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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부금 님의 서재입니다.

화약의 마법사

웹소설 > 자유연재 > 라이트노벨, 판타지

할부금
작품등록일 :
2013.07.16 17:49
최근연재일 :
2013.07.27 03:53
연재수 :
8 회
조회수 :
4,068
추천수 :
200
글자수 :
45,175

작성
13.07.16 20:14
조회
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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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글자
6쪽

프롤로그

DUMMY

슈마허는 학자보다는 성직자에 더 어울릴 법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예복처럼 세심히 다림질된 회색 정장을 입고, 옆구리에 성서같은 두툼한 교과서를 낀 채 일정한 걸음걸이로 근엄히 움직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그의 눈은 싸늘한 지성보다는 용광로같은 열망으로 번뜩였다. 그것은 참 기묘한 일이었다. 학자와 성직자는, 그 자질로만 보자면 서로 상극인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나 슈마허의 기품과 습관에는 그 두 가지 성질이 팽팽히 맞물려 있었다. 그는 성직자같은 믿음을 가진 학자였고, 또는 학자처럼 생각하는 성직자였다.


하지만 그 두 가지 상반된 성질이 슈마허가 <연합왕국> 플레메스 시 북부 공업지대에 안정적으로 자리잡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죽은 동물들의 갈비뼈처럼 철골들이 얽히고 섥힌 공장들을 중심으로 뻗은 플레메스의 주택가는 노동자 거주지역 특유의 배타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최근 중부대륙에 떠돌고 있는 폭력적인 공산혁명 사상에 들떠 있었고,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위안이 되어줄 만한 마음씨 좋은 영적 목자를 갈망했다. 슈마허는 좌파 사회학자로서, 그리고 그가 입은 회색 정장처럼 흠 잡을 데 없는 도덕성으로 거주지역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신성제국동맹>에서 온 위험한 사상을 공부하는 낯선 인문학자에서, 모든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현자로 변모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역시 슈마허 자신이었다. 그는 머지 않아 플레메스 대학의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도 질 좋은 강의로 인기가 높았다. 강의가 끝나면, 슈마허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품에는 언제나 두툼한 대학 교과서가 들려 있었다. 그는 코코넛이 그려진 붉은 카펫이 깔린 방에 앉아 고명한 학자들의 저서들을 연구하는 걸 즐겼다. 그러다가 집중력에 한계가 오면 창문을 바라봤다. 황혼이 물든 플레메스 시의 매캐한 하늘과, 그 위를 느리게 흘러가는 권태로운 분홍 구름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쩌면 이렇게 하염없이 흘러가기만 하는 삶도 나쁘지 않으리라. 안락함이 가져다주는 나태함에 젖어서.

그러나 운명은 좀도둑처럼 느닷없이 그를 각성시켰다.


"좋은 꿈을 꾸셨소?"

슈마허의 등 뒤로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슈마허는 눈에 띄게 큰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돌렸다. 갈색 망토를 둘러쓴 보통 체격의 남자가 카펫을 밟고 서있었다. 얼굴은 눈부신 노을이 만든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만족할 만 했소. 하마터면 내가 왜 이 나라에 왔는지도 잊어먹을 뻔했어."

그렇게 말하며 슈마허는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나 곧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군. 당신들은 아무 대가도 없이 나를 이 나라로 보내줬어. 제국동맹 사람을 이런 나라로 빼돌리려면 상당한 자금이 들텐데."

특히 요즘같은 때는. 슈마허는 최근 신성제국동맹이 좌파 학자와 마법사들에게 행하는 참혹한 탄압에 대해 들은 바 있었다.

"음? 이 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소?"

남자가 약간 비꼬듯이 묻자, 슈마허는 먼 옛날 일을 회상하듯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입을 열었다.

"그럴리가 있나. 난 내 삶에 정말 만족하고 있소. 왕국은 듣던 것보다도 훨씬 더 사상과 학문에 자유로운 곳이고. 하지만."

슈마허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말을 이었다.

"난 '호의' 라는 걸 믿기엔 너무 오래 살았어. 세상의 간사함에 때묻었지. 분명 당신들은 나에게 원하는 게 있을 거요."

"이보시오, 슈마허씨."

남자가 슈마허 쪽으로 발을 한 걸음 옮기며 말했다. 슈마허는 그때서야 자신이 손님을 방 한가운데에 방치해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이를테면 투자라고 할 수 있는 거요. 우린 당신의 재능과 야망이 만개하는 순간을 보기 위해 양분을 조달하고 있는 거지, 모종의 거래를 하고자 함이 아니오."

"투자라...그렇다면 언젠가는 지분을 받아내겠다는 거로군?"

슈마허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건 알아서 생각하시오."

남자가 대답했다. 슈마허는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품 안에서 손바닥에 올려 놓을 수 있을만큼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들었다.

"자, 이건 약속한 그 '물건'이오."

