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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평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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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1.01.16 11:18
최근연재일 :
2011.01.16 11:18
연재수 :
1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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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16,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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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27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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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 (3)

DUMMY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마음을 가라앉힌다.

띠디딕, 띠디딕.

아침마다 부숴버리고 싶던 알람 소리가 어떤 음악보다 감미롭게 들렸다.

" 어처구니없는 꿈이었어. " 돌아온 일상에 감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럴 때가 아니지. 알람이 울렸다는 건 지금이 오전 6시라는 뜻. 부지런히 준비하지 않으면 지각하기 십상이다. 어젯밤 꾸었던 터무니없는 꿈을 머릿속에서 털어버리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쏴아아, 꿈속에서는 그렇게나 귀했던 물이 스위치만 올리면 콸콸 쏟아진다. 문명의 이기 만세! 축복받은 환경을 이룩해낸 선조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두 손 가득히 차가운 물을 받아 남은 잠기운과 함께 어젯밤 꾸었던 꿈의 잔재를 시원하게 씻어내렸다.


" .....라는 전개였으면 좋았을 텐데. "


이슬을 가득 머금은 풀에 면상을 처박은 체 눈을 떴다. 주변이 온통 풀 투성이라는걸 망각하고 몸을 뒤척이다가 봉변을 당한 셈이다.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보다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마치 햇빛이 나만 비추는 것 같이 강렬해서 쉽사리 눈을 뜰 수 없었다. 한참만에 조금쯤 적응이 되어 다시 하늘을 보니 해는 벌써 동편 하늘 높이 떠 있었다. 이미 새벽도 아니다. 틀림없이 아홉 시도 넘었을 것이다. 오래간만의 늦잠이었다. 응? 늦잠? 그럼 아까 그건 뭐야, 꿈이었어? 이게 꿈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만들어낸 꿈은 비참한 현실을 되새겨주었다. 잠깐, 혹시 이것도 꿈?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볼을 잡아당겼다. 아얏! 틀림없는 현실이다. 슬프지만 내 현실은 변함없이 이름 모를 초원에서 조난당한 사람이다. 어제 겪었던 일만으로 괴로운데 하루를 넘기니 아침부터 고통이 밀려왔다. 밤새 이슬에 흠뻑 젖은 교복만 믿고 잠들었던 대가로 전신이 얼어버린 듯 차갑게 굳어 있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켰더니 교복에서 얼음처럼 빠지직, 하는 소리가 났다. 잘도 안 죽었구나.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내리쬐는 햇살의 온기에 몸이 녹는 걸 기다렸다. 아마, 이 햇살 덕분에 무사히 깨어날 수 있었을 거다. 아니면 얼어 죽었겠지.


나는 꼼짝하지 않고 계속 햇빛을 받았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피부에 땀이 맺히고 얼어붙은 교복에서 온기가 느껴질 즈음에야 겨우 몸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움직일 때마다 관절이 욱신거리고 근육은 해동이 덜된 듯 뻣뻣했다. 이번 일로 나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겁 없이 밤에 잠들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소중한 교훈을 말이다.


