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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맨

잘생김을 연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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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맨
작품등록일 :
2021.10.18 01:01
최근연재일 :
2023.09.08 15:36
연재수 :
120 회
조회수 :
167,929
추천수 :
3,574
글자수 :
645,036

작성
22.04.09 12:00
조회
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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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11쪽

107 라이벌리

DUMMY

“아! 병찬이형.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니까”


진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몸은 건강한 것 같지만 얼마나 씻지 않았는지 머리칼과 얼굴에는 기름이 좔좔 흘렀고 몸에서는 냄새까지 났다.

그 와중에도 잘생김이 뿜어져 나오는 게 어이가 없다.


“매니저님이 얼마나 걱정이 많았으면 나한테까지 연락을 했겠냐?”


자기도 알기는 아는지 대답이 없다.


“이번에 들어온 드라마는 정말 놓치기 아깝다고 말 좀 해달라더라”


계속 대답을 안한다.


“밖에 나오지도 않는다면서? 집에 틀어박혀서 뭐 하느라 그러는 거냐? 설마 공황장애라도 온 거야?”


진형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어”

“뭐가?”

“생일파티게임”

“그거 그런대로 평이 좋았잖아?”


진형이 또 입을 닫았지만 이번에는 진득하게 기다렸다.

한참 뭔가 생각하던 진형은 방에 들어가 종이뭉치를 가지고 와 진철에게 건냈다.


“내가 원하던 건 좀 더 치밀하고 좀 더 긴박감 넘치는 그런 거였어. 아슬아슬해서 보는 사람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그런 거”

“그런 거 안 원하는 사람도 있냐?”


보는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

이 바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염원 같은 거다.

진철의 반응이 어떻거나 말거나 한번 입이 풀린 진형은 따따따 속마음을 쏟아냈다.


”내가 아이디어를 좀 개떡같이 설명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말야. 원동연피디 팀은 전문가들이니까 찰딱 같이 만들어 줄 걸로 생각했는데 말야. 내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아냐?”


씨근덕거리기까지 했다.

저런 상태면 더 말해도 소용없다고 판단한 일단 진철은 종이를 사라락 넘기며 먼저 대체적인 내용을 파악했다.


“이건 예능이 아닌데?”

“생각해보니까 처음부터 잘못된 거였어. 내 아이디어를 풀어내기에 일회성 예능은 애초부터 어림도 없었다고. 미니시리즈 드라마는 되야 할 것 같아”


진형이 글 쓰는 걸 본적이 없는 진철은 혀를 찾다.


“그래서 네가 드라마를 썼다?”

“일단 한 번 봐”

‘하기는 쟤가 예능을 기획할지도 생각 못 했었지’


진철은 한장한장 신중하게 읽어나갔다.

시놉시스도, 트리트먼트도, 정식 시나리오도 아닌 그 글은 굳이 말하자면 소설에 가까웠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내용은 각기 다른 직종의 회사에서 근무하는 열 명의 동창이 어느날 갑자기 같은 부서 팀원 전체와 함께 외딴 섬으로 납치되면서 시작되었다.

그 섬에서 생존과 거액의 상금을 미끼로 각 팀별로 서로 죽고 죽이는 살인게임을 강요받으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런데 왜 이야기가 이렇게 뒤죽박죽이야?’


스토리의 비약이 심하고, 플롯도 엉성하며, 시점이 마구 뒤섞여 있다.


“그리고 왜 결말이 없어?”

“그건 아직 못 썼어. 그래도 아이디어는 죽이지 않냐?”


그렇다.

다 엉망인데 재미는 있다.


“그렇기는 하네. 어렸을 때 하던 게임들로 생사를 결정한다는 것도 신선하고 그런데 그것 말고는 다 문제야”


진형이 진철의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나도 알아. 그런데 그 정도가 내 한계인 것 같다. 한 번 얘기가 막히니까 도저히 진전이 없네?”

“그래서 모습이 그 모양이냐?”

“그럼 어쩌냐? 얘기가 머리속에서 막 돌아다니면서 괴롭히는데”

“그럼 이 건 좀 내려 놓고 딴 일 하면서 머리를 쉬게 해 줘. 매니저형님이 아깝다고 한 그건 어때?”

“글쎄?”

“아직 대본도 안 본 거냐?”


진형이 또 방에 들어가 대본을 가지고 와 내밀었다.


“발렌티노?”


마피아 패밀리의 변호사인 한국계 이탈리아인의 이야기였다.







“안녕하세요? 강진철입니다”

“우리 처음 보죠? 방상훈입니다”


작감 면담을 강남의 어떤 일식집에서 하기로 했는데 막상 나온 것은 방상훈 피디 혼자였다.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방피디님”

“하하! 백부장님 요새 바쁘다는 건 아는 사람 다 아는데요. 그래도 좀 일찍 연락 주시지. 숨 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이번 작품의 작가가 원래 사람 만나길 꺼려한다고 백부장에게 듣기는 했었다.


