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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깃 노트

엑스트라의 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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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LOT
작품등록일 :
2021.09.19 01:48
최근연재일 :
2021.11.03 14:29
연재수 :
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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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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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2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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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식 대회

DUMMY

하나쯤은 제대로 구워서 맛을 볼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았던 탓인지. 초벌구이가 끝나기도 전에 마차가 멈췄다.

주변의 방해 때문이 아니었다. 채강이 똑똑, 노크 후 도착을 알렸다.


아쉽지만 뭐, 요리가 완성되지 않은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파라파백작이 이런 조잡한 닭꼬치같은 걸 먹고 싶어 하지는 않을 테니까.


대충 손을 털고 일어나자 강적도 눈치껏 불을 끄고 따라 일어났다. 채강은 문을 열어주다가, 먼저 나오는 강적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문고리를 놓고 옆으로 비켜섰다.


“요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채강이 빈손으로 내린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대충 다 했어.”


뻥이지만 그런 것으로 하자. 초벌구이라는 개념이 없는 듯한 강적이 고개를 끄덕인 덕분인지 채강은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근데, 백작한테 줄 건 아니고 우리가 먹을 거라서.”

“음식을 만들어 이송하는 대회가 아니었습니까?”

“어. 그건 따로 준비했으니까 걱정 말고······정비부터 하자.”


지금 채강이 걱정할 것은 요리의 완성 유무가 아니라 본인의 상태다. 딱히 지쳐 보인다거나 상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부터는 진짜 원령을 상대하러 가야 하니까.


정비라는 말에 두 사람은 군말 없이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전투 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충 무기를 확인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것이 전부지만, 이 정도면 되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마음 같아서는 회복 포션을 하나씩 건네주고 싶은데. 아쉽게도 지금 내게 소지품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원령요람 자체가 회복류 포션이 극명하게 효율적이지 못해 잘 사용되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그래도 다음부터는 하나씩 사 들고 다녀야겠다. 안 먹는 것보다야 먹는 게 나을 테니까.


내가 수상하니 의심 중이니 뭐니 해도, 둘 다 내 말을 착실하게 잘 들어주는 것이 기특하다. 약속한 바가 있기 때문인지 서로 싸우지도 않고, 나를 지켜주고 있기도 하고.


“정비하라는 건, 내부에 들어가면 원령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죠?”


아무래도 강적은 나의 말 하나하나를 진중하게 곱씹고 생각하고 판단하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강적은 그런 성격이다. 학구열과 호기심이 뛰어나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말 그대로의 학자.


“스포일러.”

“긍정으로 알겠어요.”

“그렇군.”


채강은 무엇을 눈치챘는지 자신의 폼멜부터 긴 자루를 한번 쓱 쓸어내린다. 무언가 튀어나오면 금방이라도 검을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녀석은 아닌 척해도 열혈의 육체파니 일단 무력행사를 할 생각인가 보다.


아주 완벽한 조합이다. 둘이 팀을 먹으면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다.


“자, 그럼 다녀와!”


둘의 등을 힘차게 팍팍 두드렸다.


출격! 같은 의미였는데.

이거, 쎄한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한다.


그리고 양쪽 팔이 덥석 붙잡혔다.


“자, 잠깐!? 나는 왜!?”

“당신이 음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아닌데, 아닌데? 엄밀히 말하면 너도 가지고 있고 얘도 가지고 있거든?”


팔이 붙잡혀 턱짓으로 채강과 강적을 가리켰지만, 채강은 먼저 말을 꺼낸 주제에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강적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렇긴 하지, 하고 중얼거렸다. 이쪽은 확실히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다.


기어코 백작성의 정문이 열렸다. 성답게 외벽의 정문과 중문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보통의 성이라면 문 앞부터 문지기가 있을 법한데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축제 기간이니 사람을 물렀다 생각하겠지만.

정원을 가로질러 성의 문앞으로 걸어갈 때까지 정말 어떤 생명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누가 봐도 수상한 분위기가 풀풀나는 성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니.


철컥.


채강이 문을 열었다. 성답게 경첩 관리도 아주 잘 된 모양이다. 끼이익 같은 불길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문틈으로 보이는 내부가 아주 어둡다. 그렇게나 창이 많은데도 햇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불길하고 오싹한 한기도 느껴진다.


채강은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공기에 짧은 침음을 삼켰다.


“피 냄새가 납니다.”


