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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범 님의 서재입니다.

지옥불 난이도의 이세계 생존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지니범
작품등록일 :
2020.07.30 01:13
최근연재일 :
2021.06.30 06:00
연재수 :
88 회
조회수 :
19,546
추천수 :
627
글자수 :
465,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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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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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시체를 넘어서(2)

DUMMY

"그대들은 짐의 잔을 받으라."


켈러가 갑옷을 입고 정렬한 12명의 공작 기사들에게 한 잔씩 술을 따라주었다. 잔의 경계를 따라 넘칠듯이 일렁거리는 레드 와인은 마치 곧 있을 유혈사태의 전주곡과도 같았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국왕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격정도. 어떠한 떨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사람은 죽는다'라는 명제를 말하는 철학자같이 말이다.


공작들은 아무런 말 없이 잔에 담긴 와인을 한 입에 들이켰다. 톡 쏘는 탄산의 맛과 목을 데우는 알코올의 향기. 살인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켈러는 비워진 잔을 바라보았다. 아주 약간 남겨진 레드 와인은 보라색과 붉은 색이 섞인 색조로 잔을 물들이고. 이내 올라간 것은 떨어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의해 다시 잔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전부 무장은 갖추었나?"


"예, 폐하. 모두 무장을 갖추었나이다."


폴 공작이 철판으로 가린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강철과 피륙으로 마지막 해결책을 수행하는 것 뿐.


*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셨군. 음.. 어떻게 불러드려야 하나?"


하늘산 계단의 가장 아래에 모여있는 301명 중 1명. 스커지 부족장이 도끼를 어깨에 얹으며 계단 중간 쯤에 서 있는 켈러에게 말했다.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는 중년의 근육질 남성. 켈러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국왕 폐하라고 부르거라. 야만인."


"아델라이데는 왕이 없소만?"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평생동안 변치 않아왔던 세계를 살던 이와. 지난 수년간 모든 것이 바뀐 세계를 살아왔던 이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터이나. 지금의 대화는 그런 유형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아니다."


"?"


"네 눈 앞에 있는 내가 바로 아델라이데의 국왕이다. 너를 꺾고. 대평원에 나의 깃발을 꽃을 자의 위용을 그대의 눈으로 똑똑히 보도록 하라."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하나만 기억해두라고 '국왕 폐하' 지금까지 아델라이데에 왕이 없었던 이유의 반절은.. 우리 스컬본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렇다면 이제 시름의 반절은 덜겠군."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두 집단 사이에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서로 공존하고자 하는 노력은 종말을 고한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왕과 부족장의 옆에 공작 기사들과 대전사들이 각자 무기를 손에 쥐고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스산한 분위기가 하늘산에 감돌았다. 폭풍전야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하늘산 위의 백성들과 하늘산 아래의 부족민들 모두. 계단의 위와 아래에 모인 최강자들이 내뿜는 무언의 기세에 짓눌려 간신히 숨을 붙들고 있었다.


그 중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자는 단 두명. 계단 위에서 고고하게 스커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켈러 왕과. 그런 켈러 왕을 노려보고 있는 중년의 부족장. 스커지.


둘이 내뿜는 살인적인 기세에. 그들의 옆에 선 공작들과 대전사들마저 슬금슬금 거리를 둘 정도였으니. 일반 병사들과 민중들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은 오죽하겠는가.


"네놈은 감히 짐이 굽어살피는 왕국을 침범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여 왕국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실로 하늘에 닿을 듯하도다.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그대의 명예를 고려하여 참수형으로 끝내주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라 하였던가. 대화가 아닌 통보의 형식으로 다시 말을 꺼낸 것은 왕이었다. 왕의 말을 순순히 듣고 있던 스커지 부족장은. 코웃음을 치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된다면. 내 부족은 어떻게 되는 거지?"


"모두 죽을 것이다. 네놈도 알고 있지 않으냐? 이 아델라이데의 대평원에서 자비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큭큭큭. 그래.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서 있는지도 잘 알고 있겠군."


바로 자신이 그런 규칙을 이용하던 장본인이었으니. 모른다고 하면 체인질링일 것이다. 스커지는 거대한 양손 도끼를 어깨 위에 얹고서는. 눈을 크게 뜨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세상이란 게 참 우습지 않으냐!? 몇 달 전만 해도 아델라이데의 평원을 질주하던 우리 스컬본이 고작 이 산 하나를 정복하지 못해 멸망의 기로에 놓인 것이?"


