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거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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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부사관, 준사관, 위관, 영관. 그리고 그 위에 장성.
군에서 장성급이 최전선에 직접 방문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원래라면 후방에서 지휘를 내려야 할 계급이 설령 전장에서 목숨을 잃기라도 한다면 그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으니까.
말 그대로 별이 떨어지는 건 부대 하나둘 잃는 것에 비할 수가 없다.
본래 참모 본부에서 뒷짐이나 지고 있는 게 어울리는 장성이 자발적으로 포화 속에 몸을 던지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설령 있다 하더라도 경우는 기껏해야 두 가지 정도로 한정된다.
고착된 전장에 승리를 불어넣을 수 있는 압도적인 강자ㅡ그 전투원으로 모습을 보일 때.
그리고 지휘계통등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다.
“중위!”
그렇기에 정찰보병연대 2중대장, 프엘리냐 대위는 어느 때보다도 더 긴장해있었다.
마치 처음 훈련받을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입은 바싹바싹 타들어 가고, 무슨 소리만 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신경이 곤두선 채다.
“준장님 말씀이십니까, 아직 도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 중대장의 긴장을 감지하고 바로 답을 하는 부관은 자신의 일은 아니라는 듯 태연했지만 직접 호출된 프엘리냐는 이야기가 다르다.
“막사 청소는 전부 끝냈지? 병사들 용모도, 가도도 깨끗이 닦아놓았지?”
“청소는 다섯 번 했습니다. 용모 단정히 하라고 각 소대에 지침 전달했고, 부서진 파편들도 깨끗이 치워놓았습니다.”
“사열대 집합은?”
“1개 중대 전부 집합해서 대기 중입니다.”
“그래... 또... 또 해야 할 게 뭐가 있었지?”
“없으니까 이거나 마십시오.”
“그래... 고마워.”
부관이 건넨 컵의 물을 순식간에 비우고, 프엘리냐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닦고 닦아도 식은땀이 멈추지 않는다.
아무런 예고 없이 그녀를 호출한 건 군무부 총사령관 권한대행인 가름 준장.
장성급 중에선 제일 낮은 준장이라지만, 보직을 생각하면 별 하나뿐의 권한을 휘두르는 건 아니다.
군무부는 마왕군의 모든 부서를 아우르는 부서로, 원래라면 마왕의 지휘를 받는 곳이다.
그 대행인 가름 준장은 마왕의 전 권한을 갖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그런 사람이 직접 행차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중대에.
별이 온다. 별이.
“긴장하지 말자, 긴장하지 말자. 긴장하면 더 그르친다고.”
중얼거리며 자신에게 주문을 거는 프엘리냐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중위가 한마디 한다.
“별일 아닐 겁니다, 중대장님, 며칠 전의 탈영 말고는 아무런 껀덕지도 없지 않습니까.”
“바로 그거야, 이 바보야... 그거라고...!”
프엘리냐 중대장의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이 제국 주둔군에서 병사가 탈영한 부대는 전 보병단을 통틀어서 우리 정찰2중대밖에 없어. 준장님이 온다고 한다면 그거 말고 뭐가 있겠냐고! 우리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목이 타는 프엘리냐는 빈 컵을 들어 마시려다 다시 내려놓는다.
얼마 전 병사 하나가 행방불명되어, 적에 의한 습격의 흔적도 없음이 확인된 뒤 최종적으로는 탈영으로 결론지어졌다.
탈영은 결코 가볍지 않다. 무단으로 부대를 이탈한다는 건 군기가 개판이라는 소리.
게다가 승전을 거듭하는 군에서 탈영?
완전히 지휘관이 무능하다는 걸 입증해버리는 꼴이다. 아무리 억울해도 위에서 보는 시선은 바뀌지 않는다.
“군본부에선 날 변방으로 보내버릴지도 몰라... 이대로면 평생 영관 계급장을 달아보지도 못한다고.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건데...”
왕국의 할렘가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겨우 부지하던 프엘리냐가 이만한 군에 들어온 건 순전히 운이다.
꼬박꼬박 월급에 품위 유지비까지 나오고 노후 연금까지 보장되는 마왕군이라는 건 살면서 처음 들어봤다.
토끼종의 아인인 킹래빗과 인간의 하프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후드를 벗지 못할 운명이었던 그녀가 입신양명할 기회를 얻게 된 건 일생에 딱 한 번 주어진 천재일우의 찬스인 것이다.
얼떨결에 왕국의 몰락과 함께 마왕군에 편입되고, 왜인진 모르겠지만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여러 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대위라는 자리까지 오르긴 했지만 개인의 무력이 출중한 것도 아니다.
특기인 정령마법은 전투에는 크게 쓸모가 없는, 수확이 가끔 풍년이 되게 해주는 정도의 마법이었으니까.
잘못하면 다시 시궁창 인생이다. 신기루처럼 출세가도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한번 잘못 보이는 순간 그대로 끝. 전부 펑, 하고 없어진다. 진급이 코앞인데.
별, 별이 보인다. 머리에 별이 하나, 둘, 셋.
“으... 으... 어떡하지...”