그런 살벌한 말을 평범하게 하지 말아 줬으면.


생각해보면 피 냄새가 나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해야 하는 상황은 다르다고나 할까. 심지어 비둘기가 로드킬 당한 것만 봐도 목덜미가 섬찟해지는데 인간의 시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냥 박쥐처럼 의뢰서나 내밀어줄 걸 그랬다. 아주 깊은 후회가 밀려 들어온다.


“나, 전투력 전무한 일반인이다?”


두 사람을 애절하게 바라보며 티끌만큼도 무력이 없음을 어필했다.


내가 너희 중 하나로 플레이하고 있을 때는 당당하게 문을 확 열어젖히며 액정 너머로 이리오너라를 외쳤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이 세계의 주민에 빙의한 것도 아니고 지극히 평범하고 평범한 27세 대한민국 건아의 몸뚱이 그대로 이곳으로 날아왔다.


사회초년생에다 상경한 자취생이라 돈은 없지. 회사에서는 막내지. 총괄이랑 액팅 쪽이 껴서 회의할 때면 무슨 말이 오갔는지 받아쓰기만 하는 속기사 정도의 하찮은 포지션의 이펙······ 어쨌든.


그냥 쉬는 날마다 원령요람이나 하는 뭐 그런 평범한 겜창이다.


덤벨은커녕 아령을 들어본 적도 없고 하물며 학생 때 계주를 뛴 적도 없다. 초등학생 때 단거리 일등 도장을 받아서 공책을 받기는 했는데, 정말 내세울 거라곤 그것밖에 없는 딱.


그런 사람인데.


“꼭 날 데려가야겠구나, 너희.”


이 천재의 인생을 살아온 야박한 영웅들에게 이런 추억팔이가 먹힐 리 없지.


내가 잠깐 추억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이미 채강은 문을 열고 강적에게 나를 떠맡기듯이 밀어버렸다. 강적은 자연스레 내게 팔을 휘감듯이 팔짱을 껴서는 퇴로를 차단했다.


무슨 마법사가 이렇게 힘이 세냐······. 열심히 팔을 흔들었지만 강적의 훌륭한 바스트 덕분에 여간 민망한 것이 아니라, 얌전해져야만 했다. 진짜 모델링 한 번 죽여주게 했다.


지금은 지켜준다던 강적의 말을 믿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문이 활짝 열린 덕인지, 내부는 어렴풋한 빛으로 밝혀져 있었다. 강적에게 이끌려 먼저 들어가는 채강을 따라 진입하니, 그 많던 창문이 전부 무언가로 막혀 있다. 암막 커튼이나 블라인드처럼 보이지는 않고······.


엄밀히 따지자면 점성 있는 액체 같은데 어두컴컴한 보라색이다.

저게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뚜걱. 뚜걱. 뚜걱.


잘 깔린 대리석 바닥 덕분에 세 명의 걸음 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린다.


채강은 곧장 로비를 가로질러 정면에 보이는 계단으로 향했다. 이 성은 5층짜리고, 5층은 백작과 같은 성을 쓰는 사람들의 침소나 개인 서재 등으로 이용된다.


대회 규칙상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은 4층의 응접실이라고 명시되어 있기는 한데.


“아무도 나와보지 않는군요.”


일반적인 판타지처럼 이런 거대한 귀족의 건물에 들오면 저택의 집사나 사용인들이 저택을 안내해주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사용인은 물로 쥐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귀족의 저택에 쥐가 살진 않겠지만.


“그럴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없는 거겠지.”


그래, 채강의 말이 옳다. 이 저택에 거주했던 인간은 전부······더 이상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닐 테니까.


“뭔가 있어요.”


강적이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한 방향을 예리하게 노려봤다. 깃펜까지 꺼내며 살짝 위쪽을 보는 걸 보니 바로 위쪽 계단에 무언가 있는 모양인데.


“사, 살려줘!”


동시에 그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강적은 계단을 정직하게 오르는 것 대신 난간을 밟고 계단 중앙에 장식된 누군가의 흉상의 어깨를 짓밟으며 훌쩍 뛰어올라 바로 4층의 복도를 향해 몸을 던졌다.


동시에 끄드득, 무슨 소리인지 알고 싶지 않은 소리가 울렸다. 일단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였다. 예를 들면 인간의 뼈 같은 거.


“꽉 잡아요.”


