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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부금 님의 서재입니다.

화약의 마법사

웹소설 > 자유연재 > 라이트노벨, 판타지

할부금
작품등록일 :
2013.07.16 17:49
최근연재일 :
2013.07.27 03:53
연재수 :
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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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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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20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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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전형적인 비극 -4-

DUMMY

웨이터가 다가와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해거드는 식기들이 서로 부딪쳐 내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럼 아직 범인은 못잡은 건가요?"

"그건 일반인들에게 밝히기엔 좀-"

"그게 말이죠. 사실 범인은 이틀 전에 잡혔어요."

맷이 토미의 말허리를 자르며 불쑥 끼어들었다. 토미가 동료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야, 너 지금 경찰서 기밀을..."

"뭐 어때? 이 사람은 마법사잖아. 국가에 큰 공을 세우는 사람이라구."

맷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거드는 범인이 이미 잡혔다는 그의 말에 매우 놀랐지만,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범인이 이미 잡혔다구요? 잘 됐네요! 그런데 왜 아직도 순찰을 다니시는 거죠?"

말을 마친 해거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 같아서는 이 공과 사도 제대로 구분 못하는 멍청한 경찰관의 멱살을 붙잡고 다그치고 싶었다. 하지만 공격적으로 나가면 안된다. 최대한 그 자신이 이 사건에 별 관심 없는 일반인이라는 걸 보여줘야만 했다. 비밀을 가진 사람은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타인과 마주할수록 움츠러드는 법이니까.


"그게 아직 확신할 수가 없어서요. 정황상으로는 범인이 맞는 것 같기도 해요. 진술에도 오류가 없고 범인의 기억과 실제 범행시각도 일치했구요. 문제는 그거죠."

맷은 자신의 어깨를 붙들고 잔소리를 속사포처럼 퍼붓는 친구를 한 손을 들어 제지시키고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이게 살인범과 경찰이 게임을 벌이고 있는 거라면, 살인범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거잖아요. 근데 왜 갑자기 살인범이 경찰서에 증거까지 직접 찾아들고 나타나 자백한 거냐는 거죠. 그냥 어떤 정신병자가 벌이는 원맨쇼일 수도 있잖아요?"

"범행 중간에 갑자기 양심이 폭발한 거 아닐까요?"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아리시안이 끼어들었다. 맷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랬다고 보기에도 미심쩍은 게 한 둘이 아니예요. 그 놈은 초범도 아니었고, 살해 현장이나 방법이나 아주 치밀하게 전략을 세우고 했다고 보는 게 옳거든요. 게다가 피해자들을 죽인 후 척추와 신체 부위 일부를 도려내서 가져가기까지 한 미친 놈이예요. 그런 녀석에게 사람의 마음이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보거든요."

"전략이라...그럼 혹시 공범이 있었습니까?"

해거드가 말했다.

"우리도 그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공범이 있느냐고 심문을 해봤는데, 자기 혼자 저질렀다고 하더라구요."

맷은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잠시 후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그 녀석은 그냥 미친 놈 맞는 거 같아요. 자기가 저지른 범행의 방법이나 시각 등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일상적인 부분에선 구멍이 많더라구요."

"구멍이요?"

"네! 예를 들어 우회적으로 심문하기 위해서 최근에 만난 사람 중 누가 있느냐, 라고 물어봤는데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더라구요. 꼭 마치 그 살인사건 관련된 걸 제외한 모든 기억을 가위로 잘라낸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그러니까-"

"아뇨. 거기까지만 말하셔도 괜찮습니다."

해거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손짓으로 웨이터를 불러 계산서를 가져오라 했다. 해거드는 지갑에서 10스털링 지폐를 꺼내 웨이터의 투박한 손에 쥐어주었다. 웨이터는 눈을 큼지막하게 뜨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해거드가 계산서에 적힌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준 것이었다.

"팁으로 써요."

해거드가 넉넉한 목소리로 말하자, 웨이터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해거드는 고개를 돌려 경찰관들을 바라보았다.

