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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맨

잘생김을 연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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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맨
작품등록일 :
2021.10.18 01:01
최근연재일 :
2023.09.08 15:36
연재수 :
1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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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4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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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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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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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02 찌그러진 거울

DUMMY

넓다는 말 보다는 광대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무실.

벽과 바닥, 가구들은 흰색 베이스에 검은색 조합으로 심플하지만 고급스럽게 구성되어 있었고 곳곳에 도자기와 정교한 장식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딱 봐도 거대기업 사장이나 회장이 쓰는 사무실처럼 보인다.

다만 한쪽 긴 벽 전체를 녹색천이 덮고 있었고 거기 연결된 짧은 벽은 전체가 거울로 되어 있다.


고급 양복에 고가의 시계를 차고 머리를 깔끔하게 다듬은 주인공이 그 거울로 된 벽 앞에 서서 소리치고 있다.


“뭐가 악마고 뭐가 강제집행이야. 결국 내가 이겼다. 내 승리야! 나는 결국 성공했어”


주인공의 얼굴에 어린 환희는 도가 지나쳐 오히려 광기처럼 보였다.


“나와! 나오라고! 빨리 나와서 내가 이긴 걸 인정해!”


아니, 그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악을 쓰는 게 진짜 미친 것처럼 보였다.

그 때 갑자기 조명의 방향이 바뀌고 거울이 유리로 변했다.

유리 건너편은 허름한 단칸 방.

주인공이 쓰던 방이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에는 검은 페도라에 검은 양복, 검은 코트를 입은 미스터리한 남자가 표정 없는 얼굴로 주인공을 보고 있었다.


“드디어 나왔네. 어때! 내가 이겼어. 내가 결국 이겼다고”


희열이 서린 주인공의 말.

그러나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던 미스터리 남자가 갑자기 입가에 웃음을 짓자 뭔가 불길함을 느꼈는지 주인공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왜 웃지?”


확 작아진 주인공의 목소리.

그리고 미스터리 남자의 입이 열렸다.


“그래. 네가 이겼다”


패배선언을 들었지만 주인공은 기쁘지 않은 것 같다.


“그럼, 지옥으로 꺼져버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조울증이라도 걸린듯 다시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진 주인공의 목소리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미스터리 남자는 계속 말했다.


“계약대로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그런데 왜 그렇게 웃는 거야? 이긴 건 나야. 너는 졌다고”


한껏 조롱하는 목소리를 듣던 미스터리 남자는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크크크”

“웃지마!”


주인공의 고함에도 미스터리 남자의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입가에 머물던 작은 웃음은 어느샌가 얼굴 전체로 번져 함박웃음이 되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한참 웃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이겼다. 그러니 그 곳에 있는 것들은 이제 네 것이다”

“대답해! 왜! 왜 그렇게 웃는 거냐!”


주인공의 거친 목소리에 짙은 불안감이 담겨있다.


“왜 그렇게 불안해하지? 이제 계약에 따라 넌 그 천국에서 내가 남긴 것들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고 난 이 ‘아무것도’ 없는 지옥에서 불행하게 살아갈 텐데”


그렇게 말한 남자는 작게 덧붙였다.


“네가 잊은 것들을 가지고”


주인공의 눈동자가 흔들린 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잊은 것들이라니? 그게 뭐야”

“네가 선택했고 네가 버린 거다. 이제와 그게 뭔지는 왜 물어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인공의 눈동자가 떨리고 입술이 바싹 말라갔다.

그 때 미스터리한 남자가 한발 앞으로 나섰고 그의 옷이 허름한 청바지에 낡은 잠바로 바뀌었다.

그리고 미스터리 남자의 뒤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아직이야?”

“다 됐어. 바로 나갈 게”


미스터리한 남자의 입에서 나온 건 주인공의 목소리였다.

멍하니 그걸 듣던 주인공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다 미친듯이 앞으로 달려가 거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미진아! 아니야. 그 놈은 내가 아니야. 나 여기 있어”

“하하하하하~~~~~! 기억이 떠올랐군”


다시 크게 웃던 남자의 얼굴이 날카롭게 변했다.


“네가 버린 가족, 사랑하는 여자, 친구들. 네 인생은 내가 주워 살아주마. 너는 그 천국, 나에게는 지옥이었던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아라. 둘 다 만족하는 등가교환이겠군”


쇠냄새가 날 것 같이 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야. 아아아악~~~!”


주인공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미친 것처럼 유리를 두들기며 소리쳤지만 미스터리 남자는 단호하게 뒤돌아 단칸방의 문을 열고 사라졌다.

유리가 다시 거울로 변했다.

그리고 카메라가 뒤로 빠지며 화려한 사무실에 남아 발광하는 주인공의 뒷모습을 멀리서 잡았다.







“좋습니다. 제가 상상했던 화면이 그대로 나왔어요”


현장 편집본 플레이가 끝나자 그렇게 말을 한 류승철은 뒤로 돌아서다가 멈칫했다.

모니터를 둘러싸고 같이 영상을 보고 있던 영화스텝들이 하나같이 그의 입만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묘하게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촬영이 끝났다고 감독이 공식적으로 말하길 기다리는 거다.


