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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대체역사

완결

블랙빙고
작품등록일 :
2021.10.28 20:13
최근연재일 :
2022.10.01 11:40
연재수 :
21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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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68
추천수 :
621
글자수 :
1,208,896

작성
21.11.26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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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소년의 초상(1)

DUMMY

거울에 비친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

시차 때문인지 퀭하고 속도 울렁거린다.


‘누가 보면 굉장한 모험이라도 다녀온 줄 알겠어.’


내가 뭘 하던 중이었을까.

생각이 떠오른 나는 만찬실로 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서자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


“형님이 결혼한 그때부터일 거야. 결국, 이렇게 된 게···.”


그는 말을 끊고는 나를 쳐다봤다.

저놈 때문이었다. 밖에 나간 이유가.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껄끄러웠다.

말주변도 없는 데다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니까. 그보다 안 좋은 것은 꽉 막힌 장소에서 낯선 주제를 곁들인 식사.


딱 지금이 그런 경우.

게다가 뒤에는 고용인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다.


중년 남자의 얼굴을 훑었다.

내가 작위를 포기하면 다음 서열은 자기라고 했던가.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이라고 식사시간 내내 불편한 대화주제만 꺼내는 건지.


“신부님?”


깔깔거리며 세상에 나온 사람처럼 식사 내내 웃고 계신 신부님을 불렀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야 철이 들까요?”


중년 남자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자기를 돌려 까는지 눈치챘으려나.


“영원히 철들지 못할 것 같네요.”


기대 없이 던진 말에 답은 바로 나왔다.

신부님은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에, 성서에서 제일 오래 산 사람이 있어요. 에녹의 아들인 무드셀라지요. 혹시 몇 세까지 살았는지 아시나요?”


질문을 던진 신부님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그런 걸 알 리가?’라는 표정으로 모두 시선을 피했다.


“백작님, 우드빌 하원의원님, 우드빌씨, 그리고···. 미스 권?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편하게 저를 보세요.”


다시 사람들은 신부님과 시선을 맞췄다.

그는 만족한 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정확히 969년을 살았어요. 태초의 인간 아담부터 홍수의 시대 노아까지는 평균 수명이 800년 정도 되었지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자신과 눈이 마주친 사람들의 동공이 흔들리자 그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성직자가 아닌 제 개인의 의견이니까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허허허. 사람은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었던 거예요.”


다들 성직자가 들려주는 성스럽지 않은 얘기에 집중했다. 목을 축인 신부님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500살 정도는 살아야 철이 들지 않겠어요? 이제 인간이 철들지 못하는 이유를 다 아시겠죠?”


신부님이 나를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셨다.


“그러니 내 앞에 있는 누군가가 맘에 들지 않는다 해도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 보세요. 그저 덜 여문 것이라 생각하면서요. 허허허.”


신부님은 처음부터 냉랭했던 분위기를 다 읽으신 모양이다.


만찬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나이프가 접시를 긁어대는 마찰음만 가득하다.


“백작님? 조금 아까 저분요. 몇 대 백작님이라 하셨죠? 자꾸 물어보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자 만찬실에 온기가 올라왔다. 상석에 계신 백작님. 아니, 할아버지의 시선이 초상화를 향했다.


“필리프 우드빌, 14대 리버스 백작님입니다. 미스 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퇴위한 백작입니다. 아들놈에게 작위를 양위했거든요. 비록 고인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냥 편한 대로 부르세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자 하니.”

“네? 네?”


그녀가 움찔하며 포크를 내렸다.


“미스 권은 한국계 미국인이라 들었어요. 그런데···.”


의미를 알아챈 그녀가 바로 답했다.


“어머니가 미국분이세요. 그래서···.”

“그렇군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 녀석. 아니, 손자놈과 사귄 지는 꽤···.


“으흐흠.”


헛기침으로 말을 끊자, 지수는 나무라듯 나를 보다 입을 뗐다.


“네, 맞아요. 백작님. 릭과 5년 만났어요.”


중년 밉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가 혀를 찼다.


“쯧쯧, 결혼 얘기도 슬슬 나왔을 텐데. 남자친구네 집안이 어떤지 아직 못······.”


손에 든 나이프와 포크를 던지듯 접시에 떨궜다.


“저기요?”


흠칫 놀란 그의 미간 주름이 짙어졌다.


“저기···요? 내가 먼 친척이긴 하지만 네 작은 아버지뻘이란다.”

“그런 건 관심 없고요. 당신이 건넨 서류 읽어봤어요.”


처음부터 영국 귀족 같은 거 생각도 없었다.

나와 지수.

미국에서 하는 일에 만족하며 살았는데 다짜고짜 불러서는 작위 포기각서에 위로금이라니···.



영국에서 걸려 온 집사장의 전화.

아버지의 1주기 추도예배. 돌아가셨는지도 몰랐는데 1주기란다.

굳이 참석하라고 한 것은 그 서류 때문이리라. 이렇게 마주 보고 확실히 하려는.


“추후의 분란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지. 사람 맘이란 게 좀 간사해야 말이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경을 긁는다.


“추도예배 끝나면 포기각서에 사인하고 바로 떠날 겁니다. 위로금도 필요 없고요. 제가 무슨 거지도···.”


“릭?”


지수가 나의 말을 잘랐다.


“죄송해요. 백작님. 신부님, 릭의 작은아버지. 제가 사과드릴게요. 릭? 당신답지 않게 왜 이래요?”


풍성한 머릿결을 쓸어 넘긴 그녀가 힐난의 눈빛을 보냈다.

중년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보였다.


“네 일이라는 게···미국 촌구석 미술관의 큐레이터라지? 학자금 대출도 꽤 있다고 들었는데. 서류에 사인하면 위로금과 별도로 섭섭지 않게 챙겨주마.”