"부탁 하나 드리죠. 서로 안내해주십시오. 가서 그 용의자를 보고 싶으니까."

"네?"

맷이 덩치와 안어울리게 고개를 갸우뚱하는 귀여운 동작을 취하며 되물었다. 해거드는 외투 주머니에서 빳빳하게 코팅된 종이를 한 장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경찰관들의 이목이 종이에 집중되었다. 그것은 지방 경찰서의 보잘 것 없는 말단 경찰관들과는 영원히 인연이 없을 법한 낯선 전문용어들로 꽉 찬 국가마법사 자격증이었다.

"거기에 보시면 알겠지만..."

해거드는 일부러 말에 뜸을 들였다. 그는 권위에 의존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사실 저는 정부 주요기관의 마법사입니다. 무시무시한 왕국 정부의 특수 헌법 긴급조치를 실행하기 전에 제 말을 듣는 게 좋을 겁니다."

"하, 하지만 그건 저희 권한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저희 뒤에는 경위님이..."

토미가 앞으로 나서며 다급하게 말했다.

"제 뒤엔 의회가 있어요."

해거드가 선언하듯이 말했다. 아리시안이 얼굴을 찡그리며 그에게 눈총을 주었다. 해거드는 보란듯이 자격증을 뒤집었다. 텅 빈 백지인 뒷장에는 상원 의원용 도장과 함께 필기체로 짤막한 문장이 쓰여져 있었다. <친애하는 해거드에게, 경의를 담아 하워드 경(Lord Howard)이.>

그것을 본 맷은 이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우와-"



텅 빈 도로를 경찰차 한 대가 무심히 가로질렀다. 잠시 후 검은 앨비스 한 대가 경찰차를 뒤쫓았다. 도로의 양쪽 끝에서 일렁이는 가스등의 불빛이 앨비스의 오목한 보닛의 표면을 핥듯이 스쳐 지나갔다. 아리시안은 규칙적으로 자동차 앞좌석을 비췄다가 점멸하는 불빛을 향해 손바닥을 오무려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해거드를 응시했다.

"하워드 경은 누구예요? 우리가 그런 사람 후원을 받는 줄은 전혀 몰랐는데."

해거드는 경찰차의 검푸른 뒤꽁무늬를 노려본 채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랑 친분이 있던 의원님이야."

"그럼 정말로 우리한테 경찰권을 장악할 권한이 있는 거였어요?"

"암. 물론이지. 하워드 경은 말이야. 한때 우리나라 중앙은행 총재를 맡으셨던 분이야."

해거드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싹 다물었다. 그 당시 하워드 경의 금리 정책 실패가 왕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었다는 사소한 사족을 달 필요는 없었으니까.

"...은행이랑 경찰이 무슨 관련이 있는데요?"

"너 바보냐. 세상은 돈이 지배하잖아. 그러니까 분명 경찰도 우리나라 금융사(史)의 거인을 존중해 줄 거야."

아마도. 해거드는 자기 암시를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시안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해거드를 노려보며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번에도 뚜렷한 전략은 없다?"

"물론이지. 난 한 평생 허세로 살아왔으니까."

그걸로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끊겼다. 맷과 토미가 탄 경찰차가 두 사람을 어둑한 아치형 다리로 인도했을 때, 아리시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해거드의 아버지는 의원이랑 친분이 있을 정도로 엄청 높은 사람?"

