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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577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20.11.10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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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추천
6
글자
10쪽

불길한 기억

DUMMY

가름은 어둠이 싫었다.


매일 밤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어둠은 한참이나 가둬져 있었을 때를 생각나게 했기에.


있어 마땅한 세계축의 하나라는 이유로 진정한 의미로 죽지도 못하고, 그저 정신만이 공허를 맴돌고 안식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긴 세월이 남기는 트라우마는 크다.


수면을 취할 때의 잠깐의 어둠조차 가름에겐 무척이나 불쾌한 것이었다.


생각난다.


아니, 보인다.


들린다.


쓰러지는 동료들이. 빗발치는 성스러운 화살이.


귓가에 맴도는 함성이 가라앉고 나니, 넘쳐흐르는 피의 홍수가 비추는 건 오로지 죽음만이 존재하는 세계.


어두컴컴하다.


펜리르가 태양을 집어삼키고 난 뒤의 세계에는 달밖에 남지 않아, 은은한 달빛이 넓은 평원 위 펼쳐진 참상을 비춘다.


기분 탓인지, 그 달마저 피로 얼룩진 것 같았다.


조용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곳 모두는 이미 평등한 죽음을 맞았기에.


허나 그건 절대 만족스러운 죽음이 아니었다.


그날, 만족하며 죽어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건 그런 법이다.


“누...님.”


가름은 겨우 말을 자아내,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을 찾는다.


한쪽만 남은 눈으로 좇는 건 더이상 움직이지 않게 된 늑대.


그조차도 흘러내리는 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확실했다.


아름다웠던 푸른 털은 질척이는 피와 진흙으로 더럽혀진 지 오래다.


피와 눈물이 섞여 눈앞이 흐려진다.


“아... 아아.”


그 펜리르마저 당하고 만 것인가. 세계 종말의 날에.


초반까지만 해도 선전했지만, 예상보다 거센 신들의 반격으로 이쪽도 태반이 살해당했다.


적어도 사지가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마수는 이제 없다.


이미 죽었거나, 죽음을 목전에 앞둔 놈들뿐이다.


가름은 속으로 슬픔을 삼킨다.


반쯤 떨어져 나가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무시하고 간신히 기어가, 푸른 늑대의 옆에 누웠다.


너덜너덜해진 어깨에 놓인 앞발이 떨린다.


모두가 우러러보고 따랐던 어깨다. 불합리한 세계의 변화를 도모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던 어깨다.


이젠 그 무거운 짐을 겨우 내려놓을 수 있었던 걸까.


“누님.”


대답은 역시 돌아오지 않는다.


상처를 확인한 가름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이빨을 악물었다. 살아있을 수 있을 정도의 부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입은 부상도 비슷한 수준의 것.


그는 펜리르의 부릅뜬 두 눈을 감겨주었다.


“누님, 부디 안식을.”


피를 너무 흘린 탓일까, 어질어질하다.


이제 그에게ㅡ지옥의 문지기 가름에게 남은 시간은 별로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져 간다.


마음이 텅 빈 느낌이었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격렬했던 전쟁이 거짓말처럼, 그의 머리는 평온했다.


이건 패배인가. 승리인가.


가름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허허벌판을 멍하니 보았다.


신들의 군대와 격돌한 수르트의 군대ㅡ천계와 마계의 싸움의 흔적이 처절하게 남아있고, 어딜 보나 시체들이 즐비했다.


편을 갈라 싸우던 인간들과 마족들도 사이좋게 싸늘해진 채 지면을 구르고 있다.


“아... 그랬지.”


목적은 달성했다.


고위 신들은 대부분 죽였다. 자기 마음대로 세상의 이치를 주무르는 놈들은 비명횡사하고 없다.


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


거인과 네임드 마수들은 신들이 휘두르는 신기와 권능 앞에 쓰러졌다.


신들을 위에서 끌어내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살아남아 여명을 지켜볼 이는 이제 전무하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더는 돌이킬 수 없다.


죽어간 이들 중에 라그나로크에 참전한 것을 후회한 자는 없을 것이다.


후회가 있다면,


이 뒤에 찾아올 세상을 못 보는 정도다.


하지만.


“누님... 우린 정말로 이걸로 좋았을까?”


대답은 역시 없다.


시야가 흔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가름은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


◆◇◆◇◆◇◆◇◆◇◆◇◆◇◆◇◆◇◆◇◆◇◆◇



부스스 눈을 뜨니 처음엔 낯설고, 점차 낯이 익어가는 천장이 보인다.