강적은 갑자기 내 팔을 놓고 허리를 감더니, 깃펜을 기운차게 휘둘렀다. 펜촉의 끝에서 푸릇한 새싹 같은 빛이 휘몰아치며 강적의 발아래에 마법진이 생겼다.


[도약]


어버버 할 틈 없이 몸이 붕 떠올랐다. 자, 잡으라고는 하는데 딱히 잡을 데가 없었다. 그렇다고 채강처럼 강적의 머리통을 잡을 수도 없고.


타탁. 깔끔하게 4층의 복도에 착지한 강적은 나를 내려주려는 듯 감은 팔에 힘을 빼다가, 다시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눈앞에 있는 무언가가 검은빛을 뿌리는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이쪽으로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우리보다 몇 발 앞의 채강을 향해 걸어가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아주 느리고 묵직한 발걸음과 달리 배를 심각하게 꿀렁이고 있었다. 배 안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것처럼 꿀렁거린다.


배와 함께 머리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듯이 머리가 앞으로, 옆으로, 그리고 위아래로, 흐릿한 빛에 무엇도 보이지 않는 주변을 부자연스러울 만치 과장되게 흔들거린다.


흔들리는 머리에서 두 가지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원해. 안돼. 원해. 안돼. 전부. 더는. 먹어치워! 그만!]


머리가 아팠다. 그 광기 어린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져나갈 듯이 울렸다. 며칠 전 들었던 원령의 것인지 아닌지,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인 것 같은 음성 틈으로 간절하고 애달픈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비집어 든다.


“이것이······ 잠식인가요.”


강적의 목소리가 옅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팔도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늘 실체는 존재하나 육체가 없는 원령의 상태만을 보는 포획자에게는 낯선 모습일 것이다.


이건 공포가 아니라 분노다. 그녀는 명백히 분노하고 있었다.


채강이 그랬던 것처럼 강적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생각은 좀 나중에 해주면 좋겠다. 지금은 얼을 빼놓을 때가 아니다.


“예상보다 심하군. 단계가 올라갔다.”


백작의 모습은 척 봐도 기괴했다. 원래 제 배를 불리는 사람이었든 아니든 일단 사람이라면 저런 형체는 불가능할 것 같을 정도로 배만 터질 듯 빵빵하다.


처음 잠식당한 사람은 조금도 티가 나지 않는다. 그저 원령의 속삭임이 들리며 그 원령의 욕구에 맞게 충동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이상 증세를 보이는 정도다.


저렇게 신체까지 변형되었다면 이미 잠식 단계가 올라간 것으로, 어쩔 수 없이 구원(물리)을 통해 숙주까지 처단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


원령이 무엇이든 먹어 치우는 ‘검은 입’인데다 파라파백작의 성에 거주하는 사용인이 상당히 많으므로······. 잠식의 단계가 아주 빠르게 올라가는 귀찮은 보스다.


포획자와 달리 해방자로 플레이한다면 주변의 참가자들을 다 쳐내어 금메달을 달성해도, 이미 달려가는 순간에 1단계의 변형이 완료되어 응접실의 한 귀퉁이에서 괴이쩍은 모습으로 플레이어를 반긴다.


모 전설에 나오는 귀신마냥 입꼬리가 귀까지 쭉 찢어져 있고 마른 몸에 배만 기이할 정도로 튀어나와 양발을 벌린 채 뒤뚱거리면서 걷는······실루엣으로 예상컨대, 지금이 딱 그 1단계다.


원령요람은 잔인함으로 18금 딱지가 붙은 게임이고.

그것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그의 배가 쩌저저적 갈라졌다. 알을 깨고 나오듯이 배부분의 음영이 짙어지며 뻐끔 열리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벌어진 입과 갈라진 배에서 검은 입의 혀가 튀어 나오며······ 비명의 주인공의 것처럼 보이는 뼈가 후두두둑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이벤트 장면이 끝났다.


스르르릉. 채강의 검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성스러울 정도로 새하얀 빛을 뿌리며 뽑혀나왔다.


스으으. 흐리게 숨을 들이쉬는 그의 몸에서 증기처럼 새하얀 기운이 흐른다.


“원령에 삼켜진 딱한 이여. 너의 이야기를 끝맺으려 검을 들었으니, 더는 두려워 말라.”


채강의 묵직한 목소리가 장내를 울린다.


[구원의 시간]


해방자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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