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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스 한입 하실래예

도술 쓰는 공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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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새글

이기준
작품등록일 :
2024.05.21 21:54
최근연재일 :
2024.06.20 22:30
연재수 :
28 회
조회수 :
26,272
추천수 :
810
글자수 :
149,729

작성
24.06.01 22:00
조회
1,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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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글자
10쪽

가정 교습 (1)

DUMMY

네빌은 등을 펴고 눈앞에 솟은 거대한 성을 살펴보았다. 구름이 잔뜩 낀 탓에 한낮인데도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콰르르릉.


천둥소리가 네빌의 간을 들었다 놨다. 네빌은 잡생각을 억누르려고 했으나,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학회 추천서가 걸린 일만 아니었어도······.'


아니지··· 곧 태어날 사랑스러운 아이, 미렌만 아니었어도 그는 이 일을 결코 맡지 않았을 것이다. 귀족의 도련님을 상대하는 일은 보수가 높은 만큼 일이 까다롭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가 맡게 될 도련님은 그냥저냥한 귀족이 아니라, 북부의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에스테르지 가문의 영식이었다.


'그나저나 여길 어떻게 들어가지?'


정문이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하인이 먼저 마중을 나오기 마련이었다. 네빌은 창가를 기웃거리며 건물 안쪽을 살펴보았다.


끼이익.


그때였다. 난데없이 벽에 붙은 쪽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램프를 든 여인이 나타났다. 삼십대 초반의, 선량한 인상을 가진 여인이었다.


"예법 선생님이신가요?"


여인이 물었다.


"예, 네빌이라고 합니다."


"정문은 수리중이에요. 이쪽으로 오시면 되어요."


네빌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여인의 뒤를 따랐다.


복도에는 초가 켜져 있었지만,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네빌은 희미한 빛을 따라 걷다가, 벽에 걸린 액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신기한 그림이로군요."


글씨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것이 노란 종이 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패턴이 존재하는 듯도 했지만, 그의 식견으로는 읽어낼 수 없었다.


"공자님께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시거든요."


네빌은 이덴 공자에 대한 소문을 몇 가지 떠올렸다. 확실히, 그가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봤었다.


"참, 주의하셔야 할 게 있어요."


여인이 뒤를 돌아보며 타이르듯 말했다.


"저를 잘 따라오셔야 해요. 한눈 팔다가 길을 잃은 분들이 너무 많아서··· 아셨죠?"


"예."


네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게 뻗은 복도에서 도대체 길을 잃이 뭐가 있겠나 생각하면서.


"이덴 공자님께서는 복도 끝방에 계세요. 절대 한눈 팔지 마시고, 저만 따라오시면 되어요."


여인은 다시 한 번 신신당부했다.


네빌은 괜스레 긴장이 되어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만 느껴졌다. 갑옷이 저 혼자 움직인 것 같기도 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곧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기도문처럼 중얼거렸다. 미렌, 미렌...


"공자님, 예법 교사인 네빌 님이 도착하셨어요."


네빌은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는 고색창연한 응접실의 문턱에 서있었다. 그는 머지않아 살아서 보아온, 그 어떤 것보다 불가사의한 존재를 발견해냈다.


도자기처럼 유려하고, 꽃처럼 아름다운 아이.


"안녕."


아이가 손을 까딱이자, 네빌은 다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이, 인사드립니다! 오, 오늘부터 전하의 교육을 담당하게 될···!"


"네빌, 맞지?"


아이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따뜻하고 격의없는 미소였다.


네빌의 머릿속에 그동안 예법 교사 노릇을 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면면들이 스쳐갔다. 모두 집안의 위세만큼이나 잘나신 도련님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남에 도취되어 있어서, 네빌의 말을 당최 들어먹질 않았다. 말을 듣기는커녕 각성 능력의 실험대상으로 삼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중에는 공작의 둘째 아들인 크리스 에스테르지도 있었는데, 그 소악마와 함께했던 시간은 네빌의 기억에 가장 고통스러운 구간을 담당했다.


