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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피트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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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피에르와소
작품등록일 :
2019.03.09 00:54
최근연재일 :
2019.06.03 17:00
연재수 :
6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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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3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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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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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56화

DUMMY

어두운 밤, 리피트 일행은 차를 끌고 험한 숲을 달리고 있었다. 이들의 남은 목적지는 남부제국에 남아있는 유적지였다.


지금은 아르보레가 운전을 하고 있었고, 미르네와 리피트는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르네."


"응?"


"니 말대로 이 성물이 대륙의 어디든 보여준다고 하면, 남부 제국의 황제는 어쩌면 연합국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음... 그럴수도 있겠네."


"그러면 우리가 무언가 꾸미던 것도 모두 알고 있었을텐데... 왜 우리의 감옥 계획에 당한 거지?"


미르네는 손가락을 두개 세워보였다.


"우선 아르칸 언니의 저 성물에 대해 살짝 설명하자면, 한번에 여러 상황을 동시에는 못 봐. 한 번에 한개씩만 볼수 있어. 물론, 여러명이 동시에 이용하면 각각 다른 상황을 볼 수 있긴 해. 어쨌든, 한명당 한가지의 상황만 볼수 있다는거."


손가락 한개를 접는 미르네.


"그리고 저건 지나간 상황이나 미래의 상황은 보지 못해. 즉, 현실만 볼 수 있다는 거지."


미르네는 손가락을 모두 접고는 말을 이었다.


"황제 혼자서 모든걸 파악하기에는 이쪽이 머릿수가 좀 많았던거지. 그리고 아마 우릴 별로 경계하지도 않았을거야. 끽해야 암살정도라고 생각했겠지. 그정돈 막아낼 자신이 있었을거고."


미르네의 말은 거의 정답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리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날 뻔했네. 거하게 말아먹을 뻔했어."


리피트는 생겨났던 작은 의문이 깨끗이 사라진채 잠에 들었다.


ㅡㅡ


잠에서 일어난 리피트는 뻑적지근한 심장부근을 마사지했다.


"요즘 자꾸 이러네.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몰라."


물론 불로불사의 술 덕에 죽음에 벗어나있는 리피트만이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옆을 보자 미르네와 아르보레는 아직 곤히 잠들어있었다. 리피트는 아공간에서 주먹밥 하나를 꺼내 먹으며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았다. 목표로 하던 유적지는 얼마 남지 않았던 듯 자고있던 두 사람이 일어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피트는 자동차의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살폈다. 이내 이끼가 잔뜩 낀 채 곧 무너질 것 같은 사원을 찾을 수 있었고, 사원의 입구가 돌로 꽉 막혀 있는 걸 확인한 리피트는 더 나아가지 않고 차로 돌아왔다.


"얘들아 일어나. 다 왔어."


"으음~"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미르네와 아르보레. 두 사람은 씻기 위해 일어났고, 리피트는 테이블을 하나 가져와 그 위에 아침 식사를 꺼냈다. 돌아온 두 사람과 함께 아침을 먹는 리피트. 아르보레는 아직도 졸린지 아침을 먹으면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바로 바깥에 사원 같은 곳이 있더라. 이거 다 먹고 가보자."


대충 끄덕이는 미르네와 아르보레. 두 사람이 듣고는 있는건지 살짝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 리피트였다.


잠시 뒤, 리피트 일행은 사원을 막고있는 거대한 돌덩이 앞에 서 있었다.


"부술거야?"


"아니.. 일단 신술 한번 써보고 생각할게."


리피트가 아르칸 신술대로 마나를 운용하자 거대한 돌이 그 마나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쿠르릉.


그러더니 혼자 다른 곳으로 굴러가며 입구를 열어주었다. 리피트 일행은 망설임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ㅡㅡ


"뭐... 아무것도 없네?"


리피트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원 내부는 온통 석벽이었는데, 나름 꼼꼼하게 지어놓은 게 무색하게 정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 지하로 내려가는 곳이 있어요."