"아리시안. 거기에 대해선 묻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해거드는 날카로운 어조로 내뱉듯이 말했다. 아리시안은 입을 비죽이 내밀면서도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리를 넘은 자동차는 날실처럼 펼쳐진 긴 통로를 조심스럽게 지나 아담한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 옆으로는 노동자 주거지역 주변의 다른 구조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아담한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건물 입구에 <북 플레메스 지방 경찰청> 이라는 초라한 글자가 적혀 있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맷과 토미는 건물 입구를 지키는 뚱뚱한 경찰관에게 친근하게 인사했다. 뚱뚱한 경찰관은 호신용 곤봉을 관자놀이에 붙였다가 떼며 그들의 친절에 답했다. 그러나 해거드와 아리시안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깔끔하게 무시했다. 경찰서 내부는 외관보다도 훨씬 더 진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사무실 안내데스크처럼 생긴 거대한 책상이 중앙에 놓여 있었다. 책상에는 밀알같은 글자들로 꽉 채워진 서류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벽에는 왕국 국기와 함께 국왕의 초상화가 패잔병처럼 우울하게 걸려 있었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찰관들이 방과 복도, 계단 사이를 수시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경찰보다는 고달픈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인턴 사원들에 가까워 보였다. 서 내의 무거운 공기는 커피 냄새와 섞여 더욱 무기력하게 축 가라앉아 있었으며, 그보다 더 둔중한 관료제의 분위기가 피로한 경찰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잠시 후, 맷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금발의 중년 여성을 데리고(모시고) 나왔다. 토미는 최대한 그들과 거리를 두려는 듯 멀찍이 떨어져 뒷짐만 지고 있었다. 중년 여성은 팔짱을 낀 채 해거드와 아리시안을 빠르게 훑었다. 해거드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관통해버릴 것만 같다고 느꼈다.

"국가마법사들이시래요. 그리고 의원의 인장도 가지고 있어요."

맷은 여인의 귀에 대고 자랑스럽게 속삭였다.

"음, 그렇다는군요."

해거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전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 마냥 말했다.

"의원의 인장이요? 어떤 의원이죠?"

해거드는 차마 "전(前) 중앙은행 총재를 지냈던 상원의원입니다. 제 아버지 친구예요." 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대답 대신 국가마법사 자격증의 뒷면을 멋쩍게 펼쳐 보였다. 여성은 해거드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해거드와 아리시안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위조된 자격증은 아니군요. 국가마법사라는 건 믿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상원의원의 명령으로 우리 용의자를 넘기고 싶진 않군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리고 아마 두 분 다 특수군의 척후대 소속이신 것 같은데, 맞죠?"

해거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아셨죠?"

"여기에 써 있으니까요. 난 이 두 놈처럼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까막눈 취급은 하지 마세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맷과 토미를 째려보았다. 두 경찰관은 자연스럽게 몸을 움츠러들었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들은 적 있어요. 뜬금없이 마법사 척후대 쪽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된 경찰 정보를 공유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하던데, 치안 문제는 어디까지나 경찰의 관할입니다. 그쪽의 간섭까지 받고 싶지는 않군요...어디였죠, 국방부? 아니면 첩보부?"

해거드는 비수에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름이 아니라 경찰 정보를 척후대 내에서 받아보고 싶다고 생떼를 썼던 게 바로 해거드였던 것이다. 그는 힘 없는 목소리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첩보부와 자주 헷갈리긴 하지만, 저흰 기본적으로는 국방부입니다. 다만 억지로 입양된 자식같은 느낌이랄까."

그건 해거드가 해거드가 척후대를 대하며 느끼는 솔직한 감정이었다. 애초에 마법사 척후대는 전 중부대륙을 점령하고 있는 이단심문관들로부터 왕국의 마법 자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왕국 정부의 항의표 역할을 하는 집단이었다. 국방부는 실제 전쟁과 거의 아무 관련도 없는 혹을 달고 사는 심정일 것이다.

"만약 이 사건이 마법과 연루되어 있다면요?"

느닷없이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이의 이목이 아리시안에게 집중되었다. 아리시안은 잠시 침묵 속에서 중압감을 떨쳐내려는 듯 헛기침을 한 후, 말을 이어나갔다.

"마법사 척후대는 자유마법사와 관련된 모든 사건에 일차적인 권한이 있어요. 이 사건이 마법과 관련되어 있다는 게 밝혀지면 우리가 정보를 요구할 수도 있지 않나요?"

"그건 사실입니다."

여자가 아리시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집된 증거 중 마법이 행해졌던 흔적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마법에 문외한이긴 하지만, 이 살인사건들이 인간의 물리력을 통해 벌어졌다는 것 만큼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들의 척추와 각종 신체 부위들까지 칼로 도려낸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거든요."

