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특수부 정종신 검사
28. 특수부 정종신 검사
윤석의 구둣발 소리만이 복도를 뚜벅뚜벅 울린다.
늘 정신없이 바쁘게 오가던 직원들도 오늘따라 보이지 않아서 복도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홍기면 지검장은 압력에 굴할 사람은 아니다.
학교 선배라서, 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지인이라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대쪽검사라는 별명이 의미하는 것처럼 쪼개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곧은 사람, 그게 바로 서울중앙지검장 홍기면이다. 그런 사람이 압력에 굴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지검장실이다.
똑똑..!
문을 연 윤석은 대뜸 고개부터 숙였다.
“찾으셨습니까.”
“그래, 어서 와서 앉아.”
책상에서 일어난 홍기면이 소파로 나왔다.
윤석이 홍기면의 앞에 앉았다.
“커피?”
“아니, 괜찮습니다.”
“좋아, 유인홍 고검장이 김진우 변호인으로 왔다며?”
“네.”
“태산에서 그 양반을 그냥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네, 가방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거절했더니 하나 더 준비하겠다는데 그것도 거절했습니다.”
윤석은 당당했다.
만약에 그 돈을 받았다면 이런 압력도 없었겠지만 스스로도 이처럼 당당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그런 윤석을 물끄러미 보던 홍기면 지검장이 입을 열었다.
“꽤 큰 금액이었을 텐데 왜 안 받았어?”
“네?”
“아니, 생각해 보게. 태산과 연줄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그걸 왜 안 받은 거야?”
“네? 그걸 왜 받습니까?”
윤석의 어처구니 없어하는 모습, 홍기면이 마치 그런 윤석의 내면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이 날 선 비수와도 같았다.
윤석은 순간 움찔했지만 그뿐이다.
그리고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홍기면의 눈빛에 괜히 울컥하면서 울분이 솟구쳤다.
“지검장님, 지금 그거 안 받았다고 나무라시는 겁니까?”
윤석이 따지듯이 물었다.
그제야 홍기면이 얼굴을 풀었다.
“아니, 잘했어. 정말 잘한 거야. 예전처럼 돈에서 자유로운 모습이 보기 좋구먼.”
“지검장님, 지금 시험해 보셨다는 거죠?”
“그건 아닌데 뭐, 아무튼 지금도 전화를 해서 김진우를 풀어달라는 거야. 조용태 하나로 마무리하자는데 어떻게 생각해?”
“뭘 어떻게 아니, 생각하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지검장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증거가 워낙 명확하다고 하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연락이 올 것 같다. 청장님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고 어쩌면 저 쪽 기와집에서도..”
홍기면 지검장이 말을 흐렸다.
하나 윤석은 여전히 밝은 얼굴이다.
“그래서 지검장님은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나는 자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윤석은 홍기면이 지금 한 말이 그의 진심이라는 걸 잘 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을 아끼고 있었는데 가족처럼, 그러니까 아들이나 조카로 생각하는 거다. 사실, 윤석도 홍기면을 삼촌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니 피차일반이다.
홍기면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특수부 정종신에게 이 건을 맡길 생각이야.”
왠지 조심스러운 말투, 홍기면은 그렇게 말하면서 윤석을 슬쩍 보았다.
윤석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홍기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평소 윤석의 모습이 아니다.
사실, 이 얘기를 꺼내기까지 꽤 여러 시간을 고민했었다.
얘기를 꺼내는 순간, 윤석은 얼굴을 시뻘겋게 달굴 것이고.
[지검장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제보를 받고 직접 출동해서 체포해 왔는데 왜 다른 검사에게 넘겨야 합니까? 그렇게는 못합니다. 아니, 이 사건은 제가 끝까지 마무리할 겁니다. 정말 지검장님께, 아니, 선배님께 실망했습니다.]
이렇게 비통해하며 소리를 지르는 게 정상이다.
그러니 홍기면은 당연히 이런 반응을 예상했던 것인데 아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솔직히 검사들의 자존심은 최고다.
검사라면 눈을 부릅뜨면서 거부감을 보이는 게 당연한 거다.
