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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커피 님의 서재입니다.

강과 먼지의 왕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노란커피
작품등록일 :
2016.09.24 16:04
최근연재일 :
2022.01.30 09:00
연재수 :
17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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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2.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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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2-117. 침식되는 여자 (3)

DUMMY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저녁 시간 때. 율리아와 다레온은 외출 준비를 마쳤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창피를 당하지 않는 최소한의 선에서만 갖춰 입었다. 뭐, 당연했다. 보석이라도 지니고 가면 계모인 이비아가 득달처럼 달려들 테니 말이다.


율리아는 대문 앞에서 다레온을 기다렸다.


“미안, 튜디. 오늘은 정말 너랑 같이 저녁 먹고 싶었는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 정말 미안. 대신, 내일 같이 식사하자. 혹시 하고 싶은 건 없어? 춥지만 도시 밖으로 산책하러 갈까? 말 타고?”


다레온의 친절한 말에 튜디는 수줍은 많은 아이처럼 웃을 뿐이었다. 어른스러운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율리아의 착각인 듯했다.


튜디와의 인사를 마친 뒤, 다레온이 자신의 두 친구에게 말했다.


아키아족 코바로스와 길스인 마커스에게.


“두 사람 모두 나 없는 동안 애들 좀 잘 지켜봐 줘. 미안, 오자마자 또 일 시켜서.”


마커스는 마땅히 자기 일이라며 고개를 숙였고, 코바로스는 내일 돈과 자유시간이나 달라고 말할 뿐이었다. 모두와 인사를 마치고 그가 다가왔다.


“미안합니다. 부인. 기다렸지요?”


“아뇨... 슬슬 가죠.”


“예, 그럽시다.”


율리아는 다레온과 각기 노예를 하나씩 거느린 채 본가로 향했다.

이게 다 안토니아 때문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계모 이비아는 안토니아를 보자마자 당당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곧바로 거세된 개처럼 얌전해졌다.


그럼, 그냥 돌려보내면 됐을 텐데. 안토니아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멍청한 이비아를 구슬려 율리아와 다레온에게 식사대접을 하게 했다.


‘어머 이비아. 오랜만이네요. 안 그래도 조만간 찾아가려고 했는데, 정말 반가워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예? 아, 혹시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위분을 만나러 오신 건가요? 친절해라... 제가 감히 나설 것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식사하는 건 어떨까요?’


놀랍게도 이 몇 마디에 오늘 저녁 식사가 잡히고 말았다.


이걸 계기로 안토니아와 친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이비아는 반드시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율리아와 다레온에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다레온은 그걸 또 예의 바르게 수락했다.


정말 전부 마음에 안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부인.”


“예? 아... 괜찮아요. 당신이야말로 괜찮나요? 전쟁터에서 막 돌아와 피곤하실 텐데.”


“괜찮습니다. 애들을 봐서 그런지 전혀 안 피곤합니다.”


“... 그거 다행이네요. 그런데 올 거면 온다고 연락 좀 주지 그러셨어요.”


“아, 그 점은 건 미안합니다. 저도 갑자기 휴가를 받아서 이야기할 틈이 없었습니다... 아, 이제 도착했군요.”


다레온이 노란 뱀 문양이 새겨진 대문을 보며 말했다.


햇빛과 먼지로 색이 바랜 붉은 대문을 보자 율리아 급격하게 침울해졌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우울한 과거가 떠올랐기에... 허나, 다레온은 괜찮다는 듯 청동 손잡이를 이용해 대문을 두들겼다.


잠시 후, 말랐지만, 옷을 잘 차려입은 노예가 나왔다. 필시, 사위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랴부랴 옷을 갈아 입힌 것이리라.


‘물론, 그 사위가 다레온은 아니겠지.’


노예가 말했다.


“어서 오시지요. 주인님과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노예를 따라가는 도중 율리아가 다레온 곁에 살짝 붙어 속삭였다.


