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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대체역사

완결

블랙빙고
작품등록일 :
2021.10.28 20:13
최근연재일 :
2022.10.01 11:40
연재수 :
21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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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64
추천수 :
621
글자수 :
1,208,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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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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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데카메론 이야기(2)

DUMMY

뿌듯한 기분으로 자존감이 올라가는 것도 잠시, 다시 만찬실의 ‘골드 바’ 사건이 떠오르며 짜증이 밀려왔다.

참아야 하겠지.


“<라 포르나리나>의 모델은 라파엘로의 연인이었어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화면 밖 관객을 보고 있죠. 그에 반해 앵그르가 그린 <샘>의 모델은 무표정하고, 심지어 화면을 응시하지도 않아요. 그런데도 저는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어떤 남자를 흠모하는 여자의 표정이 저런 것일 수 있구나.”


그 뒷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레이디 오스틴 러셀이 오늘 저녁 만찬에서 살짝 입술을 벌리고 멍한 눈빛으로 아르마 남작님을 바라보던 표정.

그림 속의 모델과 싱크로율 99%였다는.


아르마 남작님은 나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역시 버머씨의 제자답네요. 백작가의 희망을 여기서 보는군요, 우드빌씨.”


버머씨가 내 얘기도 했나 보다.


“덕분에 저도 새로운 관점에서 그림을 볼 수 있게 된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우드빌씨.”


순간, 레이디 오스틴 러셀이 황급히 입을 가리며 재채기를 했다.


-에치! 에에-취이.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손수건을 입으로 가져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남작님.”


남작님은 몇 걸음을 지나 다음 그림 앞에 멈추셨다.


“조금 전 상황과 이 그림에 상당한 연관이 있을 것 같네요. 우드빌씨?”


젊고 아름답고 잘생긴 사람들이 모여 앉아있는 그림이다.

우측에 악기를 든 남자가 뭔가를 이야기 중이다.

좌측에 앉은 여자들은 남자의 이야기에 빠져 있는지, 남자의 외모에 빠졌는지 그를 뚫어지기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 소설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나오는 한 장면 같습니다. 소설에서, 흑사병을 피해 시골로 내려간 10명의 젊은이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 사람씩 돌아가며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아르마 남작님은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던 레이디 오스틴 러셀 쪽으로 시선을 돌리셨다.


“혹시 소설을 읽으셨나요?”


갑자기 시선을 마주하자, 흠칫 놀란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음···학교에서 교양수업 시간에···채, 책을 읽은 것은 아니고···.”


데카메론은 19금을 넘어 거의 29금 소설이다.

6백 년 전에 쓰인 중세시대 소설이지만, 소재도 정말 신박해서 넷플릭스 29금 드라마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


“‘데카메론’은 르네상스 문학사에서 단테의 ‘신곡’과 함께 언급되는 작품입니다. 당시 사회, 종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아 바티칸에서 금서로 올렸었죠. 내용이 많이 외설적이기도 하고요.”


남작님을 바라보는 레이디 오스틴 러셀의 얼굴에 홍조가 짙어졌고, 남작님도 그녀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핑크빛 기류로 꽁냥꽁냥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베니스의 곤돌라 사공이 된 것 같다.

푸치니의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라도 한 곡 불러줘야 할까.

가사를 떠올리며 인물들을 대입하자 공작님이 안쓰러워졌다.


“우드빌씨? 제가 조금 전 한 말 기억하시죠? 이 그림과 조금 전 상황이 이어진다는 게 어떤 뜻일까요?”


남작님의 질문에 상상의 끈 타래가 풀리며 현실로 돌아왔다.


조금 전 상황이라는 게 뭐였을까.

갑자기 생각하려니 기억나지 않아 모르겠다.


순간, 남작님의 눈에서 빛이 반짝이다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남작님의 품속에서 뭔가 번쩍했고 그의 외눈 안경에 반사된 거였다.


“잠시만요, 우드빌씨.”


남작님이 품속에서 꺼낸 것은 담배케이스였다.

담배케이스를 둘러보던 남작님은 다시 품속에 넣으셨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 모습이 낯익다.

아니, 저 사람이 낯익다는 게 아니라 방금 저 모습. 뭔가를 꺼내서 훑어보다가 주머니에 넣는.


스마트폰 문자 왔을 때 딱 그 행동 패턴인데.

설마, 100년 전에 스마트폰은 무슨.


남작님이 내게 시선을 돌렸을 때, 조금 전의 말도 안 되는 생각은 흩어져 버렸다.


“죄송합니다. 남작님. 떠오르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레이디께서는 재채기하셨지요. 저는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이라 했고요.”


맞다. 이제 생각났다.

그런데 그거 별거 아닌데.


“알겠어요, 남작님! 이 그림과 조금 전 상황의 관계에 대해서요.”


