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571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20.12.27 19:30
조회
219
추천
8
글자
18쪽

영예로운 끝

DUMMY

뜻밖이었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루드게이트는 자신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선 이 소년에게 이와 같은 제안을 받을 줄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있었다.


저쪽이 진심으로 그리 물어본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여기에서 그가 내민 손을 잡지 못하면 자신은 황국과 함께 파멸하리라는 것이었다.


싸워서 물리친다는 선택지는 없다.


펜리르를 상대로 맞서 싸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건 아직 제대로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한 용사.


그것도 소재지가 두 개로 나뉜 덕에 어느 쪽이 진짜 용사인지, 혹은 둘 다 용사라는 뜻밖의 전개일지는 알 수 없는 채다.


“···”


루드게이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왕과 협력한다면 최악의 배신자로 기록되겠지. 하지만 최종적으로 마왕군이 승리한다면 그건 염려할 것이 없다.


문제는 과연 이 자를 용서할 수 있을지 아닌지다.


황국의 신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으며, 절대 인류와 공존할 수 없는 마왕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단 하루 만에 무너뜨린 마왕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그때 스쳐 지나가는, 한 남자의 얼굴.


루드게이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마왕, 당신은 인간의 피를 흘릴 거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미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요.”


“그렇다.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겠지.”


마왕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이 그리는 미래는 완전히 인간을 배제한 것인가요?”


루드게이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정도 되는 자가 종족을 이유로 말살 정책을 펼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게 손을 내밀지도 않았겠죠. 당신은 필요하다면 인간의 힘도 태연하게 빌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근거가 조금 빈약하군. 단지 첫인상으로 판단한 건가?”


“아니요.”


루드게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왕국과 제국은 피해는 상당히 입었을지언정, 폐허가 되었다는 않았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심지어 교역 루트는 오늘까지도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지요. 그 말은 마왕, 당신은 인간족을 향한 혐오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마왕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발을 바꿔 꼬았다.


“인간의 적인 마왕이 인족에 대한 혐오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엇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는 말인가?”


“보다 효율적인 전쟁을 위해, 필요 없는 희생을 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교섭의 여지 없이 황국을 완전히 없애려고 하는데도?”


“왕국이나 제국과는 달리 종교적 신념이 강한 나라인 만큼, 살려둬서 생긴 후환이 얻을 이득에 비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겠죠.”


추측에 불과한 의견이지만, 루드게이트는 확신에 차 있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제게 당신은 그런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자신의 말이 무슨 반응을 자아낼지 조마조마하며 루드게이트는 마왕의 인상을 살폈다.


“하핫, 하하하.”


마왕이 웃어젖혔다.


“대단하군. 네 분석은 정확해. 확실히 나는 인간을 죽이려고 움직이는 건 아니지. 벌레들을 짓밟는 것에 희열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최우선 순위는 아니다. 네 말대로 필요한 수라면 기꺼이 써주지.”


어쩌면 인류에게 제일 위험한 마왕은 이런 부류가 아닐까.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냉정을 잃지 않으며, 하나의 체스판을 앞에 둔 플레이어처럼 조심스레 수를 두는 남자.


“그래서? 내 손을 잡을 생각이 들었나?”


루드게이트는 대답을 하기 전, 심호흡을 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마왕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그녀가 승낙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루드게이트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


“쿠테타를 계획한 건 제가 아니라 리우 에스타와 제 조카, 리겐스 군이기 때문입니다.”


리겐스가 뭐라 말하려 했으나, 루드게이트는 시선으로 그의 말을 막았다.


“전 단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이유로 자비를 베푼다면 이 아이들에게 베푸는 게 맞습니다. 이변을 눈치채고 바로 주요 군사시설에 방어막을 펼친 것도 이 둘의 생각이었습니다.”


마왕이 의외라는 얼굴로 루드게이트와 리우, 그리고 리겐스를 번갈아 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공을 넘기면 내 제안을 받은 네게 손해 아닌가? 이대로 여기서 죽임당하게 될 텐데?”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는 해도, 저는 유디트 황국의 대주교입니다. 부하의 공적을 가로채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마왕은 불쾌하기보다는 흡족한 쪽에 가까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훌륭하군.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음까지 받아들인다는 그 태도는 만인이 본받아야 마땅하다.”


“한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루드게이트는 비장한 얼굴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그 제안은 이 둘에게도 유효한 것이겠지요? 당신이 흥미를 품은 속전속결의 결단력은 제가 아닌, 그들의 것이니까요.”


