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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평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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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1.01.16 11:18
최근연재일 :
2011.01.16 11:18
연재수 :
1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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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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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
글자수 :
816,019

작성
10.06.0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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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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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글자
11쪽

평범 (7)

DUMMY

" 이놈입니다. "


간수는 아무도 없는 감옥 한복판에 던져진 고깃덩어리를 보며 말했다. 온몸에 상처가 없는 곳이 없고, 흘러내린 피가 전신을 붉게 물들여 갓 도축한 고깃덩어리로 밖엔 보이지 않는 그것은,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간수의 인도를 받아 감옥으로 내려온 성직자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것은 지하 감옥에 가득 찬 고기 썩는 냄새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직 생활을 하면서 이런 비참한 모습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는 저런 꼴을 하고도 사람이 살아있을 수 있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무심코 간수에게,


" 그것, 살아있나? "


하고 물었다.

간수는 문을 열고 들어가 피투성이 청년의 숨을 확인했다. 아직도 미약하나마 숨이 붙어 있다. 애당초 야윈 몸에 지금껏 흘린 피가 적지않은데 아직 살아있다니, 독종 아니면 기적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었다. 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살아있다고 답했다.


그 말에 성직자는 신에게 조용히 기도했다. 그러자 그의 몸에 성스러운 빛이 서리더니 쓰러진 청년에게도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감옥 안은 순백의 빛으로 가득 찼다.




<비참한 사람>


" 푸핫! "


전신에 차가운 기운이 돌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 내 몸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몽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니 옛 유럽의 병사 같은 복색을 한 사내가 커다란 물통에서 심기 불편한 눈으로 내게 물을 끼얹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뭐라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면서 들고 있던 바가지를 던져주었다. 그제야 나는 몸을 돌아봤다. 온몸은 아마, 내 몸에서 흘러나왔을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저 사람은 정신을 잃은 나를 씻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백히 귀찮아하는 태도를 보아 호의라기보단 명령을 받아서 싫어도 할 수 없이 하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살았다는걸 실감했다.


살아있다.

이번에야말로 죽었다고 체념했는데 또 살아있다.

그렇게나 살고 싶어했으면서도 정작 살아나니 기쁘기보단 떨떠름했다. 사실은 죽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었다. 훗날, 되돌아보면 아마 앞날이 순탄치 않음을 이때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순수하게 반가운 것은 몸이 온전하다는 것이었다. 무언가에 난타당한 탓에 어디 하나 병신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피를 씻어내면서 살펴보니 사지 멀쩡하고 비록 알몸이긴 하지만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그보다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로 몸을 씻는 게 고욕이었다. 하지만, 뜨거운 물을 달라고 해봤자 통할 리 없는 분위기라 전신에 말라붙은 피를 씻어내려면 별도리가 없었다.

물을 한번 끼얹을 때마다 몸이 덜덜 떨렸지만 나는 기어이 온몸의 피를 다 떨어내고야 말았다. 등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내가 바가지를 놓자 알아들을 순 없지만, 구박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철썩, 소리가 나도록 등에 물을 끼얹었다. 그러더니 성실하게 등을 문질러주었다.


이윽고 등의 피를 다 씻어낸 것인지,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쉰 사내는 뭐라 지껄이더니 어디서 옷을 하나 가져와 내게 던져주었다. 뒤이어 가죽으로 만든 모자도 받았다. 모자와 옷에는 십자가 둘이 비스듬히 겹쳐져 있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이상 궁금증을 꾹 참았다.