‘이거 연기를 좀 바꿔서 더 찍어보자고 하면 많이들 실망하겠는데?’


그런데 그가 입을 열기 전 강진철이 먼저 말을 했다.


“감독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네. 말씀하시죠”

“이 씬, 다른 방식으로 연기해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애드립도 좀 섞어서요”


류승철 감독이 빙긋 웃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 됐네’

“당연히 되죠. 걱정하지 마시고 강진철씨가 원하는 게 나올 때까지 찍어보죠”


감독과 배우가 의기투합한 훈훈한 장면이지만 스텝들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중 유난히 발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감독님! 오늘 안에는 끝내야 해요. 여기 스튜디오도 저기 가구들과 장식품, 그림들도 싹 다 오늘 반납해야 해요. 날자 지나면 렌트 요금 다 따블이예요”

“알았어요. 알았어”


제작프로듀서는 애가 탔지만 류승철 감독의 대답은 누가 들어도 건성이었다.


“진짜 이제 예산이 없다니까요?”

“알았어요. 알았어”


그 때 동생 승호가 옷으로 갈아입으러 가는 강진철을 잡는 게 보인다.


“저는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해요?”

“그냥”

“네?”

“너 하고싶은 대로. 아까 내가 얘기한 거 기억하지? 넌 이미 주인공을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으니까 내가 어떻게 연기하던 넌 최고의 리액션을 보여줄 거야. 믿는다”


류승철 감독은 분장실로 돌아가는 뒷모습의 어깨 위에서 아침에 보았던 그 뜨거운 기운이 다시 솟아나는 걸 보았다.


‘어떤 연기를 할까?’


조바심이 다 났다.








청바지와 잠바를 미스터리한 남자의 의상으로 갈아입는 동안 진철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 악귀를 떠 올렸다.


‘악의[惡意]의 결정체.


그 악귀는 뚜렷한 의식도 없는 영체 주제에 생명을 가진 것들은 다 죽이고 말겠다는 증오로 똘똘 뭉쳐진 존재였다.

그리고, 미스터리한 남자는 주인공을 미워한다.


‘자기는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가지지 못했던 것을 가지고도 소중함을 모르는 이에 대한 증오’


통하는 게 있다.

악귀의 그 끔찍한 증오심을 미스터리 남자를 연기하는데 적용하면 밋밋했던 연기가 조금 더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리 연습해도 스스로 만족할 정도의 연기는 완성하지 못했다.

이제는 시간이 없다.

실전이다.


‘여기서는 성공해야 해’


촬영장으로 한 발 한 발 걸어 나가며 진철의 고심을 점점 깊어져갔다.


‘어떻게 하면 그 깊은 증오와 악의를 담은 연기할 수 있을까?’


계속 머리속으로 되뇌이며 단칸방 세트의 중앙에 가서 섰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유리 건너편에서 류승호의 대사가 들려온다.


“하하! 뭐가 악마고 뭐가 강제집행이야. 결국 내가 이겼다. 내 승리야! 나는 결국 성공했어”

“나와 나오라고! 빨리 나와서 내가 이긴 걸 인정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조명의 방향이 바뀌고 특수하게 만든 거울이 투명한 유리로 변해 건너편의 류승호가 보였다.


“드디어 나왔네. 어때! 내가 이겼어. 내가 결국 이겼다고”

‘불쌍한 녀석’


가지지 못한 것을 탐하지만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모른다.

문제다.

불쌍하게만 보이고 증오하는 마음이 솟아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하지?’


미스터리 남자가 웃어야 류승호의 다음 대사 ‘왜 웃어?’가 나온다.

하지만 그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불쌍해서.


‘어떻게 하지?’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역시 준비한 대사가 아니면 한마디의 대사도, 하나의 몸짓도 나오지 않는다.

답답하다.

답답해서 견딜 수 없어 속에서 불이 솟구치는 것 같다.

평소라면 억지로 냉정함을 유지했겠지만 이제는 참지 않고 놓아버려야 할 때도 있다는 걸 배웠다.

오늘은 참지 않기로 결심했다.


“크크크”


녹이 잔뜩 슬어있는 쇠가 갈리는 듯한 끔찍한 웃음소리가 심상각인의 힘을 타고 진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고막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을텐데 류승호는 견뎌내고 대사를 했다.


“웃지마!”


쥐어짜내는 것 같은 목소리다.


“카카카카카카~~~~!”


다시, 진철은 전 보다 훨씬 더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심상각인의 힘을 타고 세트장 전체를 흔들고 유리 건너편 류승호의 몸을 휘청이게 했다.


‘이건 그 악귀가 내던 소리?’


사람 마음을 사정없이 흔드는 바로 그 소리였다.


‘어떻게? 왜?’


의문은 나중에, 지금은 잡아채야 한다.

이 순간이 지나가면 다음 기회는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마음이 동하자 기가 빠른 속도로 순환하고 감각이 예민해졌다.