“우리 작가님은 지금 원고를 쓰느라 정말 정신이 없어요. 하지만 강진철씨라면 무조건 찬성이라고 했으니 오해는 말아주세요. CP 님과 국장님도 오시고 싶어했지만 워낙 약속을 급하게 잡아서 스케쥴 조정을 못했어요”


방송가 사람들 말은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

행간에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라는 건 진철도 알지만 그는 원래 그런 거 신경쓰지 않는다.

조연을 주로 할 때도 그랬다.

그런 것에 센스도 없는데 신경 써봐야 혼란스럽기 때문에 진철은 진철의 일을 할 뿐이다.


“그래도 작가님을 직접 뵙고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아깝네요”


그래도 이제 마음에 없는 말도 제법 할 수 있게 되었다.

백본부장도 한마디 했다.


“제가 늦게 답변을 드려 번거롭게 해드렸습니다. CP 님과 국장님께는 따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인사치례가 끝났으니 술을 곁들여 식사를 할 차례다.

보통 배를 좀 채운 다음에야 본론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방상훈 피디는 좀 마음이 급했나 보다.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말을 꺼냈다.

아니면 원래 성격이 급하거나.


“아는지 모르지만 사실, 처음 남주의 물망에 오른 건 주하늘씨였어요”


눈에 빡 힘을 주며 진철을 빤히 보는 게 기선을 제압하려 하는 것 같다.

피디 중에는 촬영을 자기 마음대로 끌어가기 위해 먼저 배우를 제압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있다.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이 아니예요. 진철씨가 [삼국 팔검전]이나 [크라임시티]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다는 건 알아요. 그런데 굳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그런 강렬한 캐릭터 말고 일상연기에는 약간 의구심이 있어서 그래요”

“예, 저도 그런 연기를 좀 잘하고 싶어서 연습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진철은 스타라고 피디와 기 싸움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진철씨를 주인공으로 꼽은 이유는 그 사진 때문입니다. 그 사진이요”


이제는 ‘그 사진’이라고 해도 다 알아듣는다.

어떤 이미지를 그리는지 감이 잡혔다.


“태봉이 캐릭터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시군요?”


진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피디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원래 성격이 급한 것 같다.


“네. 태봉은 태어날 때부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태어나 온갖 고생을 겪은 사람이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죠. 그리고 꾸밈이 없고 자기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굉장히 투명한 사람이에요. 누구나 단 일초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죠. 하지만 그 안에 딱 한 방울, 사실은 굉장히 큰 한 방울이지만 한을 숨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격은 좀 불 같을 때도 있지만 한없이 맑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 그 한을 터뜨릴 때 시청자들의 마음이 움직일 겁니다. 그리고, 결국 그걸 극복하고 행복해질 때 사람들은 태봉이와 같이 행복을 느끼겠죠”


다다다 말을 쏟아내지만 요점을 콕 집어 이야기하는 게 자기가 뭘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다.

드라마 이야기를 시작하자 처음의 좀 거칠던 태도는 어느새 사라지고 눈을 반짝거리며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마음에 든다.


그 뒤로 긴 시간 방상훈 피디와 진철은 태봉의 캐릭터뿐 아니라 드라마 전체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느낌이 좋네’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때쯤 방피디와 진철은 둘 다 서로에게 꽤 만족한 상태였다.

진철은 마지막 용건을 꺼냈다.


“대본에 태봉의 아주 어릴 때와 청소년기의 장면도 꽤 나오던데 아역 배우들은 뽑으셨어요?’

“아! 유년기 배우는 뽑았는데 청소년기 배우는 아직이야. 주연을 먼저 뽑은 후에야 비슷한 이미지의 아역을 뽑을 수 있으니까”


방피디는 어느새 자연스레 말을 놓고 있다.


“그럼 청소년기 태봉도 제가 연기해도 될까요?”

“응?”


방피디는 예기치 못한 습격을 받은 것 같았다.


“진철씨가 어려보인다는 건 인정하지만 아역은 아역에게 맡기는 게 나을 거야”

“방피디님”

“안 돼”


완강한 반응이지만 진철은 설득할 자신이 있다.


“제가 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시죠?”

“미남으로 얼굴을 바꾸는 그거 말인가?”


진철은 빙긋 웃었다.


“바꿀 수 있는 게 미남 얼굴만은 아니죠”

“설마?”

“네. 어려 보이게도 할 수 있습니다”


진철은 바로 그 자리에서 얼굴에 기를 돌리고 근육과 신경을 움직였다.







다음날 오전.

