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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깃 노트

엑스트라의 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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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LOT
작품등록일 :
2021.09.19 01:48
최근연재일 :
2021.11.03 14:29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645
추천수 :
15
글자수 :
89,511

작성
21.10.14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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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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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3. 적의 적은

DUMMY

강적이 달려 나간 방향을 가리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무래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이 탈것은 승차감이 아주 최악이다. 토네이도와 게이트를 포함해서 이제껏 타본 그 어떤 것보다 최악의 승차감이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느리더라도 내 발로 뛰어가든가 해야지. 아까 속을 다 게워내지 않았으면 이 어깨 위를 화려하게 물들였을 거다.


그래도 확실히 내가 뜀박질을 하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거리가 좁혀지고 있기는 했다.


몇 발 뛰지도 않았는데 건물의 외벽을 밟고 올라 지붕을 훌쩍 뛰어다니니, 벌써 원령의 새하얀 체력바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애초에 움직이는 속도 자체도 나의 배는 되는 것 같고.


“키퍼.”


이놈은 거의 원령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힘들지도 않은 모양이네.

비해 나는, 얌전히 옮겨지기만 한 주제에 지금 토할 것 같으니까 제발 말 걸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왜.”

“지금 뒤를 쫓고 있는 원령과 제가 해방해야 하는 원령은 같은 원령입니까?”


별 이상한 질문을 하네.


당연한 거 아냐. 1의 붉은 창끝과 4의 붉은 창끝은 다른 원령이지만 이번에는 같은 원령이다. 성질과 환경이 비슷하면 같은 이름이 붙고 같은 모습을 하기는 하지만······


아닌가? 같은 원령이 아닐 수도 있나?


1과 4의 붉은 창끝이 다른 원령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카드 수집부터 떡밥을 그렇게 깔았는데, 진엔딩에서도 밝혀지는 내용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이번의 ‘검은 방’을 떠올리자면.


포획자는 필연적으로 저 탐욕의 낱말을 놓치게 되고.

해방자는 포획되지 않은 원령을 한 번도 만나지 않으니까.

······어, 그럼.


“모르는군.”


단호한 중얼거림이 정곡을 찔러온다. 야, 어깨에 둘러메놓고 그렇게 큰 소리로 중얼거리면 들으라는 거 아니냐.


“나라고 뭐 다 알겠냐?”

“그리 생각했습니다만.”


참, 사람을 과대평가해도 정도껏 해야지.

뭐,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어렴풋이 예상이 된다. 본인이 나고 자란 마을의 비밀을 내가 술렁 까버렸으니, 그만큼 대단한 정보력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는 거겠지. 그의 예상대로 내가 ‘대단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도 맞고.


하지만 내 정보에는 빈 공간이 많다. 미래의 큰 줄기와 흐름은 알고 있지만, 그 미래가 벌어지게 된 상세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고나 할까. 나도 그게 궁금해서 세 번째를 시작한 거니까 모르는 건 당연하지.


생각해 보니 괜찮은 추론인 것 같다.


또 한 명의 포획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원령 자체가 같은 이름과 같은 외형의 다른 원령이었다라.


분명 나는 두 사람에게 의뢰서를 건넸다. 의뢰서는 내게 내려온 퀘스트를 기반으로만 작성되고, 의뢰서 작성 자체가 키퍼의 일이었기에 나는 규율인지 무언지 때문에 개요만을 적을 수 있었다.


미식대회에 우승하면 특별한 원령이 담긴 사물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식 축제에 가면 탐욕의 낱말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뢰서라기에는 아주 불확실한 내용만 가득하다. 그런데도 이들이 움직인 것은 당연하게도 게임이기 때문이다. 키퍼가 제시하는 의뢰서에 빗나감이란 없으니까. 키퍼의 의뢰서는 언제나 정확한 정보니까.


두 의뢰서가 말하는 원령이 하나의 원령이라고 생각한다면.


의뢰서를 보낸 쪽은 ‘강적은 포획에 성공하고 그 원령이 미식대회의 우승 상품으로 걸린다’는 미래를 점지한 것과 다름없게 된다.


다른 원령이라고 해도 같은 원령이 올 거라는 확실한 정보를 가졌다는 것이 꽤 수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쪽이 훨씬 말이 된다고나 할까.


“그래. 다른 원령일 확률이 더 높겠어.”