나는 먼저 그가 전해주는 옷 중에 유일하게 천으로 만든 팬티 비슷한 속옷을 입고 가죽으로 만든 상·하의를 입었다. 중세 농노가 입었을 듯한 심플한 디자인의 옷으로 단추가 없고 끈으로 고정하게 되어 있었다. 눈치를 봐서 먼저 웃옷을 입었다. 가죽으로 만든 옷이라 약간 걱정했는데 속옷 없이 입어도 그럭저럭 착용감이 괜찮았다. 다소 뻣뻣해서 움직이기 불편했지만 아마, 새것이라 그럴 거다. 계속 입다 보면 좋아지겠지. 앞섶은 단추가 없고 끈으로 고정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끈을 구멍에 넣고 적당히 잡아당긴 후 묶어서 고정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매듭의 모양에 따라 맵시가 차이 나기 마련인데 나는 세련된 매듭 따윈 알지 못했기에 영 웃기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뒤이어 바지를 입었더니 대번에 흘러내렸다. 자세히 보니 고정하도록 허리춤에 끈이 있었다. 허리띠처럼 졸라 고정하는 게 아니라 웃옷과 연결해서 고정하는 것 같았다. 눈치를 봐서 적당한 구멍을 찾았는데 옆구리 근처에 끈을 넣는 구멍이 있었다. 거기에 끈을 넣었더니 지켜보던 사내가 갑자기 폭소했다. 그리곤 뭐라 지껄이더니 내 옷을 도로 벗기고 다시 입혀주었다. 나는 그 모습에 사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사내는 내 웃옷을 벗기고 바지를 벗긴 후 반대방향으로 돌려서 다시 입혔다. 기다란 고정 끈이 등 뒤로 오자 사내는 끈을 내 어깨 너머에서 앞으로 넘긴 후 바지 앞에 나 있는 구멍으로 통과시키고 적당히 조였다. 그 후 능숙한 솜씨로 매듭을 짓자 바지가 몸에 고정되었다. 조금은 불편한 느낌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멜빵 바지와 다를 바 없는 것이라 낯설지는 않았다. 사내는 그 위에다 웃옷을 입히고 내가 맺었던 멍청한 매듭 대신 깔끔한 매듭을 지어주곤 모자를 푹 씌워주었다. 그리고는 내 등을 탁 치더니 무어라 지껄였다.


말은 못 알아들어도 눈치라는 게 있다. 나는 앞서나가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내가 있는 곳이 감옥이라는 것도 알았다. 통로 곳곳에 창살과 죄수가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몰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가 치료받고, 무죄판결을 받아 방면되는 것이었다.

내 예상대로 사내는 낯선 거리에 나를 데려다 주곤 다시 한번 등을 팡! 소리 나게 두들겨주면서 씨익 웃고는 들어왔던 곳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그렇게 알 수 없는 도시에서 자유를 얻었다.


이곳이 성 안이라는걸 깨닫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멀리 도시를 감싸는 성벽이 보였기 때문이다. 모자를 둘러쓴 탓인지 아니면 모자에 그려진 문장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성 안 사람들은 밖의 머저리들보다 제대로 된 사람들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뭇매를 맞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고난이 끝난 건 아니다. 집도 절도 없고 당장 먹을 빵 쪼가리 하나도 없다. 경멸해 마지않았던 거지들과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어떻게든 일자리가 필요했지만 말 하나 모르는 내가 어떻게?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으니 벙어리에 귀머거리나 같다. 게다가 더 암울한 건 이곳의 문자와 언어에 대해 정보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믿을 건 눈치밖에 없다.

나는 무작정 거리를 돌아다니며 일자리가 있을법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마차에 짐을 싣고 있는 무리를 발견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일하기엔 저런 단순 노동이 딱이다. 아니, 단순 노동밖에 할 수 없다.


나는 열심히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을 찾았다. 혹여, 어느 집안의 하인들이 하는 일이면 더 좋다. 하인으로라도 들어가면 말을 배울 때까지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 그때, 일을 하던 사람 중 몇몇이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몰래 그 뒤를 따랐다. 그랬더니 그들은 비쩍 마른 사내에게 가서 은화를 받는 것이었다. 그들은 날품팔이 일꾼이었던 것이다. 나는 잽싸게 은화를 주던 사내를 불렀다.


" 야! 좀 보자! "


마른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다 나를 발견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 그래 너 말이야. " 하고 접근했다. 사내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다 뭘 봤는지 안심한 듯한 눈치였다. 뭐, 좋은 일이다. 원래 목적인 말이 안 통한다는 사실도 확실하게 전달됐을 것이다.