"네?"

여자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아리시안은 그녀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펴 자신의 붉은 눈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경찰님들은 분명 우리보다 더 많은 걸 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린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린 경찰들의 권한을 빼앗거나 경쟁하는 사람이 아니라 경찰의 눈을 보강하는 확장물로 쓰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어때요?"

여자는 침묵에 빠졌고, 해거드는 내심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가 아는 아리시안은 자기주장 강하고 조금은 건방진 소녀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스스로를 물건으로 격하시키며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아십니까, 마법사님들. 제가 일반인, 아니 마법사들이 용의자를 심문할 수 있도록 허가한 걸 총경님이 아시면 아마 박살이 날 겁니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솔직히 나도 빨리 저 빌어먹을 녀석이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요. 그걸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거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죠."

"그렇다면..."

"네, 이 악마같은 분들. 단 5분만 허락하겠습니다. 그 이상은 내 밥줄이 위험해지니까 안되요."

여자는 해거드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맷의 뒤통수를 툭 치며 말했다.

"이봐. 엘라 경위의 명령이니 지금 당장 907번 임시 수감자를 심문실로 올려보내라고 해. 아, 그리고."

경위는 막 달려가려던 맷을 불러세우며 덧붙였다.

"자네의 규정 위반 행위에 대해서는 추후에 추궁하도록 할테니 그리 알아두도록."



심문실은 해거드가 상상한 그대로였다. 기체화된 마석이 부글거리며 마력코드가 새겨진 전구의 겉면을 스칠 때마다 쏟아지는 빛의 폭포, 그 한가운데에 있는 심문자와 피심문자. 두꺼운 벽에는 거대한 유리창이 나있었는데, 방 안에서는 보이지 않고 밖에서만 보이는 구조였다. 분명 경위와 경찰관들이 조바심 나는 얼굴로 해거드와 아리시안, 그리고 문제의 용의자를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어떤 것 같나, 아리시안 양?"

해거드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려고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아리시안을 향해 말했다. 아리시안은 수갑으로 두 손을 묶인 채 앉아있는 수척한 용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거무튀튀한 피부에 산발한 검은 머리카락과 지저분한 수염을 가진 남자였다.

"가망이 없는데요."

해거드는 이 소녀가 잔혹하리만치 솔직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염력으로 조종당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해봤어요. 하지만 이 사람의 몸에 누군가가 마법을 걸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아있어야 해요. 딱 한 줄의 코드라도."

"정령이나 악마에 씌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흔적이 있어야죠."

아리시안의 말은 지극히 타당했다. 대기를 떠도는 정령, 혹은 악마 역시 마력코드의 집합체였다. 다만 그것들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복잡한 알고리즘을 가진 존재들일 뿐이었다. 사람의 몸에 마법을 씌우든, 혹은 마법적인 존재를 씌우든, 결국 마력코드의 잔여물이 남아야 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 결국 정신계 마법일 수밖에 없어. 사람의 신체가 아니라, 정신에 마법을 건 거야. 리비도의 발동 메커니즘을 수정했다든지 이 녀석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항문기 고착증세를 재발시켜 변태 살인마가 되게 한 거지."

"농담이죠?"

"응."

둘은 잠시 침묵하고 물끄러미 용의자를 바라보았다. 그 불쌍한 사내의 눈은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아무 것도 응시하고 있지 않았다. 정말로 누군가가 그의 의식을 가위로 재단해낸 듯 했다. 갑자기 아리시안이 말했다.

"그리고 설령 진짜로 흔적이 남지 않게 정신에 마법을 걸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어요. 그건 곧 우리가 영원히 증거를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니까. 영원히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겠죠."

가정은 가정일 뿐 진실이 되지 못했다. 진실이 되기 위해서 가정은 입증이나 반증을 거쳐 살아남아 견고해져야만 한다. 아리시안의 논리는 날카로웠다.

"좋아. 그럼 한 번 '상상' 해보자구."