평상시에는 활기차게 솟아있던 프엘리냐의 두 토끼귀는 눈에 뜨게 풀이 죽어있다.
“그렇게 긴장해도 별 수 없습니다. 어차피 바뀌지도 않을 거 마음 놓으십시오.”
“너, 너는 자기일 아니랍시고ㅡ!”
“아, 오셨습니다.”
“삐캭!”
“뭡니까, 이상한 울음소리나 내고.”
깬다는 표정을 지은 부관이 금세 얼굴을 고친다. 통신석을 통해 '별'과 수행장교가 중대에 도착한 소식을 전해 받은 것이다.
“우선 지휘관 막사로 안내하겠습니다.”
“그, 그, 그, 그래···”
갑작스런 장성의 방문을 들었을 때부터 한숨도 못 잔 덕분에 쌓인 다크서클은 서투른 화장으로 어떻게든 가리고, 마무리는 의외로 가끔 상냥한 면이 있는 부관이 해주었다.
“후후, 하. 후후, 하.”
복식호흡을 하지만 심장박동은 점점 빨라지기만 한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져 온다. 가슴이 조인다.
오셨다, 그 분이.
덜덜덜덜.
춥지 않게 껴입었을텐데도 프엘리냐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막사의 입구가 열린 순간,
“충성!”
신병마냥 목청이 터져라 경례를 올린 그녀를 바라보는 눈이 두 쌍.
장난스러운 눈을 한 헬하운드가 하나.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처음 보는 여우꼴 마족이 하나.
계급은 각각 준장과 대위...!
“대위 프엘리냐! 이런 곳까지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닷! 영광입니댜!”
너무 굳은 바람에 혀가 조금 꼬이고, 프엘리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 너무 딱딱하게 안 해도 돼.”
간단한 손인사로 프엘리냐의 경례를 받은 장성은 그녀가 상상했던 근엄한 장군과는 전혀 동떨어진 태도로 말했다.
“바로 미안하지만 탈영이 있었던 곳으로 안내해줘. 조금 서두르고 있거든.”
◆ ◆ ◆ ◆ ◆ ◆ ◆ ◆ ◆
“여기지? 탈영이 있었다는 곳이.”
“예, 준장님.”
깍듯하게 선 프엘리냐를 뒤로, 가름은 반쯤 무너져내린 가도를 훑어보았다.
“작전지의 한가운데서, 어디로 탈영했다는 건데? 하늘로 솟기라도 했냐?”
“그, 그것까지는 저희도... 자세한 건 아직 조사하고 있습니다.”
부하의 관리 태만을 꾸짖는 것만 같아 프엘리냐는 잔뜩 긴장했지만, 가름은 더 힐난하는 것 없이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냄새가 난다 이 말이야.”
“예...?”
킁킁거리던 가름의 발이 멈춘 곳은 반쯤 무너져내린 골목길.
아무 이상 없어 보이는, 허름한 골목을 가름은 한참 쳐다보았다.
“정정해, 중대장. 이건 탈영사건 따위가 아니다. 뭔가 이상해서 와본 게 정답이었어.”
스윽, 하고 손으로 땅을 만진 가름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놈들은 여기 있었던 거야.”
◆ ◆ ◆ ◆ ◆ ◆ ◆ ◆ ◆
유디트 황국.
루드게이트 주교는 황국의 고위직에 몸담은 지 30년 이래, 최악의 소식을 받고 있었다.
“천벽인광의 거점이 괴멸... 했다는 겁니까.”
마물과 마족의 천적인 그들이 이리도 쉽게, 소리도 없이 당해버렸다는 건 도통 믿기 힘들었다.
침입을 허용한 흔적도 없는 데다, 거점의 단원들이 참살당하고 있는 동안 위에서는 공무원들이 멀쩡히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어난 건 일어난 거다.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해봤자 참담한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행방이 묘연한 건 두 명. 당직만 당했다고 하지만 앞서 마왕군 기지에서 잃은 둘을 합치면 벌써 4명의 공석입니다.”
그녀의 심복이 들려주는, 황국의 비공식 최대 전력이 깎여나갔다는 끔찍한 소식.
“아직 용사가 확인되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마왕군은 진군을 계속하네요. 황국만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가능한 빨리 연합군을 조직해야 하는데.”
루드게이트 주교는 그것의 어려움을 알았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한 일일수록 이상한 이유를 들며 반대하는 놈은 항상 있다.
최대의 장애물은 바로 레인 추기경.
황국이 다른 나라와 손을 잡는 건 국가주의로 똘똘 뭉친 레인 추기경 파벌이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나라를 팔아먹을 속셈이라고 여론몰이를 할 것이 뻔하다. 그 때문에 일부러 제국과 물밑접선을 해온 것인데,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제국과 왕국이 몰락한 지금, 아군이 될법한 건 공화국과 공국...”
한낱 파벌싸움에 황국마저 불길에 휩싸이게 둘쏘냐. 여태껏 그래왔듯, 마왕은 격퇴한다.
주교는 궁지에 몰린 심정으로 그리 다짐한 것이었다.
- 작가의말
이번화는 푸른거탑 보면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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