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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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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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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3,963

작성
20.08.0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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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그 손을 잡으면

DUMMY

칠흑의 마왕.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소년의 모습을 한 그것은 레스트가 상상했던 냉혹한 마왕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그만한 숫자의 피해를 내고, 레스트와 선대 황제들의 모든 것이었던 제국을 그렇게나 쉽게 손에 넣은 교활한 자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자리에서 본 게 아니라면 단지 분위기가 묘할 뿐인 소년으로 생각했겠지. 깔끔하게 검은 옷을 차려입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귀한 가문의 도련님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긴 마왕의 알현실이다. 그리고 저건 단지 마왕을 흉내 낼 뿐인 소년이 아니다.


그 얼굴에 걸린 차가운 미소와 당연한 것처럼 그의 뜻을 받드는 마의 생물들은 저것이 보이는 것처럼 순수한 소년이 아님을 소리치고 있었다.


옥좌가 있는 계단의 최상층과 레스트가 딛고 선 바닥의 높이차는 마치 힘의 차이, 격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발부터 머리까지 걸친 모든 것이 심연보다 어두운 흑색이다. 그의 눈동자마저 보는 이를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것 같았다.


이런 눈을 가진 소년을, 레스트는 평생 본 적이 없었다.


제국의 황제로서 많은 자를 봐왔지만, 이 소년은 성격도, 이상도 가늠할 수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기분이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전부 백지다.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나라 하나 정도는 손쉽게 무너뜨리는 전설의 괴물들이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따른다는 것은ㅡ 저 해가 없어 보이는 소년도 괴물 중의 괴물이라는 소리.


긍지 높은 마족들은 아무에게나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마왕이라는 사실만으로 고개를 조아리지 않는다.


확실하게 자신보다 강자라고 인정한 자에게만 복종하는, 그런 원시적인 마음가짐은 마족 대부분이 공유했다. 그건 강한 마족일수록 더더욱 그럴 터다.


그 무시무시한 마족들이 같은 군복을 입고, 다른 계급장을 달고 저마다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군인으로서.


저 소년은 이곳의 끔찍한 마족들이 전부 주인으로 인정할 정도의 힘을 가졌다는 소리가 된다.


제아무리 전투에는 연이 없는 레스트라도 그 정도는 유추할 수 있다. 단지 조금 교활할 뿐인 소년을, 이런 괴물들이 주군으로 인정할 리가 없다.


생각해보면 그에 대한 복선은 수차례 있었다.


한때 왕국의 모험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자이언트 드래곤을 홀로 죽인 것도 그다.


레스트가 황성에서 사로잡혀 이곳에 인도되기까지, 혹시나 숨기고 있을 무기를 대비한 몸수색도 전혀 없었다.


이 마왕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레스트 같은 한낱 인간은 경계할 만큼의 적수도 아니라고. 지상의 어느 것도 감히 자신의 앞을 가로막지는 못한다고.


식은땀이 흘렀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단순히 강하다는 영역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마족 나부랭이를 이끌고 돌진하는 전통적인 마왕이 아니다.


힘과 지략을 둘 다 갖춘, 명실상부한 인류의 적인 것이다.


오만가지 생각이 오가는 와중, 마왕 류셀은 차분하게 말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황족의 생존을 보장해줄 수도 있지. 그야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지만, 그대에게 같은 피를 나눈 혈족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테니 말이야. 내 심복들이 내게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그대도 비슷한 심정이겠지.”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옥좌에 앉은 소년이 던진 시선에, 그의 뒤에 선 늑대 아인이 송구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마왕의 말은 너무나도 가볍게 전달되어, 식사의 메뉴를 정하는 것 정도의 무게감밖에 느껴지지 않았지만, 레스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수십만의 인간을 마법 한 방에 죽였다는 마왕이다.


이 소년이 말하는 게 텅 빈 협박이 아니라고 하기엔 그가 쌓아온 시체들의 벽이 너무나도 높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입이 결정짓는 건 제국이라는 나라의 목숨이다.