"전혀 우습지 않도다. 인류 사회의 섭리는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이니라. 국가라는 거대한 인류 집단의 지도자는 그런 잔혹한 섭리로부터 집단의 구성원을 지킬 신성한 의무가 있노니. 그대는 아델라이데 왕국의 역사에서 가장 최초의 패배자로 기록될 것이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대는 전사이지 철학자가 아니며. 짐 또한 국왕이지 음유시인이 아니다. 이제부터 짐의 기사들과 그대의 대전사들이 나눌 대화는 오직 강철의 대화이니. 어디 한 번 문명인들의 협상을 해보도록 하지."


켈러 왕이 검을 소환하자. 12명의 공작도 일제히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대전사들은 도끼와 창을 꺼내 겨누었고. 스커지 부족장은 고함을 지르며 계단의 첫 번째 턱을 밟았다.


수십명과 수백명의 싸움에서. 가장 먼저 날을 부딪친 것은 왕과 부족장이었다.


*



쾅!


도저히 백병전에서 일어날 수가 없는 폭음이 들려왔다. 인간을 초월한 자들의 항쟁이란 이런 것이다. 가만히 있는다면 고막이 찢기고. 움직인다면 사지가 증발한다. 오직 기사와 대전사라 불리는 초인들만이 초월적인 힘으로 적들을 막아설 뿐.


"호오.. 어린 놈인 줄 알았더니 실력이 제법 있는 놈이었구나. 어디 이것도 막을 수 있는지 한 번 볼까!"


쿠웅!


씨익 웃은 스커지가 사악한 웃음을 드러내며 풍선같이 부푼 근육의 힘으로 도끼를 내려찍었다. 과연 대단한 용력이기는 했으나. 이미 백인력을 갖춘 켈러에게는 어린아이의 어리광이나 마찬가지였다.


켈러는 한손으로 도끼를 잡아 쳐내고는. 그대로 검을 휘둘러 스커지의 가슴에 깊은 자상을 남겼다. 마치 물 흐르듯 이어지는 연격. 스커지는 경악하며 재빨리 도끼를 회수했다.


"네 놈... 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이냐? 그 눈짝하며.. 기이한 힘이라.. 악마와 거래라도 한 건가?"


"웃기는 소리. 감히 악마 따위가 짐의 용안을 볼 수 있을 것 같으냐?"


지극히 오만한 발언이었지만. 스커지는 그에게서 오만함을 느낄 수 없었다. 오만함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그 누가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네 녀석 때문에 무고한 민중들이 고통받고 있다. 네놈을 죽인다면. 짐의 백성들은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씨앗을 뿌릴 수 있겠지."


"흥! 과연 그럴 수 있는지 보자고!"


부웅! 부웅!


위압적인 파공음이 허공에 울려퍼졌다. 과장 좀 보태서 성인 남성의 상반신만한 도끼의 날이 계단을 파고들고. 검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카각! 키기기긱!


마찰열에 의해 금속 불꽃이 생기고. 손에는 저절로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오직 스커지에게만 말이다. 여전히 켈러는 여유롭게 검을 쥐고서 이리저리 날아드는 참격을 피하거나 가볍게 맞받아치고 있었다.


"후욱! 후욱! 으아아아아!"


스슥. 스스슥.


"제대로 좀 휘둘러보지 그러나? 맞는 게 하나도 없군."


"이 빌어먹을! 죽어! 죽으라고!"


스커지는 절망감을 느꼈다. 아무리 휘둘러도 맞지 않는 광경이 수 차례 계속되자. 그는 차라리 눈알을 뽑아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어!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자신보다 한참 어린 자가 마치 개미를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마냥 압도적으로 자신을 농락할 수 있단 말인가? 스커지는 이를 악물고 계속 도끼를 휘두르고 내려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보기만 해도 영혼이 찢겨져나갈 것만 안광과 자신을 압도하는 아우라의 휘광이었다.


"고작 이런 하찮은 힘으로 짐의 왕국을 막아서려 한 것이냐?"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없이 막강하고 지고한 존재의 목소리가. 스커지라는 한 필부가 벗어날 수 없는 강대한 존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스커지는 고개를 들어 켈러를 보았다. 같은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자를. 어째서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처음부터 나서서 자신과 자신의 부족을 말살하지 않았는지. 그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나약한 것. 지옥에서 네 죗값을 마저 치르도록 하거라."


그것이 스커지라는 인간의 마지막이었다. 마치 손을 풀듯이 가볍게 내지른 정권에. 부족장의 안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고. 다시는 펴지지 않았다.


