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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 향기 가득한 숲 속

신비한 숲속


[신비한 숲속] 첫 번째 스케치 북 : 눈이 오는 풍경

첫 번째 스케치 북 : 눈이 오는 풍경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눈 오는 날을 싫어하게 된 건.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는 눈을 감고 어릴 적부터 천천히 내 기억을 훑어본다.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유치원 때 그리고 학창시절과 대학교 시절과 아, 이제 생각이 난다. 고등학교 때 부터였나 보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시골에서 살고 있다. 간밤에 눈이 내린 날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고 마당으로 달려 나가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은 어린 나의 마음을 마구 두들겼다. 게다가 추수가 끝난 논과 밭은 말 그대로 미답(未踏)의 상태로 남아있어 순수 그 자체로 보였다. 그렇게 모든 흉한 것들을 덮어 주는 눈이었다.

 

또 눈은 어린 나와 친구들에게 최고의 장난감이 되어 주었다.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산의 비탈진 곳에 비료부대를 깔고 썰매도 탔으며 빈 상자를 가지고 눈의 성(城)을 쌓기도 하였다. 그러다 꽁꽁 얼은 손을 호호 불며 집으로 달려가 아랫목에 손을 녹이고 다시 나와 놀기를 여러 번. 그렇게 해가 저물면 눈은 또 다른 광경을 선물했다.

 

달에 비친 눈. 그것은 크리스마스카드의 그림보다 더 그림 같았으며 환상적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창문으로 숲의 눈 쌓인 나무들과 들판은 달빛에 진주처럼 반짝였다. 아마 동화 눈의 여왕에 나오는 여왕님이 이런 풍경에 반해서 그 추운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눈이 오는 날 밖에 나가 눈 맞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부모님은 감기에 걸린다고 성화셨지만 조용히 내리는 눈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좋았고 마치 나는 순수한 요정들에 둘러싸인 듯 한 기분이었다. 물론 정말 감기에 걸려서 고생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때 부터 철이 든 것인지 아니면 동심을 잃어버린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눈이 오는 날이 싫어졌다. 집이 시골인지라 눈이 많이 오면 버스가 들어오는 곳 까지 한참을 걸어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야했다. 출석 점수가 중요한 시기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눈이 녹은 후의 질척한 길은 검은 스타킹과 교복의 치맛자락을 흙탕물로 물들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친구들과 더 놀지 못하고 일찍 귀가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가 대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눈은 더욱 싫어졌다. 대학교가 북향(北向)인지라 눈이 오면 학교 앞은 언제나 눈이 쌓여 있었다. 한창 멋 내고 다니던 여대생에게 눈이란 신발에 달라붙어 가뜩이나 미끄러운 로비에서 자칫 잘못하면 뒤로 자빠져 창피함을 주거나 발목이 삐끗하게 만드는 것 밖에 되지 않았으며 방학동안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는 내가 출퇴근을 위해 학교까지 가는 비탈길을 더 힘들게 만드는 일종의 장애물이었다.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눈은 싫었다. 눈이 온 날 아침이면 민원인들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전 직원이 나가 눈을 치워야 했으며 눈이 오고 있으면 미끄러운 현관에서 노인 분들이 넘어져 다치실까 염려되어 얼른 눈이 쌓이기 전에 틈틈이 치워야 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싫어졌다. 연인들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성탄절 행사를 위해 교회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뛸라치면 눈은 방해가 되었고 행사가 끝난 후 아이들이 돌아가는 길에 혹시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게 되었다. 그리고 성탄절 새벽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새벽송을 돌 때 눈이 오면 시골길이라 대체 길이 어딘지 보이지 않아 적잖아 애를 먹게 되는데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번 성탄절에는 눈이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 날 보며 어이없어 웃곤 한다.

 

그리고 눈이 많이 오면 비닐하우스가 무너져 적잖은 금전적 손해를 보게 된다. 눈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 튼튼한 쇠파이프가 휘어지는데 문제는 쇠파이프의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복구하는데 많은 시간과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이렇게까지 눈을 싫어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얼까? 그건 아마도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적에는 그저 아빠와 엄마의 보살핌 아래에서 아무 걱정 없이 뛰놀며 현실의 무게를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눈 오는 것 그리고 눈이 쌓인 풍경 그 자체만 보고 행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성장해 버린 나에게 현실은 현실이었고 눈은 현실이란 시각 아래 아름답지만은 않은 진실을 보게 했다. 즉 눈을 눈 자체로 보지 못하고 눈에 관련된 많은 사실들이 내가 쌓은 경험만큼의 무게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눈이 온다. 그리고 밖에는 거의 15cm의 눈이 쌓여있다. 오늘도 집 앞의 눈을 치우느라고 고생했고 다시 쌓이는 눈이 얄밉다. 어떤 시인은 눈을 가리켜 순백의 영혼이라 하였고 또는 모든 것을 지우는 존재라고도 하였고 동요에서는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뿌려준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그저 트러블메이커로 보일 뿐이다.

 

내 생각에 눈은 그저 풍경으로 볼 때만 아름다운 것 같다. 나의 순수했던 마음이 언제 이렇게 회색빛으로 물들어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은 그렇다. 다시 나에게 저 눈 내리는 풍경을 보며 어릴 적 그때 느꼈던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날이 올까?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눈을 맞다 감기에 걸려도 기뻐할 것이며 눈사람을 만들고 눈의 성을 만들다 동상에 걸려도 아무 불평 없이 행복해 할 것 같다.

 

2012년 12월 6일. 눈 오는 풍경을 보며 글을 쓰다.

 

 


댓글 4

  • 001. Personacon 윈드윙

    13.03.18 01:25

    솔직하면서도 공감가는 내용이네요..

  • 002. Lv.21 향란(香蘭)

    13.03.18 10:50

    원래 '얼음장미의 인생 스케치'라는 곳에 있던 이야기랍니다. 최근에 그 글을 지우면서 그곳에 있던 글을 옮긴 것이지요.
    윈드윙님은 눈을 좋아 하시나요? 싫어 하시나요?

  • 003. Personacon 윈드윙

    13.03.19 06:09

    군대있을때의 기억, 그리고 운전할때의 불편함으로인해 썩 좋아하지는 않아요.
    근데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거나 사랑을 하고있거나(징조가 보일때) 그럴때는 눈이 예쁠때도 있어요. *^^*

  • 004. Lv.21 향란(香蘭)

    13.03.22 22:18

    그렇군요^^ 역시 어른이 되면 보통을 싫어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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