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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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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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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4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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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127. 결집하는 마음 (3)

DUMMY

기분 좋을 정도로 선선한 바람이었다.


이제 막 3월에 접어든 하일랜드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기후였고, 분명 경기를 보면서 응원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었을 것이다.


“이게······ 대체 뭐야.”


정작 기대를 품고 찾아온 관중들의 눈을 의심케 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전반 30분, 전광판의 숫자는 한쪽 팀에 2를 표기하고 있었다. 그 숫자는 홈팀의 것이 아니었다. 원정팀이 로스 카운티를 상대로 가져간 두 점 차의 리드.


아크 서클 바깥에서 시도한 슈팅을 미처 마크하지 못하여 한 번, 아직 경험이 미숙한 딜런 갈브레이스의 우측이 완전히 뚫리면서 크로스를 허용한 것으로 또 한 번.


그래도 상대가 리그 내에서 화력 하나는 좋기로 정평이 난 마더웰이니 두 골을 내주는 게 이상할 건 아니다. 하지만 결과보다 경기의 내용이 더 처참하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아무리 주전이 빠졌다지만 이건······.”


지금의 광경은 마치 스코티시 컵 이전 라운드에서 로스 카운티가 2부 리그의 그리녹 모턴을 만나서 압도해 나가던 느낌을 뒤집어놓은 듯했다.


와아아 -


당연히 마더웰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던 원정팀 스탠드는 신이 난 상태였다.


장소는 빅토리아 파크였지만, 마더웰의 퍼 파크라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 그 기세를 몰아 그들의 화력은 더욱 불을 뿜어댔고, 급기야는 다급해진 로스 카운티가 무리하게 라인을 올린 그 틈을 노려서 들어간 롱패스로 완전히 뒤를 허물어내었다.


결정적인 위기. 데이비드 밀스 키퍼가 용감하게 몸을 던졌으나 안타깝게도 잡아낸 건 볼이 아닌 공격수의 발목이었고, 이를 지켜보던 주심은 가차 없이 휘슬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맙소사.”


홈팬들은 페널티 킥으로 또다시 실점을 당하자 손으로 두 눈을 덮어버렸다.


이게 정녕 로스 카운티의 경기란 말인가? 리그에서는 왕좌를 두고 다투며, 바깥에서는 연이은 기적을 일구어내던. 어떠한 악조건이 닥쳐와도 좀처럼 쓰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던 그 무적의 팀이 맞단 말인가?


“······맞아. 예전에는 이랬었지.”


사실 돌이켜보면 과거의 모습이다. 빈약한 공격으로 수비만 반복하다가 한 번의 요행을 노리던 전형적인 약체팀. 본래 로스 카운티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아니었던가.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팀의 모습은 지켜보는 팬들에게 암울하고 불쾌한 추억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응원할수록 지치기만 했던, 끝내 등을 돌려 축구를 멀리하게 되었던 당시의 추억을.


최근에 보여주던 그 로스 카운티의 위엄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경기력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


한동안 들떠있던 빅토리아 파크가 실로 간만에 잠잠해졌다.


이제는 0 : 3으로 표기되어 있는 전광판. 마냥 낯설기만 한 스코어는 아니다. 약 한 달 전에 있었던 리그 컵에서 셀틱을 만났을 때도 세 골을 내주며 탈락했었다.


다만 상대가 셀틱이었으니까 그나마 용인될 수 있는 결과였지, 이번 상대는 마더웰이다. 이대로 끝난다고 해서 작년처럼 델 레오네 감독의 자리를 압박하는 여론이나 비난이 고개를 들지는 않겠으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을 것이다.


그때도 주전을 대거 제외한 후보 멤버를 내세웠었는데, 다시 똑같은 실책을 저지르려 하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큰 문제는 당시에 그건 모든 게 다 끝나고 난 뒤의 결과였으며, 지금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이 경기는 아직도 후반전이 남아 있다.


*******


“달리 수가 있나? 이럴 때 아니면 쉴 기회가 없으니.”


물론 존 프리먼처럼 감독의 판단을 이해하려는 사람들 또한 존재했다.


