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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커피 님의 서재입니다.

강과 먼지의 왕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노란커피
작품등록일 :
2016.09.24 16:04
최근연재일 :
2022.01.30 09:00
연재수 :
17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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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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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55,524

작성
20.12.27 09:0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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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2-118. 흔들리는 왕 (1)

DUMMY

2-45. 흔들리는 왕




르로안. 그는 꿈을 꿨다.


달콤한 과일 향이 나는 꿈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기분 좋은 꿈을 말이다.


꿈속에는 방패처럼 탄탄한 복근이 있었고, 르로안은 거기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유방을 매만지더니, 이윽고 그녀의 몸 안에 자신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만큼은 행복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행복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르로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하아.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르로안은 주변을 살폈다.


따뜻한 모피 침대와 이불, 은은히 불타는 쇠화로와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제야 르로안은 여태껏 꿈을 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노아는 사라졌다. 그녀에 대한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 그러자, 알 수 없는 허탈함과 불쾌함이 밀려왔다. 이게 며칠 째란 말인가?


의욕이 꺾이며, 무기력이 몸을 지배했다. 일어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그때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고개를 돌리자 르로안은 자신의 아내를 볼 수 있었다. 약소부족인‘검은날개 부족’의 질 공주를. 그녀의 복장을 보아하니 한창 일하던 중인 거 같았다.


“... 그래, 일어났소.”


르로안이 상체를 일으키며 대답했다. 질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다행이네요. 지금 점심을 준비했는데, 괜찮으시다면 드시겠어요? 전하.”


르로안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 대답했다.


“... 그래, 그럽시다.”


1층으로 내려온 르로안은 내장 스튜와 귀리 빵, 구운 양고기로 식사 중인 아버지 리가르와 떠돌이 사제 애슈다를 보았다. 먼저 르로안을 알아본 건 애슈다였다.


“이런, 전하 오셨습니까?”


통통한 사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쾌활하게 인사했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보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르로안이 자리에 앉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제 일어났느냐?”


“예.”


“좀 늦게 일어났구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요즘 잠을 설쳐서요.”


“그래 며느리에게 들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비난이 섞여 있었지만,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이제 르로안이 왕이었으니까.


아내 질이 귀리 빵과 내장 스튜를 가져왔다.


“막 구운 빵이랍니다. 전하.”


“고맙소.”


질이 미소 지으며 떠나려고 할 때, 아버지 리가르가 그녀를 붙잡았다.


“며늘아. 너도 식사해야 하지 않느냐?”


질이 여느 때처럼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전 아까 전에 해 괜찮습니다. 아버님. 그보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밖으로 나가게 허락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왜? 어디를 가려고?”


“다름이 아니라, 다른 여인들과 함께 훈련 중인 전사분들 식사를 준비하고 싶어 그렇습니다. 일손이 늘면 여러모로 편하지 않을까 해서요.”


“참으로 기특한 생각이구나.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닌 내 아들이 허락할 문제인 거 같구나.”


아버지 리가르가 그리 말하며 르로안을 바라봤다. 르로안은 시선이 불편한 듯 대충 대답했다.


“뭐, 알겠소... 다녀오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질은 기쁘게 대답하곤 외투만 걸친 채 집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떠나자 거대한 저택에는 남자 셋이 식사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뭔가 우중충해졌는데,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애슈다가 특유의 쾌활하고, 과장된 어조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음.... 정말 훌륭하군요! 이렇게 맛있는 내장 스튜는 얼마 만에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왕비님의 요리 솜씨가 가히 일품입니다. 그려.”


애슈다가 통통한 볼에 음식을 가득 머금으며 말했다.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썩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질 공주의 요리 솜씨는 꽤 훌륭한 편이었다.


“동감합니다. 사제님. 아주 훌륭하죠.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집안 솜씨도 좋고, 야무지고. 속도 깊습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예... 훌륭하군요.”


르로안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버지 리가르가 계속해 말을 이었다.


“참으로 기특해. 매일 불평불만 없이 일찍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부족 여인들과 함께 일을 하지. 전사들 식사 준비라던가, 군화를 만든다거나. 싫은 티 한번 내지 않고. 심지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가 말없이 도와주기도 하지. 그래서 벌써 네 아내를 좋아하는 이들도 많이 생겼단다.”