조명에서 나는 미세한 떨림 소리가 들리고, 촬영장비들의 쇠냄새가 맡아지며, 조명을 받은 공기중의 먼지가 공중에서 느리게 움직이며 부유하는 게 느껴진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빠르게 방금전의 경험을 되새기고 있을 때 진철의 머리 속 깊은 곳에서 벼락처럼 튀어나와 온 정신을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오송선사의 목소리.


[나는 명경지수.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다]


바로 그 순간 진철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 생각했는지 깨달았다.

기본을 잊고 있었다.


‘증오를 연기하기 위해 무언가를 진짜 증오할 필요는 없었어. 그저 비추면 될 뿐. 진짜 연기는 거울이 되어 세상을 비추는 거야’


진철의 입이 저절로 열리고 대사가 튀어나왔다.


“그래. 그 쪽 세상을 선택했으니 네가 이겼다. 네가 원하던 모든 게 있는 그 곳에서 계속 행복하게 살아라”








분장실에서 나와 단칸방 세트 앞에 선 강진철을 보며 류승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서 저런 박력이’


강진철이 다가오는 게 마치 검은색 용암이 압박해 오는 것 같이 느껴졌다.

누가 그러라 한 것도 아닌데 모두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그의 뒤와 옆에 서 있던 스텝 누구도 숨조차 크게 쉬는 이 없었다.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스터리 남자의 짧고 긴 두번의 웃음소리.

류승철의 턱에 빡 힘이 들어갔다.

그는 확신했다.

현재 스튜디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몸에 난 털이란 털은 모두 곤두서 있을 거라고.


‘영화관의 관객들도 그러겠지’


벌써 기대 이상이다.


“그래. 네가 이겼다. 그러니 이제 네가 원하던 모든 게 있는 그 곳에서 계속 행복하게 살아라”


말소리 자체는 평이한데 주인공을 향한 악의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계약에 따라 넌 그 천국에서 내 지위와 돈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라. 네 바람대로 난 이 지옥에서 네가 버린 것들을 가지고 불행하게 살아갈 테니”


지난 연기가 날카로웠다면 이번 연기는 바위같이 무겁다.


“네가 선택했고 네가 버린 거다. 이제와 그게 뭔지는 왜 물어보지?”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류승철은 테이크를 끊고 싶지 않았고 강진철 역시 그런지 그대로 연기를 이어갔다.


“네가 버린 가족, 애인, 친구들. 네 인생은 내가 주워 살아주마. 너는 그 천국, 나에게는 지옥이었던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아라. 둘 다 만족하는 등가교환이겠군”


악의가 해일처럼 덮쳐온다.

그리고, 마지막 미스터리 남자의 대사.


“나는 너를 비추는 거울이다. 하지만 이 거울은 찌그러져 있지. 어디 그 찌그러진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아봐”


강진철이 뒤돌아 단칸방을 나가고 유리가 다시 거울로 변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강진철의 연기를 버텨내던 승호는 발광을 하는 대신 넋이 나가 바닥에 누워버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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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김을 연기하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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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사죄 말씀 드립니다. 연중공지를 안했었네요. +1 23.09.08 129 1 1쪽
119 119 니들이 뭘 알아 22.08.28 271 8 12쪽
118 118 파티 22.08.25 278 7 13쪽
117 117 미혼모와 미친놈 22.08.23 273 6 13쪽
116 116 촬영은 계속되었다. 22.08.21 301 6 11쪽
115 115 태봉과 도화와 봉구 22.08.19 285 4 12쪽
114 114 내가 미친놈인 게 다행이다 22.08.17 300 5 11쪽
113 113 닮았다 22.08.16 288 7 12쪽
112 112 괜찮아 안 괜찮아 22.04.19 688 14 12쪽
111 111 휴가 가자 +1 22.04.17 839 14 12쪽
110 110 언리얼 22.04.15 858 13 12쪽
109 109 드라마 작가 22.04.13 898 9 11쪽
108 108 사투리 연습 22.04.11 894 11 13쪽
107 107 라이벌리 22.04.09 897 9 11쪽
106 106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22.04.07 825 14 13쪽
105 105 MAPA 2차 주주총회 +1 22.04.05 877 18 15쪽
104 104 겨우 내가 되려고 그렇게 아팠던 걸까? 22.04.03 847 18 12쪽
103 103 뭐가 있는 날 22.03.31 705 17 12쪽
» 102 찌그러진 거울 +2 22.03.29 695 15 12쪽
101 101 도약을 해보자 +1 22.03.26 713 17 12쪽
100 100 굿이 끝나고 촬영이 시작됐다 22.03.24 756 20 13쪽
99 099 굿은 굿엔딩이 될 수 있을까? +3 22.03.22 707 22 13쪽
98 098 북소리와 방언 22.03.19 725 22 13쪽
97 097 너였냐? 22.03.15 734 21 12쪽
96 096 김율 +2 22.03.13 724 21 12쪽
95 095 어디 귀신 없나? +2 22.03.10 822 24 17쪽
94 094 중철무속연구소 22.03.08 805 26 17쪽
93 093 지옥에서의 초대 +1 22.03.06 839 22 13쪽
92 092 온갖 긍정적인 시그널의 총합 +2 22.03.04 824 2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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