그는 입가를 닦으며 히죽거렸다.

돈 앞에서 별수 있냐는 표정.


순간, 심장이 날뛰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여독이 덜 풀린 것 같아요. 이만 일어날게요. 지수?”


나의 팔을 꾹 내리누르던 그녀는 포기한 듯 고개를 돌렸다.


“정말 죄송해요. 전시 기획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거든요.”


그녀가 일어나자, 할아버지와 신부님, 그리고 그놈도 따라 일어났다.


“이해합니다. 미스 권. 가서 쉬도록 하세요. 알프레도?”

“네, 백작님.”


“방까지 모셔 드리게. 신부님,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신부님은 괜찮다는 표정이다.

할아버지의 날카로운 시선이 맞은편 자리로 향했다.


“앤써니? 우린 대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


집사장에게 알아서 가겠다고 말하고는 그를 들여보냈다.

지수가 안쓰러운 눈빛으론 나를 달랬다.


“릭? 그분의 말씀이 심하시긴 했는데 그렇게 반응하면···.”

“말하는 게 정말 재수 없었다니까.”


내가 씩씩대자 지수의 미간이 좁혀졌다.


“...미안해. 또 욱해서 성질낸 거.”


한숨을 내뱉은 그녀는 갤러리 복도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홀을 가로질러간 그곳엔 그림과 갑옷들이 진열되었다.


“릭은 거짓말쟁이였던 거야.”


거짓말쟁이라니.

아버지는 영국,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미국 사람이라는 거.

부모님이 이혼하자 미국에 왔고, 중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와 살았던 것까지 난 모두 얘기했는데.


'아, 본가가 영국 귀족 집안이라는 건······.'


“미안해. 굳이 할아버지가 백작이라는 건 밝히기 뭐했어. 어차피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고, 앞으로도 연 끊고 살 거니까.”


법률회사에서 일하는 그녀는 인권변호사를 꿈꾸고 있다.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자신의 꿈을 사랑한다.


‘나도 내 일을 사랑할까?’

상관없다. 지수가 응원해 주니까.

박봉에 계약직이라는 것만 빼면 다 좋은데 말이지.


“무슨 소리야? 릭? 이 그림들 얘긴데? 역사학 전공이라 대학원 수업 따라가기 힘들었다며? 그런데 여기 보라고.”


그녀가 갤러리 복도를 가리켰다.


“이거 출발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인걸?”


나는 말 없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어느 그림 앞에 선 그녀가 흠칫했다.


“어? 이 그림···.”


빨리 오라며 손짓한 그녀는 내가 다가가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음이 잦아들고 그녀가 돌아봤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같아. 그치?”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그곳에서 지수를 만났었다. 온통 환하게 빛났던 그녀의 모습과 미친 듯이 나댔던 내 심장.


“방금 흥얼거리신 곡요.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너무······.”


멍청하게 더듬거리는 내 말투에 지수는 허리를 젖히고 웃었다.


“아하하! 기억하고 있었네? 아우, 지금 들으니까 좀 오그라들어.”


지수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미소진 입가의 주름. 그래, 저 입가의 주름에 반했었는데.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걸? 그때 어찌나 눈부셨던지···”

“그럼 지금은? 나이 들어서 못나 보인다는 거야?”


그녀는 장난처럼 눈을 흘겼다.

번뜩이는 순발력으로 그림을 가리켰다.


“이거 왜 모사품을 전시했을까?”


지적 호기심이 유달리 강한 그녀다. 그림으로 시선을 돌리고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다른 그림들은 전부 진품 같은데. 왜 굳이······.”


-또각또각

발걸음이 우리 뒤에서 멈췄다.


“그림 밑에 보시면 14대 리버스 백작님께서 유명 화가에게 모사를 의뢰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미스 권.”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14대 백작님이라면 아까 만찬실에서 뵀던 분 맞나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보티첼리의 화풍을 좋아하셨나 봐요. 아니면,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입을 떼려던 할아버지는 ‘저 영감은 언제 따라왔데? 라는 내 표정을 읽은 듯, 자연스럽게 우리를 지나쳐 갔다.


“흐흠, 서재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미스 권. 좋은 밤 되세요. 리차드 너도.”


***


“알프레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으면 고용인들에게 퇴근하라고 하지. 자네도 이만 퇴근하고. 난 앤써니와 마저 얘기하고 올라가겠네.”

“알겠습니다. 백작님. 그럼 좋은 밤 되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집사장이 눈짓하자, 서재에서 대기하던 고용인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전 시키는 대로 했어요. 큰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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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인류를 구원할 준비(1) 22.09.29 72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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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기쁨의 평원(3) 22.09.26 54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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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기쁨의 평원(1) 22.09.24 58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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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영원의 강(1) 22.09.20 55 1 12쪽
202 사흘 만에 돌아오다(2) 22.09.19 60 1 14쪽
201 사흘 만에 돌아오다(1) 22.09.18 64 1 12쪽
200 달의 호수(2) 22.09.17 61 2 13쪽
199 달의 호수(1) 22.09.14 63 1 13쪽
198 태양의 서쪽(2) 22.09.13 64 1 13쪽
197 태양의 서쪽(1) 22.09.12 60 1 12쪽
196 오랜 벗을 만나다. 22.09.11 64 1 13쪽
195 천년의 고도에서(3) 22.09.10 63 1 12쪽
194 천년의 고도에서(2) 22.09.07 59 1 13쪽
193 천년의 고도에서(1) 22.09.06 71 1 13쪽
192 Officially missing you(3) 22.09.05 68 1 12쪽
191 Officially missing you(2) 22.09.04 60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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