“정확히... 내가 뭘 하라는 건가?”


소년ㅡ마왕 류셀은 기다렸다는듯 입꼬리를 당겼다.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건 싫지 않다. 이스는 당신이 사리 분별은 할 줄 안다고 얘기했지. 들은 대로야.”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와 레스트는 한때 황가의 귀여움을 받았던 소녀의 안부를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이스는ㅡ이스 바실루스는 제국을 배신했다. 마왕에 대한 것을 미리 알리지 않은 시점에서, 적어도 더는 제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움직이지 않는 건 분명했기에. 물어보았자 의미가 없다.


배신자의 행방을 추궁할 권리는 지금 레스트에게는 없는 것이다.


“제국이 가진 내수경제와 교역 루트는 이전부터 매우 탐내고 있었지. 그 정도의 돈을 벌어들이는 나라가 예하에 있다면 나의 마왕군도 더할 나위 없어. 황국의 함락에 도움이 된다.”


알트레아 왕국. 제국. 그리고 다음은 유디트 황국인가.


레스트는 자신을 찾아왔던 분홍 머리의 소녀를 잠시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마왕군의 침공으로 인해 제국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소. 그건 그 정도 규모의 공격을 결정한 마왕 공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대답이 나왔다. 마치 마왕을 힐난하는듯한 말투에, 순간 자신에 모인 마족들의 시선이 한층 더 날카로워진 것 같았지만, 레스트는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같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 건 늑대 귀의 소녀다.


“보자 보자 하니, 더러운 인간이 주제를 모르고 덤비는군요. 지금 자신이 누구의 아량으로 아직 살아있다고ㅡ”

“진정해라, 린.”


당장 레스트의 목을 떨어뜨릴 서슬 퍼런 기세로 독설을 이어나가던 늑대 마족은 소년의 한마디에 바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일국을 잃었으니 내게 악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지. 그게 한낱 모래성이었다고 해도.”


소년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양해를, 바실루스 황제. 내 부하들은 하나같이 나를 끔찍이 아끼거든. 방금의 말이 결례라고 생각하진 않으니 안심해도 좋다.”


그야 뭐, 라며 그는 운을 뗐다.


“제국이 우리에게 호되게 당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그게 본연의 의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최소한도로 부쉈다, 고 생각하고 있지. 당장 국가가 마비될 정도의 피해는 입히지 않았다. 안 그러나?”


그 말을, 레스트는 부정할 수 없었다.


“파괴된 통신소는 다시 지으면 그만이야. 부서진 자재들을 대체할 예비도 있다. 너희는 왕국과 달리 일반 농민을 징집하지도 않으니 병사들이 다소 죽었다 해서 노동력에 지장이 가는 것도 아니지. 재기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그 말은 즉...”

“속국, 이 되라는 것이다, 황제. 명목상의 지위는 유지하겠지만 제국의 최고 통수권자는 그대가 아니야. 바로 나, 그리고 내 부하들이지.”


그렇게 부숴놓고 그런 소리가 나오겠냐고 묻고 싶었다.


“제국이 만드는 무기는 조금이라도 많은 인간의 피를 흘리기 위해.”


마왕이 턱을 당겼다.


“제국이 조달하는 식량은 조금이라도 많은 마왕군 병사를 먹이기 위해 사용되겠지. 어찌 보면 같은 인간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 대가로 제국은 '제국인 채로' 연명할 수 있다.”

“...”

“승낙하라고 강요는 않겠다. 딱히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마왕은 그리 말했지만, 레스트는 자신이 거절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제국은 왕국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되리라고.


왕국에서 벌인 것과 똑같은 살육은 제국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이 마왕은, 그러고도 남을 빌어먹을 자식이다.


“알겠나, 내게 있어 이 전쟁이란 비즈니스에 불과해. 주어진 자원을 사용해 최대의 이익을 내는 거란 말이다. 그러니 그대도 비슷하게 바라봐주었으면 좋겠군, 합리적인 판단을.”

“...”


