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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깃 노트

엑스트라의 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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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LOT
작품등록일 :
2021.09.19 01:48
최근연재일 :
2021.11.03 14:29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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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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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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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적의 적은

DUMMY

저렇게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마법은 생각보다 많다.


눈에 보이는 몇 미터 밖으로 몸을 이동시키는 마법, ‘블링크’도 있고. 몸과 기척을 전부 없애버리는 ‘하이드’도 있고, 게이트를 통해 입장했다면 위기의 순간 바로 게이트 밖으로 도망갈 수 있는 일명, 긴급탈출 버튼인 ‘이스케이프’도 있다.


문제는 세 가지 다 고난이도 마법이라 아주 후반의 후반에 배운다는 것. 즉, 이 쪼렙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레벨이 높은 상대라는 것이다.


어차피 세 가지 중 무언가를 사용했다면 아직 ‘추적’ 기술이 없는 채강이 사라져버린 소녀를 찾아내는 것도 무리다. 오히려 다행인 부분이라고 할 수있다.


즈즈즉.


얼음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침묵의 방이 사라졌다. 시전자가 사라지면 침묵의 방도 사라진다. 자리를 떠나지 않고 몸을 숨기는 마법인 하이드는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거의 혼이 나간 듯이 소녀가 사라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강적에게 물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물고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응답하지 않겠다는 표시다.


검을 다시 집어넣는 채강을 바라봤다. 저쪽은 갑자기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으음. 하긴, 벌써 저녁때가 넘기는 했지.


밥이나 먹여야겠다. 오늘 저녁은 내가 책임지기로 약속했으니까.



* * *





밤이 깊어져, 그대로 뿌리 박힌 듯 움직이지 않으려는 두 사람을 데리고 헤카론의 빛을 찾았다.


그리고 헤카론의 빛, 1층 식당.


가장 외곽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두 사람을 대충 앉혔다. 해가 넘어가자마자 강적이 찾아와 저녁 식사를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둘 다 별로 입맛이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영웅님들을 잘 먹여둬야 내일도 열심히 움직일 수 있다. 공복 게이지 같은 건 없지만 음식 버프는 출정 전 아주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라는 계산이었는데. 둘은 무언가를 주문하기는 커녕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고 그저 입만 꾹 닫고 있었다.


그래, 채강은 염통꼬치를 토해내진 않았을 테니 배가 안고플 만하기는 하지만.


둘의 머리가 열심히 돌아가는 것이 눈에 선하다.


강적의 표정은 상당히 덤덤하기는 한데. 얼굴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원령을 놓쳤을 뿐더러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먼저 포획해버린데다, 그 장면을 모두 채강에게 들켰으니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너덜너덜하게 찢어발겨졌을 것이다.


반대로 채강은 온몸에서 ‘나 지금 고민 중임’이라는 오오라가 팍팍 뿜어져 나온다. 강적과는 달리 포획자가 정말 원령을 포획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을 목격한 탓도 있는 것 같지만, 아주 잠깐 반짝하고 사라진 그 수상한 ‘소녀’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그 소녀가 누구인지 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생긴 npc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그 소녀를 만난 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채강에게 분명히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하지 않았나?


입이 근질근질거린다. 강적에게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은데, 입을 뻥긋했다간 그대로 날카로운 펜촉으로 내 목을 꿰뚫을 것 같고. 채강에게 그 소녀를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간 한순간에 내 목 위와 아래가 이별을 할 것 같다.


어느 쪽이 더 좋은 죽음인지 선택하기 힘들어서, 일단은 사는 쪽을 선택했다.


“밥부터 먹자?”


둘이 답을 하든 안 하든 일단 삼 인분을 주문했다. 채강이나 강적의 입맛 같은 건 모르겠지만 스토리상 딱히 가리지 않고 뭐든 잘 먹으니, 괜찮겠지.


미식 축제가 열리는 지역인만큼 이곳의 음식은 퀄리티가 높다. 둘 중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주인공 중 한 명이 혼자 그런 말을 중얼거렸던 기억이 있다.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그렇게 설계된 동물이다.