“아, 준장님!”


비몽사몽 한 채로 왜 낯이 익은 걸까, 생각하던 가름은 코트걸이에 걸린 자신의 군복을 보고 여기가 자신의 숙소임을 깨달았다.


그가 있는 곳은 그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 아니다. 모든 걸 얻고 모든 걸 잃어버린 그때가 아닌 것이다.


가름의 가슴을 옥죄던 불안이 서서히 풀어졌다.


새로 얻은 집, 그리고 새로 얻은 주인. 그리고 새롭게 얻은 사명.


“정신이 드십니까?”


서슴없이 손을 그의 이마에 대어 열을 체크하는 건 걱정스러운 얼굴의 소녀.


포니테일로 묶은 흑발의 좌우로 큼지막한 여우 귀가 나 있다.


충직하고 기특한 면이 있어, 부관으로 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여우다.


“괜찮아.”


어깨를 푼 가름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략 짐작하고 눈을 감았다.


“미안. 신세를 졌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준장님은 멋지게 적을 쓰러뜨리셨습니다!”


쿠도가 고개를 격하게 흔들지만, 3문을 열면 매번 이렇게 깨어날 때마다 난장판이 되어있는 걸 오랜 세월을 통해 이미 학습한 가름은 한숨을 쉬었다.


“나, 얼마나 누워있었냐?”


“오늘로 사흘째입니다.”


이 바쁠 때 사흘이나 뻗어있었다는 소리다. 전보다 능력의 반동이 심해진 건가.


“그 뒤로 어떻게 됐어?”


“마왕 각하께서 첩보부장님과 함께 준장 님을 기절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제도의 피해는 크지만 군의 계획에 큰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또 엄청나게 부순 모양이구만···”


그렇게 힘을 조심히 쓰려고 했던 나날들은 보답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래선 처음부터 전부 부숴버리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이번엔 의식이 날아간 상태에서 얼마나 죽음을 흩뿌렸을지.


자신의 꼴을 보았을 쿠도가 두려움을 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가름은 더 우울해졌다.


아군도 가리지 않고 전부 죽이는 힘이라니. 저주와 별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몸은 괜찮으십니까?”


한편, 쿠도는 가름이 일으킨 피해보다는 그의 건강상태가 더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조금 뻐근한데. 내가 멈췄으니 보스나 누님한테 한 방 제대로 맞은 거겠지. 그 지경이 된 나는 그 정도 날려주지 않으면 정신을 못 차리니 말이야.”


가름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건 감출 수 없었다.


옛 기억을 오랜만에 상기한 탓인가. 빠르게 뛰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린 건, 아마 아주 오랜만에 그것을ㅡ제3문을 해방한 탓이겠지.


“미안한걸, 대위. 칠칠치 못한 상관이라. 자기 능력을 제어도 못하는 라그나로크의 마수라니, 꼴불견이겠지.”


“준장님···”


“아쉽게도 본질이 이런 놈이라 말이야. 막아줄 사람이 있는 게 참 다행이지. 아군도 가리지 않는, 곁에 두기엔 꺼림칙한 능력이니까.”


그대로 풀이 죽는 가름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한 마리 여우.


어떻게든 주제를 돌리려던 쿠도가 뭔가 생각났는지 테이블에서 서류뭉치를 갖고 왔다.


“준장님, 그런 것보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범상치 않은 서류 두께를 보고 가름은 눈썹을 모았다.


맨 하단에 눈에 익은 도장이 찍혀있다.


“새로운 작전이냐?”


“예, 그렇습니다. 오늘 오전에야 마왕 각하의 최종승인을 받은 작전안입니다. 제국의 속국화 사업은 그대로 진행되겠지만 주력 부대는 본 작전에 투입됩니다.”


쿠도가 공손하게 내민 서류를 받은 가름은 서류철을 넘겼다.


원래 같았으면 자신을 통해 보스의 집무실로 올라갔을 서류다. 사흘이나 뻗어있느라 업무에 구멍이 생겼다면 빨리 만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모로 철부지 같은 면이 있는 가름이었지만, 군무부 권한대행의 지위를 받은 그는 자신의 의무를 확실히 숙지하고 있었다.


그의 주인이 내리는 거라면 뭐든지 하겠지만, 업무에 관련해서 의견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장성에게 주어지는 고리타분한 업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실전에 투입되는 게 그나마 귀찮음이 덜했다.


