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9. 돌아온 지휘관 (1)
2-48. 돌아온 지휘관
마지막 발악을 하듯 거칠게 내리는 눈보라. 그 눈보라를 뚫고 한 무리의 기병 무리가 등장했다.
나무 성벽 위에 서 있던 병사들은 예상치 못한 등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종소리를 내는 등 한껏 요란하게 굴었는데, 잠시 후, 성문이 열리며 십여 기의 기병이 튀어나왔다.
다들 두꺼운 털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 명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두꺼운 털 망토로도 가릴 수 없는 존재감이랄까? 어떤 의미로는 참으로 부러운 능력이었다. 정치인에게 있어 말이다.
“벌써 돌아오시다니... 혹시 붉은방패 생활이 영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웬걸? 난 마음에 들었네. 내 머리카락이 거래될 정도로 사람들이 날 사랑해주고, 말귀가 통하는 젊은 친구들도 만났거든, 재미난 쇼도.... 다만, 자네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이리 왔다네.”
페로스의 말에 시리온이 클클 웃었다.
“오오... 방금 들었어? 우릴 보고 싶었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좀 변태처럼 들리는군요. 하긴, 이 빌어먹을 땅에 그리 미소 지으며 돌아온 걸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찌 됐건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각하.”
“저 역시 반갑습니다. 각하.”
시리온과 코모두스가 눈보라를 해치고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다들 살이 좀 빠져 있었는데, 페로스가 화답하듯 한껏 미소지었다.
“재회의 감동은 좀 들어가서 나눌까? 여긴 매우 춥군. 불알이 얼 정도로 말이지.”
페로스의 말대로 시리온과 코모두스, 페로스는 다 같이 숙영지 내 지휘관 막사로 들어왔다. 문을 잠깐 연 것만으로 눈이 한 바가지는 들어왔는데, 참으로 지독한 날씨가 아닐 수 없었다.
“오.... 제기랄 이제 좀 살 것 같군.”
막사의 온기를 느끼며 페로스가 말했다. 눈으로 반쯤 언 망토를 바닥에 벗어버리고, 불에 데운 뜨거운 수건으로 얼어버린 머리와 얼굴을 녹였다.
‘빌어먹을... 추위 때문인지 머리카락이 더 뽑혔구만.... 좀 더 가늘어진 것 같은데? 유피테르여 자비를 베푸소서. 좀.’
페로스가 수건에 묻은 머리카락을 보며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각하. 이거 좀 드시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페로스가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머리를 닦다만 코모두스가 뜨겁게 데운 포도주잔을 내밀었다.
냄새가 아주 좋았다. 후추와 꿀, 생강... 그리고 육두구 냄새가 났다.
페로스는 그것을 받아 마시고는 말했다.
“너무 친절해 감동적이기까지 하군.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각하라면 반드시 빠른 시간 안에 돌아올 것이라 믿었기에.... 그렇다 해도 설마 이 눈보라를 뚫고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몰랐네. 자네들 좀 감동시켜 줄 요량으로 서두르는 척을 했지만, 진짜 서두르게 됐지. 녹색 땅의 겨울을 잠시 잊었어.... 이 눈보라와 추위를 뭐라 부르는지 아나?”
“수확철 겨울이라 부르죠.”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시리온이 나타나 말했다. 그는 따뜻하게 데운 수건뿐 아니라 담요까지 걸치고 있었는데, 이미 따뜻한 포도주도 한잔 마신 듯했다.... 아니, 한 병을 마셨군.
페로스가 손가락으로 시리온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정답이네. 겨울 막바지 마지막 희생자들을 수확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지... 자네가 그걸 아니 놀랍군.”
“여긴 더럽게 지루하고, 계집년들은 젖통 큰 것 외에는 내세울 만한 게 없거든요. 최소한 공화국 말 정도는 해도 좋을 텐데.... 어쨌건 지루한 덕분에 수확철 겨울이라는 것도 배우게 됐죠... 수치스럽습니다. 그건 그렇고 다레온 녀석은 어디 있습니까?”
“휴가 중일세.”
“휴가요?”
“그래, 휴가. 일도 잘하고, 고생도 많이 하고, 내가 술에 취하기도 해서 휴가를 줬지. 취소하려고 했는데, 바로 떠났다네.”
“젠장, 돌겠군! 전 여기서 이리 고생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 잡종 놈은 뭘 한다고 휴가를 간답니까?! 이건 옳지 않습니다. 정의는 죽었구만.”
코모두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 그를 그리 신경 써.”
“라기아어 욕을 아주 잘하거든. 그 녀석을 통해 누구한테 욕 좀 해줘야 해서.”
“그런가? 누군가?”
