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467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20.04.02 07:49
조회
288
추천
8
글자
9쪽

죽음의 문턱. 그리고 거래

DUMMY

단지 화염을 불러일으킬 뿐인 검이 아니다.


수트르ㅡ불의 거인이 사용했던 이 무기는 절대 사그라지지 않고 영원히 타들어 가는 불길을 만들어낸다. 자칫 잘못하면 말 그대로 이 세상 모든 것을 태워버릴 종말의 검인 것이다.


“!!”


스카디가 급히 얼음 장벽을 둘러 화염을 막으려 하지만 맹렬한 불꽃 앞에서는 땡볕 아래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린다. 몸에 두르고 있는 냉기로 겨우 불꽃에 직접 닿는 것은 면하고 있지만, 그 모습은 가히 궁지에 몰린 쥐새끼였다.


겨울의 여신? 라그나로크의 생존자? 도저히 그렇게는 안 보이는군.


권위는 없다. 필멸자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의 위엄도 없다. 존재하는 건 단지 힘의 차이, 그뿐이다.


“웃기지 않나? 변수 하나 때문에 이리 상황이 뒤바뀌다니.”

“...”

“어째서 몸집이 클 뿐인 파충류 따위가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아이러니하게 됐군, 스카디. 분수에 맞지 않은 걸 끌어안고 있었던 어느 용 때문에 네가 파멸을 맞게 된다니.”


지금 나는 수트르의 검을 잡기 위해 고유 스킬을 해제한 상태. 내 마력으로 곧잘 만들어내 지근거리에서 조종하는 검과 달리, 고대서부터 내려온 이 무기는 직접 잡지 않으면 휘두를 수 없는 물건이었다.


쉬익, 쉬이이익.


나조차도 참기 힘들 정도의 뜨거운 열기에 혀를 내둘렀다. 다루기 힘든 물건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강력한 물건이라는 것인가, 신기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마력이 끊임없이 샘솟아 나오고 있다.


물론, 이 정도의 신기이기에 스카디를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수 있겠지만 말이지.


“네 섣부른 판단 덕분에 네 소중한 마을은 불탄다. 저들만의 시간을 살던 라드레이드의 드래곤들은 너와 함께 사이좋게 잿더미가 되는 거다. ”

“아직 끝난 것은...!”


빗발치는 고드름.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뾰족한 얼음기둥. 하나같이 상급 공격마법의 위력을 한없이 넘어선 것들 뿐이다.


“이건 어떤가요...!”


발악으로 스카디가 자연재해에 가까울 정도로 파괴적인 각종 빙결 마법을 쓰지만, 혀를 날름거리는 겁화는 꺼질 기미 없이 그녀의 공격을 전부 무효화시켜버린다.


고드름은 내게 닿기도 전에 녹아버리고, 얼음기둥은 힘을 잃고 무너져내려 물의 웅덩이를 만들었다.


상성의 차이라는 건 겨울의 여신을 이렇게나 무기력하게 보이게 했다.


요란하게 불이 치솟고 있는 가운데, 내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좀 생각을 많이 했거든. 엉겁결에 오긴 했지만 의문은 아직 많았다.”


모든 수를 봉인당하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여신을 향해, 여유로운 발걸음을 옮기며 내가 말한다.


“왜 내가 마왕이 된 건지. 그놈들은 내게 뭘 바라고 이런 역할을 맡긴 것인지. 나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알면서. 여러 밤을 지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이 안 나더라고.”


화염을 아무리 뿌리치려 해봐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스카디가 드디어 손을 내렸다.


“하지만 답이 안 나와도 이젠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지?”


타닥 타닥.


이제 넓은 실내를 가득 채운 겁화 속에, 상대방은 서로를 노려본다.


뜨거운 공기. 본연의 냉기를 잃고 무너지려는 건물.


시야를 가릴 정도로 어지럽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두 쌍의 눈이 마주친다.


타다다닥, 타닥.


점점 크기를 더해가는 불길에 버티지 못하고 신당이 타들어 가는 소리 가운데, 내 목소리가 또렷이 울렸다.


“후회가 남을 뿐이다. 사라지지 않는 후회만이 남아 가슴을 옥죄는 거야. 그걸 알면서도 날 이 자리에 둔 건, 그걸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불꽃은 구석구석까지 퍼져, 한때 아름다웠던 것들을 차례차례 망가뜨린다. 적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저 겁화는 언젠가 내게도 닿겠지.