집무실 책상 앞에 온종일 앉아있을 바에 전장에 나서는 게 차라리 낫다고 가름은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귀찮은 일은 귀찮은 것에 변함은 없었지만.


“오? 정말 이게 최종안이냐?”


아직 반쯤 감겨있던 가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서류는 잔뜩 과장이 가미된 소설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장대하고 기상천외한 전개로 가득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가름도 이 정도로 흥미로운 글을 읽는 건 처음이었다.


“예. 피아넬 비 코르니아스 연구원장의 검수를 받은 최종본입니다. 감염 경로는 이미 소규모로 재현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 단어는 뭐냐? 보통 언데드라고 할 텐데.”


가름은 주석을 읽었다.


“왜 하급언데드를 다르게 부르는 거지?”


“이건 전파력이 높은 질병에 가까운 것으로, 기존의 하급언데드와는 조금 다르다고 합니다.”


쿠도가 가름의 곁에 붙어 페이지를 넘겨주어, 도움이 되는 내용을 찾았다.


“지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건 비슷하지만 자아가 완전히 결여되었다고 하네요. 있는 건 오로지 산자의 고기를 탐하는 욕구 뿐입니다.”


“그리고 한 번 물리면 그대로 감염되어 똑같은 짓을 되풀이 한다는 거냐···”


가름이 살짝 질린 얼굴을 했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피아넬 녀석이 생각할법한 짓이야. 이쪽은 팔짱 끼고 서서 놈들이 서로 뜯어먹는 걸 구경만 하면 된다니. 엘드리치라는 족속은 참 실망하게 하질 않다니까.”


“인간의 업보입니다. 그들이 쌓아온 죄의 역사에 합당한 벌이 되겠죠.”


가름은 조용히 서류를 덮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래선 깔끔하게 무너진 왕국이 차라리 행복해 보이는군. 황국 놈들도, 참 딱하게 됐구만.”


서류철에 적힌 좀비 어포칼립스, 라는 글귀가 햇빛을 받아 불길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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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마왕의 제안 +3 20.12.23 202 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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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불행은 오늘도 입맛을 다신다 +1 20.12.10 185 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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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커져가는 불씨 +3 20.12.04 210 5 15쪽
149 흘러내리는 피 +5 20.11.30 238 7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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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바이러스 개발 +3 20.11.16 243 8 12쪽
» 불길한 기억 +1 20.11.10 206 6 10쪽
145 상실은 검게 피어 오른다 +2 20.11.01 239 8 10쪽
144 대참사 +1 20.10.28 217 7 11쪽
143 소동의 마무리 +2 20.10.26 258 6 12쪽
142 광신의 끝 +1 20.10.15 234 6 12쪽
141 지켜보는 눈 +1 20.10.13 224 7 11쪽
140 비뚤어진 신앙 +1 20.10.07 236 7 10쪽
139 번견의 눈 +3 20.09.28 252 7 11쪽
138 백과 흑의 격돌 +1 20.09.02 238 5 10쪽
137 흔들리는 빛 +3 20.09.01 252 5 10쪽
136 검은 거탑 +1 20.08.27 217 7 9쪽
135 같은 곳을 보고 있어도 +1 20.08.23 223 8 9쪽
134 더는 묻지 않을 수 없다 +2 20.08.21 233 6 10쪽
133 늑대의 깨달음 +3 20.08.17 258 8 9쪽
132 다음 타깃은 +5 20.08.16 280 7 12쪽
131 그 손을 잡으면 +1 20.08.08 241 6 10쪽
130 마왕의 성 +2 20.07.30 269 7 12쪽
129 그의 직업은 전 용사 +1 20.07.15 256 5 9쪽
128 충돌 +2 20.07.06 272 8 10쪽
127 꼬리 +1 20.06.08 278 7 8쪽
126 유디트 황국 +1 20.05.25 348 6 9쪽
125 신살 +2 20.05.19 322 9 10쪽
124 궁니르 +2 20.05.06 280 8 11쪽
123 그리고 빛이 +1 20.04.18 292 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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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신살 +1 20.03.29 292 7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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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연극의 막을 올리다 +1 20.03.18 286 7 9쪽
117 함락 +1 20.03.15 289 8 8쪽
116 드리워지는 그림자 +1 20.03.12 426 7 8쪽
115 전장에 울려퍼진 총성 +1 20.03.08 288 5 9쪽
114 불타는 도시 +1 20.02.29 278 9 9쪽
113 마왕군의 침공 +1 20.02.26 300 7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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