“네가 거절했으니, 딱히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만.”


“저는 오늘 여기서 스러질지언정, 뒤에 남아 지켜볼 수족은 남겨두고 싶습니다.”


“욕심이군, 대주교. 애초에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방법이 없다. 네가 그저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했으면 끝날 것을. 왜 그리 혼자서 죽고 싶어 하나?”


마왕은 루드게이트를 질타했다.


“그렇게 해서 남는 게 도대체 어디에 있나. 그건 단지 같은 선택을 종용하지 않으려는 욕심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손을 잡을 수 없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루드게이트는 리우와 리겐스를 흘깃 보았다.


“이 아이들에게 어른의 죄는 없습니다. 있다고 한다면 그건 전부 저와 같은 어른이 그들을 잘못 인도한 것일 뿐.”


“아이들이니 살려주자라. 낡아빠진 논리군, 대주교. 쿠테타와 방위의 계획을 그들이 짰다는 것에 대한 진위를 파악하지 못하는 지금, 이 둘을 살려둬서 내게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나.”


“마왕군에 강자들이 많은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천벽인광의 두 번째 빛인 리우 에스타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아니겠지요. 리겐스 군도 그의 활 솜씨라면 분명 유용하게 쓰일 겁니다.”


“잠깐만, 이모님. 저는ㅡ”


“이들은 오래전부터 저와 함께한 수족. 제 방식에 누구보다 크게 동조해주었던 자들입니다. 쿠테타도 둘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겠지요. 당신이 흥미를 느낀 건 제가 아니라 이 둘의 아이디어였습니다.”


루드게이트는 간청을 계속했다.


“천벽인광은 수많은 마족을 죽여왔다. 마왕군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마족을 죽인 죄라 한다면, 천벽인광을 직접 지휘한 제 죄가 더 크겠지요.”


“대주교님.”


리우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있는 걸 루드게이트는 알아차렸다.


하지만 마왕이 이런 흥미를 보인 건 천재일우의 기회다. 그걸 망쳐버릴 순 없었다.


“리우, 당신은 살아서 끝을 지켜봐줬으면 합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왕의 말마따나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른다. 리우가 자신의 명을 따를 거라고 알면서 살아남으라고 얘기하는 것이니 말이다.


명예로운 죽음을 가질 권리를 빼앗아버리고 비겁하게 살아가라고, 그렇게 강요하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루드게이트는 리우가 블레이즈와 같은 운명을 맞는 걸 절대 원하지 않았다.


그 천하의 블레이즈도 이기지 못한 마왕군 간부를 부리는 마왕에게 대적한다면 리우의 미래는 뻔하겠지.


리우는, 리우 에스타라는 분홍머리 소녀는 단지 적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천검의 사용자로 결정되어 인생을 황국의 더러운 임무로 낭비해왔다.


그 나이 또래 여자아이에게 주어지는, 학교에 가고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에 얼굴을 붉히는 정상적인 삶은 리우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여느 소녀가 치마를 골라보고 있을 때, 리우는 최전선에서 마수의 목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인생의 모든 것을 황국에 바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위선일지도 모른다.


황국이니 어쩔 수 없다고 그것을 방관하던 루드게이트가 지금에 와서야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은.


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둬서 그런 걸까.


지금의 루드게이트는 황국의 고위 성직자가 아닌, 일개 중년 여성으로서 생각하고 있었다.


리우가 끝까지 황국의 도구로 쓰여지는 건 본의가 아니었다. 리우나 리겐스가 마왕타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왕이시여. 당신은 이미 황국을 무너뜨렸습니다. 아이의 목숨 한둘 정도는 남겨둬도 큰 문제는 아니겠지요. 게다가 당신의 제안이 원래 향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둘. 부디 선처를 바랍니다.”


거듭되는 루드게이트의 호소에, 마왕이 곤란한 얼굴을 한다.


“으음. 그 말이 사실이라면 탐나기는 하다만, 저쪽은 내 부하중 하나와 악연인데 말이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되는군. 카니앗은 꽤 진심으로 이를 갈고 있던데. 일단 이 둘은 내 제안에 승낙하는 거로 보면 되나?”


마왕의 지목을 받은 리우는 루드게이트와 한번 시선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리겐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지금 여기에서 거부의 뜻을 표하는 건 루드게이트의 죽음을, 그녀의 의지를 의미 없게 해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승낙하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루드게이트의 뜻은 어느 때보다도 확고했으니까.