빛을 밝히고 돌아다니던 아르보레가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아냈다. 리피트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는 리피트 일행.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반구의 형태를 하고 있는, 어느정도 크기가 있는 공간. 그리고 그 곳의 벽에는 몇가지 그림들과 함께 글들이 적혀있었다.


"고대 제국어네."


아쉽게도 리피트가 읽지 못하는 글로 적혀있는 내용들. 리피트는 글을 읽는 것을 포기하고 그림을 보기로 했다. 수백년 아니 어쩌면 수천년이 지났을지도 모를 그림들, 하지만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고 하기에는 그림들은 방금 막 그린듯 새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리피트는 그림을 만져보고 싶어 손을 얹었다. 그 순간, 갑자기 리피트의 눈 앞에 그림과 함께 글자가 떠올랐고, 귀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피트는 그 글자와 목소리가 고대 제국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을 읽을 수가 있었고,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알아 들을 수가 있었다.


[하레나 일족의 장이자, 제국의 초대 황제, 나 알켄타르는 죽기 전에서야, 후계를 위한 글을 남긴다.]


'하레나? 알켄타르?'


리피트 눈앞의 그림이 바뀌었다. 그곳에는 누군가가 힘을 내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태초에 세번째 자식들까지 만드신 아르칸 주신님은 수많은 아이들이 함께 지내길 원하셨고, 우리는 각 종족의 장들이 모여 하나의 대표를 뽑게 되었다., 여러 이들의 배려로 내가 첫번째 황제가 되었다. 아르칸 주신님께서 직접 왕관을 내려주셨으며, 나는 그 때를 평생 잊지 못할것이다.]


그림은 하나의 기념비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때 참여한, 세상에 존재하던 모든 종족의 이름을 이 기념비에 적어 아르칸 주신님께 바쳤다. 그 돌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힘도 없지만, 이곳에 그 돌을 가져온다면, 아르칸 주신님과 직접 이어줄 수 있는 신님께서 거주하시는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그곳은 우리네 땅이지만, 이곳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신성한 곳. 나의 뒤를 잇는 황제여, 기념비를 제단에 바치고 그곳으로 가서, 아르칸 주신님의 축복을 받아라. 내가 전해준 신술이 완전해 질것이며 그제서야 진실된 황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엔 그림이 아니라 누군가의 얼굴이 나타나 움직이고 있었다.


"뭐.. 뭐야?"


그곳에 나타난 것은 모래로 이루어진 사람의 얼굴. 리피트는 본적은 커녕 들어본 적도 없는 종족의 등장에 당황했다.


[나 알켄타르가, 불멸의 목숨을 바쳐 제국의 영원한 평화를 원하니, 후계자는 나의 힘을 받거라.]


리피트는 무언가가 자신에게 흘러들어옴을 알 수 있었다. 한 두개의 마법같은 걸 전해받는게 아니었다. 하레나라는 종족이 가지고 있는 강한 능력들, 그 중에서도 단점이 거의 없는 능력들이 리피트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리피트가 모래로 이루어진 종족의 힘을 모두 다 받아갈때쯤 리피트의 눈앞에 떠오르던 그림들과 글들은 모두 사라졌고, 그와 동신에 방 한가운데에 제단 하나가 생겨났다. 리피트는 그곳에 알칸타르가 말하던 기념비를 올려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제단이 생겨나자 의아하단 눈빛으로 쳐다보는 미르네와 아르보레. 리피트는 혹시 몰라 두 사람에게 확인했다.


"미르네, 아르보레, 너네 혹시 알켄타르가 누군지 알아?"


"알켄타르요? 혹시 그 모래 일족의 족장인 꼬장꼬장한 녀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음... 맞는거 같은데?"


"알켄타르는 왜? 걔가 뭐했어?"


"여기가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알켄타르가 남긴 곳이라고 되어있거든."


"그래? 하긴, 그녀석 황제 되고 나서 질질짜긴 했지."