슈마허는 상자를 성배라도 되는 듯이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였다. 그의 가냘픈 두 팔이 애처롭게 떨렸다. 슈마허는 마른침을 삼키며,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다급한 동작으로 상자 뚜껑을 열었다. 열린 상자의 틈새로 불길한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아아, 살아 생전 정말로 이걸 보게 될 줄은 몰랐소."

슈마허의 떨리는 목소리에 황홀함이 배어 있었다.

"모든 자유마법사들이 갈망하는 물건이지. 특히 최근에는 수요가 더욱 높아졌소. 이제는 중부대륙의 신사들뿐만 아니라 제국 관료나 동방의 왕족들까지도 이것을 탐하오."

"하, 부디 신께서 우리 중부인들의 유산을 보호하시길."

슈마허는 다시 상자를 닫았다. 굶주린 뱀처럼 방 안에 도사리던 붉은 기류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슈마허는 예전처럼 평온함이 깃든 얼굴로 남자를 응시했다.

"이걸로 내 평생의 연구가 완성될 거요. 그리고 그때가 되면, 노동자 혁명 따위는 호수에 이는 잔물결만도 못하게 되겠지. 훨씬 더 큰 파도가 몰아칠 테니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얼어붙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남자가 대뜸 입을 열었다.

"조심하시오."

"무엇을?"

"이 나라, 연합왕국이 마법에 관대하다고 해서 모든 자유마법사들을 용인하는 건 아니오. 머지 않아 왕국 정부가 끄나풀을 보낼 거요. 당신의 속내를 들춰내기 위해서 말이지."

"당신은 내가 어디 출신인지 잊었나 보군."


슈마허의 순박한 얼굴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제국동맹 심문관들의 눈도 속였소. 왕국은 내 상대가 되지 않소."


작가의말

*가상의 판타지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시대나 정세는 1900년대 초-중엽의 유럽대륙과 비슷합니다. 공산혁명 등의 용어는 적절한 것을 창작해 대체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놔뒀습니다.


*보통 가상의 대륙을 무대로 하는 판타지소설에서는 프롤로그에서 대륙의 지명과 세계관 설명에 주력하던데, 저는 그냥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일단은 스토리를 점점 진행하면서 소설 내에 세계관 정보를 점점 흘려넣는 방식으로 가려고 하는데, 조절이 될지는 저 역시 걱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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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2

  •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07.17 23:04
    No. 1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군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쿠샤미두로
    작성일
    13.07.18 18:03
    No. 2

    음....기대가 만땅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8 한적한오후
    작성일
    13.07.18 18:20
    No. 3

    이상하게 강철의 연금술사가 의 이미지가 배경으로 그려지는군요

    아무상관도 없는데 말입니다

    공업지대 + 물건(현자의돌?)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검풍혈로
    작성일
    13.07.19 10:48
    No. 4

    이른바..마법+기계문명이니까 스팀펑크가 배경이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7 옴니버
    작성일
    13.07.19 14:32
    No. 5

    내연기관이 나오니까 디젤펑크풍 판타지로 분류해야 할 듯 합니다만.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 할부금
    작성일
    13.07.19 15:33
    No. 6

    네 맞아요 디젤펑크풍 판타지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7 옴니버
    작성일
    13.07.19 16:40
    No. 7

    왠지 저와 비슷한 취향을 가지신 듯한 분을 뵌것 같아 기쁩니다. 제가 연재하고 있는 소설의 제목도 화약으로 시작되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0 요하네
    작성일
    13.07.20 01:53
    No. 8

    KIA~ 묘사능력에 취한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7.20 16:01
    No. 9

    묘사가 좋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6 오후의녹차
    작성일
    13.07.20 18:22
    No. 10

    연재한담에서 추천글 보고 왔습니다.
    중세를 벗어난 환타지라는 것만으로도 반갑습니다. ^^;

    어... 그런데요...
    1. '매캐한'은 냄새에 쓰는 표현입니다.
    '매캐한 하늘' 대신 '흐릿한 하늘' 또는 '거뭇한 하늘' 정도가 어떨지요.

    2. 땅거미는 '해가 진 뒤의 어스레한 상태'랍니다 (네이버 국어사전).
    '눈부신 노을'은 앞에 올 수 없을 것 같네요.

    3. 슈마허 방에 코코넛이 깔린 카펫이 있다고 했습니다.
    갈색 망토의 남자는 처음 등장했을 때 카펫을 밟고 서 있다고 했는데, 뒤에 보면 방 밖에 방치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건필하세요.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 할부금
    작성일
    13.07.20 18:47
    No. 11

    지적 감사합니다. 언제 한 번 비문을 전부 갈아엎으려고 했었는데 덕분에 더 빨리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1번같은 경우는 나름 공감각을 노리고 택한 단어였는데 많이 어색했나보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 할부금
    작성일
    13.07.20 18:49
    No. 12

    3번은 저도 당황스럽네요 지금까지 방 바깥이라고 썼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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