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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스 한입 하실래예

도술 쓰는 공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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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새글

이기준
작품등록일 :
2024.05.21 21:54
최근연재일 :
2024.06.20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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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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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49,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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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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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글자
12쪽

불과 얼음의 노래 (2)

DUMMY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라슬로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틀림없다. 손목을 쥐었을 때 녀석의 몸으로 기를 한 가닥 흘려봤는데, 기의 흐름에 막힘이 없었다. 녀석은 훌륭한 도사가 될 자질을 타고났다.


스승님이 날 처음 발견할 때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세상 우울한 꼬맹이가 알고 보니 도술 재질이더라는 거.


"혹시 너···."


나는 녀석의 눈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녀석이 긴장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우리 집 올래?"


"공자님."


탈리아가 끼어들었다.


"아바로 백작이 불편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녀의 눈짓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았다. 라슬로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파란머리의 뚱뚱한 사내가 날 무섭게 노려보는 중이었다.


저 눈은 그거지, 하필이면 왜 그 따위 놈하고 대화를 나누냐는 거다. 아마 두 형님 중에서 한쪽 편을 들고 있는 사람이겠지?


"라슬로."


나는 녀석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정 힘들다면 언제든지 연락해.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


녀석은 날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머릿속엔 오직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뿐인 듯했다. 아쉽지만 지금은 보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흠, 어쩔 수 없지, 누구처럼 돈 몇 푼에 남의 자식을 사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후의 일은 전적으로 녀석의 의지에 달려있다. 어떻게든 인연이 이어진다면 사제의 연으로 발전하는 거고, 그렇지 못하면 그냥 안타까운 꼬맹이중 하나로 기억될 뿐이고.


"가자."


나는 들고 있던 과자를 내려놓았다.


"분위기는 대충 파악했어."


연회장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있었다. 한쪽 그룹은 크리스가, 한쪽 그룹은 마벨이 중심이었는데, 마벨의 그룹이 확실히 크기가 작았다.


마벨이 장남인데도 세력이 작은 이유는 순전히 그가 가진 능력 때문이었다. 각성 능력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어처구니없는 능력이었는데, 그게······.


"마벨 형님의 각성 능력이 뭐였더라?"


"'생장의 노래'입니다. 노래를 부르면 작물의 성장이 빨라지죠."


그래, 생장의 노래.


장래희망이 정원사라면 모르겠다만, 공작의 아들로서는 심히 부적합하다 하겠다.


공작령의 상황은 안정적이지 않다. 아버지가 하루가 멀다하고 토벌을 나가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불안정한 땅에서, 어떻게 풀떼기한테 노래나 불러주는 자식에게 작위를 물려주겠어.


반면 크리스의 능력은······.


'베리타스.'


타인에게 명령을 강제할 수 있는, 최상급의 정신계 각성 능력.


살라고 하면 살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다.


처음 그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엔 헛웃음이 나왔다.


그냥 신이나 마찬가지 아니야?


이토록 엄청난 능력을 타고났으니 목숨이 아깝다면 알아서 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이 든단 말이지. 그런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형이나 나한테는 써먹지 않는가 하는.


그놈에게 참을성 같은 덕목은 없다는 걸 난 알잖아.


발동 조건이 존재한다거나, 특정한 대가를 치러야한다거나, 뭐라도 있어야 녀석의 얌전함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회장이 소란스러워졌다. 크리스가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채 마벨 형님 쪽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5년만에 다시 만난 크리스는 몰라보게 성장해있었다.


여섯 살 때부터 용모 출중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던 놈인데, 열 살이 넘은 녀석의 모습은 미소년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검은 바탕에 노란 실로 수를 놓은 예복도 썩 어울리고, 오만한 표정은 마치 옷과 깔맞춤한 장식품 같다.


크리스가 다가서자, 마벨의 추종자들은 고양이를 만난 다람쥐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녀석은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가, 마벨의 앞에 떡 버티고 섰다.


"비텐."


나는 다급하게 비텐을 돌아보았다.


"마실 거, 아무거나."


이 재미에 음료를 곁들이지 않을 수 없지.


비텐이 서둘러 음료의 조달에 나섰다. 마벨을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오렌지빛 머리카락을 짧게 친 건장한 소년이었다. 기사 수업을 받는 중이라는 게 헛말이 아닌 듯 체격이 좋았고, 서글서글한 미소가 친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벨 형님."


