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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깃 노트

엑스트라의 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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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LOT
작품등록일 :
2021.09.19 01:48
최근연재일 :
2021.11.03 14:29
연재수 :
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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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글자수 :
89,511

작성
21.10.0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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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 싸우지만 말자.

DUMMY

느닷없는 제안에 멍해진 것도 잠시, 강적이 내가 잡고 있던 손을 역으로 잡아 쥐었다.


“못 들은 척 하지 마시고요.”


못 들은 척 아니고. 그냥 진짜 잘못 들었나 싶었을 뿐인데.

강을 잡아끌기 위해 애쓰고 있던 반대쪽 손도 역으로 붙잡혔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저도 키퍼가 함께 가기를 바랍니다.”


어쩐지 갑자기 두 사람의 의견이 합치되었다.

아니, 내가 같이 가자고? 이때까지 내가 진행한 시나리오에서 그런 괴랄한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 일단 나는 엑스트라란 말이야.


아니, (구)엑스트라. 알고 보니 흑막의 쫄다구.

어쨌든 주인공과 함께 가자니, 너무 과한 제안이다.


“아, 그게 또······. 내가 제약 때문에 같이 못 들어갈······걸?”


아닌가?


곰곰이 규율을 떠올렸다.

딱히 함께 의뢰에 참가하면 안된다는 말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럴 리 없어요. 내 선배 중 한 명이 키퍼를 데리고 ‘게이트’에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있으니까.”


나 이외에도 3회차를 시작한 유저가 있다는 건가?

음. 강적이든 채강이든 거짓말은커녕 빈말도 잘 안 하는 성격이니, 사실일 것이다.

확실히 내가 같이 간다면 언제 등을 돌리고 서로 으르렁거릴지 모르는 두 사람을 적당히 말릴 수 있을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나는 슬쩍 한발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날 왜? 나는 일단, 전투 능력은 전무한데.”


죽기는 싫단 말이야.


채강이 오기 전 여러 실험을 해봤다.

인터페이스를 몇 번이나 훑어보고 눈에 보이는 건 다 만져보고, 스킬창이나 스텟 같은 걸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무릅쓰고 이 악물고 쩌렁쩌렁하게 소리치기도 해보고.


그런다고 뭐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시스템은 규율과 과업, 그리고 의뢰목록만 주르륵 띄울 뿐이었다.


정말 내게 어떤 능력치도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금 진행 중인 이야기가 ‘나’에게는 튜토리얼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1회차도 2회차도 튜토리얼 진행 중에는 스텟창이니 스킬창이니 하는 건 못 열었거든.

그렇다고 해도 딱히 전투에 유용한 스킬이 생길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내가 한발 물러났다고 정말 몸도 뒤로 빠지는 건 아니었다.

양쪽에서 얼마나 손을 강하게 잡고 있는지, 상체는 그대로인 채로 하체만 뒤로 슥 빠진 우스운 꼴이 되어 버렸다.


“걱정은 마세요. 키퍼는 내가 지켜 줄 테니.”


적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진심은 1g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빈말은 하지 않으니까 정말 지켜주기는 할 텐데. 어떤 감정도 없다는 거지.


“‘포획자’와 ‘지킨다’라니. 웃기지도 않는 부자연스러움이군.”

“그런가요? 하긴, 구원자 병에 걸린 당신 같은 사람이나 공수표처럼 뿌리고 다닐 말이긴 하네요.”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이 세상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그것보다 무서운 게 없다더니. 딱 옳은 옛말이군요.”

“이다지도 무감할 수가. 너희가 집어넣은 원령들이 어떤 피해를 끼치며 살아가는지 모르는가?”

“당신이야말로, 거창한 핑계를 대며 풀어놓는 원령들이 얼마나 골칫덩이들인지 모르나요?”


둘의 말싸움이 점점 격해지다 못해 각자 검집과 펜대를 다시 잡는다.


그래. 주인공으로서의 통찰력은 개뿔.

너희 내 말은 정말 조금도 신뢰하지 않고 있구나.


실상 너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포획자가 원령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해방자가 원령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들을 생각이 없는 거겠지.


두 사람은 각자 해방자와 포획자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에피소드 1이 마땅히 해방자와 포획자로 키워진 각자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고.