“제 새어머니께서 반드시 돈 이야기를 하실 거예요. 그러니 적당히 맞장구만 쳐주고, 아무것도 약속하지 마세요.”


“음, 왜죠?”


다레온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왜일까요? 골수까지 뽑아 먹을 탐욕스러운 여자라 그렇죠. 제 아버지 꼴 나기 싫으면 제 말대로 하세요.”


“예, 봐가면서요.”


율리아는 ‘하!’하고 탄성을 냈다. 봐가서면서요?... 기껏 걱정해줬더니.


‘이제 모르겠다. 알아서 하라지.’


노예의 안내를 받아 따라가는 율리아가 생각했다.


도착한 곳에는 아버지 ‘퍼블리스 세벨스’와 계모 ‘이비아 세벨스’


큰 언니인 ‘아우리아 마르카스’와 그녀의 남편 ‘디키우스 마르카스’


작은 언니인 ‘이빌리아 카루스’와 남편 ‘투무스 카루스’


마지막으로 ‘시니아 주세프트’가 있었다.



나약한 아버지와 순직한 올케언니 그리고 비열한 가족들이라. 아마, 운명이란 게 존재한다는 그놈은 아주 변태일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선 어찌 이런 끔찍한 조합을 생각했을까?


그들은 겉으로나마 율리아와 다레온을 반겼다.


“이런 오늘의 주인공이 왔구나!”


이비아가 즐거워하며 지껄였다. 허나, 말과 정반대로 곧바로 율리아를 무시한 채 시니아에게 치근덕거렸다.


“며늘아가 기억하지? 결혼식에서도 봤잖아?”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애교 섞인 목소리. 율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남의 돈, 남의 위치, 남의 인기... 그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기생충처럼 들러붙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딸들과 사위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 퍼블리스 세벨스가 말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저기 앉거라.”


율리아는 불쾌함을 숨기며 한쪽 귀퉁이에 마련된 길스식 와상에 몸을 뉘었다. 다레온 역시 율리아 옆에 몸을 뉘었는데, 그는 앉기 전 아버지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이리 초대해주어 너무나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아버지는 잠시 놀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도 진심으로 존중받는 게 얼마만인지 몰랐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원로원 의원인 디키우스 마르카스, 진흙항구의 행정관 투무스 카루스는 모두 겉으로는 예의를 차렸으나, 속으로는 아버지를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하긴, 누가 나약한 남자를 존중하겠는가?


그래서인지 아버지도 진즉에 그런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아키아족 사내만이 유일하게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예를 갖췄다.


아버지는 혼란스러워하며, 다레온에게 말했다.


“갑자기 이리 불러 힘들게 했는지 모르겠네.”


“별말씀을요. 오히려 절 이리 생각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참으로 친절하십니다.”


다레온의 대답은 시니아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던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그도 그럴 게 입에 발린 말 같으면서도, 진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초대해주신 장모님에게 역시 감사합니다.”


“흠! 흠! 별거 아니다. 아니, 별거 아닌 건 아닌데. 나니까 이리 주는 거다. 난 친절하니까 말이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자 분위기가 변했다.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어느새 모두 율리아와 다레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사 인사 몇 마디로 이곳에 섞인 것이다.


아버지가 힘없이 잔을 보다 물었다.


“.... 이보게. 막내 사위.”


“예, 장인어른.”


“허흠.... 녹색 땅에 있는 동안 별일 없었나?”


“예, 위대한 펠소포티 각하와 아소리우스 각하, 멜리우스 장군께서 전장을 지휘한 덕분에 별일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작게 감탄했다. 페로스, 시리온, 코모두스 모두 공화국에서 명성이 자자한 영웅들이니.


까칠하고, 남을 상처 입히기 좋아하는 큰 언니 아우리아가 능글맞게 물었다.


“제부. 정말, 녹색 땅의 야만인들은 벌거벗고 싸우나요? 남자, 여자 모두?”


“언니!”


“왜? 너도 궁금하잖아?!”