로스 카운티는 원대한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일이 모든 경기에 주전을 투입했다가 고꾸라져버린다면 당장의 경기보다 더 큰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감독은 올해 빽빽하게 채워진 일정표를 보며 투자의 비중을 따졌을 테고, 컵 대회에서는 후보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는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경기에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굳이 버려야 한다면 과감하게 버릴 생각으로 말이다.


“그것과 별개로 이게 로스 카운티가 지니고 있는 최대 약점이긴 해.”


주전과 후보의 격차가 크다는 것, 비단 로스 카운티뿐만 아니라 부유하지 못한 소규모 팀의 어쩔 수 없는 특징이기도 하다.


후보 멤버의 기량이 부실하면 주전에서 한두 명만 이탈해도 스쿼드를 원만하게 운영하기가 어려워진다.


프리먼은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공백을 보며 새삼 그동안 뛰어온 주전 선수들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었다.


현재 로스 카운티의 중앙을 책임지고 있는 건 에이든 딩월과 맷슨 클락. 한 명은 원래 공격수고, 한 명은 리그에서 자주 나오지 못하는 만년 후보.


딩월은 대런 케틀웰의 자리를 훌륭하게 채워내면서 사람들을 열광케 했었지만, 그게 순전히 그의 힘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음을 오늘 경기에서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자리를 비울 때마다 뒤에서 발생하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커버해주던 리차드 브리튼이 존재했기에 활약이 더욱 빛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클락은 그 정도로 노련한 선수가 아니다. 정적인 움직임이 많았고, 서로 간의 호흡도 잘 맞지 않는다. 딩월의 활발한 에너지가 도리어 마더웰이 공략할 수 있는 틈새를 제공하는 꼴이었다.


그야말로 둘의 시너지는 최악이었다.


“거기에 수비 쪽은 뭐······. 길게 언급할 것도 없네.”


주전이 전부 휴식에 들어간 수비진은 오늘의 핵심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표본.


폰투스 얀손의 전진 패스와 스콧 보이드의 안정감, 좌우 풀백의 공수 밸런스가 빠지니 남은 것은 불안정한 수비와 빌드업의 실종이었다.


첫 번째 실점도 애초에 얀손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저돌적으로 달려 나가 슈팅 코스를 막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티브 샌더스는 빌드업 능력이 나름대로 괜찮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오늘 경기 이후 그 평판에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벤치에 앉아 있던 시간이 오래되어 감각이 무뎌진 건지 기본적인 패스에도 불안함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 마더웰의 포위망을 쉽게 뚫어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후방에서 보급이 끊기니 지원을 받아야 할 전방에서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 로스 카운티의 공격진은 본인들이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어낼 시도조차 제대로 부여받지 못하고 있었다.


“마더웰은 칼을 갈고 나온 것 같은데, 정작 로스 카운티는 힘을 빼놓았으니······.”


지난 리그 컵 8강전에서 마더웰은 로스 카운티에게 탈락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이번에 독기를 가득 품고 완전히 주전으로 무장하여 승부를 걸어왔건만, 그걸 상대하는 게 후보 위주로 구성된 선수단이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특히 컵 대회에서 꾸준하게 나오고 있는 이들이 그동안 상대해 온 건 폴커크, 피터헤드, 그리녹 모턴처럼 대부분 하부 리그에 소속되어 있는 팀들. 셀틱에게는 완패를 당했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본 건 마더웰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제 그 마더웰에게 끔찍한 대패를 앞두려 하고 있다.


“과연 어떻게 되려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리그 컵 4강 셀틱전을 제치고 이번 경기가 올해 로스 카운티 최악의 경기로 선정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최악을 연달아 갱신한 후보 선수들은 그 불명예스러운 기록의 중심에 서게 될 테고 말이다.


*******


“지금 대체 뭐 하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전반전이 끝난 뒤 크게 가라앉아 있던 라커룸. 그 정적을 깬 한마디에 모두가 고개를 돌려보았다. 팔짱을 한 채 어깨를 벽에 기대고 비스듬히 서 있는 블랜차드가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오늘 우리가 중앙선을 넘어서 공격해 본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았던 거 같은데.”


“······.”


“이게 정상적인 상황인가?”