"황제인건 맞아?"


"어? 응. 알켄타르가 제국의 첫번째 황제 맞아."


"흐음."


리피트는 방금전 자신이 보게 된 내용에 신뢰가 조금 더 생겼다. 아무리 지도에 표시되어 있더라도 방금 전 본 내용이 거짓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생겨난 조금의 신뢰는 꽤 큰 차이였다.


이곳에 적힌 내용을 믿기로 한 리피트는 망설임없이 두 사람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들을 말해주었다.


"기념비?"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르네는 짚이는 게 없어서였고, 아르보레는 짚이는 점이 있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기념비... 같은 걸 저번에 본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진짜? 어디서?"


"그 황제의 보물창고에서요. 제 기억이 맞으면 아르칸 주신님의 성물 근처에 있었던 거 같은데.. 잠깐 딴데 둘러본 사이에 없어졌더라고요. 분명히 본 것 같았는데, 잘못 본거 일지도 몰라요."


그러자 리피트의 머릿속에 번뜩 스쳐지나가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투박하게 생긴 비석. 황제가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게끔 해놓은 비밀 창고에 있기에는 너무도 평범했던 돌덩이가 생각난 리피트. 곧장 그 돌 비석을 꺼내 아르보레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이거야?"


"네! 이거 맞아요."


리피트는 꺼낸 비석을 살펴봤다. 기념비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작은 크기. 그래도 그 작은 공간 안에 빽빽하게 글씨가 채워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리피트는 저도 모르게 기념비에 손을 얹어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순간, 리피트의 눈앞엔 수많은 종족들의 모습이 지나갔다. 그들은 바로 기념비에 새겨진, 최초의 제국인들이었다.


리피트의 눈앞에 많은 종족들이 스쳐지나간 뒤 영상은 끝이 났다. 신이 만들어준, 최초의, 진정한 통일제국을 구성하던 이들. 그러나 리피트의 마음속엔 의문이 하나 생겨났다.


"왜 인간은 없지?"


리피트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수많은 종족들, 그런데 그 중에 아르카디아 대륙에 가장 많이 존재하는 인간은 존재하질 않았다. 그의 의문에 옆에 있던 아르보레가 대답해줬다.


"원래 제국이 처음 세워질때 인간이란 종족이 없었어요. 인간은 한참 뒤에 생겨난 이들이에요."


"진짜?"


리피트는 미르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미르네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며 아르보레의 말이 맞다는 걸 긍정했다.


'옛날에는 인간이 없었다니 신기하네.'


그렇게 생각한 리피트는 황제가 말한대로 기념비를 꺼내 제단에 올렸다. 제단에 올려진 자그마한 기념비가 웅 하고 떨리더니 제단 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그건 바로 리피트가 종종 사용하던 '게이트' 마법.


"우리가 가도 될까?"


"가는건 상관없지. 더 강해지면 좋은 거잖아? 그리고 언니랑 이어주는 신이라니 누군지 내가 한번 봐야겠어."


게이트를 향해 발을 뻗는 리피트 일행. 세 사람이 모두 게이트 너머로 지나가자 제단위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게이트가 사라졌다.


ㅡㅡ


"여기 대체 어디야?"


리피트 일행이 게이트를 타고 넘어온 곳은 무릎까지 오는 풀들이 자라는 넓은 초원이었다. 사방이 모두 똑같이 생긴 곳. 리피트의 얼굴엔 당혹감이 묻어났다.


"이러면 어디로 가야되는지 어떻게 알지?"


당황스러움에 우선 마나부터 뿌려보는 리피트. 마나를 움직이자 자연스레 따라 발동되는 아르칸 신술. 그리고 신술이 마나에 섞인 그 순간, 리피트는 처음보는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리피트의 앞에서 마나들이 모여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이쪽을 향해 가라는 듯 화살표 모양으로 뭉쳐진 마나들. 놀랍게도 리피트가 전혀 다른 쪽으로 마나를 뿌려도 마나가 화살표쪽으로 이동해 방향을 구성하고 있었다.