“예, 저도 들었습니다. 리가르 님. 아직 어린 나이인데 불구하고, 누구보다 맡은 바 책무에 열심히 시죠.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르로안이 음식을 만쯤 먹다 말곤 수저를 내렸다. 그리곤 물었다.


“그런 말씀을 하는 저의가 뭡니까?”


“네게 충분히 과분할 정도로 좋은 아이이니. 불편한 티 그만 내고 잘 대해주라는 말이다.”


“전 충분히 잘해주고 있습니다.”


“진심이냐? 네 어머니를 걸고?”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르로안은 말문이 막혔다. 한동안 괜찮았나 싶었는데, 또 이 상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왕자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르로안은 이 상황이 싫었다. 자기가 아이가 된 거 같고, 어리석어진 것 같아 말이다. 허나, 이 이상 자기더러 뭘 어찌하란 말인가?


골치 아픈 상황. 그래서 르로안을 말을 돌렸다.


“... 그보다 그건 어떻습니까?”


“뭐가 말이냐?”


“우리 고향인 ‘감시자의 언덕’과 ‘뿔 숲’에 파견한 군대 말입니다. 슬슬 무슨 소식이 올 듯싶은데, 아무 이야기 없습니까?”


거기에 관해 애슈다가 대답했다.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전하.”


“애슈다 그대는 바람의 속삭임을 듣는다 하지 않았나. 그대의 능력으로 들은 이야기가 정녕 없나?”


“정말 죄송하지만 없습니다. 전하. 기이하게도 거기에 관한 속삭임을 하나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거, 아쉽군.”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신비하지만 그만큼 빈약한 능력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아버지 리가르가 끼어들었다.


“그건 왜 궁금해하느냐?”


“당연히 궁금하지요. 다른 부족과 공화국 군대가 우리 고향을 수복하러 간다는데 왜 신경이 안 쓰이겠습니까?”


그랬다. 현재,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날이 어느 정도 풀리자 공화국 장군들은 뒤늦게 합류한 라기아족. '긴창', ‘엄니멧돼지’, ‘얼룩돼지’, ‘금갈기’, ‘돌주먹’, ‘녹색사슴’ 등을 이용해 르로안의 고향인 녹색 땅 ‘동부 중앙’과 그 옆에 위치한 ‘뿔 숲’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봄이 되면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라는데, 이유는 둘째치고 르로안은 왜 자기들 고향을 수복하는데, 자신들을 안 보낸 건지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버지 리가르가 대답했다.


“당연히 신경 쓰이지. 허나, 당장 우리가 어찌할 문제가 아니니 신경 안 쓰려고 한다.”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요?”


“그래, 우린 은화장군에게 복종하기로 했으니, 우리가 고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 그리고 안 나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어째서지요?”


“겨울에 움직이는 것 자체가 위험하니까. 추위와 눈, 신경질적인 날씨 모든 게 위협적이지. 차라리, 이곳에서 쉬며 힘을 기르는 게 훨씬 나을 거다. 뭣보다 뒤늦게 합류한 자들이 초조하지 않게 전공을 나눠주는 것도 필요한 일일지 모르고.”


전공을 나눈다라... 르로안은 잡초를 씹는 듯한 씁쓸함 맛봤다. 어찌나 쓴지 지금 누리고 있는 안락함과 맛있는 음식조차 감흥이 없을 정도였다.


분명 1년 전과 비교도 할 수 없게 상황이 호전됐지만, 르로안은 설명하기 어려운 허탈감과 허무함을 맛봤다.


그토록 바란 풍요와 안전이었지만, 그 대가로 르로안은 소중한 것을 점차 잃어가는 것 같았다. 명예, 자존심, 자유, 인생의 선택권 같은 거 말이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카노아가 사라지니 다시 그러한 감정이 꿈틀댔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잘못된 건지, 자신이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지.... 어쩌면 그녀가 대신 화내 줬기에 르로안이 버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 카노아에 대한 그리움과 씁쓸함이 다시 한번 왈칵 올라왔다.


르로안이 숟가락을 내리며 말했다.


“전 이만 그만 먹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아직 반이나 남았습니다만... 좀 더 드시지요?”


“아니, 괜찮아. 입맛이 없어.”


“하지만-”


“-그만하시지요. 사제님. 본인이 먹기 싫다는데, 어쩌겠습니까? 배고프면 알아서 먹겠지요.”