큰 언니 아우리아와 작은 언니 이빌리아가 깔깔 웃었다. 막 돌아온 사람에게 저런 질문이나 하다니. 허나 다레온은 친절히 답할 뿐이었다.


“몇몇은 그렇게 싸우기도 합니다.”


“어머, 진짜요? 여자도?”


“예, 대신 몸에 문신이나 문양을 칠하는 데, 그러면 칼과 화살이 피한다고 믿죠.”


그녀들이 다시 한번 깔깔 웃었다.


“야만인들이라 그런지 멍청하네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내의 질문에 디키우스가 대답했다. 장교 출신의 현 원로원 의원 말이다.


“그렇군. 몸에 그림 그린다고 창칼이 피한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멍청한 족속이군.”


“저도 그 점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아무리 강력한 육체를 가지고 있어도 맨몸으로 싸우면 위험한 법인데, 거기다 미신과 소문에도 잘 휘둘리고요... 다만, 그쪽 문화를 들어보면 약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디키우스가 비웃었다.


“이해? 라기아족을?... 아키아족이라 그런가?”


“전 궁금한데요? 무슨 문화 때문에 그런 거지요?”


끼어든 것은 다름 아닌 시니아. 그녀의 질문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다소 야만적인 이야기인지라...”


“괜찮아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레온은 공화국을 위해 싸우고 계신 영웅이잖아요? 한번 듣고 싶어요. 뭣보다 제 남편 역시 장벽에서 지금 싸우고 있어서요.”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왜 라기아족이 옷을 벗고 싸우냐면 자신의 용기를 과시하기 가장 좋기 때문입니다.”


“용기요?”


“예, 부상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신기하네요. 제 남편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다만, 여자인 저로서는 이해가 안 되네요. 용기를 입증하는 건 좋지만, 왜 그토록 무리하는 거죠?”


“용기 있는 전사로 인정을 받으면, 명성을 얻고, 운과 실력까지 따라주면 ‘전투귀족’까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투귀족요?”


“예. 라기아족의 계급 중 하나인데, 부족마다 의미와 역할이 조금씩 다르지만, 소대, 중대 단위를 이끄는 전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럼, 전투시 더 많은 노획물을 챙길 수 있죠.

흥미로운 건. 전사들에게 용기를 증명한다는 건 단순히 과시욕을 넘어, 생계가 달린 문제라는 겁니다. 인정받는 전사가 돼야 더 많은 전리품을 챙길 수 있으니까요. 그 탓에 가난한 전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이는 부족의 승리를 이끄는 요인이 되죠. 야만족의 무모한 행위도 그들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흥미롭죠?”


솔직히 말해 율리아는 관심 없는 이야기였으나,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누군가 물었다.


“그래서 라기아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거군요.”


“예,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예? 꼭 그렇지도 않다뇨?”


“라기아족은 분명 용맹하지만, 그 용기는 불과 같습니다. 이길 것 같으면 산불처럼 크게 불타오르지만, 패색이 짙어지면 금방 사그라들지요. 더욱이 흥분을 잘해 통제가 안 되고, 전투가 길어지면 빨리 지쳐 제풀에 쓰러지기도 합니다.”


시니아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이야기를 다레온이 주도했는데, 이에 디키우스가 질투하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너무 잘난 척하는 거 아닌가? 마치, 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아, 죄송합니다! 민망하군요. 맞습니다.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펠소포티 각하와 아소리우스 각하가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하다 보니 제 생각인 것처럼 말했군요.”


다레온이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허나, 그와 반대로 다른 이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민중파의 일인자와 이인자 아닌가?


“펠소토피 각하와 아소리우스 각하라니.... 설마, 페로스 각하와 시리온 각하 말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거짓말!”


누군가 소리쳤다.


“거짓말 그만두시오. 아니지... 혹시 그분들이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은 건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들은 거요?”


“그분들이 대화하는 것을 들은 것도 있고, 그분들이 제게 말씀하신 것도 있습니다.”