마나가 뭉쳐진 모습은 리피트만 보이는게 아니었다. 옆에 있는 미르네와 아르보레에게도 그 모습이 보였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본 미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저쪽에서 신격이 느껴져. 방향대로 가면 되나봐."


세 사람은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걸어갔다. 앞으로 나아가며 리피트가 마나를 뿌리자 마나들은 자기들끼리 이곳저곳 뭉치며 일정한 방향으로 화살표들을 계속 만들어냈다. 덕분에 리피트 일행은 헷갈리는 일없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잠깐만."


맨 앞에 서서 가던 리피트가 멈춰섰다. 뭉쳐지던 마나가 화살표와는 다른 무언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화살표가 모두 사라졌는가, 그건 또 아니었다. 화살표는 화살표대로, 새로 생긴 표지판 같은 것은 그것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슬쩍 다가간 리피트에게 무언가 글자들이 떠올랐다. 모르는 글씨인데 알아 볼 수 있는 특이한 글자. 그리고 왠지 모르게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 쨔잔! 여기는 아주아주 희귀한 그린 라이언의 쉼터랍니다. 라이언하면 사자죠? 그리고 사자하면? 육식! 하지만 이 그린라이언들은 전혀 육식을 하지않는 채식주의자랍니다. 이 친구들은 성격도 아주 온순하고 애교도 많아서 토끼사자라는 애칭도 있답니다! 그래도 귀엽다고 갈기를 막 만지면 안되요! 갈기를 만지면 삐져서 도망가거든요! ]


"...?"


귀에서 울리는 쾌활한, 활기찬 목소리. 리피트는 그 내용에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나 여기 적힌대로 그린 라이언이라는 종족이 있을지 몰라서.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런건 보이지 않았다. 리피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미르네와 아르보레도 표지판을 통해 내용을 전해받았다.


"엄마, 이분은..."


"응. 알리모가 맡고있는 곳이네. 알리모 밖에 없어."


리피트가 두사람의 대화에 질문을 던졌다.


"알리모가 누구야?"


"돌봄과 양육의 여신."


"여신?"


이곳에 여신이 있다고 확언하는 미르네. 그말을 들은 리피트는 제단에서 들었던 것을 그제야 제대로 믿을 수 있었다. 안심하고 황제에게 받았던 능력을 사용해보는 리피트. 리피트의 몸에서 어느정도의 마나가 빠져나갔다.


놀랍게도,


주변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뭐야 이게. 이거 무슨 마법이지?"


고개를 갸웃 거리는 리피트. 그 사이 미르네와 아르보레는 화살표를 따라 저 앞까지 가 있었다.


"얘들아! 같이가!"


리피트는 그들을 향해 황급히 뛰어갔다. 리피트가 뛰어간 그 뒤에는 어느새 한곳만 주변의 몇배로 커진 풀들이 있는, 광활한 초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ㅡㅡ


[나무 전갈! 이 거대한 전갈은 마치 나무 고목인 것처럼 위장하여...]


[물고기가 어떤 뜻일까요? 아무래도 물이 있는곳에 살기 때문에 물이란 단어가 붙어있는게 아닐까요? 그런데 여기! 땅고기란 말이 더 어울리는...]


[주의! 샌드웜 출현지역! 멸종위기종이지만 누구보다 포악한 샌드웜이 사는....]


"여기도 땡, 저기도 땡. 다 땡이네."


리피트 일행은 화살표를 따라오면서 여러개의 표지판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아주 온순한 생물부터 굉장히 위험한 생물까지 다양한 종류의 생물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아무것도 없잖어."


표지판만 달랑 있다는 점이었다. 길을 따라 오면서 일행들은 초원 뿐만이 아니라 여러개의 자연환경을 지나오게 되었다. 초원,사막,화산 심지어 얼음 덮인 빙하지대까지. 그러나 그건 정말 말그대로 자연만 있을뿐, 생명체 하나 존재하지 않는 땅들이었다.