침묵 속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한아름 지방의 파라파 백작이라는 기묘한 설정을 가지고 있지만, 일단 이 세계 헤스티카는 배경이 서양에 가깝다. 지방 이름이 한아름이라는 건 고유명사를 바보처럼 번역해버린 결과처럼 생각하면 된다. 국산 게임이긴 하지만.


즉, 눈앞에 차려진 건 화려한 한식이 아니라 나와는 데면데면한 서양식이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차려졌음에도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살벌한 분위기에 슬그머니 그들의 앞에 수저를 놓아주고 나도 수저를 챙겼다.


대충 뷔페의 많이 먹기 팁처럼 샐러드를 먼저 먹으면 되는 건가. 슬그머니 보울에 수북하게 나온 샐러드를 집어 앞접시에 더는데.


“키퍼.”

“키퍼.”


아, 깜짝이야. 아무래도 나는 심장이 떨어져 죽을 운명인가 보다. 동시에 나를 불러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어느 쪽을 먼저 봐줘야 할 지 몰라 갈팡질팡거렸다.


이 원형테이블에도 둘이 딱 양쪽으로 나눠서 앉은 꼴을 보라지. 솔직히 이렇게 앉으면 먹을 때마다 서로를 마주 보게 되는데 왜······ 아. 뻔하다. 서로를 감시하기 위해서겠지.


나 역시 ‘수상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일단 서로보다 경계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나는 잠깐의 안도와 함께 먼저 강적을 바라봤다. 멘탈이 깨진 건 이쪽이니까 이쪽을 더 우쭈쭈해줘야 한다.


“왜? 둘 다 무슨 일이야?”


후에 채강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둘 다 답이 없다. 이 답 없는 것들. 동시에 나를 부른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서로를 노려보는 데 집중했다. 뜨겁다, 뜨거워.


“적이부터 말할까?”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얼른 끼어들었다. 강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관자놀이를 짚는다.


“내 의뢰는 실패했어요. 원령은 다른 포획자가 먼저 포획해버리고 말았죠.”


자존심보다 사실을 보고하는 것을 선택한 그녀가 깊은 한숨을 뱉었다. 물론 채강 역시 예상한 일이었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저, 요요하게 비웃던 강적처럼 짧은 바람 소리를 섞은 비웃음을 선사해줬을 뿐이다.


강적은 채강의 비웃음은 못 들은 체하며 저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저 말고 다른 포획자가 이곳에 있다니, 이상한 일이에요. 상황을 확인해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실패한 의뢰인데 굳이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이유도 없고요.”


아마 그 솥이 보글보글 끓던 것이 ‘포획’의 이펙트일 것이다. 강적도 포획하면 원령이 ‘종이’에 녹아드는 시간 동안 책이 번쩍번쩍 빛을 낸다.


그저 원령이 도망쳤다는 것만 알았던 기존과 달리, 누군가 눈앞에서 원령을 포획해버리는 장면을 목격해버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기는 한데.


가지 말고 채강을 좀 도와주지?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다. 애초에 채강도 두 손 놓고 구경만 했고. 채강도 딱히 바라지 않을 것이다. 둘 모두에게 대놓고 비난을 들을 말이다.


“그럼 돌아가려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게이트를 통해 돌아가면 의뢰 완료이기는 한데.


“아뇨. 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이곳에 해방자의 의뢰가 있다는 건, 조만간 그녀가 포획한 원령이 이곳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의미하죠. 우매한 해방자가 내가 포획하지 못한 원령을 해방하지는 못하겠지만, 포획된 원령을 회수하는 것도 내 일이에요.”


졸지에 채강은 원령을 해방시킬 능력이 없는 우매한 해방자가 되어버렸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지 않다니, 상당히 추악하군.”

“내가 부족했다는 건 인지했어요. 단지 당신이 나보다 뛰어날 리 전혀 없으니, 아주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끝에 낸 결론일 뿐이죠.”

“키퍼의 당부는 잊었나? 너는 네 일을 하고 나는 내 일을 한다. 서로 방해하지 않기로 했을 텐데.”

