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의 벽(2)
아버지와 남쪽 숲에 다녀오던 날. 그날부터 크리스마스 파티까지 거의 일주일간 반복되었던 꿈. 꿈에서 선조를 참수한 놈이다. 딱 부러지게 ‘이거다’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지금 뭔가 잘못되어 가는 건 확실하다. 선조 살해자의 시선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어이, 꼬마. 묻는 말에 솔직히 말해. 맘에 들면 아프지 않게 나누어 줄게. 좌우 똑같이 대칭되게끔 말이야.”
정상이 아닌 놈이다. 끔찍한 살인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게.
-어기적 어기적.
진흙 바닥에 다리를 질질 끌며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저 걸음걸이도 꿈에서 본 것과 똑같다. 그의 신발에 진흙들이 잔뜩 엉겨 붙었다. 신발의 무게가 더해지자 신경 쓰였는지 공을 차듯 신경질적으로 발을 털어냈다. 진흙 한 덩이가 날아올라 그의 허벅지에 떡하니 달라붙었다. 손가락을 튕겨내 떼어내려 했으나 이번에는 그의 손에 붙어 버렸다.
“하, 시발. 구질구질한 이놈의 날씨같이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어.”
그는 신경질적으로 허공에 손을 털었다.
“나 지금 굉장히 예민하거든. 좋게 말할 때 대답해. 하퍼는 어떻게 된 거지?”
"하퍼가 누군데?"
그는 인상을 쓰며 진흙 묻은 손으로 뒷머리를 긁어댔다. 이내 멈칫하곤 말을 내뱉었다.
“이런, 머리까지 더러워졌잖아? 진짜 가지가지 하네.”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래. 넌 그녀의 이름을 모르겠네. 하퍼가 누구냐면 말이지. 너 공격했던···귀여운 여자. 난 걔가 맘에 들었는데, 걘 날 피하더라고. 킬킬킬.”
“맥스!”
반대쪽에서 한숨 쉬듯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기다려 봐! 난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어차피 얘 죽으면 말해 줄 사람도 없고.”
그럼 이놈, 선조 살해자가 꿈에서 말했던 게···나였나?
[성이 비슷한 꼬마 하나를 나누고 왔더니···헷갈리네. 킬킬킬.]
“맥스, 누군가 눈치채고 오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걔가 뭘 알겠어? 순례자도 아닌데 말이야!”
“너무 닦달하지 마, 아치! 누가 온다 해도 바뀌는 건 없어. 난 평화주의자이니까. 자, 이제 꼬마. 마지막 기회야. 하퍼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얘기해 주면 빨리 끝내줄게”
어떻게 하든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 거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자. 꿈에서 돌아가셨던 조상님도 결국 살아서 가문을 이으셨다. 이게 내가 아는, 나를 둘러싼 역사다.
“난 아는 게 없으니까 더 가까이 오거나 위협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어. 이건 나, 리버스 자작이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말할 수 있다!”라고 호기롭게 외쳤지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하지만 효과는 있나 보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을 뿐인데 상대방은 흠칫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정말 나한테 뭔가 있는 거 아냐?
-후 으아 읍
정신을 집중하고 단전에 기를 모았다. 그 순간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분이 느껴졌다. 배꼽 아래쪽으로 열기가 모여드는 가 싶더니, 두 주먹이 파르르 떨리며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뜨거운 공기가 모여든다. 이대로 내지르면 공원의 그 여자처럼 뭔가 나갈 것 같다.
“이야아아압!”
두 손을 뻗는 찰나, 턱 하니 주먹이 가로막혔다. 거대한 집게처럼 내 주먹을 잡은 팔뚝이 보였다. 뒤에 있던 보디빌더다. 내 앞에 있던 맥스란 놈은 황급히 자세를 낮추고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보호하는 형태였다.
‘팔이 잡히지만 않았다면 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한껏 어깨를 움츠렸던 놈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어 기적 어 기적.
주먹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남자가 어깨를 힘껏 빼더니 퍽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순간, 배가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갈비뼈부터 시작해서 뱃속의 모든 장기, 심지어 척추뼈까지 시큰거렸다. 자연스럽게 무릎이 휘청하며 몸이 기울어졌다.
-후, 후, 후우
조금만 공기를 들이마셔도 뱃속이 찢어질 듯 통증이 올라온다.
“뭐야? 이 새끼. 방금 때린 건 나를 상대로 뻥카 친 대가야. 근데 너 방금 뭐 하려고 했던 거냐? 아니, 궁금해할 필요 없지. 하퍼 몫으로 99대 남아 있으니까 똑바로 자세 잡는 게 좋을 거야.”