생각에 잠기던 마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한번 아무런 제약 없이 카니앗과 싸워준다는 보장 하에 살려두도록 하지. 카니앗과의 싸움에서 죽지 않는다면 내 밑에서 일하는 조건 하에 자유를 약속하겠다.”


그건 루드게이트에게 내건 조건과 살짝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


“리우, 부탁드려도 될까요.”


루드게이트가 물었다.


“더는 천벽인광의 임무를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황국이 쓰러진 이상, 천벽인광도 여기까지니까요. 그저 저를 대신해서, 리겐스 군과 함께 이 싸움의 결말을 지켜봐 주셨으면 해요.”


“...”


리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루드게이트가 처음 보는 망설임이었다.


누구보다도 마의 존재와의 싸움에 먼저 앞장서왔던 리우다.


끝까지 고결하게 싸우다 죽음을 맞는 건 상상했어도, 마왕과 거래를 맺어 목숨을 부지하게 되는 전개가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알겠습니다.”


쥐어짜듯 말한 건 그녀의 본의가 아니겠지.


루드게이트는 가슴이 아팠지만, 이야기를 철회할 생각도 없었다.


“자, 그러면 이 둘은 살려두는 거로 하고, 나머지는 죽어줘야겠는데.”


마왕의 싸늘한 시선이 나머지 사제들, 그리고 루드게이트에 머물렀다.


때가 온 것이다.


“얌전히 목을 내어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마지막 저항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루드게이트는 주교장을 손에 들고 일어섰다.


그가 이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대주교다운 최후라고 고개를 끄덕일 것인가, 무의미한 죽음을 선택했다고 화를 낼 것인가.


어찌 됐든, 그와는 곧 재회하게 되었다.


루드게이트는 가져다 쓸 수 있는 모든 마나를 주교장ㅡ구원의 스태프에 집중시켰다.


휘리릭, 하고 돌아간 금속막대에 신성한 빛이 깃들기 시작한다.


찰칵ㅡ찰칵ㅡ찰칵


스태프의 각 마디가 회전하며, 정교히 새겨진 문자열이 한 줄씩 조합된다.


상황에 맞게 성마법의 용도를 바꿔쓸 수 있는 이 국보는 지금, 살상력만을 내기 위해 맞춰져 있었다.


“양 진영의 리더간의 결투인가, 나쁘지 않군.”


호전적인 태도로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선 마왕.


“저 둘은 먼저 안전지대로 보내두겠다. 괜히 휘말리는 불상사가 있으면 안되니 말이다.”


“잠깐, 이모님ㅡ”


리겐스의 말이 끊겼다.


강제로 전이마법진에 올려져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리우는 발밑의 마법진이 빛나기 직전, 고개를 숙였다.


번쩍.


둘의 모습이 사라지고, 마왕은 왼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루드게이트를 보았다.


“준비는 됐겠지, 대주교.”


“물론입니다, 마왕.”


루드게이트는 전투모드로 맞춘 구원의 스태프를 치켜들었다.


오직 교황에게만 허락된 이 역사적인 국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성마법을 다룰 수 있다.


위력은 사용자에 따라 반감되지만, 성마법의 초짜라도 상급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는 말도 안 되는 물건이다.


무려 초대 용사가 초대 마왕을 쓰러뜨리는 데 사용했다는 전설적인 무기.


“그곳은 절망도, 고통도 없는 백색의 세계.”


루드게이트가 암기한 성서를 읊고, 양쪽 책꽂이에 잔뜩 있던 성서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열두 시련을 거쳐 루미아의 세계에 도달했을 때, 죄인은 선인이 되었고 쇠사슬을 벗어던지게 되었다.”


촤라라라락ㅡ!


백색 빛으로 발광하는 페이지들이 루드게이트의 의지대로 움직여 공중에 뜨더니, 순식간에 각기 다른 모양으로 변했다.


창, 검, 화살, 심지어 방패로까지.


“이건 처음 보는군. 성마법의 궁극인가.”


루드게이트를 향해 걷는 마왕은 그렇게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대성당을 가득 채운, 압도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수많은 무기들의 물량을 보면서도 전혀 위기감이 없다.


“나와 함께 걸으시며, 나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나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무기들이 뜨겁게 불타기 시작한다.


상급 성무기제작 마법을 통해 만들어낸 이 무기들은 하나하나가 강력한 마수를 쓰러뜨릴 수 있는 용사의 성검과 동일한 힘을 가진다.


