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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부금 님의 서재입니다.

화약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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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부금
작품등록일 :
2013.07.16 17:49
최근연재일 :
2013.07.27 03:53
연재수 :
8 회
조회수 :
4,075
추천수 :
200
글자수 :
45,175

작성
13.07.27 03:53
조회
264
추천
18
글자
7쪽

전형적인 비극 -6-

DUMMY

슈마허는 아침부터 불쾌한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불안함과 편집증적인 기시감이 그의 모든 촉각을 덮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는 햇빛에 더욱 싱그러워지는 교정의 초목들을 험상궂은 눈초리로 쏘아보며 지나쳤고, 늘 마주하는 5층의 기둥 주변을 주의 깊게 둘러보았다. 누군가가 그를 염탐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조급한 마음을 표정에 드러내서는 안된다. 플레메스 시로 오고 난 뒤 그의 삶은 한 편의 연극이었다. 의심많고 타인에게 배타적인 노동자들의 틈바구니에 마찰 없이 스며들기 위해선 돌처럼 정적일 필요가 있었다.


슈마허는 한결같이 이웃들에게 평온하고 친근한 표정만을 내보이며 살아왔다. 적어도 바깥에서 그의 모습은 현실과 단절된 공시적인 공간을 거니는 신사였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까지나 같은 자리에 같은 행동을 하며 같은 기분으로 서있을 거라고 믿었고, 슈마허는 지금까지 그 믿음에 확실히 보답해왔다. 이제 와서 이 연약한 신뢰를 깨뜨릴 수는 없었다. 슈마허는 기둥 뒤를 조사해보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평상시의 슈마허는 약간의 허술함을 용인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신사였으니까. 대신 그는 손목시계라도 보려는 듯이 옷소매를 슥 훑으며 자신의 연구실로 발길을 돌렸다.


연구실 문은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다. 서재에 진열된 고문서들의 묵은 향기가 밀려오자 슈마허는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그의 조수는 한결같은 자세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커피 잔을 들고 그를 맞이했다.

"늦어서 미안하군. 앨리스 양. 오늘따라 유난히 길이 막혀서."

앨리스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보이며 슈마허의 회색 외투를 받으려고 다가왔다. 그러나 슈마허는 손사레를 치며 그녀의 호의를 저지했다.

"아, 아닐세. 미안하지만 곧 나가봐야 해서."

"네? 하지만 곧 수업이 있지 않으신가요?"

앨리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슈마허는 껄껄 웃으며 앨리스의 좁은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하지 말게. 스케쥴은 어제 내가 조정해놨으니까."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앨리스를 진정시키는 데에는 확실히 쓸모가 있었다. 앨리스는 좋은 학생이었고 머리도 영특했지만, 좋은 학자가 될 재목은 아니었다. 그녀는 스승의 말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으니까. 슈마허는 인자한 미소를 유지하며 여자의 여린 어깨를 감싼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이것은 자신이 가진 미약한 힘을 흘려보내기 위해 방아쇠를 당기는 의식이었다. 그의 회색 유리알같은 왼쪽 눈이 희미한 붉은 빛을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 그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현실이 무의미하게 시야에서 점멸하며, 오로지 그와 앨리스의 정신만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은 무한히 확장하는 입자들의 무리처럼 가변적인 형태를 갖췄으나, 그가 신에게 선사받은 훌륭한 재능이 그것을 확고한 모양을 갖춘 문자의 모습으로 바꿔주었다.


슈마허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문자들을 연구해왔다. 문자들은 15개의 다양한 도형들로 이뤄져 있었다. 슈마허는 그 도형들이 어떻게 단어로 형성되고, 어떻게 음운을 만들고, 어떻게 문법을 만들어내는지 연구해왔다. 그리고 그 언어적 법칙들을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하는 데 힘썼다. 노력 끝에 그는 그 문자들로 몇 개의 간단한 문장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의 전공인 언어학보다는 암호학에 가까웠던 작업들. 그리고 가련한 실험용 쥐인 앨리스의 정신은 그가 새겨넣은 훌륭한 문장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때가 됐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더라도 슈마허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이미 사냥꾼들이 그가 숨겨둔 먹이들의 냄새를 맡고 한 번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으니까. 그들은 언제가 되더라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 모든 일을 마치고 이 빌어먹을 땅을 떠나리라. 슈마허는 웃으며 말했다.


"앨리스 양. 학회에 가져갈 논문들을 정리하는 걸 좀 도와주지 않겠나?"

"예, 물론 도와드려야죠."

앨리스는 충실한 노예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그것들은 우리 집에 있네. 내 차에 좀 타주겠나?"

"예, 물론입니다."

앨리스는 커피 잔을 책상 옆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슈마허는 다시 한 번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무심코 주변을 염탐했지만, 곧 그곳이 자신의 연구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심했다. 그는 회색 정장의 옷깃을 여미고, 탈주하는 스파이처럼 앨리스와 함께 연구실을 나왔다. 이른 아침 노교수와 젊은 여조수가 동행하는 것을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슈마허의 평소 행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차를 타고 소시지처럼 꽉 채워진 옆차선을 곁눈질하며 도로를 질주하는 와중에도 슈마허는 백 미러를 자주 응시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눈알은 은밀히 움직였고, 행동거지는 과감해졌다. 슈마허는 녹슨 철물더미를 싣고 가는 거대한 트럭을 앞질러 커브를 돌았다. 길은 막다른 곳으로 이어졌고, 콘크리트 벽의 거대한 그림자가 소형 자동차를 집어삼켰다. 완벽한 위장이었다. 슈마허는 자동차 문을 거칠게 박차고 나왔다. 그는 두툼한 손으로 앨리스의 팔을 움켜쥐고, 뒤뚱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여정을 끝마쳤다. 해냈다. 슈마허는 폐를 크게 부풀리며 크게 숨을 쉬었다. 그의 아담한 집 안은 처음 외출할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 붙박이별같은 균일함이야말로 슈마허가 사랑해마지 않는 단 하나의 미학이었다. 슈마허는 검은 지팡이로 바닥을 꾹꾹 누르며 붉은 카펫을 가로질러 갔다. 앨리스가 방 안을 둘러보다가 문득 목소리를 냈다.

"어, 죄송합니다. 교수님. 제가 여기서 뭘 해야 됐죠?"

그녀의 목소리는 혼란함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납득했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허술하게 짜인 마력코드의 공허한 틈새가 만든 플롯홀이다.

"아, 자네가 여기서 해야할 일은 딱 하나야."

슈마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는 서류 뭉치를 흐트려놓고 가장 밑바닥에서 뭉툭한 뭔가를 하나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앨리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건...?"

앨리스는 그 물체를 자세히 보았다. 그것은 헝겊으로 칭칭 동여맨 자루가 달려 있었고, 끝으로 갈수록 세밀하고 날카로워지는 몸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칼집이 씌워진 단검이었다.

"간단하네. 부디 나를 위해 그 칼을 꺼내어 스스로 목을 그어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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