태어날 때부터 주입받아온 사고방식이 사실 짜란, 가짜였단다! 라고 입을 터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그걸 덜컥 믿어버리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기는 해.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체념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가자.”


일단 같이 가야만할 것 같다.

아니면 원령을 발견하기도 전에 둘 중 하나가 이승을 떠나버릴 수도 있으니까.

설득은 모르겠고 일단 둘이 싸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같이 가야할 것 같다.


“가서 다시 설명해 줄게. 그럼 내 말을 믿을 수 있을 거야.”

“자신만만하군요. 그렇다면 지체할 이유는 없죠.”

“동의한다. 바로 가시죠, 키퍼.”


사실 이 둘은 상당히 마음이 맞는 게 아닐까?

아까도 미리 작전이라도 짠 것처럼 내 팔을 덥석 역으로 잡아버리더니,

이번에도 자신들이 받은 의뢰서에 동시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지막 줄에 각자 그의 이름이 적히며, 의뢰서가 화르륵 타오르듯이 사라졌다.


저 의뢰서는 평범한 의뢰서가 아니다.

이렇게 마력을 불어넣으면 의뢰가 수락되고 동시에.


‘게이트’가 생긴다.


그들 각자의 앞에 게이트가 하나씩 생겨났다.


이 게이트의 모양은 계정 생성 시의 랜덤 가챠였다.

그래서 취향에 따라 리세마라, 즉 삭제하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지.

여담으로 마음에 드는 여관 주인을 뽑기 위해 리세마라를 하는 유저들도 많았다.


어쨌든, 지금 3회차를 시작한 뒤 게이트를 직접 본 것은 처음인데.

제법 예쁜 게이트에 당첨된 것 같다.


포획자인 강적은 그녀의 성정에 걸맞게, 거대하고 낡은 책이 턱 생겨났다.

동시에 거친 바람이 불며 해당 페이지가 촤르르륵 넘어가더니, 종이 틈으로 덩굴이 뻗어 나와 아치형의 문을 만들어낸다.


해방자인 채강 역시 그의 성정에 걸맞게, 단단한 철판 같은 것이 뚝 떨어져 박혔다.

아주 단순하지만, 꾸미지 않은 단순함이 더욱 압도적인 힘을 부각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내리박힐 땐 심지어 잠깐이지만 주위가 흔들리는 것 같은 이펙트도 있었다.

동시에 흙먼지 같은 것도 피어올라서 잠깐 주위의 시야가 뿌옇게 변할 정도였다.


상당히 화려한 걸 보니 게이트 생성 이펙트의 등급만 따지면 한 S급은 되겠는걸.

신참들에게는 너무도 과한 게이트다.


아무리 내가 3회차라고 해도 그렇지. 3회차 특전으로 이딴걸 주냐?

한쪽은 반짝반짝에 한쪽은 쿠과광에 아주 그냥.


“너희, 다음부터는 건물 밖에서 문 열어라.”


이 가게, 명의가 내 거는 맞겠지?

왠지 모를 불안감에 나는 혹시나 유리잔이 깨지지는 않았을까, 뒤의 장식장을 살펴야만 했다.


다행히도 내 살림은 아주 멀쩡했다. 아무래도 둘 다 그냥 이펙트만 화려했을 뿐 별일은 없는 것 같고.


아니. 별일은 있었다.


“그래서, 키퍼.”

“키퍼, 선택의 시간이네요.”


두 사람은 나를 부른 주제에 서로를 열렬히 바라보며 동시에 말했다.


“제 문으로 가실 거죠?”

“저와 함께 가시죠.”


아, 노답들아.


나는 이 상황에서도 서로 경쟁하는 아기1과 아기2를 한번 씩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가위바위보라도 할래?”




* * *




“우, 우웨에에엑.”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게이트를 타는 게 이렇게 괴상망측한 기분이었을 줄이야.

내 몸속에 있는 장기가 죄다 한 바퀴 뒤집혔다가 돌아온 것 같은 괴로움이었다.


채강을 다독이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같이 입에 쑤셔 넣은 것이 많았던 터라, 나는 볼썽사나운 상태였다.

도착한 곳이 숲이라 다행이지. 시가지였으면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했을 거다.


“키퍼는 게이트 이용에는 익숙하지 않은가 보군요?”