데자뷰.


이걸 어디서 보았더라.


아.


그랬었지.


불타는 건물을 보며 잠시 옛날이 생각난 나는 품에 손을 넣어 권총 한정을 꺼냈다.


1911.


수년 전 이걸 쥐었던 어린아이의 손은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나이에, 분수에 맞지 않는 힘과 분노를 손에 넣은 그 아이는 그때부터 멈춰서 있었던 것이다. 발밑에 시체더미를 무수히 쌓아가며.


향할 곳 없는 복수의 칼날을 품고.


“어쩌면 나는 이전의 과오를 똑같이 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파멸뿐인 결과로 달려가는 걸 멈추지 않는 건 나라는 인간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스카디가 의아해한다.


“하지만 어쩌겠어.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스카디의 목덜미에 불타는 검을 겨눈다.


“그럼 잘 가라, 겨울의 여신이여. 끝이 맥빠지긴 했지만 나름 즐거웠다고.”


잠시 정적이 흐르고, 많이 약해진 목소리가 나왔다.


“저를... 죽이고 나면 드래곤들도 죽이실 생각인가요.”

“당연한 것 아니겠어. 굳이 살려둘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스카디의 동공에는 눈에 띌 정도의 동요가 일었다.


“그 아이들까지, 제 어리석음에 말려들 필요는 없습니다.”

“너를 죽인 내게, 놈들이 반기를 들지 않으리라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렇다고 천계 패거리중 하나인 너를 죽이지 않을 수도 없는 법이니. 슬슬 단념하시라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나를 지나 무언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오.”


작은 몸집이지만 어느새 스카디를 감싸는 형태로 선 건 붉은 머리의 소녀.


“로그...?!”

“벌써 부상이 나은 건가. 하긴 네 오빠에 비하면 얕은 창상이었으니 말이지.”

“너는 강해. 강한 놈은 좋아해. 하지만 이거랑 그거랑은 별개야.”


진지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는 로그.


“현자님은 내가 지켜.”


난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뭐? 네까짓 게 날 막겠다고? 그렇게 호된 꼴을 당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 아니겠지? 너는 물론이고 여기 있는 드래곤을 전부 데려와도 승산은 없다. 그만 포기해.”

“그래도, 물러서지 않아.”


뭐 그러시겠지.


바깥을 탐지마법으로 훑어본 나는 수십 마리의 드래곤들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는 걸 발견했다. 여차하면 로그처럼 난입해올 생각이겠지, 분명.


“그러게 처음부터 내 요구조건을 받아들였으면 이럴 일은 없었잖나. 네 현자라는 것의 어리석은 만용이 너희들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나 마찬가지지.”


스카디는 무슨 생각이 있는지, 로그를 살며시 옆으로 밀었다.


“칠흑의 마왕이여. 지금 생각을 바꾼다고 해도 들어주시진 않겠지요.”

“당연한 소리.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아?”


로그까지 한꺼번에 베어버리려던 내 귀에 솔깃한 소리가 들렸다.


“협상테이블에 저희의 협력말고, 다른 것 또한 올려놓는 것은 어떤가요.”

“다른 것?”


스카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신으로서 천계에 대한 것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알고 싶어 할 정보도 있겠지요.”

“천계에 대한 거라면 이쪽은 이미 천사를 부리고 있다.”

“천사 레벨에서 알 수 없는 것 또한,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신의 명령을 수행할 뿐, 뜻 전부를 알지는 못하니까요.”


나는 검을 살짝 내렸다.


“예를 들면?”

“각 신이 최후의 수단으로 숨기고 있는 신기, 권능. 전부는 아니지만, 그것들은 대략 파악하고 있습니다.”

“동료를 팔아넘기겠다는 것 치고는 꽤 차분하군.”

“...”


나는 속으로 찬찬히 뜯어보았다.


내 암속성 마법을 봉인한 스카디의 권능은 의외였다. 내 전투력을 크게 저하시키는 위협이 되었다. 만일 비슷한 것을 다른 신들 또한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그걸 미리 알아두는 건 내게 큰 이점이 된다.


“하지만 약속해주세요, 이 아이들은 해치지 않겠노라고.”


