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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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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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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80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20.03.18 00:28
조회
286
추천
7
글자
9쪽

연극의 막을 올리다

DUMMY

완전히 함락된 제도의 황성은 온전한 방 등을 활용해 마왕군의 지휘실로 쓰이고 있었다. 일부가 폭격에 무너지고 불에 탔다 한들 잔해 따위를 치우고 나면 쓸 수 없는 건물도 아니다. 명목이 황성이었으니까.


황제가 체재한다는 방은 임시 지휘 통제실이다. 불필요한 가구를 빼고 나니 남은 충분한 공간에 통신용 장비와 책상 따위가 놓였다. 서류작업에 필요한 종이와 필기구는 이미 구비되어 있었기에 별다른 준비작업 없이 바로 작업에 들어가는 게 가능했다.


침공의 총지휘를 맡은 비서국장, 스키잔은 연락장교를 통해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보고를 듣는 참이었다.


“앞서 척후팀이 황제를 확보했다고는 하나 각지에서 전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희 병력의 손실은 적지만 이대로면 예상보다 제압에 시간이 걸립니다.”


요컨대 머리는 제압했으나 몸이 날뛰고 있다는 소리다. 통신망을 마비시킨 덕분에 제국 병사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제도가 적의 손에 넘어간 것도 알지 못하니 이런 전개가 나왔겠지. 사실을 말해준다 해도 적의 프로파간다라고 코웃음 칠 게 뻔하다. 제국군은 자신의 나라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으니까.


“제국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봐도 군사력이 강한 편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죠. 황제를 내세워서 항복을 권고하는 게 아닌 이상 쉽게 물러나지는 않겠고. 가용할 수 있는 마도중대도 한계가 있네요.”


스키잔이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지난 인마대전에서는 말단 통신병에 불과했던 그녀였기에 지휘관의 입장에서 지시를 내리는 건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총알도 공짜가 아니다. 제국의 제압에서 소모전을 벌이게 되면 비축해뒀던 탄약을 상당히 써버리게 되겠지. 하지만 제국의 자원을 손에 넣는다는 보장이 있는 한, 총알을 아낄 필요는 없었다.


“참모장교들은 대치 상태로 가면 얼마나 더 걸릴지 알 수 없다며 행동지침을 바라고 있습니다.”

“작전에 변경은 없습니다. 인간들이 성에 틀어박힌다면 성을 무너뜨리라고 하세요. 마도중대는 폭격이 필요한 지점에 우선적으로 배치합니다. 항복권고는 어디까지나 1회뿐. 어중간하게 하면 죽도 밥도 되지 않아요.”


스키잔의 말을 받아적던 연락장교가 잠시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아, 국장님. 마도3중대로부터 민간인들이 적군에 일부 섞여 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군의 보호를 바라고 합류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성에 들어가 있다고 하는데, 그들도 적으로 간주합니까?”


3중대라면 류아가 중대장으로 있는 부대다. 마음 약한 류아가 그런 보고를 올렸을 거라 짐작한 스키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남성은 성인이 되면 의무적으로 병기본 훈련을 받는다고 해요. 군복을 입지 않다고 해서 다 민간인은 아니란 소립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한, 그럴 생각이 전혀 들지 않도록 철저하게 부숴줘야 합니다. 철저한 승리가 아니면 마왕님에게 바칠 수 없습니다.”


그 말에는, 필요하다면 민간인 따위 가리지 말고 섬멸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 스키잔의 몇 마디로 인해 혹시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인간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지휘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철저한 수직관계를 유지하는 마왕군은 그녀의 의향대로 움직여주겠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죽던 스키잔은 사실 크게 관심이 없었다. 다 죽여버려서야 곤란하지만 필요한 만큼의 희생 범주 안에 들어간다면 아무 상관 없는 것이다. 철저하게 부서지는 인간의 나라는 그대로 그들의 업보가 만든 결과다.


“알겠습니다, 국장님.”


