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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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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블랙빙고
작품등록일 :
2021.10.28 20:13
최근연재일 :
2022.10.01 11:40
연재수 :
21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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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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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
글자수 :
1,208,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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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0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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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데카메론 이야기(1)

DUMMY

“원래 필리프. 아니, 우드빌씨가 자기 것을 잘 내어주고 잘 베풀었잖아요?”


한마디로 호구였군.

그녀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래서 우드빌씨? 군 병원에 기부하겠다고? 정말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었어?”


자기가 갖지 못하는 거 남도 갖지 못하겠다는 것일까.

좌중의 모든 눈동자가 내게로 쏠렸다.

온갖 찬사를 담은 감동먹은 눈빛들이다.


기부 수락 연설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썩소 여신은 괘씸하지만, 어차피 다시 미래로 돌아간다면 굳이 금 같은 거 필요 없을 테니.

게다가 백작님의 명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아까부터 아버지와 그런 눈빛을 주고받았거든요. 당연히 저도 백작가의 일원으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 생각해요.”


짝짝짝-!


“우리 필리프가 지적발달은 좀 더뎠어도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가문의 확고한 가르침을 받았지요. 허허.”


저게 칭찬인지 멕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모님의 칭찬으로 받아들여야겠지.


“역시, 명문가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았군요.”


옆에 앉은 레이디 오스틴 러셀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나의 시선을 알아챈 그녀의 어금니가 반짝였다.


다들 한마디씩 나의 아낌없이 통 큰 기부에 칭찬을 쏟아낼 때 새로운 요리가 테이블에 올려졌다.


만찬에 참석한 후, 처음으로 윌이 말문을 열었다.


“이거, 어머님이 말씀하신 그거예요.”


모두 앞에 놓인 접시로 시선을 옮겼다.


“판소띠입니다. 베드포드 후작님.”


알렉스씨가 정확한 음식명을 알려줬다.

판소리가 아니라 판소띠였네.


고모님도 거드셨다.


“필리프가 얘기해 줘서 준비했습니다. 공작부인께서 음식 칭찬을 하셨다고요.”


공작부인은 고모님의 말씀에 살짝 당황하신 표정이시다.


“아, 네 감사합니다. 백작님. 자작부인. 윌리엄도 저도······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잊지 않고 기억해 주셨네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공작부인께서는 거짓말이 서투신 것 같다.

윌. 그냥 자기가 처먹고 싶어서 얘기한 것일까.


밀러씨는 저 재료를 구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여간 고생한 게 아니었다고 했다.

결국, 작은어머니가 도와주셔서 겨우 요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그런 작은어머니 접시는 음식이 거의 줄지 않았다.

몸이 안 좋으신지 술고래라 들었는데 내내 주스만 드시고.


어느새 테이블엔 디저트가 올려졌다.

순식간에 디저트를 끝내신 아르마 남작님은 만찬 요리에 흡족한 표정이다.


“아까 그 판소띠 말입니다. 치즈의 풍미가 잘 살아있는 이탈리아 요리 같던데요. 혹시 요리에 들어간 트러플도 이탈리아산이었나요?”


작은어머니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남작님을 바라보셨다.


“미각이 대단하시네요. 저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이에요. 이탈리아 제노아의 요리지요. 트러플도 이탈리아 북부산이고요.”


아르마 남작님은 작은어머니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작은아버지에게 시선을 옮기셨다.


“부은행장님과 우드빌 부인을 보니 두 분의 사랑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사교계에 워낙 유명한 얘기라서요. 이렇게 가까이서 뵈니 동화 속 주인공을 실제로 뵙는 느낌이군요.”


이 시기에 미국 재벌 가문과 영국 귀족가문의 정략결혼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재벌들은 귀족 작위의 명예를, 귀족들은 재력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귀족들은 원래 돈이 많지 않나?’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와서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상속세율 때문에 난리이고.


어찌 되었든, 차남이라 작위 계승권이 없는 작은아버지와 미국의 재벌가 규수인 작은어머니의 연애결혼은 런던 사교계에서 이슈가 되었단다.


작은아버지는 공이 넘어오자 살짝 당황해하셨다.

그러고 보니 만찬 내내 먼저 말을 꺼내신 걸 본 적이 없다. 누군가의 질문엔 단답형으로 ‘예, 아니요’로만 얘기했었고.


“운명이 존재한다면, 그때가 아니었을까 하네요. 워싱턴에 있는 영국대사관에서 주최한 투자설명회를 겸한 만찬회였습니다. 원래 은행장님이 참석하셔야 했지만, 다른 일정이 생기셔서 제가 갔었죠.”


이야기는 만찬에서 두 분이 옆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호감을 느낀 부분까지 진행되었고, 사람들은 점점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작은아버지는 사람들의 그런 과도한 집중이 슬슬 부담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는 이야기 중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모님을 쳐다봤다.


