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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중단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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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13.06.30 21:22
최근연재일 :
2023.02.01 01:49
연재수 :
1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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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95
추천수 :
389
글자수 :
98,073

작성
13.06.30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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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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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글자
12쪽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2)

DUMMY

-4-


그 뒤로 5년이 흘렀다. 대군령의 저자거리는 예전 같은 활기참이 줄어든 지 오래였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땅을 친 것도 있었지만 서쪽의 외적이 침노하니 정세가 엄정해지고 무거워 진 것도 원인이 있었다. 게다가 과거를 보는 자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 탓도 있었다. 현명하기 그지없는 젊은 재상이 ‘혈기만 넘치고 중구난방 식견 없는’ 무리들을 줄이고 공신의 자제들을 대우하기로 한 까닭이었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사마시는 봄의 한 철 하루에 다 보기로 하였으되, 사람들의 풍문으로는 재상의 고향에서 특별히 많이 응시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자 거리의 소문은 풍설(風說)에서 그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옥의 문이 열리고 사내가 다시 바둑판을 평상에 벌이는 것을 사람들이 본 것은 그 해 가을, 대군령에 유생 대신 추수한 세곡의 마차가 길을 메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텃밭에서 종종 채소만을 가꾸던 그가 다시 바둑판을 꺼냈다는 것은 저자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일이었고, 그제서야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 장사꾼들은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서리 낀 모습을 보고 그 용모의 변화에 또한 놀랐다. 그리고 바둑판을 벌인 뒤 첫 상대에게 말하는 대전료를 듣고서도 깜짝 놀랐다.


- 한 판에 석 냥이오


마지막으로, 그의 바둑을 보면서 사람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늘 백을 잡았지만 상대방의 집이 중원을 넘지 못하였고, 상대방은 네 귀를 모두 잡고서도 세력에서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바둑을 두는 이도, 뒤에서 구경하던 이도 모두 혀를 내둘렀다. 신묘하도다. 신묘하도다. 하지만 사내의 입은 자물쇠라도 달린 듯, 사람들의 반응에도 무덤덤하기 그지 없을 뿐이었다.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게 퍼지는 법, 곧 황도에서 내로라 하는 기사(棋士)들이 대군령에 진을 치기 시작했지만 그 누구도 초옥의 바둑쟁이에게 이겨낼 도리가 없었고 어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기귀(碁鬼)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원치 않는 명성이 대군령을 거쳐 황도에 이르고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할 즈음, 황실에서 한 대의 마차가 미끄러지듯 대군령으로 올라오니, 사내가 다시 출문한 지 7년 째,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의 일이었다.


마차가 열리며 나타난 사람은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누런 비단을 걸친 채 비둔한 몸을 평상에 올렸고, 사람들은 모두 차가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초옥의 바둑쟁이 역시 몸을 굽혔으나 비단옷의 사내는 그를 말렸다.


- 그대가 기귀라 불리는 사내인가?


- 천하고 헛된 이름이옵니다.


- 귀신인지 아닌지는 보면 알 터.


사내는 무릎을 펴고 평상에 올라 떨리는 손으로 오랜만에 흑을 잡았다. 사내를 바라보는 비단옷의 사내는 슬며시 웃으며 사내의 손을 보았다. 하지만 사내의 흑돌이 중원을 찍어누르자 비단옷의 사내는 웃음을 갈무리하며 진중한 표정을 짓기 시작하였다.

희뿌연 하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습을 바꾸지 아니하였고, 기귀와 비단옷의 사내가 벌인 대국 역시 침묵을 지킨 채 한낮을 꼬박 채웠다. 기귀의 장고는 한 다경을 넘었고, 비단옷의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패가 얽히고 장문을 펼쳤지만 서로의 형상이 빛과 그림자 같으니 누가 이기리라 쉽게 결판을 낼 수 없었다. 기귀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으나 윗니가 지그시 입술을 내리누르고 있었고, 금포 사내의 눈은 쉴 새 없이 깜박이며 머리 센 중년의 대적과 바둑돌을 연거푸 보기가 수백 차례였다. 그 때 비단옷을 입은 사내에게 군사 하나가 와서 전언을 전하였고, 사내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귀에게 나직이 말을 걸었다.


- 국사가 다망하여 더 이상 돌을 둘 수 없노라.


- 삼가 송구하옵니다.


- 서 푼짜리 바둑이 어찌 환골탈태 하였는가?


낮게 웃으며 봉황눈썹을 꿈틀대는 승상의 얼굴을 잠시 쳐다본 기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사내에게 대답하였다.


- 그 날의 기보를 5년간 방안에서 복기하고 또 복기하였습니다.