"이젠 오히려 무서워."


마치 이곳에 동물들이 잔뜩 있을것처럼 안내를 해놨는데, 텅텅 비어있다. 심지어 자연환경은 멀쩡하게 존재하는데, 동물들만 없다. 리피트가 소름이 돋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화살표를 계속 따라서 나아가자 또 한번 초원이 나왔다. 그리고 또 표지판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건 잡식성인 흰털코뿔소...]


리피트는 대충 첫줄만 읽고 눈길을 떼어냈다. 어차피 이곳에도 아무것도 없을 텐데 굳이 열심히 읽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르르릉.


그런데 있었다. 하얀털이 온몸에 길게 나있는 코뿔소들이. 비쩍 마른채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그들이 쓰러져있었다.


리피트는 그걸 보곤 곧바로 표지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까지 오면서 읽어본 표지판의 특성상 그들의 식성과 좋아하는 음식, 주의할 점 등이 항상 적혀있었으니 이번에도 그럴거라 생각했다.


'이 부분이다.'


[ 흰털코뿔소는 정말 특이한 동물이랍니다. 굶으면 굶을 수록 야채를 먹으면 안돼요. 평범한 동물들은 오랫동안 굶으면 곧장 음식을 주기보다 죽같은 소화되기 쉬운 것들을 먹어야 하죠? 그런데 털코뿔소들은 정반대랍니다. 이들은 오히려 오래 굶을 수록 고기를 먹어야 해요. 신기하죠? ]


거기까지 읽은 리피트가 급히 그들에게 달려가 물과 큼지막한 고깃덩이들을 내밀었다. 십수마리가 일어날 힘도 없이 쓰러져 있는 광경은 정말 재난 그 자체였다.


다행히 리피트가 열심히 뛰어다니며 먹인 보람이 있는지,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하나둘씩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더니 리피트 근처로 다가와 열심히 털을 부볐다.


"음머어~"


"얘들아, 하지마. 갈거야. 형 갈거야. 막지마. 몸집도 큰 애들이 왜이래. 애교 부리지마. 이 녀석들, 털 붙는다, 하지마."


"음머어~"


무리를 빠져나가는 리피트에게 고맙다는듯 코뿔소들 모두 몸을 눕히며 울음소리를 들려주었다. 리피트는 괜스레 머쓱해져 코밑을 쓱 닦았다.


"녀석들... 당치는 산만한게 귀엽네."


"뭔가 이상한데."


"그러게요."


"이상한 건 진작부터 이상했잖아. 새삼스럽게 왜들 그래."


미르네와 아르보레의 말에 태클을 거는 리피트. 하지만 두 사람에게서 나온 말은 리피트가 그냥 넘어갈 내용이 아니었다.


"알리모는 말그대로 돌봄의 여신이야. 걔가 마음만 먹으면 수명이고 나발이고 그냥 영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할 수도 있어. 내가 알기론 알리모가 돌보기로 마음먹은 녀석들 중에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은 애가 없어. 근데 쟤들 상태를 봐. 누가봐도 죽기 직전의 상태였잖아."


"굶었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된다?"


"응."


의문이 생겨난 리피트 일행. 그들은 우선 화살표를 따라 나아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코뿔소들을 만난 걸 기점으로, 리피트는 미르네가 말도 안된다고 말한 수많은 광경들을 하나 둘 씩 목격하기 시작했다.


[ 파충류계의 최상위 포식자! 파충류 계의 호랑이! 파네토라돈 이에요! 이들은 무리를 지어... ]


수백마리가 아사한 채 죽어있는 모습. 그 끔찍한 광경에 리피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외에도.


[ 이 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친구의 이름은 태산고래랍니다. 피부가 암석보다 훨씬 딱딱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거대한 산처럼 보이죠. 거기다가 삶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는 친구라 대부분 산이라고 착각하고 지나간답니다...]