군화 소리를 내며 경례를 올린 연락장교가 나가며 문을 공손히 닫았다.


“제국 점령. 라드레이드. 천벽인광. 이 세가지를 동시에 치게 된 건 우연이 아니야... 모든 건 그 분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어. 반격의 여지도 제대로 주지 않는, 무시무시한 분.”


스키잔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제국처럼 기반이 잘 닦인 나라를 손에 넣게 된 것은 앞으로의 계획에 있어 희소식이다. 마법통신소를 무력화하긴 했지만, 조금의 수리과정만 거치면 그대로 가져다 마왕군의 통신망으로 쓸 수 있다.


장거리에 걸쳐 통신마법을 보낼 수 있는 마족은 한정되어 있고, 통신석도 귀하니 제국의 기존 시스템을 일부 채용하면 자원 면에서 매우 이득인 것이다.


“아아, 현명하신 분. 오만한 인류에 얼마나 큰 재악을 뿌려주실까. 이렇게 가까이서 보필할 수 있다니... 이것보다 더한 영광이 있을까.”


스키잔은 군복 가슴께에 달린 독수리 모양 배지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대륙뿐만이 아니야. 전 인류가 당신에게 굴복하는 그날까지, 함께하겠습니다.


◆ ◆ ◆ ◆ ◆ ◆ ◆ ◆ ◆ ◆ ◆ ◆ ◆ ◆ ◆ ◆


“이스. 이건 전해둬야 하겠군.”


나는 전언마법을 해제하며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어라, 갑자기 무슨 일이신가요.”

“제국은 함락되었다.”


나는 돌려 말하지 않고 있는 사실 그대로를 고했다.


“며칠내로 전부 정리될거다. 네 나라는 오늘을 기점으로, 미래를 잃었다.”


요란했던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아침을 맞은 우리는 일단 마을 내를 소개받고 있었다.


마나의 정수를 수집하는 제련소를 거쳐, 태초부터 이어져 온 지식의 보고인 도서관 앞을 지킨다는 두 개의 사자상 앞을 지나는 중이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가까이서 정말 움직이는지 손을 흔들어보는 시이나를 지켜보던 이스는 담백하게 말했다. 감정의 편린도 없이.


“그런가요.”

“황제의 신병도 구속했다. 아무래도 도망칠 생각도 없이 황성에 남아있던 모양이더군.”

“그 사람답네요.”


그저 그뿐이다. 이스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정적 사이 한줄기, 바람이 불었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 내게 영혼까지 판 너다. 자국민이 살해당하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나? 제압과정에서 분명히 희생자가 나올텐데.”

“류셀 씨는 흥미 본위로 살생을 하시는 분은 아니니까요. 희생이 나온다면 분명 이유가 있겠죠. 그렇다면 제가 꼬치꼬치 따져보았자 의미는 없어요. 파도에 거스른다고 해서 방향이 바뀔까요.”

“마치 나를 자연재해처럼 말하는군.”


그 말에 이스는 부정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는 지켜볼 의무가 있어요.”


더 큰 희생을 막으려 알트레아 왕국에 홀로 숨어들었던 공주. 그렇다면 내 조력이 되어주는 것이 더 큰 희생을 막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모르겠군. 모르겠고, 알고싶지도 않다.


시이나와 이스는 각자 남모를 이유로 나를 따르고 있다. 내가 걷는 길 끝에 기다리는 것이 뭔지 알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파멸뿐이야. 이전부터 계속 그래왔다.”


의미 모를 내 말에, 이스는 웃으며 답한다.


“꽃이 지는 것도 아름다울 수 있죠.”

“... 너 같은 바보 녀석들은 이전에도 있었지.”

“슬슬 여흥도 끝내는 게 어때요. 이만하면 충분히 즐긴 것 같으니까.”


이스의 말에는 나도 동감이다. 라드레이드에 온 목적은 드래곤의 의향을 파악하기 위해. 그리고 드래곤들의 불참이라는 결정을 내린 게 누구인지 안 이상 체재를 늘릴 필요도 없었다.


