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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 님의 서재입니다.

병, 병, 병, 그리고 병.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중·단편

완결

김지.
작품등록일 :
2019.03.07 21:45
최근연재일 :
2019.03.18 23:25
연재수 :
1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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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6,339

작성
19.03.1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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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제 오와 육의 병.

DUMMY

並(나란히 병)






주희야...


온 세상이 무너졌다. 울려라 레퀴엠이여. 퍼져라 아마데우스여.





[레퀴엠 제3 곡 1부. Dies irae. 진노의 날]


“뭐야, 두 분 아시는 사이..?”


주희가 뒤돌아 나간다.


“마담! 씨발 어디가? 강 대표님도 여기 자주··”


글라스가 조 실장을 향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날아간다. 어린 시절 내가 주희를 처음 만난 날처럼 모든 것이 천천히.

조 실장을 아깝게 빗나간 술잔은 이내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며 빛을 머금은 영롱한 자태를 보인다.



「쨍그랑-」


“뭐.. 뭐야 당신!”



두 소음에 정신이 들자 주점을 뛰쳐나왔다. 경식아. 어디 있느냐 경식아.



*



“대표님. 벌써 세 바퀴입니다.”

“닥쳐 이 새끼야. 계속 돌아.. 계속 돌라고!”



주점 인근의 빌라와 주택을 샅샅이 찾아다녔다. 망할 년. 넌 항상 이 따위지. 넌 항상 끝이 이래.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합니다]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합니다]


전화라도 받아. 친구야. 우리 그냥 얘기나 하자고. 우리 동창이잖아. 우리 친구잖아.




***




벌써 일주일. 매일 새벽마다 너를 우연히 보았던 거리를 배회한다.

지칠 때쯤이면 함께 있었던 그 카페에서 너를 기다린다. 그리고 넌 오늘도 오지 않는다.


“대표님.”

“왜.”

“이제 그만 하시죠.”

“뭐 이 새끼야?”

“스토킹도 엄연히 범죄입니다.”

“범죄? 이게 오냐오냐 하니까,”


“그만 하시라고요!”

“송충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이거냐?”

“지렁이겠지. 작작해요 저 그만 둘랍니다.”



되살아난 남성 혐오. 이제 겨우 내 사람이 된 경식이가 떠났다. 니깟 것들 돈 몇 푼 보여주면 벌떼같이 달려 올 거잖아? 너 없으면 내가 망할 줄 알아?





[레퀴엠 제3 곡 6부. Lacrimosa. 눈물과 한탄의 날]



“뭐 어렵지 않습니더.”

“얼마나 걸립니까?”

“마, 일하는 곳 아시니 금방이면 될 낍니더.”

“꼭 좀 찾아주십쇼.”



산전수전 다 겪은 얼굴의 흥신소 사장은 제법 믿음직스러웠다. 그대도 나도, 전문직에게 느낄 수 있는 신뢰.

역시나 열흘이 안 되어 내게 연락이 왔다.



“마, 좋은 소식하고 나쁜 소식 있습니더.”

“예.”

“좋은 소식은예, 계속 일하고 있으니 거기 가심 되고예,”

“나쁜 소식은요..?”


“보자.. 그 남편이 있네예.”

“남편이요?”

“그 뭐고, 사실혼 관계 같고예, 집에는 거의 안 온답니더.”

“결혼은 언제 했답니까?”


“마, 여기 동사무소 아입니더.”

“아 예 죄송합니다.”

“더 궁금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이소.”

“남자 뭐하는 남자인지. 둘이 행복한지,”

“마, 알겠심더. 삼백 준비해 놓이소.”



흥신소에서 알려준 주소로 집을 찾아냈다. 또다시 일주일. 기다린다.

점점 고객사를 잃어갔고 계약 건이 줄어갔다. 직원 세무사들이 불만을 표시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아내만이 가만있다. 그녀는 오늘도 호스트바에 있거나 나이트클럽에 있겠지.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어 참 다행이다.


이주일이 되자 너를 만날 수 있었다.



“주희야...”

“너 뭐야?”

“왜 전화 안 받았니.”

“너 내 집은 어떻게 알고 온 거니?”

“왜 전화 안 받았냐고 묻잖아.”



매몰차게 나를 지나쳐간다. 왜, 왜 이번에는 시간이 느려지지 않는 거야.


“얘기 좀 하자고.”

“무슨 얘기.”

“왜 자꾸 날 피해.”

“그럼 안 피해? 밑바닥까지 보였는데?”

“내가, 내가 다 이해할 수 있어...”

“니가 뭔데 이해를 해?”


마음이 미어진다. 짧았지만 기뻤던 시간 덕에 외면하고 있었던 트라우마. 내 자신이 뒤틀려감을 느끼지만 멈출 수 가 없었다.


“그렇게 잘나서 이딴 허름한 집에 살아?”

