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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시간 멈추고 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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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4.01.02 12:52
최근연재일 :
2024.04.03 18:52
연재수 :
65 회
조회수 :
3,739
추천수 :
29
글자수 :
315,549

작성
24.01.19 18:49
조회
97
추천
2
글자
10쪽

투명 올가미

DUMMY

*


화요일. 방송국 사람들이 갑자기 병실 문을 열고 들이닥친다.


예고되지 않았던 일이다. 머리가 떡져 있던 것은 물론 세수도 안 하고 지내던 정강준은 물티슈로 황급히 얼굴을 닦는다.


“흐악! 모자이크! 모자이크 해주세요!”


유온은 병실 구석에서 그 모양을 지켜보며 소리 죽여 웃는다. 일부러 먹인 거다.


방송 인터뷰가 처음이라 잔뜩 긴장한 정강준은 변호사가 알려준 기본 입장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다. 무슨 질문을 받아도 똑같은 대답만 하자, 유온은 눈물까지 짜내가며 애가 머리를 다쳐서 장애가 생긴 모양이라고 대신 변명해 준다.


정강준은 졸지에 장애우가 되고 말지만, 당황해서 화도 못 낸다.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정강준이 멍청하게 구는 사이 녹화는 끝나 버린다. 휘황하던 방송조명이 꺼지자, 넋을 놓은 환자 하나가 덩그러니 남겨진다.


“아니 이런 일 가지고 지상파 뉴스에서 취재 나오는 게 정상이에요?”


카메라가 있을 때는 마치 정강준의 충실한 보호자인 양 얼굴을 어루만져주고 세상 착한 척을 다 해가면서 눈물까지 짜내던 유온은, 어느덧 원래의 도도하고 차가운 얼굴로 돌아가 있다. 일부러 초췌한 척 흐트러뜨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가다듬고 다시 묶는다.


그러면서 건성처럼 말해준다.


“너한테 맞아서 인생 종치게 생긴 놈, 알고 보니까 진짜 나쁜 놈이더라? 까도 까도 계속 나오던데? 걔 정말 전국적으로 얼굴 팔리게 될 수도 있어.”


김명진은 그냥 일진 짓만 했던 게 아니었다.


가출한 어린 애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겠다고 유인해 오피스텔 또는 원룸에 감금한 다음 성매매를 강요했다. 그렇게 갈취한 돈으로 오토바이를 사고, 유흥을 즐기고, 자신을 추종하는 똘마니들에게 용돈을 줬던 것이다.


원래 그런 포주 짓을 해서 큰돈을 만지게 되면,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인근 폭력배들이 가만 놔두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정말로 김명진의 친척 중에는 유명한 폭력배가 한 놈 있어서 아무 일이 없었다.


그쪽 세계에서 김명진은 나름 귀족이고 유망주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깡패 놈들은 지역 경찰들과는 형 동생을 하며 살갑게 지내는 사이였다.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고 부당이득을 챙겨 온 일선 경찰들은 그 사달을 다 알면서도 김명진을 눈감아주고 있었던 것. 그리고 우리나라 수사기관의 구조상, 경찰이 눈을 감게 되면 그 지역 검찰들도 범죄를 감지하기 어렵게 돼 있다.


물론 검찰들이라고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범죄신고자가 고생 끝에 경찰을 건너뛰고 검찰로 직접 범죄첩보를 해봤자 그냥 외면해 버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차장검사 정도가 직접 개입하거나 하는 큰 이변이라도 생기지 않는 한 어림도 없다.


이렇게 해서 법이 미치지 않는 곳들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이 그림자 안에서 폭력과 부패와 범죄가 제약 없이 번성한다.


하지만 이제 김명진은 숨만 붙어 있는 송장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그 동안 내지 목소리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올라오게 돼 있다.


누가 뭐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욕을 해도, 식물인간은 반박하거나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다. 김명진의 휴대전화는 벌써 지역경찰과 검찰을 안 거치고 다이렉트로 대검찰청으로 넘어갔으며, 이에 따라 지역 경찰 고위급 간부 몇이 옷을 벗게 되거나 진급상 불이익을 받을 것 같다는 전망.


김명진은 그 유소년 매춘사업을 확장할 목적으로 임수산을 정강준에게 접근시켜 자해공갈을 하고 집을 비우라고 압박했던 것이다. 하마터면 정강준의 거의 모든 추억이 깃든 장소가 사창가가 될 뻔했다.


휴우...


이제는 집 빼앗길 걱정 없이 살아도 된다. 김명진이 식물인간이 되면서, 그놈한테 잡혀 성적 착취를 당하던 애들도 모두 풀려날 것이 확실시된다.