“방해라니. 포획된 원령을 회수하는 건 내 일이에요. 내가 굳이 당신을 방해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웃기는군요. 당신이 내게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 같나요?”

“포획에는 실패했으나, 체면을 위해 포획된 원령을 가지고 돌아가려는 것 아닌가? 그럴싸한 말로 행동을 정당화하고 싶을 뿐이겠지. 어차피 키퍼를 감시하는 것이 우선순위기도 하고 말이야.”

“키퍼를 감시하려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그 부분은 나 역시 인정하겠지만, 나머지는 동의할 수 없군요. 당신은 체면을 위해 타인의 공을 가로채곤 하나 보죠?”


불꽃 튀는 말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사람을 면전에 놔두고 참 너무들 한다. 이렇게까지 날 의심한다는 말을 대놓고 해도 되는 거냐고.


그럼에도 날 물리적으로 구속하지 않는 걸 고맙게 여겨야 하는 건지. 사실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지 않았으면 보는 눈같은 건 무시하고 나를 구속했을 지도 모를 일이기는 하다.


와, 그러네. 여긴 손님이 정말 많네. 쓸데없이 부럽다. 내 여관에도 사람이 많으면 영웅의 설정값이 넘치는 두 사람이 무기를 꺼내 들려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럼 내가 지금처럼 두 사람의 눈치도 덜 볼 수 있고.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놈들이 여관을 주저앉힐까 눈치 볼 상황은 아니라는 거다.


“지금 너의 행태가 그렇지 않은가. 실패했다면 실패의 책임을 지는 것이······!”

“당신의 사고가 딱 그 정도니 그런 저열한 생각밖에······!”


서로에 대한 멸시를 여과없이 드러내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멎었다.

내가 열심히 혀를 놀리는 놈들의 입안에 빵 하나씩을 쑤셔 넣은 덕이었다.


키퍼?


도톰한 빵에 입이 막혀버린 두 사람의 시선이 휙 내게 쏟아진다. 의아함과 황당함이 섞인 눈동자들이다.


“싸우지 말고 다녀오기로 했잖아? 말다툼도 싸움이란 말이지. 너희 이거 계약 위반이다? 안 싸우는 대신 내가 같이 오기로 약속한 건데. 이런 식이면 내가 억울하지. 덕분에 나는 세 번이나 치명상을 입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때리기야?”


입에 물린 빵을 조용히 앞접시로 내린 강적이 의아하다는 듯 채강을 향해 눈짓했다. 채강은 그 ‘치명상’은 네놈의 탓이 아니냐는 듯이 다시 이글거리는 눈으로 강적을 노려본다.


대충 ‘분명히 키퍼를 지켜준다고 단언하지 않았나?’ 하는 힐난과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군요.’ 하는 확신의 눈빛이다.


둘은 소리 없는 교신을 마친 후 나를 바라봤다. 수상하니 뭐니 실컷 떠들어놓고, 영웅님들 아니랄까 봐 남의 아픔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무슨 치명상을 입었냐고 묻는 듯하다.


난 틀린 말은 안 했다. 게이트 때문에 한 번, 토네이도 때문에 한 번, 채강을 탄 덕분에 한 번. 세 번이나 내 소화기가 치명적인 위기를 겪었단 말이지. 역류성 식도염 걸리면 다 너희들 탓이다. 내가 지금 저녁을 먹고 바로 누워 잔다고 해도 너희 탓이다.


“어쨌든, 적이는 나를 믿는 것과 상관 없이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론인 거고. 강이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둘의 대화를 듣다가 늙어 죽느니, 중재하는 게 낫지.


강적이 이미 제 입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빵을 조심히 뜯어 수프에 푹 담그는 걸 보며 채강에게 시선을 돌렸다. 녀석은 빵을 그대로 씹어 넘긴 뒤 답했다.


“아둔한 저 이는 모르는 것 같으나, 그 여자는 포획자가 아닙니다.”


그는 강적을 아둔한 저 이로 만들어버린 뒤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키퍼.’ 당신이 오기 전, 그 여관의 주인이었던 사람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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