그 불꽃은 붉지도 않고, 푸르지도 않았다.


단지 영롱한 백색을 띠고 있었다.


“마왕, 각오를!”


루드게이트가 소리침과 동시에 그녀가 성마법으로 구현한 무기들은 전부 마왕 하나에게 빗발쳤다.


아낌없이 쏟아져 내리는 성스러운 빛.


타도해야 할 악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는 신자의 의지.


그 모습은 마치 성서에서 루미아가 마지막 마수를 쓰러뜨리고 인류를 구하는 장면과 흡사했다.


“...나쁘지 않군.”


마왕이 내민 오른손에 손잡이가 생기더니 불안정하게 타탁, 하고 타들어 가는 흑색 도신이 생겨났다.


그건 리우의 천검과는 달리,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넘실대는 마왕의 마검.


그는 무심하게 그걸 한번 휘둘렀다.


루드게이트의 스태프와는 대조적인 검은빛이 터져 나왔다.


사정없이 쇄도하는 백색을 깔끔하게 가르며 집어삼키는 흑색 빛줄기가 하나.


강렬하게 쏟아져 내리는 백색이 흑색에 집어 삼켜져 간다.


성스러운 무기가 하나둘씩 형태를 잃고 단순한 종이로 변해, 빠르게 타버렸다.


“크읏ㅡ”


이대로 가면 힘의 싸움에서 밀릴 거라고 깨달은 루드게이트 대주교는 구원의 스태프를 들고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백색으로 발광하는 스태프가 흑색의 마검과 맞부딪힌다. 마왕은 자신의 검과 닿고도 멀쩡한 스태프를 보고 순간 눈썹을 추켜세웠다.


창!


챙!


깡!


챙! 챙!


지친 기색 없이 연달아 스태프를 휘두르는 루드게이트.


급소만을 노리는 스태프는 전부 칠흑같이 어두운 도신이 받아내고 있었지만 그 공격은 군더더기 없이 수려했으며, 수십 년이나 무기를 잡지 않은 대주교의 움직임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치지지직ㅡ


크게 베어 넘기는 동작을 보인 마왕.


루드게이트는 그걸 그대로 받아내기보다, 몸을 숙여 피하는 것을 택했다.


자연스레 마왕에게 생긴 큰 빈틈.


루드게이트가 그걸 놓치지 않고, 스태프로 찌르며 들어온다.


그때였다.


분명히 아직 허공을 가르고 있던 마검이 마치 무언가에 튕겨 나가듯 반대 방향으로 진로를 바꾼 것이다. 아무리 팔의 근력이 높아도 불가능한 기행이다.


루드게이트가 가까스로 스태프를 자신의 목 뒤에 가져다 대고, 그 충격으로 대성당의 바닥을 구른다.


“역사 끝에 찾아올 심판의 날, 루미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픔을 내색하지 않고 그녀가 기도문을 외웠다.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었던, 신의 기적을 모방한 또 다른 창조마법을.


검을 든 천사가 다섯 개체, 루드게이트를 감싸듯이 현현한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고리가 걸려있다.


“인공천사인가...”


동요 없는 눈이 천사 하나하나를 관찰한다.


“아니, 지상의 그릇에 억지로 천사를 담은 것이로군. 매우 불안정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나. 본래 이곳에 있을 발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


마왕은 어느새 마검에서 빈손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다는 건 다음 찾아올 공격은 마법.


“모든 것은 그분이 창조했음을, 멸함과 함께 깨달으리라!”


루드게이트는 천사들과 함께 돌진했다.


마왕이 한눈에 보고 파악한 것처럼, 이 천사들은 오래 지상에 머무를 수 없다.


고작 인간의 몸으로 고위천사를 부르지도 못했을뿐더러, 이것조차 실패하고 나면 스태프를 사용할 힘이 바닥나있겠지.


죽음이 보인다.


아무리 대주교라 해도 인간이다. 두렵다. 죽음은 역시 싫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추진 않는다.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강을 건너와 버렸다.


구원의 스태프에서 어느 때보다도 강한 빛이 솟는다. 후일은 전혀 생각 안 하고 닥치는대로 마나를 주입한 결과다.


“받아주세요, 마왕. 이게 제 모든 것입니다!”


동귀어진을 각오한 그녀를 보고, 마왕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왼손을 꺼내, 검지를 위로 향했다.


“풀캐스트ㅡ버스트.”


