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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시간 멈추고 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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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4.01.02 12:52
최근연재일 :
2024.04.03 18:52
연재수 :
6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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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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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글자수 :
315,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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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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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아이템 상점

DUMMY

정강준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장비 사야 된다는 얘기지? 아이고. 하필이면 돈 쓸 일이 이번 달에 다 터지냐.


평소였다면 그렇게까지 고민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트레드밀이 너무 비쌌다.


눈썰미가 좋은 오태영이 그 심사를 읽지 못할 리 없다.


말없이, 유행이 지난 스포츠백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회색 먼지가 검은 백을 더 낡아보이게 한다.


영문 모르는 정강준은 그 모습을 멀뚱히 보고만 있다.


“열어 봐.”


백 안에는 복싱장비들이 들어있다. 정강준이 손도 못 대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자, 오태영은 자기 손으로 그것들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하나하나 보여준다. 중고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분명 쓸 만한 물건들이다.


장비의 색깔은 가방과 마찬가지로 다 검은색으로 맞춰져 있다.


악취미잖아.


“아쉬운 일이지만, 복싱 아이템으로는 공격력을 키울 수가 없어. 민첩성도 마찬가지고. 아, 아니던가? 좋은 슈즈를 신으면 조금 더 민첩해지려나? 복싱장비들은 다 부상을 막고 위험을 줄이는 물건들이지. 주먹, 머리, 낭심. 그러니까 HP를 올리는 템이라고 하면 되겠지.”


본인 생각에는 그게 재미있는지 말하다 말고 웃는다. 정강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게임에 미쳐 사니까 그따위 개 같은 드립을 치는 거야!


라고 말하려다가, 오태영이랑 맞장 까면 질 것 같아서 그냥 참기로 한다.


“어느 회사 제품을 사든지, 운동을 열심히 하면 글러브는 반드시 망가지게 돼 있어. 헤드기어는 괜찮은 거 사놓으면 오래 가는데, 슈즈랑 글러브는 사실 소모품이다. 생긴 건 안 그렇지만... 물약 같은 거라고 하면 될까?”


그만해 제발! 브라더 다메요!


다행히 오태영의 설명본능이 글러브에 대한 사항으로 옮겨간다.


“나는 글러브를 이렇게 세 가지 썼어. 샌드백 치는 글러브, 10온스 글러브, 14온스 글러브. 이 작고 얇은 건, 백 글러브라고 해서 샌드백 칠 때만 쓰는 거야. 우리 아버지가 젊어서 운동할 때는 거의 필수품이었다는데 요즘은 거의 안 써. 그러니까 이거는, 쓰다가 닳아서 떨어지면 다시 살 필요 없다. 그리고 시합용 글러브가 10온스니까, 10온스 글러브는 반드시 있어야 되고. 이거는 스파링용 글러브. 나는 14온스를 썼지만 너는 중량급 뛰게 될 것 같으니까, 이거 낡으면 그냥 버리고 다음에는 16온스로 사는 게 좋겠다.”


뭐? 몇 온스? 아니 이게 다 무슨 소리냐...?


유심히 듣고 있던 정강준에게 글러브를 툭 던져준다.


“너 써.”

“예?”

“언제까지 글러브 빌려서 쓸 거야? 진지하게 운동하는 건데 가지고 다녀야지. 글러브는, 어차피 안 쓰고 모셔놔 봤자 시간 지나면 다 망가지고 못 쓰게 돼. 골프채나 야구배트 같은 거랑은 다르다고. 일단은 이거 써보고, 괜찮다 싶으면 같은 메이커로 사. 그런데 장비 살 때 돈 너무 아끼면 금방 또 바꿔야 되니까 알아서 잘 골라라.”


모르기는 해도 비싼 물건들 같아서 냉큼 손이 나가질 않는다. 그렇다고 사양을 하지도 못한다. 평소였다면 모르겠지만 이번 달은 지출이 너무 많았다.


어... 그...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엉뚱한 말이 튀어나간다.


“그냥... 체육관에 있는 거 쓰다가... 천천히 하나씩 준비해도 될 것 같은데요.”

“어느 천 년에? 당장 이번 주 금요일에 또 스파링 가야 되는데.”


스파링이라는 말에 정강준의 눈이 빛난다. 그러지 않아도 욕구불만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굴다리에서의 싸움과 이진수와의 스파링을 통해 소진시켰던, 난폭하고 어두운 충동의 수위가 다시 높아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오태영은 무심한 척 그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다.


“느닷없이 내일 모레 스파링 하러 간다는데 놀라지를 않네. 즐겁냐?”


정강준은 그제야 움찔하지만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즐겨라, 그래. 그게 좋대. 이성규 그놈이 그러더라.”


휘익! 오태영이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상반신을 뒤로 길게 뒤로 젖힌다. 그러다 바둑 두는 아버지의 팔을 건드렸다고 뒤통수를 한 대 맞는다.


에이 씨. 폼 안 나게.