지금까지는 피해자에 불과했지만, 곧 다들 증인이 될 것이다.


작년에 자살한 남학생이 당한 것과 같은 가혹행위를 당했던 학생들도 법정에서 증언을 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다고 한다.


만일 김명진이 정강준과 싸우다가 아예 사망해버렸다면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가 종결될 것이었으나, 숨은 붙어 있으니 그렇게도 되지 않는다.


물론 죽은 거나 다름이 없어 법정에 세울 수는 없겠지만, 그놈을 추종하던 공범들까지 다 재판을 받게 된다. 기적적으로 다시 의식이 돌아온다 해도 좋을 것이 없다. 바로 끌려 나가서 형기를 채우게 될 테니까.


글쎄?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 죽어버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흡족해진 정강준이 소리 내지 않고 음산하게 웃는다. 유온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표정도 말도 없이, 그러나 다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도 한 얼굴이다.


그나저나 방송촬영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됐으니 숙제는 안 해도 되겠지 싶었는데, 정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망상이었다. 유온은 진도를 못 따라잡으면 병원비를 끊겠다고 정강준을 협박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느냐며 목에 핏대를 올려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유온은 서류 두 장을 꺼내 정강준에게 내민다. 서류의 내용은 이렇다.


유온을 정식 후견인으로 지정하며, 후견인이 내린 학습지시와 생활지도 및 오류시정명령을 무조건 이행하겠다는 것.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 유산 상속분 전액을 후견인에게 증여하겠다는, 한 번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말이 적혀있다.


처음 만났던 날, 유온의 미모에 홀려 멋도 모르고 서명했던 후견인 확인서와 동의서가 사실은 자신을 옭아매는 올가미였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정강준이 절규한다.


서류를 박박 찢어 입에 넣고 씹으며 증거인멸을 시도하지만, 사본이라는 말에 멍청히 입을 헤 벌리고 만다.


먹어서 없애려던 종이가 벌어진 입 밖으로 툭 떨어져 휴지통 속으로 골인된다. 유온이 갖다놓은 휴지통이다. 유온은 처음으로 까르르 소리 내어 웃는다. 마치 소녀가 된 것처럼.


“다 해 놔라. 알았지? 내일 봐~”


일진들이 쳐놓은 자해공갈의 올무를 찢고 가까스로 몸을 빼냈더니만, 이제는 계약서라는 투명한 우리 안에 갇히고 말았다. 이번에는 움치고 뛸 수도 없다.


서류를 읽어보지도 않고 서명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 정강준이 고통에 신음한다. 손으로 콕 찌르기만 해도 눈물을 터뜨리며 오열할 것 같은 얼굴.


그렇지만 소중한 교훈을 얻은 것만은 분명하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서류를 읽지 않고 서명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아울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주먹보다 돈이 더 무섭다는 사실까지 학습할 수 있었다.


그 더러운 산교육의 현장에 남겨진 정강준의 내면에 증오의 불길이 타오른다.


이 악마 같은 년.


*


실신해 있던 기간은 만으로 3일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밀린 공부는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잠을 줄여 벼락치기를 해도 따라갈 수 없다. 당연히 유온의 기대에도 못 미친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유온이 정강준을 잡아 족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해서 그런지 조금이나마 말조심을 하는 것 같더니, 구두시험 성적이 개판으로 나오자 바로 인신공격이 쏟아진다.


어떻게 이런 것도 모를 수가 있냐 이 바보 해삼 멍청이 돌대가리 말미잘...


엄마. 즐기고 있는 얼굴이야. 분명해. 희열을 느끼고 있는 거야.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머리꼭대기에 올라가 내키는 대로 정강준을 모욕하고 자존감을 짓밟는 중이다. 병실을 확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지만, 어쩌나 소년은 환자인데?


흥. 괜찮아. 나중에 갚아줄 수 있어. 어디 퇴원하기만 해봐라. 몸만 괜찮아지면 가만 안 놔둘 테니까.


그러나 사자를 잡아다가 젖먹이 시절부터 개들과 함께 키우게 되면, 사자는 다 자란 뒤에도 개 짖는 소리에 놀라 도망을 가는 법이다. 또한 새끼코끼리의 발에 족쇄를 채워 쇠말뚝에 묶어놓으면 그것을 뽑을 힘이 생긴 뒤에도 족쇄의 사슬을 끊을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게 된다.


부당한 권력의 횡포를 그저 참아내기만 할 경우, 결국 그 권력이 관성을 갖게 된다는 것을 정강준은 간과하고 있다.


내내 탈탈 털리고 나서 간신히 하루의 유예기간을 더 얻어낸다. 얌전히 책이나 보고 있을 수밖에.