어느새 해는 중천에 걸렸고 나는 걷기 시작했다. 한낮이 되자 풀잎에 잔뜩 맺혀 있던 이슬들이 증발하고 잎사귀에선 알 수 없는 기체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대기는 어제 그랬듯이 습기들이 점령해버렸다. 몇 걸음 가지않아 숨이 턱턱 막혔다. 마치 찜통 속에 들어온 것처럼 답답했다. 게다가 이슬이 모조리 증발해버리는 바람에 마실 물이 사라져버려 다시 갈증에 시달렸다. 견디다 못해 아무 풀이나 입에 넣고 씹었다. 꼭꼭 씹었더니 또 쓴맛 나는 즙이 나왔다. 당장 뱉어버리고 싶었지만, 그것도 액체라고 꾹 참고 넘기면서 계속 씹다가 즙이 다 빠져서야 뱉었다. 그러자 입안에 침이 잔뜩 고여서 최소한, 입안의 갈증은 어느 정도 달래주었다. 그러나 목구멍은 계속해서 물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쳤기에 다시 한주먹 풀을 뜯어서 입 안에 처넣었다. 이번에는 너무 많이 넣었던 탓에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속에서 헛구역질만 나왔다. 결국, 뱉어버리고 나니 다시 먹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나, 빨리 저녁이 돼서 이슬이 맺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계속 걸으면서도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저 해는 어느 쪽으로 가는걸까? 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건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그럼 난 지금 어디로 가는걸까? 어제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가는게 맞는 걸까? 혹시, 반대편으로 가고 있는건 아닐까? 몸이 풀리고 나선 아무 생각없이 걸었으니까 그럴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니 더는 걸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래, 머리 좀 식히자.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한 걸음 한 걸음 풀을 짓밟고 지나온 덕분에 내가 지나온 길은 비교적 간단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눈여겨보면, 살랑이는 바람이 한번 불 때마다 몸을 뉘였던 풀은 슬그머니 꺾였던 허리를 펴고 언제 밟혔냐는 듯, 꼿꼿히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밟아서 표시하는게 안된다면 뽑아버리면 된다. 나는 앞으로 갈 방향의 풀을 뜯어내서 짧은 길을 만들었다. 이거라면 길을 잃어버리진 않겠지. 걷다가 나도 모르게 방향을 틀어버릴 순 있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면 다음은 하늘에 맡길 뿐. 나는 주변의 풀을 정성껏 밟아서 자리를 만들고 몸을 뉘였다. 어차피 밤에 잠들 수 없다면 해가 떠 있는 동안에 조금씩 잠을 자둘 필요가 있었다. 목이 좀 마르긴 했지만 배고픔도 갈증도 그럭저럭 참을만한 수준인데다 적당히 피로감까지 있으니 눈을 붙이기에는 지금이 최적. 이참에 눈 좀 붙여야지...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해가 몽환적인 노을 빛으로 하늘을 물들여서 장관을 연출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나는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순간. 금새 어둠이 깔리고 기온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낮 동안 대기를 가득 매웠던 기체들이 풀잎 위에 뭉쳐져 이슬이 맺혔다. 거기에, 어제는 없었던 반가운 손님이 하나 더 있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백색의 달이 해가 사라진 밤하늘로 도도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그 빛이 얼마나 밝은지! 미처 알지 못했던 달빛의 아름다움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해가 떴을 때 만큼은 아니지만 주변이 훤히 비쳐 보였다. 나는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달이 떠 있는 이상, 어둠은 방해물이 될 수 없었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힘차게 빨아먹으며 목구멍의 갈증을 달래고 이름 모를 풀을 철근처럼 씹어먹으며 뱃속의 허기를 달랬다. 그러다 찬바람이 불어오고 몸이 오들오들 떨리면, 몸이 뜨거워지도록 뛰고, 또 뛰다가 이윽고 숨이 턱에까지 차오르면 천천히 속도를 줄여 걷고, 또 걷는 것이다. 추위도, 배고픔도, 갈증도 내 앞길을 막지 못했다. 두번째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세번째 날이 밝아왔을 때, 밤새 뛰고 걷기를 반복했던 내 육체는 마침내 한계에 달했다. 나는 온몸에서 김이 나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힘겹게 풀을 뽑아 앞길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대충 풀잎을 눌러 잠자리를 마련하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눈을 감자마자 피로한 육체 위로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을 느끼며 금새 잠이 들었다. 그 날은 꿈조차도 꾸지 않고 정말 푹 잘 수 있었다.


해가 중천에서 서쪽으로 서서히 움직일 무렵에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푹 자서인지 몸에 활력이 느껴졌다. 깨끗한 정신으로 기지개를 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면 아무 풀이나 뜯어먹으며 걷다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하늘이 노을 빛으로 물들어갔다. 그 장관을 보기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사흘만에 처음으로 뱃속에서 신호가 왔다. 그 동안, 솔직히 잊고 있었던 탓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곧 바지를 벗어던지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일을 보았다.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은 변이 엄청난 고통과 함께 천천히 밀려나왔다. 힘을 주는데 나도 모르게 땀이 주르륵 흐르고 눈물이 삐져나올만큼 고통스러웠다. 세상에, 고작 큰 거보는 것 뿐인데 무슨 애낳는줄 알았다. 거의 30분은 끙끙댄 끝에, 세상에 모습을 들어낸 변은 바싹 말라비틀어진 새까만 돌덩어리 같았다. 일을 보고나서 왼손으로 풀잎을 뜯어 닦아냈는데 워낙 말라있어서 엉덩이에 묻은 것도 없었다. 다만, 힘을 주다가 어디가 살짝 찢어졌는지 핏물이 약간 묻어나왔다. 고작 두어방울이었을 뿐인데 그걸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그 동안 쌓여있던 서러움이 둑이 터지듯 한순간 터져나왔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런 더러운 꼴을 봐야하나. 서럽고 서러워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눈물로 흐려진 눈동자에 부모님 얼굴, 친구들 얼굴이 차례로 스쳐지나간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것이 불현듯 그리워져서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깔릴 무렵, 나는 팬티만 입은 꼴사나운 모습으로 아무도 없는 초원에서 밤새도록 서럽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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