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지니범 님의 서재입니다.

지옥불 난이도의 이세계 생존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지니범
작품등록일 :
2020.07.30 01:13
최근연재일 :
2021.06.30 06:00
연재수 :
88 회
조회수 :
19,548
추천수 :
627
글자수 :
465,472

작성
20.12.17 15:40
조회
106
추천
3
글자
12쪽

물이 흐르는 곳(2)

DUMMY

"공작이라.... 만나뵙게 되서 영광이외다."


아르누스를 포함한 유목민들은 정주민들의 오등작 체계를 잘 모르지만. 그래도 공작이라면 최소한 귀족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급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부족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작위에 해당하는지는 며느리도 모르겠다만. 적어도 왕의 바로 아랫사람을 보낸 것이니 이 정도면 체면치레는 충분히 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르누스 부족장은 폴 공작을 따라 걸었다. 약 1시간 정도를 걷자. 하늘산 바로 아래 놓인 잘 만들어진 궁전이 아르누스와 폴 공작을 반겨주었다.


"하늘산 위에 궁전이 있는 게 아니었소?"


"아.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아직은 민생을 안정시켜야 하니 말이오. 괜히 궁전만 짓다가 민생을 파탄내는 것은 폐하께서 원하는 바가 아니시오."


아르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수천명에 다다르는 부족을 다스리는 자로서 지도자가 온갖 이유를 들어 사치와 향락을 즐기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상 외로 협상이 잘 끝날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아르누스는 점차 가까워져 가는 궁전을 바라보았다. 5층 정도의 높이에 다른 건물들과 비교했을 때 한 네 다섯배는 넓은 면적. 궁전이라기에는 행정 건물같이 밋밋하게 생긴 저 건물이 현재 아델라이데 왕국의 국왕이 머무는 곳이었다.


들어가려 하자 중무장한 경비병들이 제지하였지만. 공작과 같이 있었기에 아르누스는 경계의 눈초리만을 받고는 안전하게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정전은 이곳이오. 국왕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들어가보시오."


"같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오?"


"아무리 공작이라도 왕명이 없다면 출입할 수 없는 것이 궁전이오. 그대도 모르지는 않겠지."


아르누스는 공작의 말을 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정전의 출입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을 바라보았다.


경비병들은 눈치빠르게도 아르누스의 도착을 알리려 노크를 했고. 소리를 들은 정전의 경비병들이 다시 노크 소리로 대답했다.


"들어가십시오."


쿠웅!


어찌나 문이 무거운지 건장한 병사 두 명이 달라붙었음에도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틈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르누스는 마른 침을 삼킨 채. 어쩌면 제 부족의 운명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아르누스는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국왕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비교한다면 너무나 어리게 보이는 아델라이데의 국왕. 라이투스 폰 켈러를.


"그대가 아르누스 부족장인가?"


아르누스가 반쯤 넋을 놓고 용안을 바라보고 있자. 켈러는 먼저 질문을 시작했다.


"아, 예! 제가 아르카르 부족을 이끌고 있는 아르누스 부족장입니다."


"그렇군. 그래서 왜 짐을 보고자 하였는가?"


올 것이 왔다. 아르누스는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 다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송구하오나 저희 부족은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전사들은 거의 없고. 남은 자들은 늙은이거나 어린아이거나 여자들 뿐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희 부족은 그나마 남은 것마저 약탈당한 다음 멸망하겠지요."


"..."


"부족장인 저는 그런 결말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중 폐하가 이끄시는 이 왕국을 발견하였습니다. 피폐해진 저희 부족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풍요로운 이곳에 가축을 풀어 풀을 뜯어먹게 하고. 아녀자들에게 물을 길어오라 하고 싶었으나. 어찌 이 땅을 지배하시는 당신께 일언반구도 없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아르누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쯤 되면 저 왕이라는 자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을 터다. 그런데도 일부러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디 청컨대 제 부족을 당신의 아래에 넣어 이 드넓은 대평원에서 폐하를 호종할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소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희 아르카르 부족은 폐하의 창이자 칼이자 화살이 되겠나이다."


"...그대는 고개를 들거라."


아르누스는 왕의 말대로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유목민들은 왕의 지배를 받지 않기에 자유로이 평원을 드나들 수 있거늘. 그대는 어째서 평원의 법을 따르지 않고 짐의 율법에 자신과 부족을 얽매려 하는가."


"폐하께서 세우신 왕국의 밝은 미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제대로 된 도시 꼴도 갖추지 못한 나라에게서 미래가 보이더냐?"


"평원의 법도. 도시의 법도. 모두 발 아래에 놓은 채 이 메마른 땅에 물을 부어 녹지로 바꾸시는 폐하의 모습과 왕국의 깃발이 보였나이다."