평소에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던 그가 이 정도로 적극적인 의견을 내비치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패배하거나 심지어 비기는 날에도 저기압이 되어서 말을 붙이기조차 어려운 그 블랜차드가 먼저 나서서 팀원들을 추궁할 정도면 오늘 경기가 정말로 심각했다는 거다.


화낼 이유 또한 충분했다.


볼이 올라오지 못하자 내려와서 패스를 받아준 횟수가 더 많았고, 전방과 후방을 넘나들며 엄청난 범위를 뛰어다녔다. 전개가 시원찮으니 직접 공격을 주도해나갈 필요도 있었다.


스미스가 볼을 빼앗기면서 순간적으로 역습 위기가 닥쳐왔을 땐 그 자리를 커버하다가 파울로 끊어내는 바람에 옐로카드까지 받아야 했다.


전반전은 말 그대로 블랜차드 혼자서 고군분투한 경기라는 설명이 적합할 것이다. 그렇게 했음에도 결국 대량 실점은 막을 수 없었고 말이다.


그걸 알기에 다들 조리 있는 반론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아니지만······ 오늘 마더웰이 준비를······.”


“마더웰이 뭐? 우리는 로스 카운티인데? 여기는 빅토리아 파크고.”


클락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의견을 꺼내 보았지만, 곧바로 잘리고 말았다.


“홈에서 전반에만 세 골을 내줬어. 이런 경기, 난 용납 못 해. 이따위로 지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계속해서 몰아붙이고 있는데도 그를 제지하려 드는 이는 없었다. 매번 블랜차드에게 까불거리길 좋아하던 딩월도, 주장 완장을 차고 있는 잭 마틴도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이왕 나왔으니 하는 얘긴데, 그때도 마음에 안 들었어. 언론에서 지껄였던 것처럼 상대가 셀틱이라 세 골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화제는 지난 리그 컵 경기로까지 번져나갔다.


실제로 4강전에서 패배하여 탈락이 확정된 후 흘러가던 분위기는 블랜차드가 말한 대로였었다. ‘그래도 셀틱을 상대로 잘 싸웠다.’ 물론 위안을 얻기 위해서가 목적이었지만, 그것조차 영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셀틱이 아니라 그보다 더 강한 팀에게 한 골을 내주고 패배해도 화가 나.”


날이 선 블랜차드의 목소리가 라커룸을 가득 채웠다.


“근데 마더웰에게 세 골? 전반전에만? 이런 치욕스러운 일을 당했는데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


“우리는 로스 카운티야.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여기 유니폼에 달린 이 엠블럼이 가진 의미를 너무 가볍게 보는 거 아니냐고. 자신이 로스 카운티 선수라는 자각심이 있는 건 맞나? 아니면, 아직도 밑바닥에서 치이고 다니던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나. 난 정말 열심히 뛰었는지도 의문스러워지려고 하는데?”


“잠깐, 너 좀 말이 심한······.”


보다 못한 스미스가 나서려 들었지만, 누군가가 팔로 그를 막아섰다.


“미안하다. 이번 실점들은 우리 책임이 컸어. 내가 그중에서 제일 문제였고······. 후반전에는 더 분발할게.”


제지한 건 스티브 샌더스였다.


“뭐 하는 거야, 스티브?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못한 건 맞잖아.”


표현이 거칠었긴 해도 틀린 구석은 없다. 스미스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이내 고개를 땅에 떨어뜨리고는 조용히 제자리에 앉았다.


험악해질 수도 있던 상황이었으나 한쪽에서 순순히 받아들이니 다행히도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할 말을 끝낸 블랜차드는 구석 자리에 앉아서 다시 과묵해진 모습으로 축구화 끈을 고쳐 매기 시작했고, 라커룸은 숨 막힐 듯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 기류는 평소보다 늦게 나타난 감독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건 뭐지? 도서관도 이보다 고요할 수는 없겠는데.”


델 레오네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곧이어 브리튼이 앉아 있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오늘만큼은 자네를 푹 쉬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을 것 같군.”


“바로 출전입니까?”


“그래, 맷슨과 리차드는 후반전 들어가기 전에 서로 교체한다. 손을 쓰지 않고 마더웰에게 휘둘리기만 한다면 여기까지 찾아와 준 팬들을 볼 낯이 없지.”