물론 이건 게임이고 설정값이 있으니까 어느 쪽이든 어렵지 않겠지만.


“예. 그럴 확률이 더 높고.”


채강의 단호한 말은 끝나지 않고 잠깐 멈췄다.


“그래야만 할 겁니다.”


그, 그래야만 할 거라니. 등에 오싹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슬쩍 곁눈질한 채강이 정면이 아닌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사, 살기 봐라. 살기. 이건, 답이 아니라 분명한 협박이다. 협박이 아닐 리가 없다.


그래, 어느 쪽이든 의뢰서를 건네준 내가 수상하지! 완전 수상하지! 나도 알지, 수호자 연합이 너무 수상하거든!? 그러니까 그 연합의 소속인 나도 너무 수상하고 이상한 사람인 건 당연하지!


주인공다운 통찰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강적이 나를 의심했듯이 채강역시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이놈을 타고 있는 게 아니라 이놈이 지금 나를 데려가고 있는 거다. 강적도 나도 감시해야 하는 대상이니까.


“나, 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럴 리가.”


그래, 모르쇠는 안 되겠지? 이미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안다는 티를 팍팍 냈으니까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주의를 돌리자!


“야, 야. 거의 다 따라잡았네! 원령 저기 있다, 저기!”


얼른 원령의 체력바를 삿대질하며 말했다. 이놈에게 저 체력바가 보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리키자 그쪽을 정확하게 바라보기는 한다.


체력바가 아주 잘 보여서 다행이다. 채강이 얼마나 빠른지 숫자가 다시 읽힐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숫자가······


“줄었잖아?!”


그럴 리가 없는데!?


강적이 그 칠만으로 시작하는 피를 반 넘게 예쁘게 줄이기는 했는데, 도망가는 시점부터 원령의 체력은 다시 회복되고 있었다. 거의 방금 레버를 당긴 슬롯머신 정도의 속도로 아주 재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겨우 따라잡는다고 하더라도 다시 풀체력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지금, 원령의 피는 고작 네자릿수밖에 되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체력바가 줄었잖아.”


여전히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한 걸 보니 이 녀석의 눈에는 체력바가 안 보이는 모양이다.


“강적인가?”


강적이겠지. 그러니까, 네자릿수가 된 걸 보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원령의 체력을 깎아가고 있다는 건데 강적이······ 맞겠지? 비록 채강이 내게 말을 걸며 속도를 슬쩍 줄이기 전까지는 강적이 시야에 보였지만 어쨌든 원령의 피를 깎고 있는 게 강적이 맞겠지?


다시 힐끔 바라본 채강은 여전히 의문의 얼굴로 내 손끝이 가리킨 쪽을 응시하고 있다.


······절대 아닐 것 같은데? 완전 아닐 것 같은데?! 절대 강적일 리가 없는데!?

강적이 아니면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건물의 지붕 위.

날은 어둡고 바닥은 까마득하다.


잠깐 채강의 어깨에서 무차별하게 추락하는 내 모습이 머릿속을 강렬하게 스쳤다. 토네이도보다 나쁜 승차감의 이놈이 어쩌면 토네이도도 가져오지 않은 추락사를 선물해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필사적으로 두 팔을 들어 채강의 머리통을 쥐었다.


“뭡니까? 시야에 거슬립니다.”


네가 날 바닥에 메다꽂을 것 같아서 뭐라도 잡으려다 보니 잡을만한 게 머리통밖에 없었다거나 하는 말을 할 수는 없고.


“일단, 앞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으니까 내려가 볼까?”


어쨌든 채강에게 죽는다면 볼썽사납게 바닥으로 버려지는 것보다야 저 장검에 꿰뚫리는 쪽이 좀 더 멋있는 죽음 아니겠어.


최대한 방긋방긋 웃으며 그를 회유했다. 솔직히 웃는 것보다 그냥 내 팔에 시야가 가리는 것이 짜증 나서 고분고분 내 말을 들어주는 것 같다.


채강이 아주 가뿐하게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와우, 비록 이 도시에 고층 건물은 없다고 하지만, 삼층 높이에서 맨몸으로 훌쩍 뛰어내리는 건 꽤 아찔했다. 이걸 내가 당할 뻔했다는 거지.


그가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얼른 머리통을 놓고 나도 바닥에 착지했다. 여기부터는 길이 쭉 이어져 있으니까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먼저 뛰어가면!