"커헉!"


"부..부족장님!"


"스커지님께서 쓰러지셨다!"


주먹 한 방으로 족장이 마지막 단말마를 내뱉자. 12명의 공작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대전사들이 경악하며 족장에게 달려갔다. 그들의 눈에서는 이제 살기를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절망과 공포만이 서려 있었다.


"폐하께서 적장을 쓰러트리셨다!"


"우오오오오!"


"아델라이데 왕국이여 영원하라!"


어느 기사가 적장이 꼴사납게 날아가는 것을 보고서도 사기충천하지 않는단 말인가. 주군의 선방으로 인해 사기가 오른 12명의 공작들은 각자 아우라를 폭발시켜 달려드는 대전사들을 말 그대로 잿더미로 만들기 시작했다.


"감히 짐의 강토를 침범한 이들에게 철퇴를 내리거라!"


"""켈러 왕 만세!"""


켈러 왕이 검을 겨누며 공작들을 독려하자. 공작들은 검에 빛을 두르며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베어가르기 시작했다. 이제 전장은 계단이 아닌 하늘산 아래. 한 때 아델라이데의 백성들이 살았었던. 이제부터 다시 살아갈 땅이었다.


"도.. 도망쳐!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말! 말을 가져와! 일단 살고 보자!"


마치 신과도 같은 막강한 힘에 소위 대전사라 불리는 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면 지배의 안의 힘으로 영혼마저 갈가리 찢어발길 것 같은 공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슈슉! 슈슈슉!


"커억!"


"뭐..뭐야?!"


"매복이다! 이런 빌어먹을!"


그리고 앞에는 사냥꾼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미리 퇴로를 차단해 놓은 세르누엘라 백작의 기마 궁사들이 무자비하게 쏘아대는 화살에 의해 말들이 쓰러지자. 기마 궁사들과 같이 대기하고 있던 중보병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어 머리를 쪼개고 갈비뼈를 부러트리며. 사지를 인수분해하기 시작했다.


"도...도망갈 수가 없어.."


줄여 말하자면. 포위 섬멸진의 완성이었다. 앞뒤양옆 모두 봉쇄된 상황이며. 적들의 기량은 아군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항복조차 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속. 대전사들의 마지막 선택은 자살이었다.


"큭! 끄르륵..."


검으로 폐부를 찔러 피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대전사들. 한 때 아델라이데 대평원을 공포로 물들였던 자들의 최후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초라했으며. 볼품없었다.


"하다못해 최후의 돌격조차 하지 못하다니.. 이것이 스컬본 전사들의 본말이었던가? 참으로 실망스럽구나. 불태워라."


"예!"


전쟁은 끝났다. 겨울이 마지막 생명을 유지하는 2월 초. 하늘산 아래에서는 검은 색의 연기가 눈보라를 뚫고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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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아델라이데-협상국 전쟁(2) 21.02.02 69 2 12쪽
54 아델라이데-협상국 전쟁(1) 21.02.01 77 2 12쪽
53 아델라이데의 방식(2) 21.01.26 84 2 12쪽
52 아델라이데의 방식(1) 21.01.25 97 2 12쪽
51 본격적인 성장(2) 21.01.19 97 2 12쪽
50 본격적인 성장(2) 21.01.18 93 2 12쪽
49 본격적인 성장(1) 21.01.05 97 2 12쪽
» 시체를 넘어서(2) 21.01.04 92 2 12쪽
47 시체를 넘어서(1) 21.01.04 87 2 12쪽
46 청야 전술(2) 20.12.29 91 3 12쪽
45 청야 전술(1) 20.12.28 94 3 12쪽
44 물이 흐르는 곳(3) 20.12.22 107 3 12쪽
43 물이 흐르는 곳(2) 20.12.17 106 3 12쪽
42 물이 흐르는 곳(1) 20.12.14 111 3 12쪽
41 귀향(2) 20.12.06 115 3 12쪽
40 귀향(1) 20.12.05 116 3 12쪽
39 칠신기(5) 20.11.30 117 3 12쪽
38 칠신기(4) 20.11.23 130 5 12쪽
37 칠신기(3) +1 20.11.18 129 6 12쪽
36 칠신기(2) 20.11.16 129 5 12쪽
35 칠신기(1) 20.11.14 140 4 12쪽
34 세유라벤 산맥으로(1) 20.11.05 148 3 12쪽
33 전세 역전(2) 20.11.03 174 6 12쪽
32 전세 역전(1) 20.10.31 151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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