감독은 그렇게 말하고는 좌우로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영 마음에 안 드는 얼굴들을 하고 있군. 다들 어깨를 펴라. 아직 그 정도로 좌절할 단계는 아니니까.”


“······.”


“남은 45분은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지. 역전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는 뜻이야.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해봤고, 극복한 적 또한 있지 않은가?”


그 말에 선수들은 그들이 치러왔던 숱한 경기를 생각했다.


최근만 보아도 하일랜드 더비에서 해냈던 3 : 4 역전승이나 셀틱에게 뒤처지다가 끝내 따라잡았던 3 : 3 무승부 등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승점을 따낸 순간들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작년 30라운드에 치른 하이버니언전.


전반전에 1 : 3까지 벌어졌다가 후반전에 되갚아주면서 끝내는 4 : 4로 마감해 승점을 나눠 가졌던 그날의 명승부. 아직도 전율이 솟구쳐 오르는 기억이다.


상대가 세 골을 넣어서 전의를 크게 상실해버리고 말았지만, 처음으로 대역전극의 참맛을 뚜렷하게 느껴볼 수 있었던.


‘하지만 그건 우리가 해냈던 게 아니야.’


스미스의 생각이었지만, 다른 팀원들도 비슷할 터였다.


요앙 아르킨의 해트트릭이 터지고, 그때를 기점으로 주전 자리를 잡기 시작한 알렉산더 캐리의 활약으로 역사적인 순간이 만들어지는 동안 스미스를 비롯한 후보 선수들은 벤치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쓰여 있군. 누차 얘기했을 텐데? 후보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두면 자네들은 영원히 후보일 수밖에 없어.”


감독이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이 말만 하지. 내가 외부에서 나오는 비판에도 자네들을 꾸준히 컵 대회에 선발로 내보내 주려는 그 이유를 잊지 말도록.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그의 말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평범한 구경꾼이 될지, 확실한 로스 카운티의 일원이 될지.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감독이 라커룸을 나서자 다른 선수들 또한 일어나 그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면담에서 약속했던 리그 컵은 탈락했고, 남아 있는 스코티시 컵 역시 탈락 위기에 놓여 있는 상태. 확실히 이대로 끝나면 더 이상 주어질 기회는 없다.


여전히 고요했지만, 선수들의 고개는 아까처럼 축 처져 있지 않았다.


“내가 말했잖아. 결국은 올가미가 되어서 목을 조여 올 거라고.”


스미스의 뒤에 있던 샌더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에 벗어나지 못하면 낙오할 뿐이야.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어.”


스미스는 멀어져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


좌석은 듬성듬성 빈 곳이 보이고 있었다.


전반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몇몇 관중들은 일찍이 포기하고 집에 돌아간 모양이었다.


마더웰의 팬들은 벌써 승리가 확정되었다는 듯 응원가를 연이어 부르고 있었다. 여전히 빅토리아 파크는 찾아온 불청객에게 점거당한 모습이었다.


“더 공격해, 더! 박살을 내버리라고!”


원정팀 스탠드에서는 연거푸 전진하기만을 원했으며, 마더웰 역시 그들의 팀컬러답게 물러서기보다는 과감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나쁠 건 없었지만, 열기에 도취한 탓인지 후반전에 투입된 로스 카운티의 든든한 주장마저 간과해버리고 만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클락이었다면 저지하지 못하고 통과되었을 패스가 브리튼의 발에 끊겼고, 공격의 화살은 마더웰의 진영으로 빠르게 돌려졌다.


내려오면서 브리튼의 볼을 받은 필립 로스가 찔러준 스루패스는 예리하진 않았지만, 흥을 주체하지 못해 높이 올라와 있던 수비진의 뒷공간을 공략하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어린 선수의 과감한 패스가 최종 방어선을 뚫어버리자 순식간에 단독 찬스가 만들어졌고, 그런 상황에 강한 면모를 보이는 잭 마틴이 깔끔한 슛으로 그물을 흔들었다.


기습을 얻어맞은 마더웰은 속수무책으로 그저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그래봤자 한 골이지.’


