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들의 싸움(3)
“아버지, 전화한 용건은요. 제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데요. 그러니까···”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바로 아버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결투 얘기라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단다. 그것 때문에 전화한 것이라면 아버지는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하고 싶구나. 그리고 그런 결정을 한 네가 내 아들이어서 자랑스럽다는 말도···.
아, 갑자기 이러시면 반칙인데···.
“제 의견을 존중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사회에서도 결투가 진행되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요. 혹시라도 아버지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갈까 걱정이 되었어요.”
-그럴 리가 있겠니? 필리프. 다만 안 다치게 조심하거라. 혹시 무기는 어떤 것으로 결정되었지?
“총으로 선택했어요.”
-총이라···. 그래도 조심은 해야겠지. 일정도 정해졌니?“
“네, 조금 전에 통보받았어요. 이번 주 일요일 새벽이래요.”
-그래. 아무쪼록 명예롭게 임하길 바란다. 이 아비는 항상 믿고 응원한다는 거. 네가 꼭 알아두면 좋겠어.
“네, 감사해요. 또 연락 드릴게요.”
*
‘시인의 전망대’란 이름이 붙은 언덕.
유명한 시인이 된 졸업 선배가 재학 시절 자주 찾았던 곳이라 한다. 언덕을 올라 성당에 다다랐다.
결투 장소는 성당 뒤뜰이다.
휴우. 결투장에 가기 싫다.
크리켓 경기장에서 떠오른 기막힌 생각 덕분에 학교를 잘리는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는데,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하는 걱정도 생기고.
여기서 무슨 일을 당하면 난 다시 미래로 돌아가는 것일까?
성당 뒤뜰에 들어서자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잡념들이 사라졌다.
결투 관람 인원은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수석 입회인이 교장 선생님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눈치가 보여서 구경 오기를 꺼렸을 듯. 건물 뒤 묘지 쪽에 한 무리의 신사들이 모여 이따금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전에 크리켓 경기장에 있던 분들인 것 같다.
어쨌거나 미스 다비와 카르만씨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겠지? 팔찌는 고쳤다고 했으니까 심장 박동수가 올라가도 결투 중에 정신을 잃지는 않을 것이고.
오전 6시 정각.
"정시가 되었으므로 결투를 진행하겠습니다."
수석 입회인이 조끼 주머니에 시계를 넣고 결투를 선언했다.
수석 입회인인 교장 선생님부터 결투용 권총이 든 가방을 든 라틴어 선생님, 그 옆의 역사선생님까지. 참관인들 모두 학교 선생님이다.
필수 참석 인력인 전문의는 주변 병원에서 모셔왔겠지.
"결투 신청자인 필리프 우드빌 리버스 남작, 결투에 응한 조지 네빌 몬타규 공작. 가까이 와서 설명을 들으시오."
결투방식은 각자 세 번씩 번갈아 가며 공격하고 상대방이 심각한 부상이나 죽게 되면 결투가 종료된다.
교장 선생님은 왜 ‘심각한 부상’이나 ‘죽음’ 같은 단어를 쓰는 거야? 가뜩이나 긴장돼서 죽겠는데 말이지.
장황한 규칙과 주의사항에 대한 교장 선생님의 설명이 끝난 후, 설명을 모두 들었다는 서류에 서명했다.
라틴어 선생님은 갈색 가죽 상자를 꺼내어 양손으로 받치고 오셨다.
"결투 당사자들은 무기가 장전되면 가져가십시오."
상자 뚜껑이 열리자 두 자루의 클래식한 권총이 보였다. 저택의 갤러리 복도에 걸려있는 모델보다는 좀 개량형인 것 같긴 한데. 저 총으로 사람을 다치게 할···. 아니, 발사는 되려나?
상자에서 총 한 자루를 꺼낸 역사 선생님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장전을 시작하셨다. 총구에 화약을 넣고 납으로 된 둥근 총알을 넣었다.
-툭
앞으로 기운 총신에서 탄알이 굴러떨어졌다.
잠시 교장 선생님의 눈치를 보던 역사 선생님은 다시 탄알을 총신으로 넣었다.
-툭
탄알이 다시 굴러떨어져 나왔다.
아이 씨, 저 총은 쓰면 안 되겠다.
“탄약 포장지요. 역사 선생님.”
교장 선생님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역사 선생님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네? 뭐라고 하셨죠? 교장 선생님? 아니 수석 입회인님?”
“꽂을대를 사용해서 탄약 포장지를 총구에 밀어 넣어야죠. 그래야 탄알이 안 빠집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교장 선생님이 총을 건네받고는 장전을 마무리하셨다. 총을 받아든 나와 조지는 각자의 자리로 갔다.
