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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인간
작품등록일 :
2019.12.12 15:15
최근연재일 :
2020.01.16 23:59
연재수 :
2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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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8
추천수 :
95
글자수 :
127,994

작성
19.12.1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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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뜻밖의 선물

DUMMY

-댕, 댕, 댕, 댕···.


멀리 떨어진 왕성의 종탑에서 그 거대한 종을 울려 아침의 시작을 알렸다.

희붐한 빛이 시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침대 위에 웅크려 자고 있던 에이바는 햇빛이 눈가에 닿자 눈썹을 움찔거렸다.

창가에서 불어오는 조금 시린 바람.

눈을 뜬 에이바는 내일부턴 창문을 닫고 자야겠다고 생각한다.

완연한 가을이었다.

에이바는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채비를 마친 후에 집을 서둘러 나섰다.

아침 식사는 굶은 채다.

공복은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도시의 메인 스트리트를 지나 골목에서 꺾어 들어가니 3층짜리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벽은 갈라지고 회칠이 벗겨진 것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낙후된 건물엔 ‘출판 길드 폼파니’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요란하게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 입구 앞에 선 에이바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무실로 보이는 공간에는 아직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지 고요하다.

하지만 밝게 인사하며 하루를 시작하자는 것이 에이바의 다짐이다.

그녀는 우선 바닥에 너저분하게 흩뿌려진 서류 따위를 모아 정리하고 탕비실에서 차를 타서 각각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사무실의 가장 구석지고 좁은 자리에 놓여있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


과연 차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차를 놓아둔 순서대로 길드원들이 하나둘 사무실에 등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네.”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요.”

“좋은 아침···!”

“그러니까 거기서 그냥 보내면 안 되고 쪼아대서라도 확답을 받았어야지. 사람이 왜 이렇게 순진해? 그쪽 사정 다 봐주면 우리는?”

“죄송합니다. 오전에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사무실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서 솟아난 것도 아닐 차를 하나 같이, 고맙다는 말도 없이 쉽게 들이킨다.

그나마 상사에게 한 소리 들으며 들어온 후배 길드원이 자신의 자리에 놓인 차를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했던가.

아침에 주변 정리를 하고, 차를 타 놓는 것은 에이바의 기본 업무가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에이바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군말이 없었다.

오히려 기꺼이 그것을 자처했다.

마음 한편에 부채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하하하!”

“마스터, 좋은 아침입니다!”

“어서 오세요, 마스터!”

“좋은 아침이에요! 호호.”


마지막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은 길드 마스터인 제퍼스였다.

2미터에 달하는 큰 키에 거대한 체구를 가진, 후덕한 인상의 남자.

그가 한 번 걸음을 뗄 때마다 천장 위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호탕한 인사.

길드원들은 덩달아 정답게 소리친다.


“즐거운 한 주의 시작입니다!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회의합시다. 주간 회의.”


시간이 이렇게 됐다며 호들갑을 떨기엔, 그는 늘 출근 시간을 한참 넘겨 들어왔다.

주간 회의라는 말에 길드원들은 삼삼오오 하던 일을 멈추고 중앙의 테이블로 모여든다.

에이바는 미리 타두었으면 차갑게 식었을 제퍼스의 차를 지금 타서 내놓았다.

그리고 그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넘기는 동안 작은 수첩과 펜을 가져와 길드원 사이를 비집어 섰다.


“각자 진행 상황 보고해봅시다.”

“왕국에서 온 외주는 목요일에 교정, 교열까지 마쳤고요. 금요일 오전에 업자한테 넘겨서 인쇄 중입니다.”

“그 산천어 축제 전단지 건은 어떻게 됐어?”

“그거 제가 담당자를 만나봤는데, 2만 부면 충분할 것 같다는데요.”

“무슨 2만 부야. 그거면 수도에도 다 못 뿌리겠구먼. 축제 망하게 할 셈이야? 3만 아니, 5만 부까진 찍어야 한다고 다시 얘기해 봐. 가격은 적당히 후려치고.”

“교수님이 의뢰했던 원고 보내주셨어요. 제목은 『마족학개론』. 부제는 『죽입시다, 마족은 나의 원수』.”

“어째 좀···. 뭔가 좀 더 파악 느낌 오는 거 없어?”