원정팬들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지만, 일방적이기만 하던 흐름에 미묘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아직 두 점 차 리드야! 정신만 차리면 이긴다!”


마더웰의 코치진들이 크게 외치며 독려했고, 선수들도 좀 더 진지한 태도로 경기에 임하기 시작했다. 아직 유리함을 쥐고 있는 건 이쪽이다. 집중만 한다면 로스 카운티를 잡아내고 올라갈 수 있다.


“수비! 10번!”


이어서 들려오는 코치의 다급한 외침. 이번에는 블랜차드가 마더웰의 뒤를 파고든다. 그리고 중앙선 지역에서 차올린 브리튼의 롱패스가 좌측 대각선으로 길게 뻗으면서 그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마더웰의 레프트백, 크리스 레이드(Chris Reid)가 블랜차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기에 그를 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붙고 나서도 쉽게 제어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브리튼의 패스가 한 번 땅에 튀기며 솟아올라 두 선수에게 경합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블랜차드는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마를 사용해 볼을 밀어내며 들소처럼 나아갔고, 레이드는 간신히 어깨만 붙였을 뿐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도저히 제쳐낼 수가 없어. 이놈, 대체 뭐야!’


똑같은 186cm의 두 거구가 달리고 있었지만, 대등한 싸움은 아니었다. 힘에는 자신 있던 레이드였으나 지금은 마치 바위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팔 하나에만 매달린 채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으며, 이제는 스텝까지 꼬이면서 몸의 중심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든 끊어내야 해.’


설령 레드카드를 받더라도, 심지어 페널티 킥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파울로 저지해야만 한다. 그 생각에 이르자 경합을 포기하고 블랜차드의 어깨를 붙잡아 아래로 끌어내렸다.


“놔!”


하지만 블랜차드가 짧게 외치며 어깨를 강하게 튕겨내자 그마저도 실패하였고, 레이드는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땅에 엎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홀로 남은 키퍼를 향해 돌진하는 뒷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후반 60분.


전반전만 해도 분명 마더웰이 크게 앞서나가던 경기였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블랜차드의 슛이 오른쪽 하단 구석에 강하게 꽂힌 후 스코어는 2 : 3. 시간이 절반도 지나지 않았건만 순식간에 한 점 차로 좁혀졌다. 이쯤 되니 불안감이 엄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후반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무기력하던 로스 카운티가 전혀 다른 팀이 된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가 알고 있던 로스 카운티로 돌아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군요.]


중계 해설자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쾅 -


블랜차드의 중거리 슛이 골대를 강타하며 원정팬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당황한 수비수가 코너 라인 바깥으로 볼을 차 냈다.


위치가 명확하게 바뀐 모습이었다. 위축되고 있는 원정팀과 완전히 사기를 회복한 홈팀.


로스 카운티가 공격을 퍼붓고, 마더웰은 그 기세에 눌려 남은 한 점을 지켜내는 것에 모든 것을 내걸고 있었다.


이어서 코너킥 상황. 브리튼이 문전 가까이 볼을 붙여 올렸고, 그 경로를 향해 블랜차드가 무섭게 쇄도했다.


“막아!”


같이 솟아오른 수비수가 가까스로 먼저 머리를 갖다 대며 방어에 성공했지만, 볼의 소유권은 여전히 로스 카운티에 있었다.


좌측으로 튕겨 나온 볼을 잡은 스미스가 다시 박스 안에 크로스를 넣었고, 다시 걷어내려고 점프한 수비수의 머리를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갔다.


뒤에는 샌더스가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볼이 오는 걸 느끼자마자 본능적으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고, 이마에 맞은 볼이 직선으로 골대 안에 들어가는 순간 숨죽이며 지켜보던 홈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동점 골을 넣은 샌더스는 셀레브레이션도 없이 곧바로 일어나 굴러 나오는 볼을 주워 중앙선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동점으로는 만족할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았다.


“뭣들 하는 거야!”


기어이 마더웰의 벤치에서 분통이 터져 나왔지만, 뒤집힌 흐름은 돌이킬 수 없었다.


지금 와서 로스 카운티의 치솟는 기세를 막을 도리가 있을까.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은 추가 실점을 막아낸 뒤 재경기로 끌어서 승부를 보는 전략뿐이었다.