“내 집이 어때서?”

“고작 한다는 일이 술집 마담 일이냐?”

“니가 뭘 아는데?”

“그냥, 너깟 것들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왔거든?”

“그래. 알겠어.”

“뭘 알겠다고?”

“들어와. 날이 차다.”


뭐지. 들어오라고? 설마.. 분노와 회한에 휩싸여 모든 것을 벗어 던지는 성인들의 몸의 대화라도?





[레퀴엠 제3 곡 2부. Tuba mirum. 놀라운 금관 소리 울려 퍼지네]



허름한 밖과 달리 주희의 집은 아늑하고 깔끔했다. 아이의 흔적은 없다. 어른 남자의 흔적은 있다.


“곧 석현이 올 거야. 오랜만이지?”


멍청한 상상은 빗나갔고, 머릿속 마지막 빛줄기까지 꺼져버렸다. 눈물이, 천천히 그리고 또 아주 천천히 흘러내린다.

사랑의 트라우마는 사랑으로 극복했어야 했는데, 성공으로 덮어버리고 말았다. 이 둘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내 성공은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견고했다.


“왜 울어 진우야.”

“미안하다. 미안해..”

“진우야. 은방울꽃말 기억나?”

“다시 찾은 행복.”

“또?”

“왜..”

“나는.. 그때 너가 알아주길 바랬어.”

“뭘.”


“내가 좋아했던 사람은 너였는데.”

“무슨 소리야. 석현이랑 사귀었잖아. 지금은 남편이라며.”

“우린 사귄 적 없었어. 소문이 무섭더라.”




은방울꽃.「순결」


너는 내게,

너의 마음속에 나 이외의 그 누구도 들어온 적 없었다는 순결을 항변했었고,



나는,

네가 신체로서의 순결을 다시 찾고 싶다는 의미로 오해해버린 것이었다.


“왜 그렇게 오해하게 말했었는데. 왜? 왜! 대체 왜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던 거야.”

“그 나이의 수줍음이 그렇더라. 지금이었다면 바로 말했을 텐데. 그치?”


모든 것이 다행이었도다. 모든 것이 바로 잡히었도다. 그 모든 것이 끝나버렸도다.


조용히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방울이 줄기가 되어간다. 투박한 양탄자에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진다.



“그럼 석현이는. 결국 넌 석현이와 이어질 운명이었어. 나 같은 건 애당초에..”

“석현이하고는 졸업하고 무려 스물아홉이 되서야 다시 만나 친구가 되었는걸.”

“스물아홉..?”


“나는 널 기다렸는데. 십년이나 말이야.”

“...”

“고등학교 삼 년을 늘 네 뒤에서 조용히 있었어.”

“...”

“무척 열심히 공부 하더라. 그래서 기다렸지.”

“...”

“공부가 끝나면 돌아봐줄 줄 알았는데.”

“...”

“나도 졸업하고 연예인 지망생 생활을 하며 바빴어.”

“...”

“물론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며 내 삶을 살았지만,”

“...”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고, 어느덧 이런 길로 빠지고 있더라고.”

“...”


“왜 내가 십년이나 기다렸다고 하는지 알아? 다시 돌아가고 싶은데, 다시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데,”



눈물로 양탄자를 두들기는 건 더 이상 나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가 번갈아가며 가슴 미어지는 가락 질을 이어간다.


“내가 가장 깨끗했고 때 묻지 않았던 시간을 돌아보니까, 그 자리엔 너가 있더라. 넌 대체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니.”

“나는, 나는,,”

“진우는 그런 남자, 그런 남자라고 너를 추억에 묻었지. 너는 그대로 아름다웠으니까, 내게.”

“대체.. 대체 왜.. 대체 왜 이제야..”



낼 모레 마흔인 중년의 나, 어린아이마냥 목이 메어 말하는 게 어렵다.



“진우야. 이제는 너 자신을 생각하고 돌봐주어.”

“.........”

“진우는 항상 스스로를 몰아세우더라.”

“.........”



그랬다. 나는 늘 현재를 외면해왔다. 지금의 불만과 고통을 직접 해결하는 법을 몰라, 늘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달성하려고만 했다.

이것이 훨씬 더 낫다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목표. 그 성취로 모든 것을 보상 받으려고만 했던 사람.

어느 덧 난 타인을 무시하고 짓밟는 괴물이 되어 갔다. 내 바램 속에서 만들어낸 보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허구였다.

그래서 난 을이라는 새로운 보상을 다시 만들어왔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다면.. 스스로를 감싸주어도 좋아.”

“고마워 주희야. 그리고 미안해.”



우리는 말없이 식어가는 찻잔을 보고만 있었다. 일 분, 이 분, 삼 분.. 석현이가 올 시간이다.



“그래, 초대해줘서 고맙다 야. 주희야 이제 가야겠다.”