승상은 물끄러미 고개 숙인 기귀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더니 피식 미소를 짓고 소매를 뒤지더니 무언가 묵직한 것을 바둑판 위에 던졌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흑백 돌이 사방으로 튀면서 은자(銀子)의 빛줄기가 바둑판 사방을 비추었다. 사람들의 나직한 탄성소리와 함께 승상은 마차로 다시 돌아갔고, 기귀는 말없이 흩어진 바둑돌과 은자가 놓여진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5-


시간은 화살과 같고, 나이를 먹으면 어느 순간부터 물살이 불어나듯 순식간에 흘러가는 것이 세월이다. 소슬하게 바람 불던 겨울의 대국이 지난 지도 3년이 흐르고, 기귀라 불린 사내는 여전히 초옥에 기거하고 있었다. 천하의 기재라 불리던 승상과의 대국마저 무승부로 돌아가자 사람들이 질시와 찬탄이 한 몸에 쏟아졌으나, 정작 사내는 없던 말이 더욱 없어지고 초옥의 방구석을 멍하니 보는 일이 잦아지기만 하였다.

- 사방 온 벽에 똑 같은 기보를 송곳 꽂을 데도 없이 붙여놨더구먼


슬쩍 기귀의 초옥을 보고 나온 호사가가 기가 질린다는 투로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기귀는 병아리가 물을 먹듯, 벽에 붙은 기보를 보고, 다시 바둑판을 보고 하늘을 보기를 하루 종일 반복하고 있었다. 대국을 청하는 사람들은 위세에 눌리고 시세에 쫓겨 점점 줄어드는 중이었고, 그만큼 초옥의 살림살이도 빈한해지는 중이었지만 기귀는 그런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늘 대국에서 백을 잡았으나 겨울 이후로 한 판도 승을 뺏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귀의 표정은 갈수록 침중해져만 갔다.


그리고 4년째 되는 봄, 이제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없이 요식으로만 남아있는 과거철이 돌아왔다. 국경의 소문은 스산해지고 대군령의 상점들은 태반이 떠나갔으며, 술집의 술잔은 폭이 좁아졌다. 서책은 팔리지 않아 불쏘시개로 더 많이 들어갔으며 서 푼짜리 모주는 석 냥 값에 팔리는 중이었다. 전날 밤까지 매섭게 불던 삭풍이 어느새 잠잠해지고 등허리로 따스한 춘광이 내려와 기귀를 비롯한 대군령의 모든 이들이 몽롱하게 앉아 있는 하릴없는 오후, 새순이 돋기 시작한 나뭇단을 헤치고 한 명의 사내가 천천히 대군령을 넘어와 초옥 앞에 자리잡은 것이 그 시간이었다.


- 기귀 어른이십니까


등 뒤에 서책과 두툼한 비단을 가지런히 동여매고 선 채로 가볍게 시립하는 이는 해쓱하니 청수하게 생긴 사내였으나, 신색이 소탈하고 정갈함이 영락없이 사마시를 보러 오는 유생이었다. 어차피 과거는 황문(皇門)에 허수아비 같은 선비들을 모아놓고 뽑을 자는 선택하는 자리로 전락했건만 아직까지 청운의 꿈을 안고 달려오는 벽창호 같은 유생들이 남아 있긴 하였다. 기귀는 공손히 인사하는 청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조용히 평상에 정좌한 채 기귀에게 말을 걸었다.


- 소생, 부족한 공부를 펼쳐 보겠습니다.


- 그러시구려


바둑을 공부(工夫)라 말한 유생은 처음이었다. 기귀는 졸음이 몰려오는 눈을 다시 제대로 뜨고 청년의 흑돌이 내려오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우하귀의 세력선, 평범하기 그지없는 포석으로 판을 시작하였고 기귀는 슬며시 지금과 마찬가지로 중앙의 한 점에 백돌을 놓았다. 말이 필요 없는 기귀의 성명절기가 되어버린 천원일심(天元一審), 비록 승상의 기보를 그대로 보았다 하나 일세의 기재 승상과도 백중지세를 벌인 자신만의 바둑이 되지 않았던가. 조용한 봄볕을 받으며 가볍게 자리를 파한 뒤, 자신의 기예를 높이 치켜 준 겸손한 서생에게 인사라도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기귀의 예상은 두 번째 수부터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패를 잡는 것도 아니고, 축을 다루는 것도 아니었지만 기존의 법도에 어긋나는 바둑도 아니었다. 으레 지나가는 상인들과 하수 기객(棋客)들이 놓는 포석이었다. 그런데 묘하게 들어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우하귀부터 가지런히 열리는 흑돌의 대마가 조금씩 세력을 넓히면서 중원으로 압박해 들어오는데 천변만화하는 하늘의 기운으로도 조금씩 묵묵히 들어오는 흑돌의 행보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 놓인 흑돌은 엄정하고 판에 박힌 듯 하면서도 전체를 바라보면 기세가 날카롭고 웅혼하기 그지없었으니, 기귀의 기세 등등하던 흰 돌은 바람에 날리는 구름처럼 조금씩 세를 잃고 와해되는 중이었다. 기귀는 생애 처음으로, 대국 도중 입을 열었다.