충격은 더욱 배가 됐다. 누군가 사실 여부를 알기 위해 질문하려 할 때, 이비아가 끼어들었다.


“그분들이 자네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아, 예. 통역관이나 수행원 노릇 할 때 가끔씩 말동무가 되어드리긴 합니다.”


“통역관? 수행원? 말동무!”


“예, 장모님... 아소리우스 각하께선 절 통역관으로 쓰셨고, 펠소포티 각하께선 절 수행원으로 쓰셨습니다.”


이비아의 입꼬리가 충격과 함께 슬금슬금 올라갔다. 그리고 다레온을 보는 눈빛이 조금씩 변했다.


“... 신들에 맹세코 진짜인가?”


“예, 하지만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라기아어를 능숙하게 하는 자가 많지 않다 보니.”


디키우스, 투무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각각 원로원 의원, 행정관인데, 그들은 페로스와 시리온과 말도 섞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 아키아족 잡놈들 그 둘과 대화를 나눴다니... 굴욕적이었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그리 대단한 게 아닙니다.”


“뭐, 그럴 수도... 좀 자세히 이야기해 주겠나?”


“글쎄요? 전 그저 그분들의 명을 따라 통역을 하고, 잡일을 맡았으며, 전투에 함께 참여하고, 척후대를 좀 관리했을 뿐입니다.”


토무스가 끼어들었다.


“함께 전투? 척후대? 일개 병사로 간 게 아니오?”


“원래는 일개 병사로 종군했습니다. 허나, 아소리우스 각하와 함께 기병대에 편입해 싸우고, 나중에는 조각난 땅에서 고용한 노예 사냥꾼으로 이뤄진 척후대에 배치돼 지금은 그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뭐, 관리한다고 해봤자,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제대로 전달하고,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관리하는 정도지만요.”


말투는 겸손했지만, 내용은 전혀 아니었다. 즉, 다레온은 페로스와 시리온의 수행원을 겸임하면서 척후대를 이끌고 있는 장교인 셈이었다.


높으신 분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비아가 흥분해 말했다.


“대단하구만! 자네가 다시 보일 정도네.”


“감사한 말씀입니다. 장모님. 하지만, 여기 계신 두 분께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디키우스 경께서는 해적들을 무찌른 바다의 영웅이자 자랑스러운 원로원 의원이시며, 투무스 경께서는 진흙항구의 행정관으로 공화국에 봉사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아... 그렇지. 그건, 그래.”


순간 제정신을 차렸는지 이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하레스 형님 역시 빼놓을 수 없죠. 그분께서는 장벽에서 누구보다 활약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의 명성은 붉은방패에도 전해질 정도입니다. 정말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시니아.”


“고마워요. 하지만 전 그저 그이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이비아가 끼어들었다.


“아, 맞다! 자넨 모르겠구만, 며늘아기가 아기를 낳았다네! 너무나 귀여운 딸아이지.”


다레온이 화들짝 놀랐다.


“예?!... 그거 정말 대단한 일이군요. 죄송합니다. 진작에 축하 인사부터 드렸어야 했는데.”


시니아가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 쳤다.


“아니에요. 지금 말씀해주신 것만으로 감사해요.”


“실례가 안 된다면 나중에 찾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요. 언제나 환영이에요.... 그럼, 저도 부탁 하나 드릴 수 있을까요?”


“예, 말씀하시죠.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혹시, 튜디라는 아이도 함께 데려와 주실 수 있나요? 제 아들 폴리가 그 애랑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아, 그렇습니까?”


“예, 저번에 율리아랑 같이 산책 나갔을 때 둘이서 잘 놀더라고요. 폴리도 다시 만나보고 싶은 눈치라...”


“그건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데려가고 말고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뇨. 아뇨. 제가 오히려-”


그렇게 다레온과 시니아는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전혀 다른 태생의 두 사람이 너무나 말이 잘 통했는데, 더 놀라운 건 썩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거였다.