성공한다면 2차전은 마더웰의 홈에서 펼쳐지니 그동안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다.


선제골을 넣었던 이아인 비거스를 빼고, 스튜어트 카스웰(Stewart Carswell)을 투입하여 미드필더를 강화한 것은 공격 축구를 중시하던 마더웰로서도 큰 결심을 내린 셈이었다.


로스 카운티는 추격의 고삐를 늦출 이유가 없었다.


후반 70분이 되자 필립 로스를 리암 보이스와 바꾸면서 제공권에 위협 요소를 부여했고, 75분에는 앤드류 톰슨을 불러들인 뒤 소피앙 부팔을 준비시키려 했다.


그러다 감독은 갑자기 무슨 생각에선지 손을 들어 스튜어트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5분만 더 지켜보고 판단하지.”


필드에서는 톰슨이 볼을 잡고 수비와 대치하고 있었다.


단 한 골이면 모든 걸 결정지을 수도 있는 이런 양상에서는 톰슨의 스피드로 우측을 허물고 올려주는 크로스의 한 방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마더웰 또한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전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길게 치고 달릴 줄 알았던 톰슨의 오른발이 왼쪽으로 볼을 접으면서 의외의 방향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직선으로 쫓아가려 준비하던 수비수는 허를 찔리고 허우적대다가 넘어졌고, 당황한 마더웰의 선수들이 톰슨의 앞을 막아섰다.


“세상에.”


스튜어트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오른발을 이용해 달려드는 선수의 발을 또 피해내더니, 재차 왼쪽으로 치고 나가자 다음 선수는 아예 톰슨에게 접근조차 못 하고 뒤처진다.


순식간에 두 명이 나가떨어지고 어느새 오른쪽에서 중앙을 넘어 왼쪽 영역까지 진입하고 있었다.


“실속은 좀 없긴 한데, 저 녀석이 언제 저런······.”


경기장의 열기를 돋우는 데는 좋았으나, 그다음은 어떤 동작을 해야 할지 톰슨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


하지만 누군가의 외침에 늦지 않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톰슨이 볼의 흐름대로 밀어준 방향은 전력 질주하며 올라오던 스미스 쪽이었다.


뜻밖의 횡단 드리블에 당황한 나머지 시선이 쏠려 오버래핑하는 풀백을 아무도 체크하지 못한 것이었다.


스미스는 패스를 받자마자 박스 안을 보며 강한 땅볼 크로스를 찔렀고, 그것은 모든 수비수를 스치고 지나가 먼 포스트에서 대기하고 있던 잭 마틴의 발에 적중했다.


우와아 -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역전 골이 나오자 빅토리아 파크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미친 경기야!”


경기를 찍던 카메라맨들도 감탄사를 뱉지 않을 수 없었다. 절망적인 0 : 3에서 4 : 3으로 바뀌어버린 전광판을 클로즈업하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억누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닐, 에드빈을 준비시켜주게. 앤드류는 오늘 계속 뛰게 해주어야겠어.”


감독 역시 톰슨의 퍼포먼스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교체 계획을 빠르게 수정했다.



후반 85분.


“공격해! 시간이 없어!”


침착함과 집중을 요구하던 마더웰의 벤치 쪽에서는 공격만을 독촉하고 있었다.


아까는 여유를 부리던 탓에 수비라인을 올린 거였지만, 지금은 비상이 걸려 올라와 있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로스 카운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샌더스의 롱패스가 중앙선을 아예 넘어와 있던 수비라인의 뒤로 떨어졌고, 그것을 향해 잭 마틴과 리암 보이스가 동시에 오프사이드 트랩을 허물어내니 가엾은 골키퍼는 혼자서 두 명의 공격수를 상대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해트트릭을 노릴 거야.’


골키퍼는 먼저 볼을 잡은 잭 마틴이 슈팅을 시도할 거라 생각하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볼은 보이스에게로 향했으며, 패스를 받은 보이스는 빈 골대에 침착하게 굴려 넣으면서 승리의 쐐기를 박았다.


오늘의 경기는 여러 가지로 놀라운 부분들이 많았다.