"결투 신청을 받은 조지 네빌 공작님이 선공합니다. 준비되었으면 시작하세요."
-두근두근
얼마가 지났을까? 조지는 뭔가를 결심한 듯하더니 고개를 들고 천천히 총을 들어 올린다.
‘내 주변에다가 쏘기만 해봐’
조지는 애매한 높이로 총을 들었다. 재수 없이 총알이 휘거나 오발 되면 머리가 날아갈 수도 있는 위치다.
하아. 저놈 새끼. 결투 메뉴얼의 별첨부분 안 읽었나 보네. 무기를 총으로 선택했으면 상대방 멀찍이 조준하라고 그림까지 곁들여서 예시에 상세히 나와 있었는데···.
-콰과아앙!
아, 시ㅂ···깜짝이야. 미리 신호하고 쏘던가.
총소리가 크리라 예상은 했지만 이건 대포소리 그 자체다. 게다가 엄청난 양으로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가 시각적으로 공포감을 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두 팔을 올려 얼굴을 감쌌다. 상처나 통증이 없다. 몸을 훑어봤는데 맞지 않은 것 같다.
저 무지막지한 소리에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교장 선생님과 학교 선생님들부터 뒤편의 신사분들까지 다들 주춤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조지마저 놀란 듯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심지어 놈의 어깨도 뒤로 돌아갔다.
이 총. 반동도 장난 아닌가 보네.
"조지 네빌 몬타규 공작의 공격에 이어 필리프 우드빌 리버스 남작님 차례입니다. 준비되었으면 시작하세요."
이거 공격 기다릴 때보다 더 떨린다.
-스으읍 후우
메뉴얼에 또 뭐라고 나와 있었더라? 치명상을 입히는 부위는 피해야 한다고 했는데.
총구를 하늘로 해야 하나? 아닌데? 총구를 하늘로 향하면 결투 포기라고 했었다. 내가 결투 신청해 놓고 바로 포기했다고 하면 웃기잖아? 그냥 바닥 근처에 대고 쏴야겠다.
방아쇠를 조심스럽게 천천히 당겼다. 묵직한 방아쇠가 움직였고···.
-콰과아앙!
읔! 엄청난 반동과 함께 총구가 위로 향했다.
자욱한 연기에 가려 조지가 보이지 않는다. 저 어리바리한 새끼···설마 맞은 건 아니겠지? 순간, 정의부의 꼬장꼬장한 과장이란 중년 남자가 떠올랐다. 조지가 있던 곳을 향해 뛰었다.
"필리프 우드빌 리버스 남작님! 결투 중에 상대방에게 다가가면 안 됩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세요.”
교장 선생님의 외침을 듣고 자리에 멈췄다. 잠시 후 입회인 선생님들이 조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다행히도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다. 저 녀석, 놀라서 엎드렸나 보네. 그런데 좀 과하게 넘어졌는지 옷도 너저분하고 얼굴도 좀 긁힌 것 같다.
피식하고 웃는 순간, 조지와 눈이 마주쳤다.
‘너 진짜 죽었어!’
사람이 웃을 수도 있는 거지.
입회인 선생님들이 총을 수거하여 재장전 후 돌려주셨다.
"필리프 우드빌 리버스 남작님에 이어 조지 네빌 몬타규 공작님 공격 차례입니다. 준비되었으면 시작하세요."
확실히 첫 번째 공격 때보다 조지 녀석은 여유가 있어 보인다. 목을 좌·우측으로 꺾고 어깨를 돌리기도 하고.
몸을 다 풀었는지 하늘을 둘러보다가 자세를 잡았다. 조지는 총구를 들어 올리다가는 내 발목 정도에서 멈추었다.
아까 쏴본 느낌으로 보면, 저기서 총을 발사하면 반동 때문에 총구가 위로 솟구치고 총알의 최종 장착지는 내 허벅지와 허리 근처에서 멈출 것 같다.
아무래도 우리 가문의 대를 끊어 놓으려는 수작 같은데? 내가 여기서 생식능력을 잃게 되면···작은아버지는 딸만 둘이라 우리 가문은 대가 끊긴다.
-두근두근
숨이 가빠지면서 머리끝이 뜨거워진다.
-콰과과과 아아 앙앙
뭐 어언···가······아······느으······려······져······ 었···다아···.
어어? 왜 세상이 느려졌지?
조지가 들고 있는 권총 입구에서 엄청난 연기가 서서히 뿜어져 나왔고, 연기 사이를 뚫고 총알이 엉금엉금 바닥을 향해 기어 나왔다. 그대로 잠시 후면 땅에 박혀 안보여야 할 총알이···.