크리스가 포문을 열었다.


"왜 아직도 영지에 남아계시죠? 기사가 되고 싶으셨다면 아버지를 따라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아버지께서 아직 때가 아니라잖니."


마벨이 온화하게 대꾸했다.


"아직 몬스터와 싸울 실력이 아니라면 가서 노래라도 불러주셔야죠. 그래야 잡초가 쑥쑥 자라서 몬스터의 발을 묶을 거 아닙니까."


좌중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크리스. 각성 능력이란 저마다 쓰임새가 다른 법이야. 내 능력으로 몬스터의 발을 묶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곳에서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어."


"맞아요, 형님이 유용하게 쓰일 곳이 많죠. 촌것들이 뒤섞여 자는, 돼지도 치고, 채소도 기르고, 날마다 똥간에서 거름을 퍼내는 그런 곳 말입니다."


흠, 아무리 정적이라지만, 그래도 자기 형이고 가문의 장남인데 저런 말을 대놓고 해도 되나?


"하하하하!"


"똥간이라니, 딱 어울리겠군."


"못 할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농사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흐흐."


크리스 측 귀족들 사이에서 조롱이 빗발쳤다.


응, 해도 되는구나.


한 줌밖에 안 되는 마벨의 측근들을 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야유를 퍼붓는데, 저걸 꿋꿋이 받아내는 마벨이 존경스러워질 지경이다.


하기사, 이 나라는 인성 교육이라는 걸 시키지 않던가?


일곱 살이 되도록 논어나 도덕경 비슷한 소리를 들어보지도 못했다. 곧 받게 될 교육도 싸움 기술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인 듯한데, 그러니까 다들 호화로운 옷을 입고 인성 터진 소리나 읊어대는 거겠지.


"물론 날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가야지. 가문을 위해서라면 옷에 흙을 묻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대단하다, 우리 마벨 형님.


아무래도 큰형님이 공작이 되셔야겠는데? 둘째 놈은 감옥에 처넣어버리고, 나는 그냥 도나 닦고 말이야.


"음료 가져왔습니다."


"고마워."


비텐이 핑크빛 주스를 가져왔다. 빨갛고 달달한 과일을 잘게 갈아서 우유와 섞은 건데, 이번 생은 이걸 마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 가치가 있다.


"언제나 말만 번지르르하군요. 정작 옷에 흙을 묻힌 적은 한 번도 없으시면서 말입니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난 매일같이 흙을 만지는 중이다. 관심이 있다면 언제 한 번 내 텃밭에 놀러오거라."


"괜찮습니다. 정원사를 고용해뒀으니까요."


다시 한 번 폭소가 터져나왔다. 마벨의 가신들은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마벨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크리스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보다 나는 네가 걱정이다, 크리스."


"절 걱정할 여유도 있으신가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막내의 재능이 너보다 뛰어나다는데, 이러다간 너도 네 쓸모를 다른 곳에서 찾게 될지 모르겠구나."


······응?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크리스가 살기 어린 어조로 되물었다. 마벨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는, 원숭이도 알아들을만큼 속도로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너보다, 막내가 낫다고 하시더구나."


마벨이 던진 한 마디의 파괴력은 엄청났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걷히고, 혼돈과 불안이 그 자리를 채웠다.


"전하께서 이덴 공자님을 더 높게 평가하셨다고?"


"그럴 리가, 그냥 아무 말이나 둘러댄 거겠지."


"이 사람아, 마벨 님께서 허튼 소리를 하실 분인가?"


"그래, 비록 능력은 약하지만 거짓말을 하신 적은 없으시잖아."


"잠깐만, 그게 사실이라면 크리스 님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럴 게 아니라 이덴 공자님께 인사라도 드려야······."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술렁였다. 크리스가 몇 년에 걸쳐 쌓아온 정치적인 입지가 마벨의 일격에 무너질 위기였다.


"하!"


크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 하찮은 놈이 나보다 뛰어나다니,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놈이 자기 힘도 제어하지 못해서 제 어미를 얼려죽인 일은 잊었나보죠?"


"사실이 아닙니다."


탈리아가 내게 다가와, 작고 단호하게 속삭였다.