"그대의 부족에게 물과 풀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이 왕국은 다른 유목민족들에게서 증오의 대상이 될 터이다. 그대는 정말로 왕국의 검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미 평원에서 내쳐진 몸일진대 무엇을 두려워 하겠나이까? 배부른 노예보다 배고픈 자유민이 낫다는 말은 항상 부유한 이들만이 입에 담으니. 멸족을 눈에 둔 저희에게는 폐하의 자비만이 유일한 살길입니다.


옛 말에 말을 하는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란 말이 있으나. 미물인 개들도 밥을 주고 키워준 주인에게 은혜를 갚으려 천리 길을 되돌아오기도 하는데 사람의 마음을 가진 이들이라면 능히 폐하의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아르누스는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그 스스로 이렇게나 유창하게 도시인들의 어법을 흉내낼 수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사가 아닌 저 왕좌에 앉아있는 어린 왕의 의사였다. 유목민으로서 평생 살아온 자들이 도시민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이 아닌 다른 절대적인 누군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저 절대자께서는 아르누스의 입담을 좋게 받아들이신 것 같았다.


"좋다 아르누스. 그대의 충성을 짐이 받겠노라."


그리고 아르누스는 그 자리에서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




말들이 풀을 뜯어먹는다. 여인들과 아이들이 머리에 물통을 이고 천막으로 들어가며. 노인들은 열심히 양의 젖을 짜고 있었다.


"...여기는?"


"족장님의 천막입니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세상에 정전에서 기절하시다니..."


"이런..."


아르누스는 낭패라는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일어나려 했다. 궁전에서 기절했다니. 창피도 이런 창피가 없었다.


"앉아계시죠 족장님."


그러나 아르누스는 쉬이 일어날 수 없었다. 천막의 문을 열고 이질적인 복장을 한 자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딱 보아도 고급스러운 양피지를 가지고 말이다.


"아델라이데의 만기장인 세르누엘라 아르누스 백작은 국왕 폐하의 성지를 받들라!"


"어엇...아르누스가 국왕 폐하의 뜻을 받듭니다!"


그러나 그 사내가 양피지를 높게 들며 국왕의 성지를 받들라며 윽박지르자. 아르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무릎을 꿇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아르누스 부족장은 들으라. 짐이 그대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백작의 작위와 만기장의 직위를 수여하였으니. 이 작위와 직위는 앞으로 그대의 장자에게 영원토록 귀속될 것이니라.


그대는 앞으로 아델라이데 대평원의 모든 곳에서 나는 산물들을 모아 짐에게 바칠 것이며. 짐이 벌이는 모든 전쟁에 참여하여 충성을 증명하고 공을 세우며. 왕국의 적을 멸할 것이니. 그대가 바치는 모든 충성을 짐과 짐의 후손과 짐의 왕국에 바칠지어다."


"아델라이데 왕국의 국왕 폐하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칙사의 낭독이 끝나자. 아르누스는 황송해하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로서 아르누스는 세르누엘라라는 가문명과 백작의 작위. 그리고 만명의 기병을 부리는 만기장의 직위를 얻어낸 것이다.


물론 아직 왕국의 규모가 미약하니 끽해봐야 수백명 규모의 기병을 다룰 수 있을테지만. 왕국이 더욱 번창하고 발전해나갈수록 아르누스와 그의 부족이 가지는 위세도 더욱 커질 것이라고 아르누스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것은 국왕 폐하께서 세르누엘라 백작 각하가 이끄는 부족을 위하여 내려주신 선물입니다. 현명히 쓰시지요."


그런 아르누스의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해주는지. 칙사는 산더미처럼 쌓인 물자를 보여주며 국왕 폐하의 선물이라 일컬었다.


"이..이건?"


"대충 1만명을 기준으로 잡아서 이번 겨울까지 충분히 따뜻하고 배부르게 지낼 수 있을만한 물자들입니다. 가축까지 포함해서 말이지요."


"이..이런 선물은 너무 과합니다. 저희 부족은 겨우 2000명밖에는 되지 않는데.. 이렇게 많은 선물을 주시면.."


"뭐 물자야 많은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가져가세요. 여기 있어봤자 상하기만 할 뿐이잖습니까.


그거야 그렇다. 어차피 이제 곧 겨울이 올 테니 물자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물자야 말등에 얹어서 나르면 될 것이고. 혹독한 겨울에 만난 다른 부족에게 물자를 나누어주어 동맹을 늘릴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국왕 폐하께 전해주십시오. 이 세르누엘라 아르누스! 반드시 폐하의 성심에 보답하리다!"