늘씬한 손이 내 등을 툭툭 두드린다.

그녀는 슬쩍 안경을 내린 채, 의도적인 흐린 눈으로 나를 빗겨 보면서 말했다.


차라리 그냥 몇 발자국 멀리 떨어져 줄래.

아무리 그래도 누님한테 이 꼴을 보이고 싶진 않단 말이지.


그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채강이 아닌 강적과 이곳에 왔다.


가위바위보에서 강적이 승리했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이놈들, 확실히 정말 마음이 맞는 게 옳은지 가위바위보로 20연속 무승부를 냈다.


덕에 선택의 몫은 다시 내게로 넘어왔고. 내가 강적을 선택한 것이다.

별 이유는 없었다. 아까 채강에게 먼저 차를 건네줬던 것도 조금도 관련 없고.

그냥, 순서대로 따지고 보면 강적이 원령을 발견하는 스토리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겨우 진정한 나는 강적이 건네준 물통으로 입을 씻어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볼일 본 뒤 모래를 덮는 고양이처럼 나의 만행을 요령껏 감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게이트를 타는 건 처음이거든.”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러니까 판타지적 상식으로 생각하면 ‘나’가 이쪽에 건너올 때도 게이트를 이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 울렁거리지는 않았단 말이지.


“신기하네요. 헤카는 아니라는 거죠.”

“아니지.”


아닌 게 맞나? 즉각 답하기는 했지만, 뒤늦게 머릿속에서 의문이 퐁퐁 솟았다.


나는 헤카가 아니기는 한데, 키퍼라는 엑스트라는 헤카일 수도 있다.


헤카는 원령들을 만든 고대인의 핏줄을 의미하는 단어로 포획자와 해방자들이 이에 속한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거슬러 올라가면 집안싸움이라는 의미다.

그러네, 키퍼까지 헤카면 이거 완전 콩가루 집안이잖아.

차라리 내가 헤카가 아닌 쪽이 훨씬 해피엔딩일 것 같다.


“그래요. 몸은 솔직하니까요. 믿을 만 한 발언이네요.”


그녀는 나를 분석하듯이 한 번 쓱 훑어보고서는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무어라 슥슥 기록했다. 아무래도 나와 함께 가자고 한 것은 나를 감시하기 위해서인가 보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느닷없었지?

수상하게 여길 만은 한데.

이렇게 빗장을 꽉 닫고 있으면 설득은 어떻게 한담.


우선 강을 만나 한 파티를 이루고 싶은데.

딱 잘라 강을 찾으러 가자고 말하기는 애매했다. 당연히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겠지.

어차피 스토리를 진행하면 강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테니, 선회하기로 했다.


“의뢰부터 처리할까? 뭘 해야 하는 지는 알고 있지?”

“전 무식한 누구와는 다르니까요. 미식대회 근처에서 배회하는 탐욕의 낱말을 찾아 포획한다. 그게 내 목표죠.”

“좋아. 그럼 미식대회가 정확하게 언제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부터 알아봐야겠지?”

“날 너무 무시하는군요. 저는 베테랑 포획자예요.”


그녀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서는 먼저 걸어 나갔다. 반대 방향으로.

아니, 아무리 길치라는 쓸데없고 귀여운 설정이 붙어있다고 하지만 진짜 정확하게 반대로 갈 줄이야.

길이 여러 개도 아니고 딱 하나 나 있는 데다 분명히 이쪽만 ‘백작’이 살 법한 거대한 도시가 보이는데 어떻게 이걸 틀리지?

젠장, 제발 이따위 설정으로 갭모에같은 거 노리지 말라고. 이지적임이 무너지잖아.

본인은 얼마나 귀찮고 짜증나고 피곤하겠어.


“응, 그쪽 아니야.”


나는 혀를 쯔쯔 하며 강적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꽤 불쾌한 듯한 얼굴로도 순순히 내게 끌려왔다.


“바로 목적지로 가는 건 아마추어나 하는 짓이에요. 주변을 탐색하는 게 먼저라고요.”


강적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녀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 그런데 난 아마추어니까, 오늘은 바로 가는 걸로 하자.”

“그래요. 키퍼가 그렇다면 베테랑인 저는 따라주는 수밖에요.”


아무래도 정말 험난한 여정이 될 것만 같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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