거듭 음식을 권하는 애슈다에게 리가르가 끼어들며 말렸다. 그는 마치 사춘기 아들을 대하는 듯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참으로 불편한 표정. 르로안이 방으로 올라가려 하자 그가 물었다.


“또 방에 틀어박혀 잘 거냐?”


“.... 아뇨, 전사들 훈련하는 곳을 찾아가 볼까 합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방으로 돌아온 르로안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두꺼운 모피 망토를 몸에 둘렀다. 그래, 불편하게 집에서 눈치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외출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그리 자위하며 검대에 칼을 동여 맺는데, 르로안의 눈에 한 왕관이 들어왔다.


하얀 뼈로 만든 ‘뼈 왕관’ 말이다.


뿔처럼 뾰족한 뼈가 하늘 위로 여덟 가닥 솟아 상당히 위압적이었는데, 이음새에 이어 붙인 금 말고는 뼈뿐이라 소박하지만, 동시에 묘한 신비함을 자아냈다.


‘우리 뼈화살 부족의 보물. 어머니 창백한 부인이 내린 선물.’


르로안은 그 뼈 왕관을 바라보며, 정녕 자신이 저 왕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 자문했다.


분명, 어떤 왕이 될지 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밖으로 나온 르로안을 처음으로 반긴 건, 다름 아닌 청명한 하늘과 햇볕이었다.


며칠 전 몰아친 눈보라에 보답이라도 하듯 오늘은 날씨가 맑았는데, 내리쬐는 햇볕은 곳곳에 쌓인 눈더미와 부딪혀 반짝반짝 빛을 사방에 뿌렸다.


‘길을 다 정리했군.’


르로안이 깨끗하게 정돈된 길을 훑어보며 생각했다. 공화국 병사들은 신경질적이다 할 정도로 눈을 치우고, 길을 정리하는데 목숨을 걸었는데, 그러한 습성은 이내 같이 생활하는 우리에게도 전염됐다.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눈을 바로바로 치우니, 움직이기 훨씬 편했으니 말이다. 르로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훈련장으로 움직였다.


“전하, 안녕하십니까?”


“오, 전하. 몸은 이제 괜찮아지신 겁니까?”


“반갑습니다. 전하. 몸은 편안하신지요?”


르로안이 걸을 때마다 주변에서 일하고 있던, 전사나 일꾼, 여자들이 안부 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르로안의 몸이 불편하다고 거짓말을 한 것 같았다. 근래 외부활동을 자제했으니, 핑계가 필요했겠지.


르로안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주변을 둘러봤다. 겨울이라 그런지 거리가 한산해 보였는데, 허나,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닌 거 같았다.


지금 붉은 방패로 떠난 은화장군은 이곳 ‘침묵하는 숲’에 자리 잡은 야영지를 단순한 피난처 이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둬, 현재 하나의 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성장시켰다.


물론, 그것을 위해 꽤나 고생한 것은 맞지만, 덕분에 이곳 야영지는 충분한 규모와 체계성을 갖췄고, 뒤늦게 합류하는 이들이 와도 큰 혼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덕분에 지금 느긋하게 지낼 수 있는 거고... 꽤나 배울만한 태도야. 물론, 비단 거주지에 한정된 건 아니지만.’


르로안이 그리 생각하며 훈련장을 내려다봤다.


거대한 나무를 잘라 울타리를 쳐 마련한 훈련장 안에서는 뼈화살 부족의 전사들이 있었다.


과거 열두 명, 삼십 명 내키던 대로 뭉쳐 훈련하던 전사들은 사라지고, ‘전투귀족’을 중심으로 열 명, 백 명 정원로 맞춰 체계적인 훈련을 하고 있었다.


공화국의 군단병처럼 복장과 무기를 통일시키진 못했지만, 여러 무기를 다룰 줄 안다는 점을 착안해 좀 더 유연하고, 기민한 훈련을 하고 있었다.


가령, 창을 든 전사가 적들을 견제하는 사이 도끼와 검으로 무장한 전사가 파고들거나, 후미를 치는 그런 훈련 말이다. 몇몇 이들은 아군 뒤에 몸을 숨겨 적군이 틈을 보이면, 번개처럼 일어나 투창을 던지는 연습도 했다.


