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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의 하루] 헌책방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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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 오기 전에 1년 반 정도 도쿄에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전 미국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전공이 일본사였던 까닭에 

논문 자료 조사를 위해 1년동안 도쿄대학에 연구생으로서 적을 두고 생활했어야 했었죠.

하지만 일본 대학에서의 자료수집활동이 생각보다 원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폐쇄적인 일본의 도서관 시스템 때문이었죠.

외국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1차 자료 때문에 일본에서 조사활동을 하긴 했지만 

2차자료는 일본보다 차라리 미국에서 찾는 것이 더 편했습니다.


미국대학은 대학 도서관 자체의 장서량이 어마어마합니다. 

대학도서관중에 제1의 장서량을 자랑하는 하버드대학이 2500만권. 

그리고 제가 다녔던 대학이 1300만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모든 대학의 도서관이 네트워크로 묶여있어 

미국은 물론 해외 도서관에 있는 책까지 학생이 원하기만 하면 공수해서 빌려준다는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예요. 대학원생이 원하는 책은 비싼 책이라도 웬만하면 도서관에서 사놓습니다.

제가 “한일관계사료집성”이란 책 한 질이 필요하다고 신청해서 도서관이 그 책을 들여놓은 적이 있는데

그 때의 책값이 300만원이었습니다.


어쨌든 미국에서 대학원 다니면서 책을 사야할 필요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정말 두고두고 볼 책 아니면 도서관을 통해 빌려보는게 일반적이었죠. 

대출권수제한 99권에 대출기간이 사실상 무기한.

6개월에 한번씩 온라인으로 갱신신청만 하면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대출신청이 들어오기 전에는  

졸업하기 전까지 책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일본대학, 특히 도쿄대학의 도서관 문화는 너무 달랐습니다. 

중앙도서관이 있긴 하지만 거의 모든 학부가 독자적인 도서관을 따로 가지고 있는데, 

같은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이 도서관들이 서로 이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도서관에 따라서는 타학부생에게는 책을 안빌려주는 도서관도 있고, 

대출이 안되어서 복사나 필사만 허용하는 도서관도 있을 지경이었으니까요. 

대출한다고 하더라도 대출기간이 2주일밖에 안되어서 책도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본의 대학원생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책은 자기 돈을 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애서가들도 많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책은 두권을 사서 한권을 줄 그어가며 읽는 용도로 

또 한권은 서가에 깨끗하게 보관하는 용도로 쓰는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습니다.  

문제는 일본의 학술서적들 가격이 상당히 꽤나 비싸다는 것이죠. 

어느 정도 대중성이 있는 학술서적은 1,500엔에서 3,000엔 정도의 가격인데,

정말 소수의 연구자들 밖에 안볼 것같은 책은 7000-10,000엔 짜리 책도 흔합니다. 


이런 문화 덕분인지 도쿄대학의 캠퍼스가 있는 혼고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간다와 진보쵸라는 곳에 일본 최대의 고서점 거리가 있습니다. 

헌책방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데 헌책방이라고 해서 

다 쓰러져가는 동네 구멍가게를 상상하시면 안됩니다.

장서량도 상당하고 책방마다 전문으로 삼는 분야가 따로 있어서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책들, 절판된 책들도 고서점에서 대부분 구할 수 있거든요. 

게다가 일본 고서점네트워크라는 데이타베이스 사이트가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책이

어느 서점에 있는지 검색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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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도쿄 갈때마다 들리는 단골 가게가 몇 군데 있는데 전공이 전공이다보니 

역사, 그중에 사상사 중심의 책을 많이 들여놓는 곳을 자주 찾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동양당서점인데요. 여기는 정말 보물섬같은 곳입니다. 

필요했던 불교서적 중에 정가 30,000엔 짜리 책이 있었는데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했더니 동양당에서 그 책을 3,000엔에 팔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도쿄에 갔을 때 냉큼 책을 사러갔는데, 

책을 집어보니 출판연도 1925년.

무려 90년전 책이었는데 상태가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습니다.


정말, 이 재미에 헌책방을 가게 되는 거죠. 

산처럼 쌓여있는 책들 사이에서 

원하던 책을 발견했을 때의 흥분. 

희귀한 책을 싸게 손에 넣었을 때의 쾌감은 

거의 마약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고서점의 매력은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그곳은 책에 대한, 그리고 활자에 대한 

일본사람들의 경외심을 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지나간 기억과 기록들이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것을 보면 

놀랍기도 하고 또 부럽기도 하지요. 


소설, ‘비브리아 고서당의 사건수첩’은 

저의 이런 헌책방에 대한 향수를 전면적으로 자극하는 작품입니다. 

게다가 고서에 얽힌 미스터리라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침대에 누워 목만 내놓은 채 

이제 1권 <시오리코씨와 기묘한 손님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밤날씨는 춥지만 이불 속은 따뜻하고 책속의 풍경은 포근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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