"우선 책을 한 권 드리겠습니다. 공자님께서 꼭 익히셔야 할 예법을 정리해둔 책입니다."


네빌이 가져온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책이 너무 두꺼운 탓에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그의 손등에 뼛골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아이가 작은 손을 내밀더니, 책을 무 뽑듯이 쉽게 뽑아 올렸다.


"아, 감사합니다."


네빌은 고마운 건 둘째 치고, 아이의 협동성에 놀랐다.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교사 노릇을 하면서 처음 겪어보는 경험이었다.


평생 떠받들어지기만 한 귀족 아이가, 난생 처음 받는 수업에서 이런 식의 센스를 발휘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인생 2회차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은.


"부족한 게 있다면 뭐든 말을 해 줘. 7년 동안 기다려온 수업이니까."


아이가 책을 펼치며 싱긋 웃었다. 네빌의 머릿속에서 종이 뎅뎅 울렸다. 예법으로 가득 찬 머릿속에서, 소년은 이미 그의 공작이나 다름없었다.



**



남은 수명은 13년.


정확히 스무 살에 죽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난 생을 반추해볼 때 얼추 그쯤에서 내가 죽는 건 확실하다.


그래서 작위고 뭐고 때려치우고 산과 들을 쏘다니며 몬스터의 소재나 구해다닐까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래서야 지난 생의 재탕이 될 뿐이라는 판단이다.


기연이 닿기만을 기다리며 천하를 정처없이 떠도느니, 공작이 되어서 막강한 돈과 인적 자원을 휘두르는 게 훨씬 낫다.


'내 아들이 원하고 있지 않느냐.'


그날 아버지의 한 마디가 곧 삶의 이정표가 된 셈이다. 공작이 되기만하면 모든 일이 훨씬 수월해질 거란 걸 몸소 보여주셨잖아.


그래서 오늘부터 받게 될 교육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특히 제왕학 같은 건 군주가 되려면 필수적으로 배워야하는 학문이니까.


"마르덴 님이 조금 늦으시네요."


릴리가 시계를 바라보며 근심어린 투로 말했다.


"이쯤이면 도착하셔야하는데··· 약속을 잊으실 분이 절대 아니거든요."


"그래?"


"게다가 교양 교사인 에인셀 님도 늦고 계세요. 아무런 기별을 못 받았는데도요."


걱정 마, 릴리. 두 사람은 제시간에 도착했으니까.


다만 멀쩡한 상태로 도착하진 않았다. 마르덴은 훈련받은 암살자였고, 에인셀은 본인도 모르는 어떤 각성능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건 많지 않았다. 첫째는 온전한 정신일 것, 둘째는 사리사욕을 너무 밝히지 않을 것.


이 정도만 되었어도 진법을 무사통과했을 테지만, 둘은 그러지 못했고, 덕분에 즐거운 미로 탐험을 하는 중이다.


"이제 무술하고 제왕학만 남았네."


그때, 진법에 외부인이 진입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척추를 타고 찌르르 울리는.


누구냐? 무술이냐, 제왕학이냐?


······둘 다 아니로군.


진법에 달아둔 경보장치들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중이다. 이런 레벨의 적의라면 교사일 수는 없다, 내 머리통을 분리하러 온 놈이라면 몰라도.


나는 허공에 손을 뻗어, 중지를 고리처럼 구부렸다. 빗자루로 만들어둔 꼭두각시 2호기와 3호기가 신호를 받고 출격했다.


도력이 실린 빗자루에 맞아봤을랑가 모르겠네.


그 순간이었다. 꼭두각시 2호기와 3호기의 연결이 동시에 끊어졌다.


'무력으로 뚫어보겠다고?'


나는 릴리를 홱 돌아보았다.


"릴리!"


"네?"


"잠시 윗층에 올라가있어."


"갑자기요?"