바로 결단이 서질 않는다. 마왕의 속국으로 전락해버린 제국은 인류의 희망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위한 도구로 쓰이겠지. 그렇게 전향하면서까지 살아남는 건 어찌 보면 비겁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나쁜 것일까?


마왕이 있다는 건 용사 또한 재림한다는 것.


이 소년을 상대로 용사가 이기는 그림이 쉽게 그려지진 않았지만, 그때까지 제국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다. 자유를, 부흥을 또다시 꿈꿀 수 있다.

순간 마왕의 두 눈이 붉게 빛난 것 같았다.


레스트가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다시 보았을 때, 붉은 안광은 온데간데없었다.


소년이 재촉하는 듯 눈을 가늘게 하고, 레스트는 급히 말한다.


“그 제안, 받아들이겠네. 제국은 속국으로서 마왕군에 온갖 조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 맹세하오.”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인 마왕은 자신의 부하 중 하나를 불렀다.


“레야. 제국 황성에 파견할 간부가 하나 필요한데, 혹시 관심 있나?”

“마왕께서 허락하신다면, 기쁘게 받아들이지요.”


곰방대를 들고 있던 하이엘프다. 마왕은 둘이 인사라도 나누라는 것처럼 고갯짓했다.


“그럼 이걸로 됐군. 제국의 지휘권 및 최종 결정권은 내 마왕군이 가져가겠다. 레야는 내 결정 대리권자로 제국에 체재하게 될 테니, 잘 부탁하지.”

“그, 자세한 이야기는...”

“그건 저와 하시지요, 황제.”


어느새 레스트 곁에 선 레야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당황하면서도 레스트가 끌려가고, 곧 알현실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릇이 작아 보이는 남자였다만, 저런 것을 아군으로 삼아도 괜찮겠습니까.”


류드라이가 혼잣말로 의문을 담고,


“반푼이가 더 이용하기엔 좋은 법이지.”


피아넬이 답했다.


“저 장로를 혼자 보내도 될지... 저것은 정식으로 마왕군에 입대한 몸이 아니니까요.”


카니앗이 불평하듯 의심했고,


“문제없다. 이미 한배를 탄 몸이니.”


그 모두의 주군, 마왕은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그의 뒤에서 살며시 목소리를 내는 펜리르가 한 마리.


“여러모로 약해 보이는 인간이었는데 마안으로 지배하시지 않은 건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그건 참 좋은 질문이다, 린. 나도 사실 거의 그럴 뻔 했었던 참인데 말이야.”


소년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아마 이스가 말한 레스트 바실루스라는 사람에 기대를 건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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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비뚤어진 신앙 +1 20.10.07 236 7 10쪽
139 번견의 눈 +3 20.09.28 249 7 11쪽
138 백과 흑의 격돌 +1 20.09.02 236 5 10쪽
137 흔들리는 빛 +3 20.09.01 252 5 10쪽
136 검은 거탑 +1 20.08.27 216 7 9쪽
135 같은 곳을 보고 있어도 +1 20.08.23 223 8 9쪽
134 더는 묻지 않을 수 없다 +2 20.08.21 233 6 10쪽
133 늑대의 깨달음 +3 20.08.17 258 8 9쪽
132 다음 타깃은 +5 20.08.16 280 7 12쪽
» 그 손을 잡으면 +1 20.08.08 241 6 10쪽
130 마왕의 성 +2 20.07.30 269 7 12쪽
129 그의 직업은 전 용사 +1 20.07.15 256 5 9쪽
128 충돌 +2 20.07.06 272 8 10쪽
127 꼬리 +1 20.06.08 277 7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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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궁니르 +2 20.05.06 280 8 11쪽
123 그리고 빛이 +1 20.04.18 292 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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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함락 +1 20.03.15 288 8 8쪽
116 드리워지는 그림자 +1 20.03.12 426 7 8쪽
115 전장에 울려퍼진 총성 +1 20.03.08 286 5 9쪽
114 불타는 도시 +1 20.02.29 278 9 9쪽
113 마왕군의 침공 +1 20.02.26 300 7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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