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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P9 님의 서재입니다.

게임 속 방랑 성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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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P9
작품등록일 :
2021.02.26 22:37
최근연재일 :
2021.03.13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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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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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9,395

작성
21.03.10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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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4화

DUMMY

로드릭은 로버트의 배웅을 받으며 경비대를 나섰다.


‘시간 참 빨리 가는군.’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산봉우리 밑으로 가라앉는 저녁노을.

번져오는 칠흑에 숨어 빛을 뿜어낼 준비 중인 별빛들.

그 경계선에 다채로운 색깔이 뿌려져 수채화를 그렸다.


로드릭의 무심한 회색 눈동자에도 생기가 감돌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도 있어도 눈이 즐거웠다.


‘내가 이렇게 감상적이었나.’


군대를 전역하고 돈을 벌기 위해 사회에 뛰어들었다.

퇴근할 때면 언제나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회사로 출근했다.


시간에 쫓기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삶.

바쁜 일상 속에서 하늘을 올려볼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상념에 젖을 시간 따위는 사치였다.


숨이 턱하고 막혔던 직장 생활의 분위기.

스트레스를 풀려고 남는 시간을 게임에 매진하던 인생.

이젠 그 게임 속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진 불분명하지만.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헛소리.’


멸망해가는 세상에서 뭐?

이렇게 떠돌이 방랑 생활을 하는 게 나쁘지 않다고?

잠시 머리가 돌아버렸나 보군.


로드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지금껏 약한 놈들만 상대하다 보니 나태해진 것 같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

특히 기적의 가르침을 섬기는 교황을 배신하였기에, 들키는 순간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다.

시발. 왜 하필 캐릭터 설정이 이따위로 한 거야.

그는 게임 개발진들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묵을 여관이나 찾아봐야겠군.”


몸에서 도적놈들의 피 냄새가 났다.

로드릭은 뜨끈한 목욕물이 간절했다.


**


“미안하오. 자리가 없소.”


염병, 이게 몇 번째야.

로드릭은 똥 씹은 표정으로 네 번째로 찾은 여관을 빠져나갔다.

순례자들이 몰리면서 여관에 방이 부족하다고.

그리 말하는 여관 주인들의 미소는 귀에 걸려 있었다.

손님을 더 받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미소가 공존하면서 말이다.


이러다간 팔자에도 없던 노숙을 하게 되었군.

돈지랄을 해서라도 방을 구해야 할까 고려하는 로드릭이었다.


“로드릭님. 여기 계셨군요.”


그런 로드릭 앞에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오?”


멀리서 보면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금발의 청년 파이몬이었다.


“혹시 숙박할 곳을 찾고 계십니까?”

“그렇소.”

“그럼 저랑 같이 가시죠. 제가 아는 곳이 있습니다.”


파이몬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바람이 머무는 여관이라는 곳입니다. 깔끔하고 음식도 푸짐하게 나오죠.”

“모든 여관의 방이 꽉 찼다고 들었는데.”

“하하. 그곳의 주인이 저희 아버지와 아는 사이입니다. 덕분에 어떻게든 방 한자리를 만들 수 있었죠.”

“···나한테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요?”


로드릭은 그 호의가 의심스러웠다.

믿을 놈 하나 없는 세상이었으니까.

갑작스럽게 친절을 베푼다고 한다면 의심부터 해봐야 했다.


“당신이라는 사람을 좀 더 알고 싶습니다.”


호기심과 기이한 열망으로 가득한 눈빛.

이 새끼 게이인가?

로드릭은 소름이 돋아 반사적으로 칼을 뽑을 뻔했다.


“로드릭님은 제 은인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도적들에게서 저를 구해주셨으니 그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파이몬이 주먹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기사가 상대에게 예의를 표시할 때 주로 하는 행동이었다.


다행히 게이는 아니로군.

로드릭은 안도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저 젊은 청년 기사 앞에서 할 일이라곤 도적들을 도륙 낸 일뿐.

도적들 좀 썰었다고 존경까지 받다니.

참으로 웃긴 친구였다.


“혹시 실례되는 행동인지요?”


파이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거절당할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아, 돈을 더 내겠다고 하지 않았소!”

“얼마를 내든 마찬가지요. 우린 신용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오.”

“벌써 열 군데나 들렀소! 여기까지 하면 열한 군데를 들르는 거라고!”

“아, 글쎄 자리가 없대도.”


어느 순례자와 여관 주인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순례자는 오늘 밖에서 밤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흠······.”


로드릭은 고민했다.

그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거절하면 방금 전 순례자처럼 노숙을 해야 할 판이었으니.


‘별로 신경 쓰던 인물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도움을 받는군.’


처음 파이몬과 마주쳤을 때, 로드릭은 그가 메인 시나리오에 관련된 인물인지 떠올려 봤다.