"응, 지금 바로!"


나는 영문을 몰라하는 릴리를 억지로 올려보냈다. 침입자는 모든 장애물을 때려부수며 진법을 직선거리로 주파중이었다.


들린다, 화분이 퍼석거리며 깨지는 소리, 나무가 우지직 꺾이는 소리.


응접실 입구를 지키던 꼭두각시 34호기, 35호기가 방금 순직했다.


나는 사태에 만전을 기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오행의 기운을 몸에 촘촘하게 둘렀다.


도사가 근접전을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그저 직접 몸을 부딪혀가며 싸우는 걸 선호하지 않을 뿐.


쾅.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폭음과 함께, 문짝이 프레임째로 뜯겨져 벽에 표창처럼 처박혔다.


흙먼지 속에서, 검은 제복을 입은 청년이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갈색 피부.


이마에 돋아난, 안쪽으로 휘어진 두 가닥의 뿔.


머리카락은 새까맣고, 송곳니는 수상할 정도로 날카롭다.


눈은 만화경처럼 오색찬란하고, 송곳니의 틈새로는 잿빛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몬스터 도감에서나 봤을 법한 생김새의 사내였다.


"누구냐?"


나는 도력을 있는대로 끌어올렸다. 그의 존재감이 공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 정도의 압박감을 느껴보는 건 스승님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난 카로이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나는 - "


"됐어, 그놈 자식들 중 하나겠지. 꼭 닮았구만."


그가 내 말을 끊으며 손사래를 쳤다.


의외로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량없는 귀찮음만이 배어나올 뿐.


"당신이 무술 교사야?"


"무술 겸 제왕학 교사다. 영광인 줄 알아라, 인간 꼬마. 그놈의 부탁만 아니었더라면 네깟 족속과 말을 섞을 일조차 없었을 텐데."


"무술하고 제왕학을 혼자서 가르친다고?"


"가르친다고는 안 했다. 교사라고만 했지."


···이게 무슨 소리지?


"받아라."


그가 책을 한 권 던졌다. 재료가 심히 수상스러운, 울퉁불퉁한 가죽에 뒤덮인 두꺼운 책이었다.


책의 속지에서는 정체불명의 기운이 솔솔 올라왔는데, 콜린이 사용하던 성스러운 힘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이 몸이 직접 쓴 책이다. 영광으로 알고, 부단히 자습하도록."


녀석은 소파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더니,


"다 읽거든 깨워라."


이 말만을 남기고는 드러누워 버렸다. 쿠션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서는.


나는 손에 든 책과 녀석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제왕학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온 놈의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학문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그래도 읽어보긴 해야겠지, 사람을 겉으로만 판단할 수 없으니까.


어쨌거나 아버지가 각별히 아낀다는 선생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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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용돈벌이 (3) +3 24.06.06 900 3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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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용돈벌이 (1) +1 24.06.04 986 28 11쪽
13 가정 교습 (3) +2 24.06.03 1,023 33 10쪽
12 가정 교습 (2) +2 24.06.02 1,035 35 10쪽
» 가정 교습 (1) +1 24.06.01 1,077 31 10쪽
10 불과 얼음의 노래 (3) +1 24.05.31 1,123 33 11쪽
9 불과 얼음의 노래 (2) +2 24.05.30 1,127 31 12쪽
8 불과 얼음의 노래 (1) +1 24.05.29 1,152 37 11쪽
7 뜨겁고 화끈한 것 (3) +1 24.05.27 1,170 32 9쪽
6 뜨겁고 화끈한 것 (2) +2 24.05.26 1,212 37 11쪽
5 뜨겁고 화끈한 것 (1) +1 24.05.25 1,263 34 9쪽
4 형제애 (2) +1 24.05.24 1,315 32 11쪽
3 형제애 (1) +2 24.05.23 1,379 32 12쪽
2 윤회의 굴레 (0) 24.05.22 1,460 3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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