‘많이도 배웠군... 대규모 전투에서는 모르겠지만, 숲 속에서의 전투에서라면 오히려 우리가 군단병을 압도할 수도 있겠어.’


그때, 뼈화살 부족 특유의 날카로운 호령이 들렸다. 바로, 궁수들을 훈련시키는 소리였다.


르로안은 반쯤 호기심으로 저도 모르게 길을 따라 야영지 외곽에 있는 궁수 훈련장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여우의 지휘 아래 활시위를 당기는 어린 소년들이 있었다.


‘제일 나이가 많은 녀석이 열다섯도 안돼 보이는군.... 저놈은 열 살도 안 돼 보이고.’


“전하?”


르로안이 소년들의 살펴보는 사이 여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놈의 표정에는 반가움이 역력했다. 하긴, 며칠 동안 제대로 나오지도 않던 왕이 다시 얼굴을 내밀면 반갑겠지.


괜스레 머쓱해진 르로안이 별 의미 없이 말했다.


“여... 훈련 중이었군.”


“예, 전하. 리가르 님께서 명하셨습니다. 소년들에게 활을 훈련시키라고, 활 쓸 줄 아는 놈들이 많아지면 좋긴 하죠. 그보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여우가 그리 물었지만, 눈은 다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녀석이었으니, 모르면 더 이상하긴 했다.


르로안이 적당히 맞장구쳤다.


“어, 좋아졌어.”


“그거 기쁘군요. 이봐! 모두 이쪽으로! 전하께서 너희를 보러 직접 오셨다! 뼈화살 부족의 왕 르로안 님이 말이다.”


멀뚱멀뚱 서 있던 소년들이 일제히 르로안에게 몰려들었다. 고기를 만난 늑대와 같았는데, 놀랍게도 소년들의 눈에는 동경심인 가득해 반짝반짝 빛이 일 정도였다.


“와, 진짜다. 전하야....”


“나 처음 봤어.”


“난 저번에 봤어, 직접 봤다고. 대화도 나눠봤어.”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다들 눈이 너무 반짝거려 르로안은 괜히 부담스러워졌다. 도대체 자신이 뭘 어찌했다고 이러는 건지. 르로안이 여우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여 물었다.


“얘네들 왜 이래?”


“이 중 태반이 전하가 구해준 애들이고. 이후로도 전하의 도움을 받은 애들입니다. 가령, 음식이나 방한 물자 같은 거요.”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


“직접은 아니더라도, 서라기아족과 싸우며 구했고, 또 우리 부족으로 거둬 계속 도움을 주셨습니다. 뭐, 실질적으로 리가르 님이 다 하셨지만요.”


말하기가 무섭게 한 소년이 대표인양 르로안의 앞에 다가왔다. 눈이 똘망똘망했는데,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큰 가죽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꽤 낯이 익었다.


소년이 긴장하며 물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전하.”


“... 그래, 오랜만이구나. 바롤.”


르로안이 소년의 이름을 간신히 기억해 말했다. 그러자 소년은 당장 눈물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감동했다.


이 소년은 은화장군에게 무릎 꿇기 전부터 합류한 소년으로, 아비는 서라기아족에게 살해당했지만, 본인과 일가는 르로안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다. 참고로 자기 몸보다 큰 저 망토는 아비의 유품이었다.


소년이 물었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걱정했습니다. 전하.”


“그래, 이제 괜찮다... 피곤이 좀 쌓였던 것뿐이야.”


소년이 진심으로 안도했다. 여우가 끼어들어 새로운 소년을 소개해줬다. 다름 아닌 오릭스의 남동생인 ‘아시스’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전하. 형님께 전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를 거둬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확실히 오릭스와 많이 닮았군.’


르로안이 생각했다. 이 아이 역시 르로안을 무슨 영웅처럼 봤는데, 이에 어찌 대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뒤이어 다른 소년들이 르로안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출신이 제법 다양했는데, 르로안은 전부 이야기를 들어준 뒤, 다른 나머지 소년들의 이름과 출신지도 물어봐 줬다.


딱히 해줄 말이 없었기에, 듣는 건 쉬웠다. 그렇게 백 명이 넘는 소년들을 상대하자 르로안은 점차 설명하기 어려운 어떠한 만족감을 느꼈다. 보상받는 듯한 기분.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여우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하. 이 소년들 중 몇몇이 궁술이 시시하다는데, 한마디 해주시죠.”