막 말문을 열려는 찰나, 레이디 오스틴 러셀이 번쩍하고 손을 올렸다. 칭찬받고 싶어 안달이 난 초등생처럼 빨리 말하게 해달라는 듯 졸랐다.


“이번엔 제가 말씀드려도 될까요? 우드빌씨?”


누가 말하면 어떠냐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아름다운 레이디. 그럼 설명을 들어볼까요?”


호칭 앞에 붙은 수식어 때문인지,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백치미녀가 되었다.


“흑사병에 걸리면 고열과 기침과 같은 증세라고 들었어요. 사망 후에는 시체가 검게 변한다고 하여 흑사병이라 불리게 되었고요.”


좋은 시작이다. 남작님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서요?”


“그 이후 옆 사람이 기침 또는 재채기를 하면 흑사병이 아닐까 걱정이 되어 신의 은총을 빌어 준 것이 지금까지 관습처럼 이어졌다고 해요. 제 설명이 맞았나요? 남작님?”


남작님은 자랑스러운 제자를 보는 푸근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한동안 그녀와 따뜻한 눈빛을 교환하던 그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르네상스 이야기 나와서 말인데요. 전 이게 또 궁금해지는군요.”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학습법으로 돌아왔다.


“저녁 자리에서 공작님이 말씀하신 작품들요. 왜 15세기 후반 피렌체의 미술작품들은 희소성이 높을까요?”


이건 일반인들도 쉽게 알지 못하는 부분이다.

아무리 예술에 관심이 많다고 해도 남작님이 이런 부분까지 다 공부했을 리는 만무하고.


“남작님은 어떻게 아셨나요?”


내 질문이 어려웠을까.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친 나의 당돌한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그였다.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고, 내게 있을지 모르는 뭔가를 찾기 위한 탐색 같기도.


“아까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저희 가풍 덕이라고 말씀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말씀하시는 우드빌씨는 답을 알고 있다는 표정이군요.”


아니지, 지금 이 시대엔 답이 없었지.

20세기 중반 이후 미술사학자들이 추가로 발견한 기록들을 분석하여 가설을 세우고 이론을 정립한 거니까.


“그냥 퍼즐 맞추듯 하나씩 끼워서 생각한 거예요. 제 개인의 의견이니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해요.”

“제가 원하는 바가 바로 그겁니다. 우드빌씨.”


최대한 발견 자료와 연구자의 가설 등은 배제한 채, 옛날 이야기하듯 설명을 시작했다.


역사적인 배경은 찬란했던 메디치가의 지원으로 지금 우리가 아는 르네상스가 태동했던 피렌체. 하지만 인생이 무상하듯 권력. 특히나 대중들의 정치인을 향한 인기와 지지율이라는 것은 흔들리는 갈대와도 같은 것.


영원할 것 같던 메디치가가 쫓기듯 해외로 망명한 후, 권력의 공백을 메꾼 사람은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으로 불타올랐던 수도사 사보나롤라였다.


정권을 잡은 그는 신정 정치를 시행하며 사치스러운 미술품이 인간을 현혹하고 정신적 타락으로 이끈다고 하여 수많은 그림을 불태우고 조각상은 부수어버렸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피렌체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거장들의 명작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한 피렌체 귀족들은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장소에 작품들을 숨겨 놓은 채, 비교적 당대에 명성을 얻지 않았던 예술가의 작품 위주로 관리 당국에 내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살아남은 당대의 예술품들은 희소가치가 인정되어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고. 예술의 환란 시대를 꿋꿋하게 버티고 살아남은 작품으로 포장되어.


짝짝짝-!

남작님의 박수 소리에 레이디 오스틴 러셀도 박수를 따라치기 시작했다.

다만, 남작님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뭔가 미심쩍어하는 분위기다.


꼬집어 말하긴 뭐하지만, 뭔가 의심스럽다는.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나의 설명을 완성해주었다.


“우드빌씨의 완벽에 가까운 가설에 굳이 첨언을 드리자면 수도사 사보나롤라에 대한 평가는 계속 수정 중입니다. 어쩌면 그는 진정한 종교 개혁가였을지도. 아시겠지만 역사는 승리자의 편이랍니다.”


이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은 내가 되었다.

그에 대한 재평가 논문도 20세기 중반이 돼서야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저 남자. 수상하다.’라는 내 표정을 읽은 듯, 그는 낮게 읊조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죠. 역사도 그런 것일 겁니다.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어쩌면 후대의 역사가 앞선 시대에 주는 가르침일 수도.”


혼잣말일까.

마지막은 앞뒤가 바뀌었는데.

그를 향해 다시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그의 시선은 홀 건너편을 향했다.


“이제 슬슬 다시 모일 시간이 되었네요. 레이디? 그리고 우드빌씨?”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귀부인들께서 알렉스씨의 안내를 받으며 홀을 가로질러 가신다.