시꺼멓게 썩어있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시체.


[ 환상조. 이름부터 특이하죠? 놀랍게도 이 친구는 반쯤 정령이랍니다. 그래서 물리적인 충격도 마법적인 충격도 받지 않아요. 세상에 몇마리 없는 희귀한 친구니 조심해서... ]


그 몇마리가 땅에 쳐박혀 죽어있는 모습 등.


리피트 일행이 만나게 된 모습들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들의 시체가 리피트 일행이 지나간 뒤에 남아있는 일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우우웅.


리피트가 항상 지니고 다니던 신수의 알이 진동하며 쓰러져있는 동물들의 시체에서 마나가 뽑아내 흡수했기 때문이다.


파스슥.


마나가 모조리 뽑힌 동물의 사체들은 더이상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바스라졌다.


"으음..."


미르네의 미간이 힘껏 모여들었다. 어느새 리피트보다 앞서가기 시작한 미르네는 죽어있는 동물들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르보레, 리피트 또한 그녀를 따라 뛰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도 알은 마나를 모두 흡수해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피트 일행은 문이 닫힌 큰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리피트는 재빨리 신술을 운용했고 신술이 담긴 마나가 전달되자 앞을 가로막던 문이 열렸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간 리피트 일행을 맞이한 것은.


"이건..."


리피트 일행에게 익숙한, 남부제국 감옥마법의 한쪽면이 자리하고 있었다.


ㅡㅡ


리피트는 습관적으로 벽면에 손을 얹었다. 남부제국의 감옥이야 몇번이고 해결해봤던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리피트는 마법으로 구성된 벽에 손을 얹는 순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남부제국의 감옥술이랑은 격이 달라.'


제국의 감옥마법이 글자 하나라면, 지금 이 앞에 존재하는 마법은 두꺼운 책 한권과 같았다. 그만큼 말도 안되는 수준의 차이가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리피트는 또한 확신 할 수 있었다, 이 안에 분명 여신 알리모가 갇혀 있다는걸.


'이걸 어떻게 풀지?'


리피트는 조금조금씩 마나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새 마나가 조금 늘었는지 엄청난 크기의 감옥임에도 무리없이 마나를 운용할 수 있었다.


'진짜 그냥 통짜감옥이네.'


마법에 담긴 내용은 '가둔다'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수십개의 글자가 덧씌워진 그 내용에 마법의 천재인 리피트조차 이를 뚫어낼 방법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리피트는 포기하지 않고 글자를 바꿔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리피트의 마나는 곧장 튕겨나왔고, 리피트는 또하나, 이 마법의 악랄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거는..."


" '악'을 써야되네. 신들조차 열 수 없게 봉인한거야."


리피트의 마나가 튕겨나오는 걸 보고 상황을 말해주는 미르네.


리피트가 이 감옥 마법에 손을 대기 위해선 두가지가 더 필요했다. 하나는 '신격', 즉 신으로써 가지는 존재감이었고, 또 하나는 미르네한테서 봉인되었다는 '악' 그 자체였다. 신들이 '악'을 지니고 있을리 없으니 봉인을 풀어낼수가 없고, '악'을 가지고 있는 미르네마저 제 상태가 아니다보니 이 상황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능한 사람이 있긴 했다.


주신 아르칸.


신의 힘도 미르네에게서 통째로 뜯어간 '악'의 힘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녀. 그녀라면 이 마법을 풀어낼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때마침 리피트의 갑옷에게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풀 수 있어요.


-정말인가요?


-네.


-그럼 지금 당장..


-하지만, 그걸 위해선 제가 '악'과 잠시 합쳐져야 해요. 그 부작용은 모두 이 갑옷을 입고 있는 리피트 씨에게 갈거에요. 괜찮겠어요?


리피트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어떤 반동이 오나요?


-제가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감정기복이 극도로 심해질거에요.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만 시간이 오래 걸려요.


-저번에 주신 약들로도 부족한가요?