이번에야 운 좋게 자이언트 드래곤의 보물더미에서 찾은 불꽃의 검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이처럼 준비 없이 다른 신들과 싸우게 된다면 꽤 곤란한 꼴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스카디가 혹시 다른 생각을 품더라도, 수트르의 검을 가진 이쪽은 언제라도 다시 지금 같은 상황을 재현시킬 수 있다.


“나쁘지 않은 이야기야, 현자 씨.”


불꽃의 검에 깃든 겁화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나는 만면의 웃음을 띠고 검을 거두었다. 그 웃음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로그가 강하게 경계심을 높이고 몸을 움츠렸다.


“그 제안, 좀 더 들어볼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2 구원 요청 +1 21.01.10 190 6 15쪽
161 결국 놀이라고 하면 그것 +6 21.01.09 200 7 20쪽
160 다크엘프 대 신벌의 대행자 +4 21.01.07 241 7 19쪽
159 폭력 후에는, 공허가 남는다 +2 21.01.04 198 7 14쪽
158 여우와 정령의 방문 +5 21.01.03 199 6 17쪽
157 늑대의 가보 +2 20.12.28 188 6 11쪽
156 영예로운 끝 +3 20.12.27 217 8 18쪽
155 마왕의 제안 +3 20.12.23 200 7 13쪽
154 엔딩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3 20.12.20 362 6 13쪽
153 배우, 무대 위에 오르다 +1 20.12.14 216 8 13쪽
152 불행은 오늘도 입맛을 다신다 +1 20.12.10 184 9 13쪽
151 데드 맨 워킹 +4 20.12.06 225 6 16쪽
150 커져가는 불씨 +3 20.12.04 210 5 15쪽
149 흘러내리는 피 +5 20.11.30 238 7 15쪽
148 임박한 어둠 +2 20.11.20 207 5 11쪽
147 바이러스 개발 +3 20.11.16 242 8 12쪽
146 불길한 기억 +1 20.11.10 205 6 10쪽
145 상실은 검게 피어 오른다 +2 20.11.01 238 8 10쪽
144 대참사 +1 20.10.28 217 7 11쪽
143 소동의 마무리 +2 20.10.26 257 6 12쪽
142 광신의 끝 +1 20.10.15 234 6 12쪽
141 지켜보는 눈 +1 20.10.13 223 7 11쪽
140 비뚤어진 신앙 +1 20.10.07 236 7 10쪽
139 번견의 눈 +3 20.09.28 249 7 11쪽
138 백과 흑의 격돌 +1 20.09.02 236 5 10쪽
137 흔들리는 빛 +3 20.09.01 252 5 10쪽
136 검은 거탑 +1 20.08.27 216 7 9쪽
135 같은 곳을 보고 있어도 +1 20.08.23 223 8 9쪽
134 더는 묻지 않을 수 없다 +2 20.08.21 233 6 10쪽
133 늑대의 깨달음 +3 20.08.17 258 8 9쪽
132 다음 타깃은 +5 20.08.16 280 7 12쪽
131 그 손을 잡으면 +1 20.08.08 240 6 10쪽
130 마왕의 성 +2 20.07.30 269 7 12쪽
129 그의 직업은 전 용사 +1 20.07.15 256 5 9쪽
128 충돌 +2 20.07.06 272 8 10쪽
127 꼬리 +1 20.06.08 277 7 8쪽
126 유디트 황국 +1 20.05.25 347 6 9쪽
125 신살 +2 20.05.19 322 9 10쪽
124 궁니르 +2 20.05.06 280 8 11쪽
123 그리고 빛이 +1 20.04.18 292 6 9쪽
122 사냥 +1 20.04.06 305 7 8쪽
» 죽음의 문턱. 그리고 거래 +2 20.04.02 289 8 9쪽
120 신살 +1 20.03.29 291 7 7쪽
119 스카디 +1 20.03.22 278 11 9쪽
118 연극의 막을 올리다 +1 20.03.18 286 7 9쪽
117 함락 +1 20.03.15 288 8 8쪽
116 드리워지는 그림자 +1 20.03.12 426 7 8쪽
115 전장에 울려퍼진 총성 +1 20.03.08 286 5 9쪽
114 불타는 도시 +1 20.02.29 278 9 9쪽
113 마왕군의 침공 +1 20.02.26 300 7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