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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인간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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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인간
작품등록일 :
2019.12.12 15:15
최근연재일 :
2020.01.16 23:59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4,305
추천수 :
95
글자수 :
127,994

작성
19.12.20 23:21
조회
190
추천
4
글자
11쪽

그건 좀 힘들 것 같네요

DUMMY

과거의 시대는 신에 의해 확정된 세계.

재앙이 닥치는 것도, 모험을 떠나는 것도, 사랑에 빠지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신의 뜻에 의한 것이다.

때문에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세계에 의문을 품을 이유 따윈 없고, 궁극적으로는 안정과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신앙심이 사라진 현대는 다르다.

인간은 신이 빠진 세계의 모든 것을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불안하고, 두려워진다.

소설의 발전은 이 흐름과 같다.

모든 것이 완벽한 ‘신화’에서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서사시’를 거쳐, 인간의 세계를 탐구하는 ‘소설’로···.


이곳은 마신과 인간이 싸우고 초자연적인 현상이 자연스러운 섭리로 받아들여지는, 아직 부서지지 않은 세계.

호수의 여인에게 네임드 아이템을 건네받고,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가, 용과 싸워 공주를 되찾는 그런 곳이었다.

에이바가 현민의 글을 단번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민이 쓴 것은 이 세계의 소설이 아니었으니까.


주인공을 냅다 죽이고 시작하는 초유의 전개.

불변이라 여겨지는 시간을 되감는 회귀.

사건의 순서를 꼬아놓는 역순구성.

자유로운 시점의 변환!


모든 것이 혁명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파격을, 가볍고 통통 튀는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쉬운 문체와 묘사로···.

지금까지 이런 소설은 없었다.

이것은 신화인가? 서사시인가?


“예, 출판 길드 폼파니입니다. 미팅? 이쪽으로 오시죠.”


며칠이 지나서도, 집에서도, 길드에서도, 그 소설은 에이바의 머리에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처음엔 애들 장난 같은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곱씹어 볼수록 이 소설에 담겨있는 개념들은 에이바의 인식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다.


“아, 선약을 잡고 오신 게 아니라고요? 그럼 어떤 이유로···?”


그것을 조금씩 이해할 때마다 에이바는 소름이 다 끼쳤다.


“예? 에이바 씨를요?”

‘이것을 쓴 사람은 정말 엄청난 천재거나, 악마겠지···.’


멍하니 책상에 앉아 있던 에이바.

어깨를 누가 툭툭 건드렸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후배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선배님? 그···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손님이요?”


흐트러진 안경 때문에 문 앞에 있는 흐릿한 인물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보지 못했다.


“오랜만이네요.”


안경을 고쳐 쓰고 다시 보자 그곳에는, 에이바를 고민에 빠뜨린 남자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자, 작가님?”


말끔하게 차려입은 론이었다.


***


이세계에 처음 내놓은 소설이다.

게다가 나 혼자 쓰고 말았던 소설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글.

그 누군가란 책을 읽게 될 불특정 다수의 독자겠지만 막상 그것을 쓸 때 가장 많이 떠올린 사람은 에이바였다.

그녀와의 만남 덕분에 쓰기 시작한 글이었으니까.

글을 완성하고 그녀에게 보낸 이후로 현민은 계속 근질거리는 상태였다.


궁금했다.

그리고 듣고 싶었다.

책을 좋아한다고 인생의 방향마저 바꾼 그녀가 어떻게 그것을 봤을지.

그래서,

현민은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하지만 다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가기엔 위험부담이 크다.

에이바 한 명이면 몰라도, 그녀가 일하고 있는 길드는 저번 도시와는 비교되지 않게 큰 왕국 수도에 있다.

어떤 변수가 도사리고 있을지 몰랐다.

궁리를 한 끝에 최소한의 마력만 남겨 두고, 자신의 마력을 대부분 소진하기로 했다.

마력의 회복력 역시 남달랐어도 텅텅 비운다면 그것이 도로 차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며칠에 걸쳐 6써클 마법을 남발했다.

중간에 야칸에게 그 모습을 들키기는 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마왕의 일을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으니, 눈에 띄지 않더라도 큰 걱정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며칠간 준비과정을 거친 후, 현민은 마왕의 펜던트를 목에 걸고 야밤에 마왕성을 몰래 빠져나왔다.


수도는 서쪽 도시보다도 더 멀었다.

현민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마침내 수도에 도착했다.

길드로 찾아가기 전에 인근 장터에서 과일 같은 것들을 좀 샀다.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방문일 텐데, 이 정도는 준비해야하지 않겠나.

그리고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구석진 곳에 숨겨진 폼파니 출판 길드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 세계에서도 우연히 파주 출판 단지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곳의 번듯한 출판사 건물과는 비교할 수 없어도, 제법 이세계에 맞는 그럴싸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 거라고 현민은 혼자 상상했었다.

하지만 그 건물의 외관을 본 순간 현민은 눈을 한 번 비벼야 했다.


‘어째··· 상상했던 거랑은 좀 다른데?’


낡고 오래된 건물에, “폼파니 출판 길드”라는 간판이 비스듬히 걸려 있다.

벽은 군데군데 떨어지고 복도에서는 눅눅한 곰팡내가 난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에이바의 모습은 열정적이었고 근사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녀가 일하는 곳도 그럴 것이라 착각했던 모양이다.


‘뭐···. 외관이 다가 아니니까.’


현민은 건물의 입구로 들어갔다.

그리고 로비에 앉아 있던 노인을 따라 3층 사무실에 당도할 수 있었다.

10명 남짓한 직원이 움직이고 있는 사무실은 다행히 그가 알던 사무실의 풍경과 아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예, 출판 길드 폼파니입니다. 미팅? 이쪽으로 오시죠.”