나는 거리를 두고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는 용을 손으로 불렀다.


“관광놀이는 이만하면 됐어. 디를 불러라.”

“건방지게ㅡ현자 님은 네 말 한마디에 불러낼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나는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네 그 말. 현자는 나와 협상하는 걸 거절하겠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용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안타깝게 됐군. 대화에 따라선 피를 보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내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마나를 보고 드래곤의 근육이 경직된다. 남매가 내 손에 어떤 꼴을 당했는지 직접 본 놈이다. 적어도 본인으로는 아무 저항도 못하고 당할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겠지.


“잠깐... 잠깐 기다려라.”


용이 금세 태도를 바꾼다.


“그렇게 나와야지. 얼른 불러와.”


던진 공을 물어오라고 강아지를 재촉하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치욕스럽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용은 현자의 거처가 있는 쪽으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이 웃기지도 않은 연극도 슬슬 끝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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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늑대의 가보 +2 20.12.28 189 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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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마왕의 제안 +3 20.12.23 202 7 13쪽
154 엔딩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3 20.12.20 363 6 13쪽
153 배우, 무대 위에 오르다 +1 20.12.14 216 8 13쪽
152 불행은 오늘도 입맛을 다신다 +1 20.12.10 185 9 13쪽
151 데드 맨 워킹 +4 20.12.06 227 6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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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바이러스 개발 +3 20.11.16 243 8 12쪽
146 불길한 기억 +1 20.11.10 206 6 10쪽
145 상실은 검게 피어 오른다 +2 20.11.01 239 8 10쪽
144 대참사 +1 20.10.28 217 7 11쪽
143 소동의 마무리 +2 20.10.26 258 6 12쪽
142 광신의 끝 +1 20.10.15 234 6 12쪽
141 지켜보는 눈 +1 20.10.13 224 7 11쪽
140 비뚤어진 신앙 +1 20.10.07 236 7 10쪽
139 번견의 눈 +3 20.09.28 252 7 11쪽
138 백과 흑의 격돌 +1 20.09.02 238 5 10쪽
137 흔들리는 빛 +3 20.09.01 252 5 10쪽
136 검은 거탑 +1 20.08.27 217 7 9쪽
135 같은 곳을 보고 있어도 +1 20.08.23 223 8 9쪽
134 더는 묻지 않을 수 없다 +2 20.08.21 233 6 10쪽
133 늑대의 깨달음 +3 20.08.17 258 8 9쪽
132 다음 타깃은 +5 20.08.16 280 7 12쪽
131 그 손을 잡으면 +1 20.08.08 241 6 10쪽
130 마왕의 성 +2 20.07.30 269 7 12쪽
129 그의 직업은 전 용사 +1 20.07.15 256 5 9쪽
128 충돌 +2 20.07.06 272 8 10쪽
127 꼬리 +1 20.06.08 278 7 8쪽
126 유디트 황국 +1 20.05.25 348 6 9쪽
125 신살 +2 20.05.19 322 9 10쪽
124 궁니르 +2 20.05.06 280 8 11쪽
123 그리고 빛이 +1 20.04.18 292 6 9쪽
122 사냥 +1 20.04.06 305 7 8쪽
121 죽음의 문턱. 그리고 거래 +2 20.04.02 290 8 9쪽
120 신살 +1 20.03.29 292 7 7쪽
119 스카디 +1 20.03.22 278 11 9쪽
» 연극의 막을 올리다 +1 20.03.18 287 7 9쪽
117 함락 +1 20.03.15 289 8 8쪽
116 드리워지는 그림자 +1 20.03.12 426 7 8쪽
115 전장에 울려퍼진 총성 +1 20.03.08 288 5 9쪽
114 불타는 도시 +1 20.02.29 278 9 9쪽
113 마왕군의 침공 +1 20.02.26 300 7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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