"그렇게 전해드리지요."


칙사는 엷게 웃으며 떠나갔다. 칙사가 떠난 다음에도. 아르누스는 한참동안이나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인 물자를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하였다.


*




이윽고 겨울이 찾아왔다. 아델라이데 대평원은 워낙 건조한 곳이라 눈이 오지는 않았지만. 그 건조함을 모조리 추위로 치환한 듯한 살을 에는 추위가 대평원을 휩쓸고 있었다.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가지 않았고. 겨울을 위해 비축해두었던 물자들을 집 안에서 까먹으며 근근히 버텨나가고 있었다. 도시가 완전히 완성된다면 모두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겠지만. 300만은 커녕 5만명도 되지 않는 지금은 아직까지 힘겨운 겨울을 날 수밖엔 없었다.


콸콸콸!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라면 물살이 세찬 덕에 이 추위에도 불구하고 폭포에서 발원하는 강물은 얼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날씨 때문에 잠깐만 손이나 발을 담가도 동상에 걸릴 정도로 차가워졌기는 하지만. 얼지 않았다는 것이 어디인가?


겨울에 가장 장작을 많이 쓰는 이유 중 하나가 수도관이 동파되어 물을 얻을 수 없어 얼음을 가져와 녹여 물로 만드는 것인데. 다행히도 유속이 빨라 취수관으로 들어오는 물이 얼지 않고. 저수장에 이미 발열장치를 설치하는 것을 마쳐둔 터라 하늘산의 시민들은 아델라이데 대평원의 다른 도시민들보다 더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항상 불변의 법칙이 존재한다. 환한 불빛을 밝히면 밝힐수록. 애꿏은 불나방들이 꼬인다는 것.


차르르륵...


"차가운 물이군. 허나 얼지는 않았어. 신기하군. 원래 물이 흐르지 않던 곳이었는데 물이 흐르고 있고. 얼지도 않았다니."


"어떻게 할까요 족장님?"


"강물을 따라 올라간다. 그러면 물이 어디서 흐르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겠지."


"알아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긴. 우리가 차지해야지."


"알겠습니다 족장님. 전사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천천히 하게. 겨울은 기니까 말이야."


족장이라 불린 사내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과연 이 물이 흐르는 곳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자신의 부족과... 전사들을 만족시켜줄 것들이?




추천과 댓글은 작가가 연중할 수 없게 만드는 방법 중 가장 흔한 방법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지옥불 난이도의 이세계 생존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1 아델라이데-협상국 전쟁(8) 21.03.02 59 2 12쪽
60 아델라이데-협상국 전쟁(7) 21.03.01 56 2 12쪽
59 아델라이데-협상국 전쟁(6) 21.02.16 57 2 12쪽
58 아델라이데-협상국 전쟁(5) 21.02.15 65 2 12쪽
57 아델라이데-협상국 전쟁(4) 21.02.09 68 2 12쪽
56 아델라이데-협상국 전쟁(3) 21.02.08 68 2 12쪽
55 아델라이데-협상국 전쟁(2) 21.02.02 69 2 12쪽
54 아델라이데-협상국 전쟁(1) 21.02.01 77 2 12쪽
53 아델라이데의 방식(2) 21.01.26 84 2 12쪽
52 아델라이데의 방식(1) 21.01.25 97 2 12쪽
51 본격적인 성장(2) 21.01.19 97 2 12쪽
50 본격적인 성장(2) 21.01.18 93 2 12쪽
49 본격적인 성장(1) 21.01.05 97 2 12쪽
48 시체를 넘어서(2) 21.01.04 92 2 12쪽
47 시체를 넘어서(1) 21.01.04 87 2 12쪽
46 청야 전술(2) 20.12.29 91 3 12쪽
45 청야 전술(1) 20.12.28 94 3 12쪽
44 물이 흐르는 곳(3) 20.12.22 107 3 12쪽
» 물이 흐르는 곳(2) 20.12.17 107 3 12쪽
42 물이 흐르는 곳(1) 20.12.14 111 3 12쪽
41 귀향(2) 20.12.06 115 3 12쪽
40 귀향(1) 20.12.05 116 3 12쪽
39 칠신기(5) 20.11.30 117 3 12쪽
38 칠신기(4) 20.11.23 130 5 12쪽
37 칠신기(3) +1 20.11.18 129 6 12쪽
36 칠신기(2) 20.11.16 129 5 12쪽
35 칠신기(1) 20.11.14 141 4 12쪽
34 세유라벤 산맥으로(1) 20.11.05 148 3 12쪽
33 전세 역전(2) 20.11.03 174 6 12쪽
32 전세 역전(1) 20.10.31 151 5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