아직 얼굴에 앳된 모습이 남아 있는 청년이 다가와 살갑게 말을 붙였다.


“아, 선약을 잡고 오신 게 아니라고요? 그럼 어떤 이유로···?”

“사람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현민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에이바의 명함을 건넸다.

청년의 눈썹이 올라왔다.

그 사이에도 현민은 에이바가 어디에 있는지 계속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청년은 잰걸음으로 구석 자리를 향해 가더니, 뒷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녀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안경을 고쳐 쓰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그녀.


“자, 작가님?”


현민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


폼파니 길드의 마스터, 제퍼스가 과일 바구니를 대신 받아들었다.


“뭐, 이런 걸 다 사 오셨습니까. 하하, 편하게 말씀 나누시다 들어오세요.”


그는 작가라는 말에 반응하여 현민과 에이바가 밖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렇지만 은근하게 둘의 모습을 곁눈질하는 것이 어딘가 수상했다.

둘은 길드 인근의 찻집에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여길 오실 생각을 했어요!?”

“본인 입으로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저도 바쁘신 시간에 방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명함에 집 주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퇴근하실지, 안에는 계시는지 어떤지도 몰라 들어와 본 거예요.”


현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구나···. 진짜로 책을 보내주실 줄 몰랐어요. 그리고 이렇게 찾아오실 거라곤 더욱더···.”

“그거, 빈말이었습니까?”

“아뇨, 아뇨. 그냥 그때는 제가 너무 밀어붙였던 것 같은 느낌이어서 분명 부담스러우셨을 거라고, 나중에 후회했거든요.”


에이바는 수줍게 웃었다.


“그래도 정말 감사해요.”


현민도 그 덕분에 한시름 놓았다.

그녀가 자신의 방문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가볍게 서로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한참 이야기를 꽃피우는 두 사람.

그 이후에 현민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좀 전부터 좀이 쑤셨다.


“···그래서, 어떠셨나요? 제가 보내드린 글은.”

“···아!”


현민이 이곳에 찾아온 가장 큰 이유였다.

이세계로 넘어와 한동안 잊고 살아야 했던,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고 인정해주는 그 특별한 기분.

이제부터 에이바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사막을 건너다 발견한 오아시스처럼, 현민에겐 달콤한 것이다.

에이바는 얼굴을 진지하게 굳힌 채 찻잔에서 쉽게 입을 떼지 않는다.

깊이 고민하는 듯.


“···이상한 글이에요.”

“이상한 글?”

“처음에는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어요. 소재도 기이하고, 설정은 말도 안 되는 데다, 전개는 뒤죽박죽, 묘사는 어린 애 일기 수준인데···. 그런데···.”

“그런데?”


현민은 다음 이어질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에이바가 뜸을 들이다 마치 긴 결투 끝에 패배에 승복하는 기사 같이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재밌고, 페이지 넘기는 걸 멈출 수가 없더군요.”

“후후후···.”

“그리고 왠지는 몰라도 읽을 때마다 뭔가, 뭔가 깨어나는 기분이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된 중세인이라면 그 사실을 이해할수록 오싹해지지 않을까.

혹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화를 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형태의 글이 이세계 사람들에겐 너무 이른 것이 아닐까, 현민은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이바의 독해 능력은 감탄할 만한 것이다.

물론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 단기간에 어렴풋이 그 개념들을 이해한다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대체 이런 글을 어떻게 쓰신 거죠?”

‘전 다른 세계에서 온 소설가니까요.’


라고 말하는 것 대신 자신의 상상력이 좀 뛰어나다는 말로 현민은 둘러댔다.


“그런 정도의 수준이 아닌데···.”

“그래서 말입니다.”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 듯 끙끙거리는 에이바를 두고 현민은 선수를 쳤다.


“이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먹힐까요?”

“그럴 것이다, 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너무 엉망진창으로 실험적이니까요. 이런 글은···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고 봐요. 그리고 조금 불경한 구석도 있고.”

“불경?”

“마왕이 주인공이잖아요?”

“······.”


그런 것까진 생각 못 했다.

자신의 주변에서 소재를 얻다 보니 그리되었던 것인데.


“하지만···.”


에이바가 그 푸른 눈으로 현민을 뚫어질 듯 쳐다봤다.


“분명 엄청난 화제가 될 거예요. 그건 확실해요.”


그러자 현민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천천히 찻잔을 기울였다.


“책으로 내보고 싶습니다.”


현민이 대뜸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것도 인연인데 에이바 님께 그 일을 부탁드리고 싶군요.”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자신의 글을 가장 먼저 보고 인정해준, 출판 길드의 사람이 여기 있었으니까.

그러나 감격하며 승낙할 테지, 했던 현민의 예상과는 달리 에이바의 표정은 도리어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건 좀 힘들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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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시험 +3 19.12.27 140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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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거짓과 진심 +3 19.12.25 140 4 12쪽
11 그런 취급 받아도 될 사람 아니니까 +1 19.12.24 151 5 12쪽
10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1 19.12.23 162 4 11쪽
» 그건 좀 힘들 것 같네요 +2 19.12.20 191 4 11쪽
8 이 세상 소설이 아니다 +2 19.12.19 191 3 11쪽
7 뜻밖의 선물 19.12.18 196 4 12쪽
6 천직이 작가인지라 +5 19.12.17 223 4 13쪽
5 그녀의 천직은 +2 19.12.16 230 4 12쪽
4 일탈 19.12.13 241 4 12쪽
3 마왕님의 우울한 여름 19.12.12 236 6 12쪽
2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19.12.12 301 4 11쪽
1 이세계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1 19.12.12 530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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