어라? 쟤 뭐야? 총알이 잠시 주춤하더니 방향을 바꿨다. 역 포물선을 그리며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정확히 내 가슴 쪽이다. 이대로 닿으면 난 죽는다. 마음만 급했지, 총알이 다가오는 속도보다 피하는 내 속도가 훨씬 느리다.
머리끝이 달걀을 삶을 만큼 뜨거워졌다.
“아아······안······돼······!”
몸속 모든 세포를 쥐어 짜내서 힘껏 외쳤다.
그 순간, ‘리젠트 파크’의 ‘퀸 메리스 로즈 가든’에서 나를 공격했던 여인. 허망하게 이마 한가운데 구멍이 뚫리며 사라졌던 그녀가 내게 쏘았던 공기의 파동이 내 손 끝에서 뿜어져 나갔다.
파동은 총알을 향해 곧게 나아갔다. 곧, 넘실대던 물결이 총알에 닿았고 그대로 총을 감싸 안고 점점 아래로 퍼져갔다.
'아니, 밑이 아니라 옆으로 가야 하는데?'
아랫 방향으로 내려가도 결국, 내가 있는 쪽으로 오게 된다.
‘왼쪽으로! 좀 더 왼쪽으로 밀어야지!’라는 머릿속 외침을 총알이 들었는지, 서서히 높이와 방향이 바뀌었는데···.
늦었다.
“악!”
왼쪽 허벅지 바지를 뚫고 총알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난 허물어지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것이 보였다. 수많은 질문과 고민을 자아냈던 지겹게 궁금했던 그것.
붉은 크리켓 공이 숲속 허공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웅성웅성
“의사 선생님! 어서 와주세요! 이쪽이에요.”
“필! 괜찮아? 야! 정신 좀 차려봐!”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이 다급히 의사 선생님을 부르는 소리, 구경하던 신사들의 놀라는 소리, 윌리엄이 내 어깨를 흔들며 외치는 소리. 아우 어지러워.
“그만 흔들어! 어지럽단 말이야.”
“잠시만, 학생. 부상상태를 봐야 하니까, 좀 나와주겠어요?”
다행히 의사 선생님이 윌을 떼어 놓았다. 사람들 사이로 빨간 공을 보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으나···. 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학생, 가만히 있어요. 아무래도 총알이 허벅지 근처에 박힌 것 같아. 먼저 총알을 빼고 상처를 꿰매야 하는데 좀 아플 거예요.”
여기서 더 아프면 어떡하라고?
의사 선생님은 총상 관련 경험이 많은 듯 주저하지 않고 바로 집도에 들어갔다.
내 입에 두툼한 헝겊을 쑤셔 넣고는 상처 부위 옷을 찢었다. 알코올을 있는 대로 허벅지에 쏟아부은 후, 총알구멍에 집게를 넣었다.
“읔!”
상처 부위가 타는 듯 뜨겁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자꾸 집게가 허벅지 뼈에 닿은 느낌이 영 거슬린다. 두어 번 집게로 상처 부위를 들쑤신 뒤, 둥근 총알이 집게 끝에 잡혀 나왔다.
의사 선생님이 벌어진 곳을 꿰매고 붕대를 두르기까지 5분도 안 걸린 것 같다. 누가 섭외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분 아니었으면 과다출혈로 죽었을지도 몰라.
“휴우, 정말 다행스럽게 허벅지 동맥을 피했어요. 동맥에 박혔거나 동맥이 끊겼다면 큰일이거든요. 핏줄이 근육 속으로 말려 올라가면 잡아 빼기도 힘들고, 수술이 쉽지 않은데···. 학생은 운이 좋았네요.”
생각보다 심각할 뻔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담담히 듣고 계셨던 교장 선생님이 물으셨다.
“움직일 수 있을까요? 회복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흠···. 아직 어리니까 빨리 나을 것 같은데요. 모···. 상처가 얕다고 해도 잘 아물려면 일주일 정도는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의료도구를 가방에 정리하는 의사 선생님께 교장 선생님이 다시 질문하셨다. 첫 번째 질문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지금 리버스 남작님이 움직이면 어떻게 되나요? 의사 선생님? 그냥 서 있는 정도는요?”
의사 선생님은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 같다.
나를 돌아보시고는 “그건 수석 입회인께서 결투 당사자에게 물어보셔야죠.”라고 하셨다. 저 얘기는, 우선 서 있거나 살짝 움직이는 정도는 괜찮나 보네.
“저는 교장 선생님, 아니 수석 입회인께서 허락하신다면, 계속 결투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초조한 눈빛을 보내셨다. 내가 조지에게 심각한 위해를 가할 것으로 생각하신 모양이다.
“아니에요. 교장 선생님. 그냥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예요.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교장 선생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필리프 우드빌 리버스 남작님이 결투 진행을 요청하여 수석 입회인의 권한으로 결투 재개를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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