그래도 금방 붙잡히긴 하겠지만 먼저 뛰어가면!


······이 아니라, 뛰어갈 수가 없었다.


“막혔······네.”


결계가 쳐져 있어 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마법으로 된 투명한 육각의 도형의 벽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이거 침묵의 방이잖아. 확실히 강적의 침묵의 방과는 뭔가 느낌적 느낌이 다른 느낌이기는 한데. 딱 뭐라 꼬집기는 힘들고 왠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기는 한데.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침묵의 방은 재사용 대기시간이 2시간. 그러니까 절대로 이 침묵의 방을 발동한 것이 강적이 아니라는 의미다.


채강이 검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나를 힐끗 바라본다.


야, 베냐? 진짜 나 베냐?


강적이 방을 열어 날 죽일 뻔하더니, 이번에는 채강이 내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아무래도 이거, 난이도 설정이 잘못된 것 같은데? 여기저기서 나를 죽이려 들면 스킬은커녕 신체 능력도 별 볼 일 없는 내가 살아남을 방법이 없잖아!


“하.”


그가 짧은 숨을 토해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원래 다쳐도 다친 걸 확인하기 전에는 좀 덜 아프거나 안 아프거나 하는 법이잖아 그러니까.


스르르릉, 금속의 소리가 울리고.

서걱. 무언가 절단되는 소리가 들렸다.


“어라?”


안 아프네.


“뭐합니까, 키퍼.”


다시 눈을 뜨자, 채강이 그 육각의 벽 너머에 서다. 육각의 도형은 그 도형의 이음새와 맞지 않게 검격의 흔적에 따라 대각선으로 쭉 찢어진 뒤 위아래로 벌려진 듯한 모양새로 찌그러져 있었다.


“아, 들어가야지, 들어가!”


나는 겁먹은 적 없는 것처럼 얼른 찢어진 입구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놈은 침묵의 방에 재사용 대기시간이 있다는 걸 모르나 보다. 하긴, 나도 포획자를 플레이하기 전까지는 포획자에게 어떤 스킬이 있는지 전혀 몰랐지.


그렇게 내 목숨이 잠깐 시간을 벌었나 싶었는데.


들어오자마자 강적의 목소리가 선명하게도 들려왔다.


“당신은 대체 뭐죠?”


꽤 격앙된 듯한 목소리. 이어서 아주 밝고 높은 웃음소리가 퍼진다. 절대 침착하고 우아한 분위기의 강적의 웃음소리는 아니다.


강적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채강이 바로 내 뒷덜미를 덥석 잡아쥐고서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내달렸다.


무슨 들개도 아니고, 뒷덜미를 쥐인 나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아주 놀라운 장면을 마주해야했다.


누군가 허공에 떠 있다. 그녀, 라고 부르기에는 체구가 상당히 작고 딱 봐도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다. 심지어 위쪽으로 양갈래머리까지 하고 있는 데다 머리끈도 아주 새빨갛고 귀여운 체리다.


연갈색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소녀. 새빨간 눈을 가진 그 아이의 뒤로는 보글보글, 무언가 끓는 듯한 거대한 솥이 하나 보인다. 챙 넓은 뾰족 모자같은 건 쓰고 있지 않지만, 폴폴 풍기는 연기마저 보라색인 것이, 아무리봐도 ‘마녀’가 사용할 법한 검고 동그랗고 오목한 무쇠솥이다.


고개를 젖히며 한참이나 웃던 소녀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그럼 정말 놀라운데?”


자기 입을 슬쩍 가리며 진짜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내 발이 다시 바닥에 닿고, 바로 옆에 있던 채강의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참, 조금 더 머리를 굴려봐.”


소녀는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더니, 갑자기 손바닥을 보였다.


그렇게 내뻗은 손안으로 검이 들어왔다. 검이 저절로 들어간 것처럼 덥석 붙잡혔다.


“오랜만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난폭하게 반가워할 건 없잖아.”


검이 잡힌 탓에 채강은 허공에 붕 떠버렸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바로 몸과 함께 검을 비틀었다. 소녀는 앗차, 짧은소리를 내며 검을 잡은 손을 놓으며 허공에서 한 발 물러났다.


동시에 떨어지는 채강을 바라보며 두 손을 해맑게 흔든다.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거기 서!”


채강이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었다.

소녀는 정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으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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