“모든 라기아족이요. 다 등신 머저리입니다. 아비는 내시 같고, 어미는 닳디 닳은 창녀 같은 놈들이지요.”
시리온이 농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게 단호히 말했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넘어갈 때임을 직감한 페로스가 따뜻한 포도주를 한잔 더 주문하고는 자리에 가 앉았다.
“후우... 춥군 추워. 뼈가 얼어붙는 듯해. 자네들도 여기 와서 앉지. 아직 자네들이 젊은 건 알지만, 관리하지 않았다간 나처럼 추위에 약해질 거야. 어서들 앉게.”
“그리 늙지 않으셨습니다.”
코모두스가 페로스를 위로하며, 쇠화로 옆에 위치한 페로스 좌측에 앉았다. 시리온은 페로스 우측에 앉으며 말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진짜 늙은 건, 살이 너무 쪄 자기 거시기도 안 보이는 원로원 늙은이들이고요. 아마, 그들이었으면 오는 길에 넘어져 그대로 얼어 죽었을 겁니다.”
“그 말이 뼈를 찌르는군.... 실제로 오는 길에 그럴 뻔했거든. 타로, 시소스. 포르케 등등 열네 명의 자랑스러운 공화국 병사가 죽었지.”
“세상에...! 추위 때문입니까?”
코모두스가 경악하듯 물었다. 페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추위 때문은 세 명일세. 나머지 열한 명은 습격 때문이지. 오는 길에 정체가 불분명한 라기아족들에게 습격당했네. 풍족한 둥지 북쪽 푸른 뱀 강을 따라 올라오던 중 말일세... 추위 탓인지, 생각보다 수가 얼마 안 되고, 혹시 몰라 풍족한 둥지에서 병사들을 합류시킨 덕분에 무사히 뿌리칠 수는 있었지만, 좀 위험했네.”
“비너스가 보살피셨군요.”
“그렇군.... 비너스께서 보살폈지. 비록 내 병사들을 데려갔지만.”
페로스는 그리 화답했지만, 목소리는 제법 진지했다. 여태까지 괜찮은 척했지만, 습격을 받은 것은 분명 불쾌한 일이니. 무엇보다 ‘침묵하는 숲’과 ‘풍족한 둥지’는 확실한 공화국의 영역.
그런 영역에서 습격받은 것은 실제적 위협을 벗어나 몹시도 불쾌한 일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아직도 페로스에게 반란의 마음을 품은 자들이 있다는 거였으니. 신의라고는 전혀 없는 사기꾼같은 놈들....!
그런 페로스의 기분을 읽었는지 코모두스와 시리온은 각기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코모두스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듯 인상을 썼고, 시리온은 호기심과 불쾌함, 흥미가 뒤섞인 미소를 지었다.
과연 복귀하는 페로스를 누가 습격한 걸까? 얼룩돼지? 엄니멧돼지? 곰어금니? 녹색사슴?
잠깐 동안의 침묵 후, 페로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라기아족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군. 공화국의 땅에서 내 목을 노리는 자가 있는 걸 보니.”
시리온, 코모두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맞장구쳤다.
“라기아족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처럼 줏대가 없고, 생각 역시 짧아 잘 덤비고, 잘 무릎 꿇고 그러다 더 주워 먹을 게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리죠. 매가 필요합니다. 필요 없어도 전 휘두르고 싶고요.”
코모두스도 한마디 거들었다.
“확실히 그런 구석이 없잖아 있습니다. 특히, 각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약간 그런 조짐을 보입니다.”
“돌주먹, 엄니멧돼지, 얼룩돼지, 얼룩새, 민물고기, 긴창, 독두꺼비, 금갈기, 녹색사슴 같은 부족인가?”
“예.... 그리고 그 중 몇몇은 감시자의 언덕에서 큰 피해를 본 부족이기도 하죠.”
“아, 맞다.... 정확한 피해가 어느 정도인가?”
페로스의 물음에 코모두스가 바로 대답했다.
“공화국 군단병 육천에, 용병 사천, 라기아족으로 구성된 오천 병력이 괴멸했습니다. 소수의 생존자만 살아 돌아와 이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제 잘못된 판단입니다.”
시리온이 코모두스를 변호했다. 물론, 자신도.
“최종 결정을 내린 건 코모두스지만, 제안을 한 건 저입니다. ‘감시자의 언덕’과 ‘뿔 숲’을 확보하면 봄이 되는 대로 바로 움직일 수 있을 거 판단해 그랬습니다.”
“됐네. 됐어. 애당초 이 일의 모든 책임은 총사령관인 내게 있네. 적잖은 피해긴 하지만, 지금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우선, 적은 누군가?”