-턱없이요.


-으음.. 잠시만요.


리피트는 아르칸과 했던 이야기들을 일행 모두에게 전했다. 미르네와 아르보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단 결과만 보면 하는게 맞을 것 같아. 너네들도 코뿔소들 죽기 직전인거봤잖아. 그리고 오면서도 봤겠지만, 이곳으로 오는길은 하나가 아니야. 딱 봐도 수십개의 길이 존재할거야. 그리고 거기에 있는 애들이 모두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해봐."


리피트는 알리모라는 여신의 봉인을 푸는데 적극적이었다. 아무래도 털코뿔소들이 그의 마음에 깊은 영향을 준 듯했다. 하지만, 남은 두 사람은 아니었다.


"너무 위험해요. 감정기복이라는 건 얼핏 들으면 별거 아닌거 같지만, 실상은 어떤일을 벌일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거에요. 그걸 품에 안고 지내시게 할 순 없어요."


"나도 반대야. 애초에 이거 급한 일이 아니잖아? 니 말대로 언니가 약을 계속 만들어 주는거면 기다렸다가 양이 충분해졌을 때 봉인을 풀어도 되잖아."


"그치만 그러면 동물들이.."


"그렇게 해버리면 너가.."


평행선을 달리는 리피트와 두사람의 의견.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두 의견의 충돌은 리피트가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끝이났다.


"미르네. 그러고보니까 너 정신 조종 할 수 있지 읺아?"


"어? 어. 그치. 그건 왜? ...너 설마?"


"혹시 내가 이상한 짓이라도 하려고 하면 니가 내 감정을 좀 다스려주면 되겠네. 그러면 불안한 것도 해결되고 괜찮잖아. 설마 신인데 실수해서 내가 완전 맛이 가지는 않을거고."


"으음..."


미르네는 리피트의 감정을 건드려야 한다는 점이 뭔가 꺼름칙했다. 하지만 리피트의 말이 틀린건 아니었다. 자신이 그의 감정을 잘 컨트롤해주기만 한다면, 일행들은 부작용없이 이 봉인에서 여신 알리모를 꺼내줄 수 있었으니까. 결국 미르네와 아르보레가 고개를 끄덕이고 리피트가 아르칸 주신에게 눈앞의 봉인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갑옷에서 빠져나온 아르칸이 마법을 지워버리는 사이, 리피트는 재빨리 한손에 아르칸이 건넸던 알약들을 집어들었다.


"이제 '악'을 꺼내서 쓰기 시작할 거에요. 내 몸에서 검은 기운이 나오기 시작하면 곧장 알약을 먹기 시작하세요."


주의를 준 아르칸의 온몸에서 검은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악'의 영향을 최소화 하기 위해 아르보레와 미르네는 지팡이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리피트는 정신없이 알약을 씹어먹었다. 하지만 알약을 모두 씹어먹은 후에도 아르칸은 계속 봉인울 풀어내는 중이었고, 리피트는 바다처럼 몰려오는 격한 감정의 파도에 이를 악물고 버텨내야만했다. 하지만, 리피트는 버텨내지 못했고, 옆에 아르칸이 있다는 것도 잊은채 허공에 소리치고, 화내고, 울고, 갑자기 웃는 등 기행을 일삼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히도 상태가 더욱 심각해지기 전에 봉인이 풀렸고, 곧장 밖으로 나온 미르네가 리피트의 감정을 평소처럼 억제시켰다.


"헉...헉..."


잠깐 넋이 나간듯 허공을 쳐다보단 리피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이 어느새 다 까져있었다.


'이대로 며칠간 더 지내야 된다고? 엄청 위험한데?'


불안함이 마음에 싹 트는 리피트. 그래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봉인이 되어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는 세사람. 그리고 그곳에는...


"흑흑..흑흑흑..."


고개를 파묻은 채 울고 있는 가여운 여신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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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39화 19.04.29 199 1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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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7화 19.04.17 190 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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