=============================

< 로스 카운티 5 : 3 마더웰 >

잭 마틴(51‘, 76‘)

제임스 블랜차드(58‘)

스티브 샌더스(64‘)

리암 보이스(86‘)

+++++++++++++++++++++++++++++

이아인 비거스(6‘)

존 서튼(21‘, PK 36‘)


=============================



“기분이 어때?”


경기가 끝난 후에도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관중들의 환호를 듣고 있던 스미스는 샌더스의 물음에 덤덤히 대꾸했다.


“얼떨떨해.”


“그렇겠지. 동점 골에 역전 골까지 만들어낸 경험은 네 선수 생활에서 한 번도 없었잖아. 오늘만큼은 대단한 일을 해낸 거야.”


“······.”


“과정을 함께한다는 의미가 이런 거고.”


샌더스를 쳐다보자 그는 오늘 처음으로 웃고 있었다.


스미스는 고개를 내려 유니폼에 달린 로스 카운티 엠블럼을 보더니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네 말이 옳아.”


“그래.”


더 긴 대화까지 나눌 필요는 없었다. 샌더스는 스미스의 어깨를 툭 치면서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


“잘했어, 고든.”


그리고 스미스는 뒤돌아선 그를 향해 대답해주었다.


“너도, 스티브.”


작가의말

참새 눈물 만큼이긴 하지만...

다시 시간을 조금씩 앞당기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속도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언제나 재밌게 봐주시고 기다려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에 힘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_ _)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이풍 님

모아두상 님

DailyMail 님 (ㄷㄷ...)

후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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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149. 두 번째 시즌의 마무리 +14 21.12.04 2,030 75 30쪽
148 148. 평범했던 그 날의 오후 +11 21.10.31 1,975 85 25쪽
147 147. 공공의 적 (3) +11 21.10.05 1,937 76 28쪽
146 146. 공공의 적 (2) +9 21.09.16 1,877 76 20쪽
145 145. 공공의 적 +12 21.08.28 1,950 87 22쪽
144 144. 쉬운 상대는 없다 +13 21.08.03 2,597 83 28쪽
143 143. 벌어진 격차 +24 21.06.21 2,195 88 26쪽
142 142. 미끼와 덫 +15 21.02.26 2,416 90 24쪽
141 141. 클래스의 차이 (6) +23 21.01.05 2,438 118 34쪽
140 140. 클래스의 차이 (5) +4 21.01.05 2,011 63 20쪽
139 139. 클래스의 차이 (4) +5 21.01.05 1,980 57 24쪽
138 138. 클래스의 차이 (3) +18 20.10.02 2,280 96 33쪽
137 137. 클래스의 차이 (2) +16 20.08.04 2,326 81 29쪽
136 136. 클래스의 차이 +22 20.05.19 2,550 103 29쪽
135 135. 첫 라이벌 (2) +11 20.03.22 2,468 89 27쪽
134 134. 첫 라이벌 +11 20.02.13 2,651 98 27쪽
133 133. 볼프스부르크 (2) +14 20.01.20 2,532 104 32쪽
132 132. 볼프스부르크 +9 20.01.10 2,462 87 21쪽
131 131. 잃어버렸던 이름 +18 19.12.29 2,675 107 30쪽
130 130. 돌풍의 팀 (2) +10 19.12.16 2,568 103 26쪽
129 129. 돌풍의 팀 +13 19.12.07 2,649 114 23쪽
128 128. 골 넣는 수비수 +11 19.11.27 2,597 102 29쪽
» 127. 결집하는 마음 (3) +11 19.11.14 2,565 99 25쪽
126 126. 결집하는 마음 (2) +8 19.11.04 2,567 88 22쪽
125 125. 결집하는 마음 +8 19.10.23 2,697 95 22쪽
124 124. 미스터 딩월 (2) +8 19.10.08 2,728 100 27쪽
123 123. 미스터 딩월 +11 19.09.25 2,766 106 22쪽
122 122. 사냥개와 들개들 (3) +13 19.09.14 2,710 113 26쪽
121 121. 사냥개와 들개들 (2) +6 19.09.05 2,774 101 23쪽
120 120. 사냥개와 들개들 +8 19.08.25 2,900 99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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