말을 마친 그는 내 멱살을 쥐고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니 배가 더 당긴다.
-퍽퍽 퍽퍽!
모든 피가 머리끝으로 쏠리며 뇌가 전부 터져버릴 것 같은 충격이 왔다. 멱살에 잡혀서 정확히 다 맞았다. 그것도 얼굴만.
‘아, 내 얼굴···. 아니, 내 얼굴이 아니라고 해도···.’
남자의 어깨가 활처럼 다시 휘었다.
-퍼억
마지막 주먹에 몇 미터는 날아가 진흙에 처박혔다. 입안에 뭔가 돌아다닌다. 무슨 부스러기 같은 거. 혀로 돌려보니 앞니가 있을 곳이 허하다. 맞으면서 몇 개 빠졌나 보다. 목도 꺾여서 움직일 수가 없고 눈도 부어서 시야가 좁아졌다.
-푹
갑자기 날아든 놈의 발이 나의 배를 묵직하게 가격했다.
-푹푹푹
발길질이 이어졌다. 그의 뾰족한 구둣발이 여기저기 장기를 찍었다. 느껴진다. 배 속의 창자가 죄다 끊어지는 기분.
“야! 이제······응? 이게 무슨 소리야? 응? 이게 왜 울리는 거야? 아이, 시발 뭐야 이거?”
선조 살해자의 발길질이 멈췄고, 그의 혼잣말이 시작되었다.
“이 씨··· 귀! 귀! 나오라고! 이거 다 저 꼬마 때문이야. 지금 뭔가 고장 났단 말이야. 이 시발것들. 내가 나쁘다고? 응? 내가 나쁜애라고? 응? 나처럼 구질구질하게 산 놈이 착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야! 이···.”
남자는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귓속 이물질을 털어내려 한다. 이젠 한쪽 발을 들고 제자리 뛰기를 시작했다. 한참을 뛰던 그는 제풀에 지친 듯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친다. 탱크? 꼬마 잡아.”
그때 허공에 있는 뭔가가 시선에 들어왔다.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처럼 크리켓 공만 한 붉은 빛이 깜빡거린다. 저것도 공원에서 봤던 그대로다.
그때, 뒤에 있던 보디빌더가 내 어깨를 잡아 올렸다. 난 다리를 질질 끌린 채 엉거주춤 들렸다.
“······어? 어떻게 이런···”
내 어깨를 잡고 있던 놈의 손이 풀리며 난 다시 진흙탕에 쳐박혔다. 질퍽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보디빌더가 사라졌다.
-우웨에에엑.
순간, 속에 있던 모든 것을 게워냈고 쏟아져 나올 때마다 척추가 욱신거린다.
“겁쟁이 새끼, 표식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자조 섞인 웃음을 짓던 그가 허공 높이 오른손을 뻗자 스르릉거리며 롱소드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아닌데, 이거 아닌데.’
이대로면 이놈은 여기서 나를 죽이고 꿈에서 봤던 곳으로 가서 조상님도 죽일 것이다. 그때, 고함이 들렸다.
“맥스! 이 미친놈아! 너 머리 위에! 소리 못 들렸어? 뭔가 잘못되었잖아! 빨리 튀어!”
외치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질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명의 남자는 멈칫멈칫하다 그대로 사라졌다. 내 앞에 있는 이놈, 선조 살해자는 왜 안 가고 이러고 있는 거야?
지금이다! 뭔진 모르지만 아까 하려다 못한 거. 시도라도 해봐야지. 손으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꿇고 발에 힘을 주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너덜너덜해진 장기들이 마구 꼬이는 게 느껴져서 서 있지도 못하겠다. 통증 때문에 집중이 안 되지만 최대한 다시 단전으로 기를 모았다. 그리고 미세하게 주먹이 떨리기 시작했을 때···
-파바박
나갔다. 주먹에서 물결이 나갔다. 파동의 흐름이 공원의 그 여자처럼 힘차진 않았지만 나가긴 했다. 놈도 그것을 보고 흠칫 놀랐지만, 내 주먹에서 나간 물결은 바닷가 파도와 같이 선조 살해자의 몸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너, 이 새끼. 뭐야 너? 마녀 새끼가 진짜 맞나보네.”
놈은 있는 힘껏 내리칠 기세로 팔을 들어 올렸다. 난 왼쪽 어깨부터 가슴을 지나 오른쪽 옆구리까지 나뉠 것 같다. 더럽게 짧았던 인생.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끝나버리네.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모. 런던 뒷골목, 이 지저분한 진흙 바닥에 얼굴 처박고···.
지수 보고 싶다. 미스 레슬리도. 자작이고 백작이고 필요 없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무병장수하며 살고 싶다. 마법? 개나 주라고 해.