몇 차례 뻔한 실랑이와 토론이 오갔고 회의는 특별한 사건 없이 순탄하게 흘러갔다.


“자, 그럼 대강 정해진 것 같고. 겉으로는 잘 나가는 거 같지만. 알잖아? 우리 길드 요새 자금난이야. 이런 때일수록 더 분발해야 한다고. 이번 주도 힘내서 가봅시다. 따로 보고할 거 없으면 주간 회의는 마치는 것으로···.”


그 말을 끝으로 모두가 흩어졌다.

에이바만이 홀로 서서 마스터 제퍼스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제퍼스가 흘긋 에이바를 올려 봤다.


“에이바 씨? 안 가고 뭐 해?”

“마스터, 저는요? 전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그냥 하던 거 계속하면 되잖아.”

“그··· 당장 하는 게 없는걸요···?”


에이바의 목소리엔 어쩐지 초라함이 묻어났다.

그랬다.

에이바가 차를 타고 정리를 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어서다.

이곳에서 일하게 된 지도 반년이 넘었지만, 길드가 그녀에게 주는 것은 주로 잡무뿐이었다.


“아아, 그러면 저기···. 음···. 1층에 인쇄 맡긴 거 들어와 있던데 그것 좀 창고에 넣어놔 주라. 손님들도 왔다 갔다 하시는데 거기에 그렇게 있으니 좀 없어 보이잖아.”

“네, 금방 치울게요. 또 시키실 일은···?”

“일단은 그거 먼저 하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나 지금 좀 바쁘거든?”


그러면서 제퍼스는 가라는 손짓을 한다.

결국 에이바는 입술을 숨긴 채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


1층에 쌓여있는 인쇄물들은 제법 쌓여있었고 한두 사람이 옮기기엔 많은 양이었다.

하지만 에이바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을 번쩍 들어 삽시간에 창고로 옮겨두자 1층에서 경비 겸 안내 업무를 보고 있던 노인은 연신 에이바의 놀라운 힘을 칭찬했다.


“어휴, 에이바 씨 덕분에 살았네. 이것들 때문에 왔다 갔다 하기가 여간 불편했던 게 아니야.”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참으로 대단혀. 에이바 씨가 들어오고 나서 이 늙은이가 안간힘쓸 일이 줄었어. 사내 열 명보다도 낫구먼. 항상 고마우이.”


그 말에 에이바는 건조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이바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나도 남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그것이 그녀가 이 길드에 들어오게 된 이유.

하지만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일을 주지 않는 것은 자신이 미숙함 때문이라고, 에이바는 생각하고 있었다.

작은 일을 몇 번 마친 뒤로는 눈에 띄게 처우가 달라졌으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삶은, 지금까지 에이바가 살아온 삶과는 너무나 다르다.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는 데에는 그걸 위한 시간과 각오가 모두 필요하다.

긴 시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웃으면서 버티자고 각오했는데···.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복도 끝에서 두런두런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렴풋이 보이는 실루엣은 아침에 핀잔을 듣던 후배와 그를 나무라던 상사였다.

그냥 묵례만 하고 지나칠 생각이었는데,


“저어, 마스터는 왜 에이바 선배한테는 일을 주시지 않는 건가요?”


갑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가 되자 에이바는 걸음을 멈췄다.

물음을 던진 것은 후배였다.

그는 지난달에 길드에 들어와 아직 에이바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아아, 그 친구···.”


상사는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입을 열었다.


“워낙 열정적이어서 몇 번 일을 맡기긴 했다는데···. 원래 체육계? 뭐 그 출신이라며. 다른 건 몰라도 출판 쪽은 생초짜더라고. 그렇다고 일일이 가르쳐서 쓰기엔 우리라고 시간이나 인력이 남아도나~ 그럴 바엔 자르고 경력자들 쓰는 게 낫지.”

“네? 그럼 어째서 길드에 계속···?”

“사실, 처음부터 출판 일을 시키기 위해 뽑은 게 아니거든. 이쪽 일이 기본적으로 머리 쓰는 일이긴 해도 힘쓰는 일도 적지 않아. 힘도 잘 쓰고, 꼼꼼하고, 차 맛도 괜찮고···.”


말을 멈추고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상사.