혹여 그렇지 않다고 해도 결코 쉽게 대답할 수는 없는 내용이었다. 그게 대다수 검사들이 보이는 반응일 것인데, 그런데 하물며 일반적인 그런 검사들도 아니고 중앙지검에서도 최고의 고집불통이라는 윤석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고 순응한 것이다.
놀란 홍기면 지검장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니, 자네 괜찮은가?”
“네?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김진우 건이 아깝지 않아? 억울하지도 않고?”
“어차피 일인데 뭐가 아깝겠습니까. 더군다나 여기저기서 압력이 들어온다는데 그걸 굳이 붙잡고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앞으로 시달릴 걸 생각하면 저보다 훨씬 더 능력 있고 압력에도 굴하지 않을 능력 있는 선배 검사님들이 맡아 주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냥 어떤 검사가 됐든지 정말 제대로 수사해서 김진우에게 철퇴를 가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특수부 정종신 선배라는데 더 말 할 것도 없지요.”
“진심인가?”
“네?”
“지금 그 말이 진심이냐고?”
“아, 뭐 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제가 그냥 순순히 사건을 넘긴다는 게 중요하지.”
윤석은 아주 천연덕스러웠다.
홍기면 지검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거다.
“자네 정말 많이 달라졌구먼.”
“좀 변해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허참.. 하늘이 뒤집어졌나? 해도 분명히 동쪽에서 제대로 떴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지검장님, 저 멀쩡합니다. 이상한 놈처럼 보지 마세요.”
“그러니까 이상한 거지..”
“아무튼 사건 인계하겠습니다. 특수부 정종신 선배한테 넘기면 되는 겁니까?”
“응? 으응, 그래. 그러면 되지.”
“그럼, 그렇게 알고 가보겠습니다.”
“어, 그 그래. 수고하게.”
홍기면 지검장은 윤석이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스마트폰을 열어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이내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그래. 홍 지검장이 웬일이신가?
“형님, 갑자기 궁금한 일이 생겨서 전화 드렸습니다.”
-뭔데?
“윤석이 말입니다.”
-우리 애가 왜? 또 말썽 피웠나? 그런 거라면 나한테 얘기하지 말게. 나도 이제는 손 뗐어. 다 큰 자식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어떻게 서른다섯이나 된 놈이 아직도 철부지처럼 구는지..
김주태의 큰 목소리에 홍기면 지검장은 입맛이 썼다.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에 쌍심지를 켠 김주태가 고개를 저어대는 게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뭔데?
“그게 그러니까 윤석이가 예전하고 달라진 것 같습니다.”
-달라져? 뭐가?
“180도 달라졌어요. 좀 전에 사건을 다른 검사한테 넘기라고 했는데 윤석이가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거예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요, 윤석이가 어디 자기 사건을 넘겨 줄 애입니까? 다른 검사 사건을 뺏어오면 뺏어왔지 절대로 자기 걸 빼앗기지 않을 꼴통 중에서도 꼴통 아닙니까?”
-야! 너, 이 새끼 뭐? 꼴통!
“아니, 그게 제 얘기는 그게 아니고 그만큼 자존심이 센 놈이 바로 윤석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꼴통 아니, 윤석이가 사건을 넘기라는데 그냥 순순히 응했다니까요.”
-기면아.
“네, 형님.”
-넌 우리 애보다 더한 꼴통이었잖아.
“아니, 지금 그런 얘기가 아니고..”
-어쨌든지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그랬겠지. 우리 석이가 그냥 귀찮아서 그랬을까. 그러니 잘 지켜봐. 괜히 이상하다느니 뭐니 해서 정말로 귀찮게 하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이따가 올라와, 저녁이나 같이 먹게.
“그럴까요? 그럼, 안사람과 같이 올라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홍기면 지검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윤석이 뭔가 꿍꿍이가 있었다는 걸 알아챘을 것인데, 굳이 괜히 전화까지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고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도 윤석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사건을 넘긴 것인지 궁금했다.
그 시간, 자신의 사무실로 향하는 윤석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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