“원래 전국체전 출전하는 도 대표선수들은 같이 합동훈련을 해. 올해도 여름쯤에 소집해서 시작할 거다. 그런데 이제 법이 바뀌어서 중등부 고등부 선수들은 합숙하면 안 되니까 너는 신경 쓸 필요 없고, 지금처럼 집에서 출퇴근하면 된다. 훈련장까지 갈 시간도 아까우면, 여기에서 운동해도 되고.”


문득 오태영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진다. 마치 좋아하는 AV 장르에 대해서 대외에 공표하려는 사람과도 같은... 아 여러분 미안. 다시 갈게.


난공불락의 성벽을 함락시킬 공성장비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기사단장처럼 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낸다.


정강준까지 덩달아 긴장하고 만다.


“그리고 그... 낭심 보호대는... 무조건 큰 걸 사야 된다. 내가 해외 직구하는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외국 놈들이 쓰는 물건을 찾아서 주문을 해. 최고 큰 사이즈로 주문해라. 거기서도 못 구하면 주문제작할 수밖에 없어. 그런 거 만들어줄 수 있는 놈을 내가 하나 알기는 하는데, 그렇게 되면 가격이 꽤 비싸지니까.”


어째서 그런 인간이랑 알고 지내는 겁니까.


라는 질문 대신 그냥 한숨을 쉬고 만다.


정강준에게 그만 나가보라고 말할 것처럼 다리를 꼰 오태영이, 마치 잊을 뻔했던 것이 기억난 듯 화제를 돌린다.


“연맹 쪽 일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고는 있는데, 네가 올해 전국체전에 나가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을 것 같다. 행방불명된 놈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은...”


얼굴의 힘을 풀고, 지나가는 얘기처럼 건성으로 설명한다.


“내 생각에는, 도 대표였던 애가 실종이 됐으니까 그걸 인정을 하고 다시 도 대표 선발전을 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 같거든? 그런데 신성호한테 물어보니까, 위에서는 그냥 다 묻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대. 이게 워낙 큰 사고다 보니까.”


아직 어린 정강준이 그런 내용을 잘 알아들을 리 없다.


그렇지만 그런 정강준이 생각하기에도, 방금 전처럼 진지한 얼굴로 했어야 하는 이야기는 초대형 낭심 보호대 해외 직구 이야기가 아니라 이 문제가 아니었나 싶어진다.


“도 대표 선발전은 원래 지역연맹이 주최하되, 우승자는 전국연맹에 통보를 하게 돼 있어. 그런데 그 서류 작업을 하던 중에, 우승자를 착각해서 명단을 잘못 작성한 걸로 정리할 모양이야. 그냥 조용히 너를 내보내서 아예 그놈 흔적을 지우겠다는 얘기지.”

“...그게 무슨?”

“애초에 우승자가 너였고, 네 이름을 올렸어야 되는 거였는데, 실종된 놈으로 착각해서 잘못 보냈다, 이렇게 가려는 거지. 단순 착오였다고 하면 사유서 한 장 쓰면 되는 일이니까.”

“아하. 어? 그렇지만 그건 토너먼트였잖아요.”

“그렇지! 이해가 빠르네? 실종된 놈한테 깨져서 도 대표 선발전 떨어졌던 애가 나중에 항의하면 어쩌냐 이거지? 그런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그걸 아니까 저러는 거야.”

“왜요?”

“복싱이 워낙 인기도 없고 선수층이 얇은 종목이 되다 보니까, 도 대표 선발전에서는 한 체급에 선수가 두 명 나오는 경우도 잘 없어. 도 대표 뽑는 대회는, 거의 부전승으로 결정이 된다고. 그러니까 어디 운동부에 소속돼 있기만 하면, 도 대표 선발전까지는 별 문제 없이 뚫게 돼 있는 거지. 왜냐하면 일반 체육관에서 취미로 운동한 애들이 나와 봤자 걔네를 이길 수는 없으니까.”


물론 너 같은 예외가 아주 드물게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우리가 도 대표 선발전을 1차전 2차전 최종선발전까지 하는 이유는, 경쟁을 통해서 더 잘 치는 놈을 뽑으려는 게 아니야. 사실상 체급을 배분하려고 하는 거지.”

“...나눠가진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한 번 생각해 봐. 둘 다 복싱부인데 A학교 애가 B학교 애한테 졌다고 쳐. 실력이 안 돼서 다음에 붙어도 가망이 없다고 하자고. 그럼 A는 2차전에서 어떻게 하겠냐?”

“복수해야죠.”

“아니지, 이것아. 체급을 조절하겠지. 체중을 빼든지 찌우든지 해서 다른 체급으로 2차전에 나가려고 들 거야. 선수층이 완전 얇으면 그래도 되지. 그럼 그놈이랑 다시 안 싸워도 전국대회까지는 나갈 수 있잖아.”

“아...!”