"마님의 사인은 동사가 아닌 독살입니다."


나는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뭐, 독살이라고?"


난 꼼짝없이 내가 어머니를 얼려 죽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난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덴 님의 냉기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 건 아니지만, 그 전에 이미 생명력이 크게 떨어져 계셨습니다."


"대체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한 거지?"


"모릅니다. 정황으로는 독살이 분명하지만, 실제로 독이 검출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이 나오지 않은 독살이라니, 그게 어떻게······."


내 머리에 한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각성 능력인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그런 각성 능력을 지닌 자를 수소문하고 계십니다."


숨이 거칠어진다. 육년 전, 내 입에 억지로 과자를 쑤셔 넣던 어떤 짐승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오른 탓에.


"크리스, 네 말은 그저 막내의 능력이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 것 같구나. 아버지께서도 꼭 같은 말씀을 하셨어."


"헛소리 집어 치워요!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마침 막내가 이 자리에 와있으니, 직접 얘기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


모든 사람이, 문자 그대로 이 드넓은 연회장에 모인 사람 전부의 고개가 일제히 내 쪽을 향해 돌아갔다.


연회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자, 어쩌면 작위의 주인이 바뀌게 될지도 모를 순간이었다.


이때 나는 두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마냥 사람 좋아보이던 마벨 형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판을 짰다는 것.


둘째는 그의 의도가 무엇이건 나는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타고 말았다는 거.


"······네놈에겐 초대장이 안 갔을 텐데."


크리스가 이를 빠득 갈았다.


"공작저는 제 집이기도 합니다, 형님."


"나대지 마라. 자기 힘도 똑바로 못 다루는 하등한 놈 주제에."


"제가 왜 자기 힘도 똑바로 못 다룬다고 생각하시죠?"


"그럼 아니라는 거냐?"


나는 빙긋 웃으며, 들고 있던 잔을 한 차례 흔들었다. 음료의 윗부분이 쩍 소리를 내며 얼어붙더니, 작고 네모난 얼음 덩어리로 변했다.


"방금 봤어?"


"음료수 위에 얼음이 생겨났어요!"


사람들, 특히 소녀들의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원하는 영역만을 정교하게 얼리다니, 놀라운 조작능력이로군."


"그래봤자 얼음 아닌가? 저게 전하께서 칭찬하실 정도의 능력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래, 고작 저 정도로는 크리스 님께 견줄 수 없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게 갈렸다.


"웃기지도 않는구나."


크리스가 킥킥거렸다.


"그래서 그게 뭐가 어쨌다고? 그래봤자 자연계열 각성 능력이 아니냐? 어디보자, 그 조막만한 얼음을 녹여줄 불이 필요하겠구나. 그렇지, 저기 촛대에서 양초 하나를 가져오면 딱이겠다만······."


그때였다. 내 손에서 거대한 불길이 일어났다. 불길은 삽시간에 자라나 천장까지 치솟았다. 샹들리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연회장의 온도가 뚜렷할 만큼 올라갔다.


사람들은 충격적인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어떻게 불과 얼음을 동시에···!"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 솔리타스시여!"


한 노인이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어떤 이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가하면, 어떤 이들은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각성 능력이 강하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의 상식으로 한 사람의 몸에 두 가지 능력이 깃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드래곤의 존재를 깨닫고 충격을 받았듯, 그들도 지금 다른 세계의 외경(畏敬)을 목도중인 것이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크리스는 표정관리에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잘 모르면 주둥이 닫는 게 좋습니다."


크리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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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용돈벌이 (1) +1 24.06.04 986 2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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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가정 교습 (2) +2 24.06.02 1,035 3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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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과 얼음의 노래 (2) +2 24.05.30 1,127 31 12쪽
8 불과 얼음의 노래 (1) +1 24.05.29 1,151 37 11쪽
7 뜨겁고 화끈한 것 (3) +1 24.05.27 1,168 32 9쪽
6 뜨겁고 화끈한 것 (2) +2 24.05.26 1,210 37 11쪽
5 뜨겁고 화끈한 것 (1) +1 24.05.25 1,262 3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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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형제애 (1) +2 24.05.23 1,379 32 12쪽
2 윤회의 굴레 (0) 24.05.22 1,458 3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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