“으흠!... 사위?”


“예, 장모님.”


“때마침, 나도 질문이 있네만 해도 되겠나?”


“물론. 아는 것이라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 정말 페로스 각하의 등 뒤에는 후광이 있나? 소문에 들리면 비너스의 축복으로 부활해 등 뒤에 작은 태양이 떠다닌다고 하던데.”


“겉보기에는 없지만, 그분과 잠시만 대화하면 한순간 후광이 보이기는 합니다.”


“그런가?”


“예. 은빛 태양이 떠다니죠.”


“자네 시리온 각하도 잠시 모셔봤다고 했지? 그럼...”


이비아는 그동안 궁금했던 높으신 분들에 대해 있는 대로 물어봤다. 때때로 그 질문이 유치하고, 민망한 것도 있었지만, 다레온은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는 탐욕스러운 그녀가 만족하게 대답해줬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보고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줬는데, 대화는 점점 흥을 돋웠다.


율리아는 그 모습을 말없이 옆에서 지켜봤다. 분명, 원래대로면 다레온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에 불과해야 할 터인데. 놀랍게도 그는 어느새 이 자리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이다.


식사가 중반쯤 됐을 때, 큰딸 아우리아가 제 어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콕 찔렀다.


“아! 맞다... 이보게. 사위 내 자네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할 게 있네.”


“무엇이시지요?”


이비아가 헛기침을 했다.


“내가 듣기로 자네가 붉은방패에서 제법 사업을 크게 한다는데, 맞나?”


다레온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 아, 그거 말씀이시군요? 정확하게는 제가 아닌 제 친구입니다. 전 투자만 했습니다.”


“투자라고?”


“예, 수완이 좋은 친구이죠. ‘술집’이나 ‘연극’ 같은 것을 합니다. 용병이나 군인, 외지상인 덕분에 벌이가 좋다 하더군요. 근래에는 육류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고요.”


“그런가?”


“예, 그런데 그것은 왜?”


“아.... 다름이 아니라... 흠, 흠. 자네 생각을 묻고 싶네. 가족끼리는 서로 도와야 하나? 안 도와야 하나?”


빌어먹을. 율리아가 속으로 나직이 말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지금 막 전쟁터에서 온 사람에게 돈 이야기를 꺼낼 셈인가? 이건 최소한의 선도 없는 짓이었다.


율리아는 혹시나 해서 아버지를 봤으나, 아버지는 한심하게 반쯤 남은 포도주잔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레온이 계모의 질문에 대답했다.


“당연히 서로 도와야지요.”


“그렇지? 다름이 아니라, 돈 좀 빌려줄 수 있나? 요즘이 좀 혼란스러운 시기 아닌가? 장벽, 붉은방패... 심지어 바다 건너 고대의 땅과 히드라 반도, 머리 바로 위에 있는 조각난 땅까지. 시끄러워 사업이 잘 안 풀려 그러네. 사정이 나아지는 대로 돈을 갚도록 하겠네.”


“지금 그걸-”


다레온이 율리아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은 딱딱하지만, 따뜻했다.


“당연히 빌려드려야죠. 때마침 전리품을 좀 챙겨 온 게 있는데,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 나누시죠.”


이비아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그런가?.. 이런! 그럼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군. 이봐! 가장 좋은 포도주를 가져와! 사위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다들 축배를 들자고! 어서 가져와!”



길고도 짧았던 저녁 식사는 끝이 났다.


기분이 좋아진 이비아는 하룻밤 자고 가라 제안했지만, 다레온은 집에 있는 애들이 걱정된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렇게 다레온과 율리아는 왔던 길로 돌아갔는데, 율리아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제 말을 무시하셨군요.”


“예?”


“제 말을 무시하셨다고요. 당신 실수한 거예요.”


“뭐가, 뭘 실수한 거죠? 부인.”


“새어머니에게 돈을 빌려주는 거요. 절대 갚지 않을 거예요.”


다레온의 반응은 덤덤했다.


