 1 10쪽
12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2) 22.09.26 58 0 10쪽
11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1) 22.09.26 93 0 9쪽
10 진실의 순간(fin) +1 22.07.30 65 4 21쪽
9 진실의 순간(3) 22.07.30 62 0 14쪽
8 진실의 순간(2) 22.07.30 65 2 12쪽
» 진실의 순간(1) +1 22.07.30 136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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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完) +20 13.06.30 2,373 101 18쪽
2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2) +3 13.06.30 1,966 8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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