하지만 유온이 병실에서 나가자마자 정강준은 민다혜에게 전화를 건다.


“야! 너 때문에 이게 뭐야?! 너 이제 병실에 오지 마! 공부할 거 가지고 오지 말라고!“


그러나 민다혜는 이미 유온에게서 부탁을 받았다며 거절한다.


학습지는 계속 배달될 것이다.


볼이 잔뜩 부어오른 정강준이 듣는 사람도 없는데 쌍욕을 한다. 분해서 몸부림을 친다.


그렇지만 아는 것이 힘. 역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다. 억지로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정강준이 모르고 있는 사실들도 있다.


공부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강준은, 김명진의 배후가 조직폭력배들이었던 만큼 지금 신변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유온은 잠시 배우로 빙의해 가식을 떨었던 것이 아니다. 유온이 혹독하게 다잡고 있던 마음을 잠시 주체하지 못해 정말로 울음을 터뜨린 것임을 정강준은 모른다.


혹시 안 좋은 일을 당할까 집에 갈 수가 없어 호텔을 전전하느라 며칠째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 역시 모르고 있다.


도망치듯 병실로 들어와서, 잠들어 있는 정강준의 모습을 소리 없이 바라보며 웅크리고 떨던 시간을 모른다. 알 리 없다.


아직 어리고 작아서다.


*


갑자기 학원폭력의 심각성을 조명한 시사프로그램들이 방영되지만, 정작 인터뷰를 했던 정강준은 그걸 구경도 하지 못한다.


내내 책만 파고 있다. 물론 유온의 철저한 감시를 받으면서.


현직 변호사가 내키는 대로 아무 때나 실시하는 구두시험 직전의 숨 막히는 긴장감 속이다. 정강준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차장검사의 전화다.


특별한 용건은 없다. 이제는 주위의 시선 때문에 직접 보러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참 장하고 대견한 일을 했다는 칭찬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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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훅이 시작됨 24.03.20 1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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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참패 24.03.16 12 0 11쪽
53 높이의 문제 24.03.15 16 0 11쪽
52 욕구불만 24.03.14 12 0 13쪽
51 이상하게 당겨 24.03.13 13 0 11쪽
50 물물교환 24.03.12 13 0 11쪽
49 시합체중 24.03.11 16 0 11쪽
48 아이템 상점 24.03.08 18 0 11쪽
47 군식구가 있네 24.03.07 20 0 11쪽
46 폭파범들 24.03.06 19 1 11쪽
45 전학생이 왔 24.03.05 21 0 11쪽
44 착해진 아이 24.03.02 27 0 11쪽
43 무역수지 24.03.01 27 0 11쪽
42 자리가 났다고 24.02.29 25 0 11쪽
41 링의 악마 24.02.28 27 0 11쪽
40 왜 안 아프지 24.02.27 2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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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아나콘다 24.02.23 3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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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현질 24.02.21 32 0 11쪽
35 재주는 곰이 넘고 24.02.20 39 0 11쪽
34 우주인 24.02.17 41 0 11쪽
33 반칙왕 24.02.16 42 0 11쪽
32 맹점과 타이밍 24.02.15 42 0 11쪽
31 결전 24.02.14 46 0 11쪽
30 더티 복싱 24.02.13 59 0 10쪽
29 생전 처음 24.02.10 58 0 10쪽
28 달라진 분위기 24.02.09 61 0 10쪽
27 남자 대 남자라서 24.02.08 40 0 10쪽
26 만두귀랑 예약되셨지 24.02.07 47 0 10쪽
25 이상한 놈이 나와 24.02.06 74 0 10쪽
24 수상한 회복 24.02.03 4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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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스파링 세션 24.01.25 65 1 10쪽
16 낙관주의자 24.01.24 68 1 10쪽
15 천원권투체육관 24.01.23 88 0 10쪽
14 무미건조한 24.01.20 90 2 10쪽
» 투명 올가미 24.01.19 98 2 10쪽
12 슬기로운 입원생활 24.01.18 113 2 10쪽
11 심리적 안전장치 24.01.17 107 2 10쪽
10 똘마니들 24.01.16 107 2 10쪽
9 오직 시간이 문제 24.01.13 112 2 10쪽
8 살인연습 24.01.12 121 1 11쪽
7 이제 와서 어쩔 24.01.11 127 1 10쪽
6 아리가또오 24.01.10 137 1 10쪽
5 실험성공 24.01.09 167 1 10쪽
4 책과 사진과 아버지 24.01.06 174 1 10쪽
3 뭐가 들어있는지 24.01.05 183 2 10쪽
2 유산은 백억 24.01.04 217 3 10쪽
1 사라진 아버지 24.01.03 320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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