우리도 응접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도착해 있던 남성분들과 귀부인들의 대화가 시작되었고, 고모님은 레이디 오스틴 러셀을 공작부인께 데려가셨다.


“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요? 우드빌씨.”


남작님은 ‘넌 나에게 궁금한 게 있을 것이야’라는 표정이다.

물론 있지만, 질문할 수 없는 거다.


“방금까지 머릿속에 있었는데. 다른 생각이 떠올라서 잊어버렸네요.”


“괜찮습니다. 저도 자주 그러니까요, 우드빌씨. 그런데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까요?”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은 ‘소리와 빛’이었다.

'남작님의 담배케이스 때문이었을까?'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두 장면이 머리에 겹쳐졌거든.


“악마와 계약한 화가 얘기요. 그 화가가 그린 그림에서는 악마가 나온다고 하더군요.”


뇌를 거치지 않고 불쑥 얘기가 튀어나왔다.

‘악마’라는 단어가 나오자 남작님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하, 그렇군요. 악마는 나와서 어떤 일을 한다고 하던가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남작님. 버머씨 화실에서 뭔가를 잘못 봤는데 저를 놀리려고 말을 지어낸 것 같아요”


남작님은 눈에 걸쳐있던 외눈 안경을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고개를 든 그의 눈썹이 화난 듯이 올라가고 있다.


“정확히 어떤 것을 보셨지요? 우드빌씨.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목소리 톤도 그대로고 표정의 변화도 없는데 한기가 느껴진다.


"아, 이런. 잠시만요. 우드빌씨."


남작님이 품에서 담배케이스를 다시 꺼내셨다.


담배케이스는 여전히 빛이 깜빡이고 있다.

인상을 쓰던 그는 엄지손가락을 케이스 표면에 가까이 댔다.


그리고 스르륵 움직였다?!

살면서 수도 없이 봐서 익숙한 자세.


저거 진짜 스마트폰일까.

내 시선을 눈치챈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눈짓으로 자신의 담배케이스를 가리켰다.


“우드빌씨는 지금 무엇이 보이나요?”


그의 손에 들린 손바닥만 한 물건으로 시선을 옮겼다.

스마트폰이라고 말하면 웃길 텐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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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신대륙과 만나다(1) 22.02.03 194 3 12쪽
58 한쪽 문이 닫히면(2) 22.01.20 334 3 19쪽
57 한쪽 문이 닫히면(1) 22.01.19 263 3 15쪽
56 매듭 풀기 22.01.18 238 3 14쪽
55 전당포 사나이들 22.01.17 250 2 14쪽
54 좋은 찻잎을 얻는 방법(2) 22.01.16 242 4 13쪽
53 좋은 찻잎을 얻는 방법(1) 22.01.15 247 3 14쪽
52 천국보다 낯선 22.01.14 247 2 13쪽
51 장미들의 싸움(3) 22.01.12 251 4 13쪽
50 장미들의 싸움(2) 22.01.11 248 3 13쪽
49 장미들의 싸움(1) 22.01.10 253 2 13쪽
48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면(2) 22.01.09 255 3 16쪽
47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면(1) 22.01.08 260 2 17쪽
46 비극의 탄생(2) 22.01.07 256 3 13쪽
45 비극의 탄생(1) 22.01.05 268 3 13쪽
44 선을 넘다(2) 22.01.04 268 2 16쪽
43 선을 넘다(1) 22.01.03 265 4 15쪽
42 공작가의 만찬(2) 22.01.02 272 3 13쪽
41 공작가의 만찬(1) 22.01.01 280 2 14쪽
40 버머씨의 순례자 수업 21.12.31 282 4 15쪽
39 마법 할머니의 초대(2) 21.12.30 285 5 16쪽
38 마법 할머니의 초대(1) 21.12.29 292 3 16쪽
37 미스 다비와 산책을(3) 21.12.28 301 4 13쪽
36 미스 다비와 산책을(2) 21.12.27 306 5 13쪽
35 미스 다비와 산책을(1) 21.12.26 324 3 15쪽
34 크리켓 공의 색깔 21.12.25 327 3 15쪽
33 통곡의 벽(2) 21.12.25 325 4 12쪽
32 통곡의 벽(1) 21.12.24 332 5 13쪽
31 크리켓 공 21.12.24 346 4 15쪽
30 글라스 하프(2) 21.12.23 366 5 14쪽
29 글라스 하프(1) 21.12.22 377 4 14쪽
28 덮어쓰기 21.12.21 384 3 13쪽
27 순례자들(2) 21.12.20 421 4 14쪽
26 순례자들(1) 21.12.19 424 3 12쪽
25 의회 개회식(2) +1 21.12.19 441 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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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리버스 자작(1) 21.12.13 565 7 12쪽
17 남쪽 숲(2) +1 21.12.12 578 8 14쪽
16 남쪽 숲(1) 21.12.11 604 8 12쪽
» 데카메론 이야기(2) 21.12.10 627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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