코모두스가 시리온을 봤고, 그가 말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서라기아족입니다. 다만, 새롭게 파견된 군대 같지는 않고, 저희에게 박살이나 흩어진 패잔병인 것 같습니다.”
“패잔병이라면 저번 고르혼이 이끌던 그 패잔병 말인가?”
“예, 제가 놈의 목을 취한 다음, 투구만 각하께 가져다드렸죠.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하네. 자네가 창으로 그의 눈구멍을 뚫었지. 그리고 적들을 완벽히 부숴 깨진 암포라처럼 만든 것 역시 기억하고. 비록 수가 너무 많아 전멸은 못 시켰지만, 대부분 지휘관을 죽여 뭉칠 수 없게 했는데.... 그거참 흥미롭고도, 우려스럽군. 어떻게 당했는지 아나?”
시리온이 흑과 백으로 색을 칠한 조약돌을 탁자 위에 던지듯 깔았다. 그는 평소처럼 웃고 있었지만, 분위기만큼은 공화국 최강이라는 칭호답게 꽤나 진지했다.
“현장에 있지 않았지만, 생존자들의 증언과 전투 흔적을 보고 대충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말해주겠나?”
시리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얀 조약돌을 모아 움직였다.
“이 하얀 조약돌이 우립니다. 명령을 내린 대로 감시자의 언덕을 순조롭게 제압하고, 뿔숲까지 가고 있었죠.”
“그러던 중 서라기아족이 습격했군.”
시리온이 역시 눈치가 빠르다는 듯이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맞습니다. 놈들은 아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기아족이 좋아하는 숲속에서 말이죠. 지휘를 맡은 사령관은 용병과 군단병을 정면으로 밀어붙이는 동시에 라기아족을 좌로 돌려 옆구리를 공격했습니다. 숲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페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합리적인 전술이었다. 군단병의 방어력이라면 숲에 숨은 라기아족의 산발적 공격 따위 버틸 수 있었고, 좌로 치는 것만으로 적들은 압박을 받을 터이니.
아직까지 어쩌다 아군이 전멸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격은 예상대로 먹혔고, 서라기아족은 그대로 숲 밖으로 밀려났다고 합니다. 병사들 말에 따르면 숲에 숨겨둔 식량과 금붙이를 챙기러 뿔숲에 왔다고 하더군요.”
“그런가?”
“최소한 병사들 말에 따르면 말입니다. 여기저기 전리품이 널브러져 있어... 라기아족은 너무 흥분했고, 공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서인지, 서라기아족을 추격했답니다. 그리고 멍청한 사령관 역시 이에 동조했습니다. 그렇게 서라기아족을 쫓아 영웅의 강과 경계선 강이 나뉘는 지점까지 쫓았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서라기아족과 강 사이에 둘러싸였다고 말했습니다.”
“.... 그대 생각은?”
“맞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병력을 이끌고 가 직접 확인했는데, 발자국과 전투 흔적을 봤을 때, 적을 추격 중 역으로 둘러싸인 것 같습니다. 아마, 뿔숲 에서 숨어있던 적들이 뒤이어 쫓아와 아군 병력을 뒤에서 덮친 것을 테죠. 병력 자체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절묘한 타이밍의 기습과 포위 덕분에 아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손발이 안 맞는 것도 있었고요.”
“우리 방식이군.”
페로스가 조용히 읊조렸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도대체 누가 이런 시기에 그런 식으로 공격한 건지 궁금했다.
“음....”
생각에 빠진 페로스. 그때, 코모두스가 한마디 했다.
“모두 큰 피해를 봤고, 그 탓인지 라기아족은 우리 공화국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보호를 바라고 왔는데, 오히려 죽었다고. 그리고는 하나둘씩 죽은 전사들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자네는 뭐라 답했나 코모두스....”
“이는 각하께서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며, 공화국이 빚이 졌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공화국은 결코 빚진 게 없다고 말이죠.”
“잘했네.... 난 저들과 더 이상 어설픈 동맹 관계를 맺으려는 게 아니니. 다만....”
“다만...? 뭐가 문제입니까? 각하?”
“시리온. 적 지휘관이 누군지 아나? 보통내기가 아닌 듯한데... 우리 방식을 제대로 따라 했어. 적을 유인하고, 끌어들여, 둘러싸 그 짧은 혼란에 단숨에 해치운 게 말이야. 더 짜증 나는 점은 흩어진 패잔병을 다시 하나로 규합한 점이야.”
“다행히 알 수 있었습니다. 생존자들이 들었거든요.”
“그런가? 누군가? 서라기아족에서 새로운 지휘관이 왔나?”
시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각하도 한번 들어본 이름입니다.”
“나도 들어본 이름. 누군가?”
“돌파자 베르겐이라 합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셔 감사합니다.
나무젓가락 님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힘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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