자기 누나에게 보내는 구조 신호일까.

특이한 사람이다.

직장에서 임원까지 올라간 사람이 남들 앞에서 얘기하는 걸 저렇게 부담스러워하는 게.


어떻게 보면 작은아버지라는 분이 그나마 나랑 성격이 좀 비슷한 것 같다.

말이 없는 것도, 숫기 없고 내성적인 것도.

만찬 자리를 즐기지 않는 저런 모습도.


작은아버지의 눈빛을 읽은 고모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역경을 이겨가는 과정도 나름 재미있지요. 그 얘기는 다음번 만찬의 즐거움을 위해 아끼는 것이 어떨까요?”


여기저기서 아쉬운 듯,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말씀을 마친 고모님은 공작부인을 돌아보셨다. 공작부인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으로 만찬이 종료되었다.


귀부인들이 알렉스씨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녀들이 움직일 때마다 치장한 보석들과 드레스가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르마 남작님은 남성 참석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리버스 백작 가문의 저택에 초대되면 거장들의 작품을 꼭 봐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만······. 가능할는지요?”


아르마 남작님의 목소리에 방을 나서던 레이디 오스틴 러셀이 귀부인들 사이에서 돌아봤다.


아버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다소 소문이 과장된 듯합니다. 하하하. 그렇게 하세요, 남작님. 필리프가 잘 안내해 드릴 거예요.”


공작님이 남작님을 향해 손을 올리셨다.


“아! 제 아들놈도 데리고 가주세요. 그리고 남작님께서 이번에 맡은 업무 말이에요. 괜찮으시다면 허용 범위에서 언제 한번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남작님은 그러겠다고 말한 후, 윌리엄과 나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

우리는 앵그르의 <샘> 앞에 섰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어야 할 그림이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우리는 눈앞의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남작님이 고개를 돌렸다.


“프랑스 귀족가문에서 구매했다고 들었습니다. 프랑스 정부에서 재판매하라고 계속 연락이 왔다던데···. 괜찮다면 간단한 설명을 듣고 싶군요. 우드빌씨?”


내 전문분야인데 못할 것도 없다.

사람은 자신의 전문분야에 있을 때 자신감과 함께 빛나는 법이다.


난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부분요. 항아리에서 떨어진 물이 일종의 상징인데요. 바닥에서 물거품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이 상징이 의미하는 것은 ‘거품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 여신 아프로디테입니다. 아시겠지만, 아프로디테는 로마 신화에서는 비너스라고 불리죠.”


남작님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반해 설명을 듣던 여성 관람객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떻게 머리를 다치면 사람이 이렇게 되는 거야? 너 정말 필리프 맞아?”


여성 관람객은 레이디 오스틴 러셀이다.

그녀는 귀부인들께 어떤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을까.


윌리엄은 자기 누나를 보자마자 포켓볼 기량을 늘린다며 휴게실로 향했고, 남작님은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런데 ‘어떻게 머리를 다치면···’이라니.

남작님은 방심하다 그녀의 말에 빵 터진 듯, 한바탕 크게 웃고는 입을 여셨다.


“아, 죄송합니다. 우드빌씨. 저도 모르게 그만. 음, 저는 이 작품의 비너스보다는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더 사랑합니다. 모든 것에 무심하고 초월한 듯한 표정. 어쩌면 사랑했던 사람을 생각하는 표정일 수도 있고요.”


레이디 오스틴 러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마 남작님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요. 남작님의 작품에 대한 깊이가 사뭇 깊으세요. 언제부터 그런 식견을 쌓으셨을까요?”


남작님은 만찬실에서도 선조들의 초상화들을 유심히 살펴보셨다.

초대 백작 부부와 그 자녀들, 그리고 작위를 계승한 역대 선조들.


“과찬이십니다. 레이디, 아무래도 가풍 덕이라 할 수 있겠네요. 어려서부터 미술작품을 많이 접하고, 늘 감상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거든요. 제가 듣기로 레이디도 눈부신 미모만큼이나 풍부한 교양과 안목이 대단하다 들었습니다.”


“어머머? 정말요? 어디서 들으셨을까?”


두 젊은 남녀 사이에 묘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다.

아버지의 말씀만 없었어도 윌 따라 휴게실 가는 건데.


“우드빌씨. 말이 나온 김에 이 작품과 보티첼리의 비너스 비교가 가능할까요?”


소외된 나를 다시 대화에 끌어들이려는 듯, 남작님이 질문을 던지셨다.


“제가 볼 때 손의 위치만 빼면 왼쪽 무릎을 살짝 구부린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포함해서 동작과 구도가 상당히 비슷하네요.”

“콘트라······뭐?”


전문용어가 튀어나왔다.

레이디 오스틴 러셀은 내 눈앞에 있는 내가 자기가 아는 필리프가 아니라고 점점 확신하는 눈초리다.