진철은 언제나처럼 연습실에 있었다.


“뭐하고 계세요?”


김정수가 들어오며 얘기한다.


“아. 이거”


진철은 손가락으로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켰다.


“그림이 꽤 마음에 드시나 보네요?”

“마음에 들기도 하고 또 연기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이걸 보다 보면 얼굴로 감정을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지 영감이 떠오를 때가 있거든”

“그림이 연기에 도움이 되다니 정말 특이한 케이스예요”

“나 같은 경우가 아니라도 배우들은 다른 예술을 접하면서 발전하는 경우가 꽤 있어. 학교 커리큘럼에도 있는 과정이야. 그림을 보고 그걸 연기를 표현하는 그런 거. 예술은 다 통하는 법이니까”

“그렇군요?”


진철은 말을 한 뒤 문득 깨닫는 게 있었다.


‘나도 무의식적으로는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아! 김혁철 감독님과 전혜진 작가님 왔습니다”


김정수가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연습실 문이 열리고 그 두사람이 들어왔다.


“진철아! 내가 왔다”


개선장군처럼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큰 소리로 말하던 혁철은 문득 멈춰섰다.


“이건 뭐야?”


입을 ‘헤’ 벌리고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킨다.

뒤 따라오던 전헤진 작가도 눈을 크게 뜨고 같은 방향을 봤다.


“작가님 마침 잘 왔어요. 화련선배가 이 그림 작가님에게 꼭 보여주고 반응을 얘기해 달라고 했어요. 화련선배와는 언제 친해진 거예요?”

“예? 딱히 그분과 따로 만난적은 없는데요?”

“그래요?”


뭔가 이해가 된다.


‘그럼 이 초상화는 라이벌에게 보내는 답장 같은 거였나?’


그림과 사진.

장르는 다르지만 유사한 점이 많은 분야다.

그 두 직업에 진심인 화련선배와 전혜진 작가 사이에는 처음부터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기질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게 운명의 맞수를 보는 그런 분위기라는 걸 깨달았다.

싫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까워지는 것 보다는 이기고 싶은 그런 상대.


진철은 다시 벽에 걸린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항에서 돌아와보니 도착해 있던 진철의 새 초상화.

전혜진 작가의 ‘그 사진’을 모사해서 환하게 웃고 있는 진철의 초상이다.


‘세상 무해한 웃음이라고 어떤 기사에서 말했지’


분명 자기 사진이지만 자기처럼 느껴지지 않는 사진.

하지만 사실 진철은 그 사진도 그 사진을 묘사한 그 기사도 좋았다.

자기가 아주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서.


화련선배의 그림도 사진을 모사하기는 했지만 그대로 따라 그린 것만은 아니었다.

자기의 창의적인 재능을 쏟아 부었다.

세명의 진철.

현재의, 그리고 청소년기와 유년기의 진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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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119 니들이 뭘 알아 22.08.28 271 8 12쪽
118 118 파티 22.08.25 278 7 13쪽
117 117 미혼모와 미친놈 22.08.23 273 6 13쪽
116 116 촬영은 계속되었다. 22.08.21 301 6 11쪽
115 115 태봉과 도화와 봉구 22.08.19 285 4 12쪽
114 114 내가 미친놈인 게 다행이다 22.08.17 300 5 11쪽
113 113 닮았다 22.08.16 288 7 12쪽
112 112 괜찮아 안 괜찮아 22.04.19 688 14 12쪽
111 111 휴가 가자 +1 22.04.17 839 14 12쪽
110 110 언리얼 22.04.15 858 13 12쪽
109 109 드라마 작가 22.04.13 898 9 11쪽
108 108 사투리 연습 22.04.11 894 11 13쪽
» 107 라이벌리 22.04.09 898 9 11쪽
106 106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22.04.07 825 14 13쪽
105 105 MAPA 2차 주주총회 +1 22.04.05 877 18 15쪽
104 104 겨우 내가 되려고 그렇게 아팠던 걸까? 22.04.03 847 18 12쪽
103 103 뭐가 있는 날 22.03.31 705 17 12쪽
102 102 찌그러진 거울 +2 22.03.29 695 15 12쪽
101 101 도약을 해보자 +1 22.03.26 713 17 12쪽
100 100 굿이 끝나고 촬영이 시작됐다 22.03.24 756 20 13쪽
99 099 굿은 굿엔딩이 될 수 있을까? +3 22.03.22 707 22 13쪽
98 098 북소리와 방언 22.03.19 725 22 13쪽
97 097 너였냐? 22.03.15 734 21 12쪽
96 096 김율 +2 22.03.13 724 21 12쪽
95 095 어디 귀신 없나? +2 22.03.10 822 24 17쪽
94 094 중철무속연구소 22.03.08 805 26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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