놈이 칼을 휘둘렀다. 그 순간 난 질끈 눈을 감았다.
-휙 캉!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살벌하다. 죽음의 향이 느껴진다. 이게 죽는 순간 맡게 되는 냄새구나.
“······”
갑자기 왜 이리 조용하지? 천천히 실눈을 떴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남자의 시선을 따라갔다. 시선이 멈춘 곳은 그의 두 손. 그는 칼의 손잡이만 쥐고 있다. '칼날은······어디간겨?’
-퐁
낯설지 않아. 저 소리.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남자의 뒤통수에서 분수가 솟아올랐다.
-촤아아아아악
전에 보았던 거다. 아니, 물총 같던 핏줄기는 점점 굵어지더니 수도꼭지처럼 콸콸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순간, 구름 사이로 햇빛이 내리치며 공중으로 흩뿌려진 핏물에 선명한 무지개가 떴다 사라졌다. 남자는 못 믿겠다는 듯 나와 눈을 마주쳤다. 두 손으로 뿜어 나오는 핏줄기를 막으려 했으나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나, 나는 시키는 대로···. 난 나쁜 아이가···.”
눈물과 핏물 범벅으로 엉망이 된 남자가 나를 덮치며 허물어졌다.
“사장님! 나이스 샷!”
귀에 익은 목소리. 미스 다비다. 남자의 머리 뒤로 그녀가 보인다. 다시 구름 사이로 햇빛이 내비쳤다. 태양을 등진 그녀 주위로 후광이 발했다.
“어이 꼬마 자작님. 나 예쁘지? 응? 막 뽀뽀해주고 싶지? 응? 저택도 막 주고 싶고? 응? 땅도 주고 싶고? 응? 응? 다 필요 없고 3층짜리 꼬마빌딩 한 채만 받을게. 지금 시세로는 모르겠고···월세 1만 달러 정도 나오는 걸로. 내가 좀 소박한 편이거든. 그건 그렇고, 조금만 늦었어도 너 둘 될뻔했어. 꼬마 자작1, 꼬마 자작2. 아우, 심장 쫄깃해져서 죽을 뻔했다.”
내가 안고 있는 이 남자. 무겁다. 그를 밀어내자 무릎에 힘이 빠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힝, 히잉, 히이잉...
내 숨소리. 정상이 아니야. 폐도 다쳤나 봐. 하긴 온몸의 세포들이 아우성이니. 잠시만 이대로 잠시만 좀 쉬자. 이 통증을 온전히 느끼는 게 너무 끔찍하다. 차라리 정신이라도 잃으면 좋겠는데···.
“막센 카르만 선수! 역시 통곡의 벽이라능. 페널티 박스 안에서 딱 공만 걷어내고 팀을 구해 냈잖음? 아픈 사랑~거어어얼···나는 아픈 워어어얼~”
카르만씨의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 노래도 노래지만,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몸을 흔드는···괴랄한 움직임. 낯익다. 어디서 봤지?
“이 변태 새꺄. 내가 그런 거 하지 말랬지? 그런 거 할 시간에 살 좀 빼란 말이야! 필리프 두 명 될 뻔했잖아!”
미스 다비가 자세를 낮춰 내 얼굴을 훑었다. 그녀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아, 나쁜 새끼들. 왜 얼굴을 때리고 지랄이야. 그 귀엽던 얼굴을 완전히 찌그려 놓았네. 아우, 꿈에 볼까 끔찍하다. 이런 얼굴은···그 메이드도 견디기 쉽지 않을 텐데? 아마 보자마자 도망갈걸?”
통증 때문인지 죽다 살아난 고마움 때문인지, 아니면 미스 다비의 말을 듣고 그녀가 생각나서인지 눈물이 쏟아졌다.
“아우, 애한테 괜한 소리 했네. 걱정하지 마. 자작님아. 내가 이빨도 죄다 붙여 주고 얼굴도 적당히 잘 펴줄 테니까. 응? 그 메이드랑 사귀는 데 아무 지장 없도록 잘 해 줄게. 그러니까 그만 울고. 뚝!”
그녀는 카르만씨를 찾았다.
“야! 돼지! 그만 지랄하고 이리와 봐. 여기 잘 보면 자작님 이빨 몇 개 떨어져 있을 거거든? 잘 찾아서 빨리 주어와.”
그러거나 말거나 카르만씨는 계속 허리를 돌리며 춤 삼매경에 빠져있다.
“아, 얼른!”
그런데 미스 다비? 이렇게 여유 부릴 시간이 없을 텐데. 빨리 시체부터 치우든···.
응?
시체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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