그 말에 몇몇 소년들이 제 발이 저린 듯 화들짝 놀라 여우를 노려봤다. 르로안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뭐, 이해한다. 궁술보다는 검이 더 멋있다고 생각할 나이이니. 훈련도 더 지루하고. 하지만, 다들 열심히 배우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지금은 활이 칼이나 창보다 유용하다고 생각하거든.”


소년들은 말하기가 무섭네 ‘네!’라고 대답했다. 눈이 여전히 반짝였는데, 르로안은 그 눈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뭐가 두려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우가 제안했다.


“괜찮으시다면 전하께서 활 쏘시는 모습을 한번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범 삼아? 그럼, 크나큰 영광이겠습니다.”


솔직히 그럴 기분은 아니었지만, 르로안은 여우에게 활을 달라고 손을 뻗었다. 기대하는 소년들의 눈빛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에.


여우에게서 장궁을 건네받은 뒤 화살을 메겨 쏘려는 찰나, 누군가 맥을 끊듯 르로안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계셨군요. 뼈화살 부족의 왕이여. 찾아다녔습니다.”


초 치는 듯한 불쾌함.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유령처럼 새하얀 사내가 서 있었다. 검은 날개 부족의 왕 하얀 까마귀 라벤 말이다.


그가 말했다.


“잠시 대화 가능하시겠습니까?”


작가의말
오랜만에 르로안 파트가 나온 거 같습니다. 다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지사항에 ‘녹색 땅 동부’ 지도를 올렸습니다. 급하게 만든 거라, 퀼과 정확성이 좀 떨어지지만, 글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한번씩 읽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무젓가락 님, 독야청청 님, 캐리 님 후원 감사합니다. 크리스마스 선물 크게 받은 거 같습니다. 응원해 주신 마음에 실례가 되지 않게 성실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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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6

  • 작성자
    Lv.64 폴피리
    작성일
    20.12.27 09:46
    No. 1
  • 답글
    작성자
    Lv.32 노란커피
    작성일
    20.12.27 20:07
    No. 2
  • 작성자
    Lv.58 李神
    작성일
    20.12.27 14:32
    No. 3

    베르겐이야 그렇다 쳐도 르로안은 참 어찌될 지 알 수 없네요. 하지만 작중에선 르로안이 더 오래 살아남을 거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32 노란커피
    작성일
    20.12.27 20:09
    No. 4

    이리 감상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쓰는 소소한 즐거움 입니다.

    베르겐과 르로안이 어찌 될지는 스포일러라 말씀 드릴 수 없지만, 각자 나름대로 의미있는 선택을 할겁니다. 개인적으로 각자 나름 대로 납득되는 선택이 될 거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9 백수심마
    작성일
    20.12.27 14:34
    No. 5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건필하세요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32 노란커피
    작성일
    20.12.27 20:09
    No. 6

    늘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1 박왈왈
    작성일
    20.12.29 17:52
    No. 7

    에휴 좋아하는 여자가 없어져서 심란하긴 하겠지만 그동안 권리를 누렸으면 의무도 져야지. 정략결혼했다고 아내한테 찬밥대접이라니... 외모가 못생기거나 내조하는 능력이 부족한것도 아닌데 지금 르로안한테는 아깝다
    그래도 이런걸 극복하면서 라기아족 왕이 되는거겠죠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32 노란커피
    작성일
    20.12.31 22:09
    No. 8

    말씀 감사합니다. 르로안에 대해 이리 이야기 해주시니 너무나 기쁠 따름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말씀 드릴 수 없지만, 이야기가 진행함에 따라 르로안이 왕다운 면모를 보일것 같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 k9******..
    작성일
    21.01.01 18:08
    No. 9

    르로안 역시 제 취향은 아닙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저런 반응을 보이는게 훨씬 사람답고 그렇긴 하지만 역시나 매우매우 답답한 우리 르로안이 생각이 많다고 해야 되나? 영웅적인 면모가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잘 느껴지지도 않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32 노란커피
    작성일
    21.01.01 19:16
    No. 10

    댓글 감사합니다. 여러 캐릭터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군상극이다 보니, 확실히 그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것 때문에 망설였는데, 쓸 수록 캐릭터들이 스스로 살아움직이는 것 같아 쓰는 입장으로는 다소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서 지루한 부분이 있는 것 역시 이해하고, 거기에 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거는 말못드리지만, 그럼에도 르로안이 나중에 영웅적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해 봅니다.