“첫 사랑한테 지금 내 모습, 보이기 싫었는데.”



오 나의 주희. 오 나의 첫 사랑이여. 이제 다시는 오지 못할 이곳. 문을 나서는데 깜찍한 토끼눈으로 나를 흘겨본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어떻게 주점을 다니냐 너도 참.”

“아.. 그거 사업 때문에 어쩔 수··”

“너랑 이어졌으면 진짜 엄청 속 썩었겠다.”

“하하.. 그러게..”


“잘 가 진우야.”

“잘 지내 주희야.”


문을 나선다. 이제 곧 문이 닫히면, 내 마지막 평온도 무너지리라.


“참 진우야!”

“응?”


“으이구, 석현이가 왜 내 남편이야?”

“...”

“석현이는 내 친동생 남편이야. 웃긴 인연이지?”

“뭐..???”

“나 이혼녀야. 그 인간도 너처럼 세무사였는데.. 아무튼 석현이는 아니야.”

“...”


“잘 가 진우야. 정말로.”






[레퀴엠 제1 곡.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주여 영원한 안식을 그들에게 주시옵소서]





‘이제는 너 자신을 생각하고 돌봐주어.’


세무법인을 정리했다. 돈 때문에 결혼한 여느 부잣집 둘째 딸인 아내와 이혼했다. 재산을 정리하고, 주변을 정리했다.

미혼의 주희를 다시 찾아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녀 때문에 이혼한 것이 아니기 위해서.

그게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한다.



“안녕하세요. 강진우입니다.”



더 이상 ‘캉우 세무법인 대표 강진우입니다.’라고 나를 소개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온전하고, 그대로 아름다우니까.

세무사 강진우가 아닌, 중년 강진우로 일 년을 보냈다. 세계를 여행하고 세계인들을 만났다.



“이야 형님!! 이야 어떻게 잉카에서 한국 사람들 다 만나나요옷. 반갑습니다요! 저는 고고학자 이찬영이라고 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게으르다 무시해왔던 우리 청년들. 세상에 나가니 별의별 꿈을 가진 동생 세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난 괴물이 아니었다. 그저 우물 속 개구리였을 뿐.

경식이, 내가 제일 미안한 내 수행기사 경식이. 형이 참 많이 미안했어. 너는 잘 살고 있지?



[첫사랑 : ㅋㅋㅋ팔자도 좋네. 이번엔 어디로 가?]

[ 나 : 몰라~]

[첫사랑 : 뭐야, 참 나 일 그만뒀다?]

[ 나 : 그럼 너도 잉카로 넘어와라~]

[첫사랑 : 그럴까? 담엔 어디로 가냐고]

[ 나 : 글쎄, 가고 싶은 곳 있어? 51구역만 빼고]



반년 쯤 지나 전처의 재혼 소식이 들려왔다. 그제야 주희에게 다시 연락할 수 있었다.

지구의 반 바퀴를 홀로, 남은 반 바퀴를 나의 동창과 함께 돌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진우야, 이제 뭐 할 거야?”

“세무사가 세무 봐야지 뭐.”

“다시 사무실 차리게?”

“아니, 당분간은 다른 사람들하고 일하고 싶어.”

“독불장군 강진우가? 잘도 그러겠네~”

“음.. 생각보다 여린데 나.”

“그 나이에 남 밑에 들어가서 잘 하겠어?”

“좀 힘들겠지?”

“근데?”

“힘이 들면 또 배울게 생기겠지.”



오스카 와일드의 저만 알던 거인이, 조나단 스위프트의 릴리풋을 찾아 나선다. 사장이었던 내가 사원의 길을 잘 걸을 수 있을까?


글쎄. 과거의 내가 아니라면, 아예 불가능하진 않겠지.





[채용공고 – 골드스톤]

직 무 : 세무사/회계사

지원자격 : 인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놈 봐라?

제정신 아닌 놈,

직무가 아니라 지원자격이 세무사겠지.

아니면.. 인생철학이 자격증보다 중요하다?


그래 뭐, 시간도 많은데 얼굴이나 한번 볼까.










제 오와 육의 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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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제 1 병. 19.03.18 7 0 13쪽
12 제 십일과 십이의 병. 19.03.17 1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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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 구 병. 고산병 19.03.15 12 0 17쪽
8 제 팔 병. 餠 19.03.14 13 0 12쪽
7 제 칠 병. 거인병 19.03.13 21 0 12쪽
» 제 오와 육의 병. 19.03.12 11 0 12쪽
5 제 오 병. 䔊(풀이름 병) 19.03.11 13 1 14쪽
4 제 삼과 사의 병. 19.03.09 18 0 13쪽
3 제 삼 병. 표절병 19.03.09 15 0 9쪽
2 제 이 병. 신병 19.03.08 26 1 14쪽
1 제 일 병 19.03.07 5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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