“방학 직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거라 기억이 났어요. 레이디.”


더 깊이 있게 들어봤자 이해도 못 할 테니, 이렇게 말하고 끝내야겠다.


남작님은 점점 상황이 재미있어지는 눈치다.

그는 더 많은 질문을 던졌다.


“네, 그렇군요. 그리고요? 뭐가 또 있을까요?”


표현 기법 분석론까지 파고들고 싶은 것일까.


“음, 앵그르의 <샘>에 한정한다면 소묘에 충실했던 신고전주의 화풍답게 비례와 균형을 통해 정적인 묘사를 충실하게 반영했네요. 매끈한 터치로 그림에 붓 자국을 남기지 않은 기법도요.”


“오호! 역시 리버스 백작가 답네요.”


우리 가문이 회화예술에 능통한 가문은 아닌데.


“그러면 우드빌씨, <샘>을 보면 어떤 작가의 작품이 떠오르나요? 우드빌씨의 안목이 대단하신 것 같아서 저도 좀 이참에 배워 보려고 질문드리는 거예요.”


전공 교수님의 주특기인 ‘꼬리의 꼬리를 무는 회화 비교분석’이다.

그냥 모른다고 하고 끝낼까 하다가 레이디 오스틴 러셀의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니 좀 더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라파엘로의 ‘라 포르나리나’가 떠오르네요.”


남작님은 오! 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렸다.


“이유는요? 우드빌씨.”

“앵그르는 라파엘로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고 하거든요.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온종일 라파엘로의 그림들을 연구했다고 하고요.”


내 답변은 이미 아르마 남작님도 알고 있던 지식인 듯, 그는 뭔가 2% 부족하다는 표정이다.


“방금 말씀하신 것은 미술사의 일반적인 내용인데요. 제가 궁금한 건 말이죠. 우드빌씨는 ‘왜 <라 포르나리나>가 떠올랐을까’입니다.”


그냥 그 작품이 떠올랐을 뿐이다.

지수와 봤던 한국의 고전 드라마가 생각났다.

여주인공이 중세시대 왕실의 마스터 세프가 되는 내용이었는데, 아역 배우의 대사가 지금 상황과 비슷했거든.


‘고기 맛에서 감 맛이 나는 것을 왜 감 맛이 나느냐 물으면 뭐라 답하냐’고···.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난 잠시 만찬실에서 있었던 장면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여성 모델의 눈빛요”

“눈빛? 무슨 눈빛?”


레이디 오스틴 러셀은 눈을 깜박거리며 다음 대사를 궁금해했다.

그녀의 눈빛은 더는 만찬실에서 나를 비웃던 그것이 아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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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한쪽 문이 닫히면(2) 22.01.20 334 3 19쪽
57 한쪽 문이 닫히면(1) 22.01.19 263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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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전당포 사나이들 22.01.17 250 2 14쪽
54 좋은 찻잎을 얻는 방법(2) 22.01.16 242 4 13쪽
53 좋은 찻잎을 얻는 방법(1) 22.01.15 247 3 14쪽
52 천국보다 낯선 22.01.14 247 2 13쪽
51 장미들의 싸움(3) 22.01.12 252 4 13쪽
50 장미들의 싸움(2) 22.01.11 248 3 13쪽
49 장미들의 싸움(1) 22.01.10 253 2 13쪽
48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면(2) 22.01.09 255 3 16쪽
47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면(1) 22.01.08 260 2 17쪽
46 비극의 탄생(2) 22.01.07 256 3 13쪽
45 비극의 탄생(1) 22.01.05 268 3 13쪽
44 선을 넘다(2) 22.01.04 268 2 16쪽
43 선을 넘다(1) 22.01.03 265 4 15쪽
42 공작가의 만찬(2) 22.01.02 272 3 13쪽
41 공작가의 만찬(1) 22.01.01 280 2 14쪽
40 버머씨의 순례자 수업 21.12.31 283 4 15쪽
39 마법 할머니의 초대(2) 21.12.30 288 5 16쪽
38 마법 할머니의 초대(1) 21.12.29 294 3 16쪽
37 미스 다비와 산책을(3) 21.12.28 302 4 13쪽
36 미스 다비와 산책을(2) 21.12.27 307 5 13쪽
35 미스 다비와 산책을(1) 21.12.26 325 3 15쪽
34 크리켓 공의 색깔 21.12.25 328 3 15쪽
33 통곡의 벽(2) 21.12.25 326 4 12쪽
32 통곡의 벽(1) 21.12.24 333 5 13쪽
31 크리켓 공 21.12.24 348 4 15쪽
30 글라스 하프(2) 21.12.23 367 5 14쪽
29 글라스 하프(1) 21.12.22 378 4 14쪽
28 덮어쓰기 21.12.21 385 3 13쪽
27 순례자들(2) 21.12.20 422 4 14쪽
26 순례자들(1) 21.12.19 425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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