" 나도 일 좀 시켜주라. "


나는 한국어로 지껄이며 나를 가리킨 후 몸짓으로 상자를 나르는 포즈를 취했다. 그리곤 삿대질로 사내를 가리키고 주머니를 꺼내 돈을 내게 주는 모습을 취했다. 새대가리가 아니면 뜻이 전달됐을 것이다. 그러나 반응은 마른 사내가 아닌, 돈을 받은 날품팔이꾼에게서 나왔다. 그들은 대뜸 고성을 지르며 화가난는 듯 지껄이더니 다짜고짜 주먹질을 하는 것이었다. 오랜 일로 다져진 굵은 팔뚝에 실린 힘은 장난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싸움한번 해본적 없는 나는 대번에 명치를 얻어맞고 꼴사납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한방에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먹먹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더 이상의 주먹질은 없었다. 그랬다면, 나는 어딘가 부러지는 것을 면치 못했으리라. 대신 그들은 욕이 분명한 말을 지껄여대며 침을 탁 뱉었다. 온갖 소리 중에서 반복해서 들리는 " 퀴에 테뻬라! " 라는 말이 뇌리에 각인되었다. 장담하건대 이건 아주 대중적인 욕일 것이다. 아마 " 씨발새끼 " 정도 되는 뜻이겠지. 퀴에 테빼라. 좋은 말 배웠다 개자식들아.


" 씨발새끼들, 내가 뭘 어쨌다고 주먹질이야? "


나는 한국어로 욕을 내뱉으며 몸을 추슬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행히 평이한 어조로 지껄인 덕인지 놈들은 그 말에 딱히 반응하진 않았다.


나는 도망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놈들이 왜 갑자기 날 공격한 것일까? 그래. 텃세다. 놈들은 자기들의 일감을 다른 놈이 채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젠장, 얻어맞으면서 일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싸움으로 당해내지도 못하니 날품팔이 일조차 할 수 없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당장 뇌리에 떠오르는 건 비참하게도 두 가지였다. 일을 못한다면 구걸을 할 수밖에 없다. 그도 아니면 어딘가 복지 시설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 세계에 그런 것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할 수 없이 나는 비럭질을 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 세계의 사람도 사람이 아닌가. 거지가 있다는 건 동냥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니 나는 그 자비에 매달려보기로 했다.



" 썅..... "



그리고 그 최후의 순박함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박살 났다. 제법 사람이 돌아다니는 대로에서 지하철 입구에서 비럭질하던 거지를 떠올리며 두 손을 내밀고 절을 하던 나는 어디선가 나타난 거지 패거리에게 죽도록 두들겨맞고 골목길에 버려졌다.

비럭질마저 텃세가 심한 것이다. 마침내 나는 내 비참한 처지를 절절히 깨달았다. 빌어먹기조차 힘든 처지. 도시의 밑바닥 중에서도 최하층의 존재가 바로 나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 작성자
    Lv.44 is***
    작성일
    10.09.02 00:32
    No. 1

    정말 현실적인 이동물이라면 이렇게 될거라고 구상해봣는데
    도저히 주인공 구제길이 안보이더군요.
    어떻게 될지 궁금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 [탈퇴계정]
    작성일
    11.11.25 09:29
    No. 2

    제가 저 상황이라면 바로 신전으로 갔을 겁니다.
    적어도 때리진 않을 거
    아니예요.
    그리고 잘 하면 말도 배울 수 있을겁니다. 비교적 착하잖아요
    성직자들이 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3 잇는것
    작성일
    13.03.01 13:45
    No. 3

    판타지에 나오는 성직자들은 거의 태반이 부패했더군요
    근데 이게 현실적으로 말이안되는게, 우리 사는 세상이야 신의 존재유무
    혹은 그영향력이 눈에 보이지않기때문에 솔직히 성직자들도 그믿음이 신실하지 않는사람들도
    있고 신의 이름을 팔 수 도 있었던건데, 판타지같은 경우는 신의 영향력이 보이는데도
    타락할 수 있다는게 웃기지않나요? 애초에 신이 그런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을 빌려줬을까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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