    아직 17, 18살 소년이다 보니... 이렇게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더 나은 글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 k9******..
    작성일
    21.01.01 20:05
    No. 11

    시대적배경으로 그 나이면 충분히 철이 들 나이지만 또 한편으론 확실히 그 나이면 저런 생각을 할수도 있겠단 생각도 드네요 ㅎㅎ 답변 감사합니다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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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32 노란커피
    작성일
    21.01.02 20:58
    No. 12

    아닙니다. 독자님들의 감상을 듣는게 제 기쁨입니다. 오히려 감사하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6 아신류
    작성일
    21.01.02 20:06
    No. 13

    새해복많이받으세요. 삼일만에 다봤네요. 개인적으로 초반15회 정도까지 별로였는데 설연휴라 할꺼없어서 봤는데 보다말았으면 후회할뻔했네요 ㅎㅎ.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32 노란커피
    작성일
    21.01.02 21:00
    No. 14

    너무나 감사한 말씀 감사합니다. 새로운 독자분이 생겨 기쁠 따름입니다. 오타 수정한 것도 봤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화이트썬
    작성일
    21.01.10 22:25
    No. 15

    즐감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32 노란커피
    작성일
    21.01.12 01:38
    No. 16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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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먼지의 왕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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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2-136. 여인 (1) +10 21.04.25 945 63 13쪽
150 2-135. 돌아온 자(4) +10 21.04.18 833 61 12쪽
149 2-134. 돌아온 자(3) +16 21.04.11 852 58 14쪽
148 2-133. 돌아온 자(2) +8 21.04.04 854 57 14쪽
147 2-132. 돌아온 자 (1) +8 21.03.28 937 56 13쪽
146 2-131. 돌아온 지휘관 (3) +4 21.03.21 884 60 14쪽
145 2-130. 돌아온 지휘관 (2) +14 21.03.14 861 57 13쪽
144 2-129. 돌아온 지휘관 (1) +16 21.03.07 949 63 13쪽
143 2-128. 상담하는 부인 (3) +22 21.02.28 947 60 18쪽
142 2-127. 상담하는 부인 (2) +36 21.02.21 951 72 15쪽
141 2-126. 상담하는 부인 (1) +17 21.02.14 984 60 14쪽
140 2-125. 성공한 사업가 (3) +25 21.02.07 893 69 17쪽
139 2-124. 성공한 사업가 (2) +18 21.01.31 892 62 17쪽
138 2-123. 성공한 사업가 (1) +20 21.01.24 1,008 65 18쪽
137 2-122. 흔들리는 왕 (5) +25 21.01.17 898 62 14쪽
136 2-121. 흔들리는 왕 (4) +28 21.01.10 929 60 13쪽
135 2-120. 흔들리는 왕 (3) +9 21.01.10 799 52 14쪽
134 2-119. 흔들리는 왕 (2) +29 21.01.03 896 63 18쪽
» 2-118. 흔들리는 왕 (1) +16 20.12.27 1,040 56 18쪽
132 2-117. 침식되는 여자 (3) +33 20.12.20 1,044 76 21쪽
131 2-116. 침식되는 여자 (2) +31 20.12.13 931 62 14쪽
130 2-115. 침식되는 여자 (1) +12 20.12.06 983 54 13쪽
129 2-114. 깨어난 자 (2) +10 20.11.29 952 62 14쪽
128 2-113. 깨어난 자 (1) +23 20.11.22 1,038 56 13쪽
127 2-112. 존경받는 사기꾼 (3) +22 20.11.15 1,036 66 16쪽
126 2-111. 존경받는 사기꾼 (2) +15 20.11.08 928 71 16쪽
125 2-110. 존경받는 사기꾼 (1) +20 20.11.01 958 67 16쪽
124 2-109. 변화하는 자 (2) +12 20.10.25 914 61 15쪽
123 2-108. 변화하는 자 (1) +8 20.10.18 980 63 12쪽
122 2-107.9 하룻고양이 (3) +20 20.10.11 1,027 66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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