“그런 식으로 체급별 출전자는 이미 사실상 정해져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그 중 하나만 슬쩍 바꿔치면 될 것 같다고 보는 거야. 설령 올해 미들급으로 도 대표 선발전에 나왔다가 떨어진 애들이 여럿 있었다고 해도, 나중에 문제 제기 못해. 지역연맹 이사가 뒤를 봐주고 있잖아, 지금.”

“그 아저씨 너무... 말랑말랑하게 생겼던데요?”

“하하하하. 미치겠다 내가 진짜. 네가 볼 때는 별 것 아닌 것 같겠지만, 그 사람은 우리 돈줄이야. 실제로 중소기업 대표고, 후원도 하고 있어. 누구도 함부로 못 한다 절대로. 나중에 정치하고 싶은 사람들은, 어디 이사니 회장이니 하는 걸 명함에 써놓을 수 있어야 되거든. 그걸 지역구 관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쨌든 그래서 복싱엔 별 흥미 없으면서도 연맹에 이름 올려놓고 있는 거야. 물론 애를 쓴다고 해서 그 정도 인물이 국회의원 같은 게 되지는 않겠지만, 정치인들과 친분이 있는 건 확실하지.”

“그래요?”

“그런 사람한테 괜히 덤볐다가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그리고 다들 이번 사고의 사이즈를 알고 있으니까. 이번 일은 잘못하면 진짜 다 개박살난다는 걸. 알아서들 쉬쉬하고 있으니까 뒤탈은 없을 거야. 내 짬밥으로 볼 때 걱정해야 될 일은 아니야. 걱정해야 될 일이었으면 나도 말을 안 했겠지, 훈련에 방해가 되니까. 넌 그냥 운동이나 열심히 하면 돼.”

“재미있네요, 어른들 일은...”


그 말에 오태영의 얼굴이 꿈틀한다.


사실 정강준은, 자신이 김명진과 싸워 그놈을 쓰러뜨렸기 때문에 그 모든 사달이 벌어졌다는 것이 신기해서 한 말이었지만, 그 사정까지 알 리 없는 오태영의 귀에는 충분히 이상하게 들릴 만하다.


그래도 오태영은 나무라거나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는다. 훈련에 방해가 될지 모르니까.


“아참, 중요한 걸 깜빡할 뻔했네. 그런데 이제부터는 체중 때문에 많이 어려워질 거야. 너는 미들급으로 나가게 될 거니까 지금 체중이 안 맞아.”

“대강 맞는 거 아니었어요? 미들급이면 70킬로 대였던 것 같던데?”


오태영이 푸히히, 소리까지 내면서 격 없이 웃는다.


“그건 숫자만 봤을 때 그런 거지. 네가 감량힐 걸 감안 안 했잖아? 미들급이라는 체급이, 대체로 한계체중 70킬로그램 초반 대에 형성되는 건 맞아. 그런데 아마추어 복싱은, 한 15년 전이었나? 체급이 조정됐어. 그때 라이트미들급이 없어지고 통합되면서 미들급 체중범위가 거의 두 배로 넓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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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욕구불만 24.03.14 12 0 13쪽
51 이상하게 당겨 24.03.13 13 0 11쪽
50 물물교환 24.03.12 13 0 11쪽
49 시합체중 24.03.11 16 0 11쪽
» 아이템 상점 24.03.08 19 0 11쪽
47 군식구가 있네 24.03.07 20 0 11쪽
46 폭파범들 24.03.06 19 1 11쪽
45 전학생이 왔 24.03.05 21 0 11쪽
44 착해진 아이 24.03.02 27 0 11쪽
43 무역수지 24.03.01 27 0 11쪽
42 자리가 났다고 24.02.29 25 0 11쪽
41 링의 악마 24.02.28 27 0 11쪽
40 왜 안 아프지 24.02.27 26 0 12쪽
39 스파링 세션 24.02.24 28 0 11쪽
38 아나콘다 24.02.23 30 0 11쪽
37 친구가 온 건 처음 24.02.22 30 0 11쪽
36 현질 24.02.21 32 0 11쪽
35 재주는 곰이 넘고 24.02.20 39 0 11쪽
34 우주인 24.02.17 41 0 11쪽
33 반칙왕 24.02.16 42 0 11쪽
32 맹점과 타이밍 24.02.15 42 0 11쪽
31 결전 24.02.14 46 0 11쪽
30 더티 복싱 24.02.13 59 0 10쪽
29 생전 처음 24.02.10 58 0 10쪽
28 달라진 분위기 24.02.09 61 0 10쪽
27 남자 대 남자라서 24.02.08 40 0 10쪽
26 만두귀랑 예약되셨지 24.02.07 47 0 10쪽
25 이상한 놈이 나와 24.02.06 74 0 10쪽
24 수상한 회복 24.02.03 4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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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투명 올가미 24.01.19 98 2 10쪽
12 슬기로운 입원생활 24.01.18 113 2 10쪽
11 심리적 안전장치 24.01.17 107 2 10쪽
10 똘마니들 24.01.16 108 2 10쪽
9 오직 시간이 문제 24.01.13 112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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