- 어디에서 배우셨소


- 딱히 배우지 않았습니다.


- 거짓말 마오. 이 정도 기력이면 파천황(破天荒)의 요결이오.


- 포석을 두는 법과 세를 키우는 법만을 배웠을 뿐, 다른 수를 배운 적은 없습니다.


- 그렇다면 귀공은 하늘이 낸 천재외다.


- 천재라는 이름은 과찬이십니다. 그저 기본만을 알 뿐입니다.


갑자기 기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생의 바둑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이었건만 그제서야 생각이 났으니, 그의 스승이었던 노인을 맨 처음 만났던 날 어깨 너머로 보여준 것과 너무나도 유사하였다. 무궁한 조화의 화려함도 없었고, 덧대어진 풍성함도 없었으나 오직 뼈와 골수만이 그 안에 남아있었다. 기귀는 덥지 않은 날씨에 흐르는 땀을 훔쳐가며 천천히 잊혀진 스승의 자취를 더듬어 바둑을 다시 짜기 시작하였다. 바둑판을 이리저리 종횡하던 백돌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좌상귀부터 천천히 굳건한 토대가 쌓이기 시작하였다. 가볍게 파하기로 한 대국은 이미 한 낮을 뛰어넘어 해거름으로 접어들 때까지 이어졌고, 어스름이 하늘을 천천히 사위게 할 무렵에서야 두 사람의 대국은 끝을 맺었다. 기귀의 한 집이 유생보다 많았다. 유생은 천천히 일어서 공손히 포권하며 시립을 하였고 기귀는 망연한 표정으로 유생을 쳐다보다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 귀공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아시오?


- 만물의 근본 아니겠습니까


- 그것이 무엇이오


- 물이 땅 아래로 흐르고 다시 나뭇잎이 되었다가 스러져 흙이 되는 것이겠지요.


- 순리가 그러하다면 사람의 노력은 헛된 것이오?


- 순리를 따르는 노력이 어찌 헛된 것이 되겠습니까


기귀가 마지막 구절을 곱씹다 불현듯 눈을 들어보니 이미 선비는 고개를 내려가는 중이었고, 서늘한 밤바람이 기귀의 등을 서늘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미 불혹을 지나 세상만사 웬만한 일은 다 겪었을 나이에 사내는 갑자기 고개를 하늘로 들고 우어억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달을 움켜쥐듯 두 팔을 어둔 하늘에 펼쳐 보였다. 입과 눈을 크게 벌리고 연거퍼 고함을 지르는 사내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고개를 도리질하며 피했으나, 사내는 목이 쉬고 눈물이 웃옷을 적실 때까지 계속 고함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목이 쉬어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사내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한 마디를 내 뱉고 그 자리에 탈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 그런 것이었구나


며칠 뒤, 젊은 선비 하나가 과거장에 들어가는 대신, 혼란한 천하와 승상의 황음무도함을 한 폭 다섯자의 비단에 일필휘지로 비판한 상소문을 적어 황문에 붙이고, 천지가 진동하게 대갈일성(大喝一聲)을 황제 앞에 질러 참형되었다는 말이 대군령이 들려왔다. 천하에 둘도 없는 명문(名文)에 충절이 가득하니 상소를 문에서 읽은 자 치고 눈물 흘리지 않은 자 없다고도 하였다. 마지막 칼을 받을 때도 해쓱한 얼굴에 기품이 있으니 활불(活佛)과도 같았다고 하였다. 늙은 바둑쟁이는 조용히 소문을 들으며 슬쩍 하늘을 쳐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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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E in 켄타우리 23.02.01 67 4 22쪽
13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fin) 22.09.26 67 1 10쪽
12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2) 22.09.26 62 0 10쪽
11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1) 22.09.26 95 0 9쪽
10 진실의 순간(fin) +1 22.07.30 70 4 21쪽
9 진실의 순간(3) 22.07.30 66 0 14쪽
8 진실의 순간(2) 22.07.30 69 2 12쪽
7 진실의 순간(1) +1 22.07.30 139 2 17쪽
6 소울(soul)의 대부 (fin) +4 14.06.27 1,115 31 19쪽
5 소울(soul)의 대부 (2) +1 14.06.27 1,031 35 25쪽
4 소울(soul)의 대부 (1) +2 14.06.27 1,783 33 15쪽
3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完) +20 13.06.30 2,377 101 18쪽
»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2) +3 13.06.30 1,971 81 12쪽
1 부지사부지생(不知死不知生) - (1) +3 13.06.30 3,675 9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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