“부인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네요.”


“예?”


“우리 둘이 처음 만났을 때요. 전 당신께 야생화 꽃다발을 드렸고, 당신은 그걸 던졌죠. 아, 오해마세요. 제겐 인상적이었으니.”


율리아가 그때를 떠올리며 약간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꼈다.


“요점이 뭐죠?”


“그때, 부인이 제게 친절히 설명해줬습니다. 부인의 가문이 얼마나 약하고, 도움이 안 될지. 심지어 손을 벌릴 거라고 했죠. 정말 친절했습니다.”


“저랑 친절의 정의가 다르군요.”


“아뇨. 친절한 거 맞습니다. 물건을 솔직히 설명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거든요.”


“물건요?”


“부인이 아니라, 부인 가문이요. 부인은 협상자였죠. 이런 제가 또 실수했군요.”


다레온이 자기 입을 톡 때렸다. 익살적인 그 모습을 보자니 정말 연극배우 같았다.


“어쨌건, 부인도 그때를 기억하나요?”


율리아가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했다.


“... 예.”


“그럼, 문제 내죠. 부인 가문에서 손을 반드시 벌릴 거라고 했는데, 제가 뭐라고 대답했죠. 물론, 상품은 없지만, 한번 맞춰주세요.”


“... 가족끼리는 도와야 한다고 대답했죠.”


그랬다. 그는 그리 말했다. 율리아는 속으로 비아냥거렸고. 솔직히 결혼을 엎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는데.


“이런다고 제 새어머니가 당신을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할 거 같아요?”


다레온이 살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제부터라도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죠. 최소한 이러면 장모님께서 부인을 덜 괴롭힐 거 아닙니까?”


다레온이 그리 대답하곤 처음 만났을 때 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율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작가의말

‘침식되는 여자’ 편은 여기까지며, 다음 주는 녹색 땅으로 배경이 옮겨갈 것 같습니다.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음 주 또 뵙겠습니다.


나무젓가락 님, 캐리 님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다음 주 역시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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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2-127. 상담하는 부인 (2) +36 21.02.21 951 72 15쪽
141 2-126. 상담하는 부인 (1) +17 21.02.14 984 60 14쪽
140 2-125. 성공한 사업가 (3) +25 21.02.07 893 69 17쪽
139 2-124. 성공한 사업가 (2) +18 21.01.31 892 62 17쪽
138 2-123. 성공한 사업가 (1) +20 21.01.24 1,008 65 18쪽
137 2-122. 흔들리는 왕 (5) +25 21.01.17 898 62 14쪽
136 2-121. 흔들리는 왕 (4) +28 21.01.10 929 60 13쪽
135 2-120. 흔들리는 왕 (3) +9 21.01.10 799 52 14쪽
134 2-119. 흔들리는 왕 (2) +29 21.01.03 896 63 18쪽
133 2-118. 흔들리는 왕 (1) +16 20.12.27 1,040 56 18쪽
» 2-117. 침식되는 여자 (3) +33 20.12.20 1,045 76 21쪽
131 2-116. 침식되는 여자 (2) +31 20.12.13 932 62 14쪽
130 2-115. 침식되는 여자 (1) +12 20.12.06 983 54 13쪽
129 2-114. 깨어난 자 (2) +10 20.11.29 953 62 14쪽
128 2-113. 깨어난 자 (1) +23 20.11.22 1,038 56 13쪽
127 2-112. 존경받는 사기꾼 (3) +22 20.11.15 1,037 66 16쪽
126 2-111. 존경받는 사기꾼 (2) +15 20.11.08 928 71 16쪽
125 2-110. 존경받는 사기꾼 (1) +20 20.11.01 958 67 16쪽
124 2-109. 변화하는 자 (2) +12 20.10.25 914 61 15쪽
123 2-108. 변화하는 자 (1) +8 20.10.18 980 63 12쪽
122 2-107.9 하룻고양이 (3) +20 20.10.11 1,027 66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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