“얼굴도 반반한 편이잖아? 사무보조로 두면 괜찮겠다 싶었겠지. 흐흐흐. 어차피 원래 하던 쪽에서도 잘 안 돼서 여기 온 거 아냐. 달리 갈 곳도 없어. 다른 데는 뭐 초짜 써주는 줄 알아?”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다, 후배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은 힘없는 신입 길드원일 뿐이다.

상사들이 정한 일에 이러쿵저러쿵 논할 수는 없었다.


“근데 그건 왜 물어봐? 걔한테 관심 있어? 새파란 게 벌써···.”

“그게 아니라 저는 그냥 걱정돼서.”

“누가 누굴 걱정해, 인마. 네 코가 석 자라고. 넌 일 좀 시키려고 뽑은 거니까 못하면 바로 이거다, 이거.”


상사는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때 복도의 문을 열고 사무실의 다른 길드원이 상사를 찾았다.


“갈먼 씨, 마스터가 부르세요.”

“아아, 갈게.”


상사는 후배의 어깨를 두들겼다.


“나 단 게 좀 당기는데 주전부리 좀 사다 줘. 돈은 이따 줄 테니까.”


그러고는 사무실로 슬금슬금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후배는 바닥이 꺼질 듯이 한숨을 푹 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 선배님?”


계단에 멀뚱히 에이바가 서 있었다.

후배의 표정이 창백해진다.


“아, 저 그게··· 사무실 들어가는 길이세요?”


그런 당연한 소리로 어떻게든 무마해보려는 후배.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네. 어서 가봐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에이바가 답했다.

그러자 후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우물거리다가 거의 쥐어짜듯이 말했다.


“저··· 선배님. 방금 이야기, 들으셨어요?”

“무슨 이야기요?”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에이바의 반응에 후배는 조금은 안심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

그리고 곧 에이바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사람들의 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전 선배님한테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후배는 고개를 숙인 뒤 에이바의 옆을 지나쳐 내려갔다.

에이바는 한참을 그 자리에 더 서 있다가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로 돌아간 에이바는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에이바의 뒤로는 전쟁이 한창이다.

길드원들의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 다급한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에이바는 눈을 감았다.

그 목소리들 가운데 에이바를 찾는 것은 없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걸까?’


열정만으론 부족했던 걸까.

되돌리기엔 전부 늦어버린 걸까.

그런 슬프고 어두운 생각들이 그녀의 마음속을 헤집을 때,


“에이바 씨. 에이바 씨!”


느닷없이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바는 퍼뜩 눈을 떴다.


“네?”

“소포 왔어요. 에이바 씨 이름으로.”

“소포요?”


정말, 1층 로비의 노인은 고급스럽게 포장된 무언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소포라니, 나에게 올 소포 같은 건 없을 텐데···?’


의아한 표정으로 에이바는 소포의 포장을 뜯어봤다.

그 안에는 글자가 빼곡하게 쓰인 종이 뭉텅이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뭘까?’


앞장을 대강 눈으로 훑어보니 소설인 듯해 보였다.

맨 위에는 한껏 멋을 낸 듯한 필치로,

“나의 열정에 불을 지펴준, 에이바 님께.”

라고 적혀있었다.


그 순간, 에이바는 불현듯 3개월 전에 있었던 그 우연한 만남을 기억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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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왕을 향한 도전 +2 19.12.30 160 3 11쪽
14 시험 +3 19.12.27 140 6 12쪽
13 그가 집을 비운 사이에 +2 19.12.26 152 4 11쪽
12 거짓과 진심 +3 19.12.25 140 4 12쪽
11 그런 취급 받아도 될 사람 아니니까 +1 19.12.24 151 5 12쪽
10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1 19.12.23 162 4 11쪽
9 그건 좀 힘들 것 같네요 +2 19.12.20 191 4 11쪽
8 이 세상 소설이 아니다 +2 19.12.19 191 3 11쪽
» 뜻밖의 선물 19.12.18 197 4 12쪽
6 천직이 작가인지라 +5 19.12.17 223 4 13쪽
5 그녀의 천직은 +2 19.12.16 230 4 12쪽
4 일탈 19.12.13 241 4 12쪽
3 마왕님의 우울한 여름 19.12.12 236 6 12쪽
2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19.12.12 301 4 11쪽
1 이세계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1 19.12.12 530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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