"네?"

"난 이렇게 생각할 거야. 누군가가 이 불쌍한 남자의 정신을 조작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작했다. 자,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거다."

"그게 무슨 억지-"

"아가씨, 잘 들어봐. 사람의 뇌 속 깊은 비밀에 누군가가 장난질을 쳤다고 해 봐. 그래서 우린 이 껍데기에 불과한 신체에서 아무런 마력코드도 찾아낼 수 없는 거고. 그런 정신계 마법이 실존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실마리가 있어. 마법은 술자의 몸에서 마력코드를 뽑아내 마법을 걸 대상에 마력코드를 입힘으로써 발동된다. 맞지?"

"네..."

"즉 누군가가 이 자에게 마법을 걸었다면, 분명 그 사람은 이 자에게 접촉한 적이 있는 누군가일 것이다. 자, 용의자. 대답해 봐라. 최근 1달간 너와 직접 접촉한 사람이 누구지?"

용의자는 머리를 들어 잠시 해거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힘없이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 것도...기억...나지 않아요..."

그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접촉만 한다면 마법을 걸 수 있잖아요? 이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접촉했을 수도 있죠."

아리시안이 따지듯이 말하자, 해거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사람을 봐. 정말로 정신이 마구 휘저어진 것 같잖아. 자신의 범죄 행위를 철저히 기억하고 그대로 진술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런 월등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과 접촉했던 이들의 기억은 모조리 잃어버렸다는 거지. 너무나 인위적이라구."

해거드는 용의자를 노려보았다.

"한마디로 이건 정신적인 자물쇠를 건 거야. 자신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추측할 수 없게 사람의 대뇌피질을 난폭하게 난도질 해버린 셈이라고. 즉, 우리에게는 우회로가 필요해. 이 자물쇠들을 피해서 근원적인 질문에 도달할 우회로를 찾아야 해."

해거드는 의연한 표정으로 용의자와 눈을 맞췄다.

"당신은 이 살인사건 이전에도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다. 맞지?"

용의자는 아까의 머뭇거리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바로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이전에는 절도 행위로 이 경찰서에서 형을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저소득층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럼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어?"

"아니오. 저는 외국에서 이주해 왔습니다.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글도 겨우 읽습니다."

"그럼, 당신은 <프롤레타리아>인가?"

순간 용의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무언가가 그의 머릿 속 깊은 곳을 각성시킨 것만 같았다.

"예...나는...맞습니다...나는 무산계급입니다."

"당신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아는가?"

용의자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이어지지 않는 기억들의 복잡한 점을 선으로 이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해거드의 얼굴은 밝아지고 있었다.

"으...맞아요...배, 배운 기억이 납니다."

"그걸 어디서 배웠어?"

"구, 구치소에 있을 때요...아, 신부님이 저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따뜻한 손으로 제 차가운 손을 붙잡으시고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니, 교수님? 신부님? 둘 중 하나였습니다. 아니면 둘 다 일수도 있고..."

범죄자에게 사회주의를 가르치는 신부가 이 세상에 어디 있어. 해거드는 마음 속으로 중얼 거리며 질문을 재개했다.

"좋아. 조금만 더 물어볼게. 당신은 이 마을 토박이야?"

"네...이주 이후 15년이 넘게 이 거리에서 살았습니다."

"당신이 절도를 저지르고 난 후 구치소에 얼마나 있었지?"

"보석금을 낼 여유가 없었습니다...아마 1달, 혹은 한 달 하고도 보름 정도..."

"좋아.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이야. 당신을 가르친 그 신부, 아직 기억하지?"

"예...그렇습니다..."

"그는 누구지?"

갑자기 남자의 눈동자가 다시 멍해졌다. 마치 실이 풀린 꼭두각시처럼. 그는 힘없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말했다.

"모릅니다...기억이...나지 않아요..."

"응, 고마워."

이제 해거드의 얼굴은 광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영문을 몰라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만 바라보는 아리시안을 뒤로 한 채 심문실을 박차고 나왔다.

"빨리 끝났군요."