공중에 검은 구체가 순식간에 생겨나더니, 수많은 갈래로 나뉘고, 검은 광선이 되어 천사들을 꿰뚫는다.


검을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일국을 멸망시켰다던 신의 대리인들이 속속 무책으로 당해, 옅은 입자들로 터져 없어진다.


닿는 모든 걸 집어삼키는 어두운 빛이 보여주는 건 압도적인 힘의 차이.


일말의 희망도 태워 없애버리는 악의의 빛.


그게 자신에 도달하기 직전, 루드게이트는 중얼거렸다.


“ㅡ블레이즈.”


눈 부신 빛이 크게 터지고, 백색의 세계가 찾아왔다.


작가의말

웬만한 용사보다 잘 싸우는 대주교였습니다


덕분에 역대급 분량이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2 구원 요청 +1 21.01.10 192 6 15쪽
161 결국 놀이라고 하면 그것 +6 21.01.09 202 7 20쪽
160 다크엘프 대 신벌의 대행자 +4 21.01.07 241 7 19쪽
159 폭력 후에는, 공허가 남는다 +2 21.01.04 199 7 14쪽
158 여우와 정령의 방문 +5 21.01.03 199 6 17쪽
157 늑대의 가보 +2 20.12.28 189 6 11쪽
» 영예로운 끝 +3 20.12.27 220 8 18쪽
155 마왕의 제안 +3 20.12.23 202 7 13쪽
154 엔딩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3 20.12.20 363 6 13쪽
153 배우, 무대 위에 오르다 +1 20.12.14 216 8 13쪽
152 불행은 오늘도 입맛을 다신다 +1 20.12.10 185 9 13쪽
151 데드 맨 워킹 +4 20.12.06 227 6 16쪽
150 커져가는 불씨 +3 20.12.04 210 5 15쪽
149 흘러내리는 피 +5 20.11.30 238 7 15쪽
148 임박한 어둠 +2 20.11.20 208 5 11쪽
147 바이러스 개발 +3 20.11.16 243 8 12쪽
146 불길한 기억 +1 20.11.10 205 6 10쪽
145 상실은 검게 피어 오른다 +2 20.11.01 239 8 10쪽
144 대참사 +1 20.10.28 217 7 11쪽
143 소동의 마무리 +2 20.10.26 258 6 12쪽
142 광신의 끝 +1 20.10.15 234 6 12쪽
141 지켜보는 눈 +1 20.10.13 224 7 11쪽
140 비뚤어진 신앙 +1 20.10.07 236 7 10쪽
139 번견의 눈 +3 20.09.28 252 7 11쪽
138 백과 흑의 격돌 +1 20.09.02 238 5 10쪽
137 흔들리는 빛 +3 20.09.01 252 5 10쪽
136 검은 거탑 +1 20.08.27 216 7 9쪽
135 같은 곳을 보고 있어도 +1 20.08.23 223 8 9쪽
134 더는 묻지 않을 수 없다 +2 20.08.21 233 6 10쪽
133 늑대의 깨달음 +3 20.08.17 258 8 9쪽
132 다음 타깃은 +5 20.08.16 280 7 12쪽
131 그 손을 잡으면 +1 20.08.08 241 6 10쪽
130 마왕의 성 +2 20.07.30 269 7 12쪽
129 그의 직업은 전 용사 +1 20.07.15 256 5 9쪽
128 충돌 +2 20.07.06 272 8 10쪽
127 꼬리 +1 20.06.08 278 7 8쪽
126 유디트 황국 +1 20.05.25 348 6 9쪽
125 신살 +2 20.05.19 322 9 10쪽
124 궁니르 +2 20.05.06 280 8 11쪽
123 그리고 빛이 +1 20.04.18 292 6 9쪽
122 사냥 +1 20.04.06 305 7 8쪽
121 죽음의 문턱. 그리고 거래 +2 20.04.02 289 8 9쪽
120 신살 +1 20.03.29 292 7 7쪽
119 스카디 +1 20.03.22 278 11 9쪽
118 연극의 막을 올리다 +1 20.03.18 286 7 9쪽
117 함락 +1 20.03.15 289 8 8쪽
116 드리워지는 그림자 +1 20.03.12 426 7 8쪽
115 전장에 울려퍼진 총성 +1 20.03.08 288 5 9쪽
114 불타는 도시 +1 20.02.29 278 9 9쪽
113 마왕군의 침공 +1 20.02.26 300 7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