엘라 경위가 만족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거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위님. 저 용의자가 구치소에 있을 때 누가 찾아왔던 적이 있었습니까?"

"네? 그게 무슨 뜻이죠?"

"음...이를테면 신부님들 있잖습니까. 범죄자 갱생 프로그램 같은 데에 지원하는 그런 분들..."

"아아-, 그런 의미라면 뭔지 알겠군요. 맞아요. 특이한 사람이 한 명 있었어요."

"누구죠?"

"그게...솔직히 말하자면 기억이 잘 안나네요. 그냥 언제나 정장을 입고 다니는 선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특이한 건 그 사람이 성직자가 아니라 공부하는 학자였다는 거예요. 하, 게다가 말끝마다 언제나 부르주아가 어쩌구 하는 말이나 늘어놓더군요. 솔직히 가뜩이나 위험한 범죄자들을 반동분자로 만들려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죠. 뭐, 다행히 한 달쯤 있다가 안오더라구요. 뭐 플레메스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던가. 그래서 말이죠. 요즘 학교들도 참 괴상하죠. 그런 위험한 사람을 교내에 들이다니..."


그걸로 끝이었다. 해거드는 갑자기 아리시안의 팔을 와락 붙잡고는 복도를 가로질러 2층 계단을 질주하듯이 내려갔다.

"왜, 왜, 왜 그래요?"

"유레카! 아리시안, 너는 날 편집증 환자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만-, 결국 내가 맞았어."

해거드는 1층 중앙 현관을 지나치다가 탁자에 수북히 쌓인 서류들 중 지도를 한 장 발견했다. 그는 지도를 한 번 슥 훑어보았다. 북부 플레메스의 지리가 상세히 그려져 있는 지도였다.

"빌려갈게요!"

해거드는 지도를 낚아채며 얼른 경찰서를 나섰다. 현관문을 통과하자마자 매캐한 공업도시의 바람이 잔물결처럼 해거드의 얼굴을 치고 지나갔다. 해거드는 그 바람을 지식의 여신이 선사하는 일종의 세례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랑스러운 앨비스의 갸르릉 거리는 듯한 엔진소리와 차체의 진동을 음미하며, 또 다시 밤길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이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 좀 해줄래요?"

아리시안이 팔목을 어루만지며 볼멘소리로 물었다.

"아리시안. 슈마허는 마법으로 사람들을 죽였어."

"...그리고 그 주장에 대한 근거는요?"

"그 녀석은 아마 이 도시에 정착한 후 도시 사정에 대해 잘 아는 토박이를 찾았을 거야. 좀 똑똑하지만 동시에 범죄에도 친숙하고 언제라도 주목받지 않는 그런 사람이어야만 했어. 그래서 녀석은 구치소에서 범죄자들을 갱생시키는 척 하면서 일종의 인재를 선발했고, 저 불쌍한 용의자 씨가 뽑힌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은 한 달 이상의 시간을 천천히 들여 그 남자의 정신을 개조해 잠재적 시한폭탄으로 만들어 버린 거야."

"한 달? 그렇게 오랜 시간을요?"

"슈마허는 우리도 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마력이 희미한 사람이야. 그리고 복잡한 알고리즘을 가진 마력코드를 불어넣으려면 장기간 접촉해야 하지."

해거드는 잠시 차를 갓길에 세우고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쨌든 저 용의자는 슈마허에게 일종의 말에 불과할 거야. 그러니까 저렇게 기억력을 잘라내버린 채로 경찰에게 자백하도록 했겠지. 아마 놈이 이미 목표를 달성했거나, 아님 저 남자를 대체할 또 다른 사람을 찾았거나. 결국 둘 중 하나겠지."

"...그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여기야."

해거드는 지도의 한 부분을 손으로 점지했다. 아리시안은 자세히 그 곳을 들여다보았다. <University of Flemeth>. 거기엔 그렇게 적혀있었다.

"아마 여기서 최후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것 역시 가정에 의존하고 있지만."


작가의말

아까 처음 이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을때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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