아무리 머릿속을 굴려봐도 파이몬이란 이름을 지닌 NPC는 없었다.

그래서 신경을 꺼버리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인연이 생길 줄은 몰랐다.


‘혹시 거절하지는 않겠지?’


로드릭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파이몬은 애가 탔다.

아버지 몰래 출가하면서 처음으로 호의를 가지게 된 대상이었다.

지금까지 마주친 용병들은 형편없었다.

상당히 무례하고 남 등 처먹기를 좋아하는 작자들.

실력도 가문의 기사들보다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런데 로드릭은 그들과 전혀 달랐다.

신사적이고 남을 배려할 줄 알았으며 타고난 강자였다.

도적들에게 핍박받던 순례자들을 도와주면서 그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다.

기사도의 정신이 확고하게 살아있는 자.

파이몬은 그가 탐나기 시작했다.


‘이런 분이 우리 영지의 기사가 되어준다면······.’


그렇다면 점점 기울어가는 가문도 부흥하게 될 터.

어떻게 해서든 가문에 포섭하여 영지의 기사로 만들고 싶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이던 파이몬이 그제야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럼 한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할 말이오.”


파이몬은 본인이 머물고 있다던 여관을 안내하면서도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귀족이었소?”

“하하, 귀족이라기보단 기사 가문입니다. 작은 마을 세 개 정도를 관리하는 작은 영지죠.”


그의 이야기는 제법 들어줄 만했다.

기사 가문의 서자로 태어나 행복한 유년기를 보낸 생활.

아버지를 따라 기사의 길을 걷게 된 이유.

가문을 부흥하기 위해 성지 순례를 목적으로 출가한 일.


“혹시 멜킨스를 순례하시고 다음 목적지를 정해놓으셨습니까?”

“아직은 생각해 두지 않았소.”

“그렇다면 저희 영지에 한 번 들러······.”

“니콜라스 주교님이다!”


그때, 관중들 사이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널따란 광장.

정갈한 차림의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행차는 수많은 사람을 끌어모았다.

단단히 무장한 성기사들이 그 주변을 호위하며 몰려드는 인파들을 통제했다.


“오, 기적의 산증인이시여!”

“기적의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주교님!”


순례자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기적께서 그대들을 굽어살피시길.”


그 열렬한 환대에 니콜라스 주교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흑흑. 으아앙! 니콜라스 주교님!”

“무슨 일이니, 꼬마야.”


어린 여자아이가 슬피 울면서 나타났다.

성기사들이 이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니콜라스 주교가 만류했다.

그는 무릎을 굽혀 그 여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노리가 안 움직여요. 흑흑.”

“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여자아이가 내민 두 손엔 파랑새가 죽어있었다.

부러진 날개와 생기 없는 눈동자.

들고양이한테 물렸는지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많이 슬프겠구나.”

“흑흑. 맞아요. 다시 노리랑 놀고 싶어요.”

“기적께선 언제나 우리와 함께한단다.”


니콜라스 주교가 그 위로 손을 포갰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붉은색 빛이 손끝에서 흘러나오더니 여자아이의 손을 감쌌다.


“노리!”


니콜라스 주교가 손을 거두자 파랑새가 되살아났다.

여자아이는 파랑새에 볼을 비비며 방방 날뛰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맙소사! 니콜라스 주교님은 진짜 기적의 대리인이다!”

“기적이 구원의 교단과 함께 한다!”

“구원이여! 영원하라!”


뜨거운 열기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파이몬 또한 상기된 얼굴로 성호를 긋고 있었다.

로드릭은 흥분한 사람들 틈에 숨어 조용히 숨을 죽였다.

서늘한 회색 눈동자가 니콜라스를 좇았다.


**


다음날.

파이몬이 말한 여관은 훌륭했다.

잠자리도 불편하지 않았고, 뜨거운 물로 목욕까지 할 수 있어 더할 나위가 없었다.


아침 식사 또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따뜻한 옥수수 수프, 아침에 젖소에게서 갓 짠 우유와 부드러운 보리빵이 나왔다.


이 정도면 지금까지 본 여관 중 최고였다.

로드릭은 멜킨스에 다시 볼 일이 생긴다면, 이 여관에서 머물자고 결심했다.


“가시는 겁니까?”

“고마웠소.”

“순례 일이 오늘로 정해졌다면서요?”

“운이 좋았지.”

“저는 아마 열흘은 더 걸릴 것 같군요. 로드릭 씨와 더 얘기를 나누지 못한다는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파이몬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순례일이 정해질 때까지, 친분을 쌓아 그의 영지로 동행할 예정이었건만.

그 계획이 무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잘 있으시오.”


로드릭은 여관을 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멜킨스는 활기찬 기색을 띠고 있었다.

미리 나와 있던 경비대장 로버트가 반갑게 맞았다.


“이쪽으로 오시오.”


로드릭은 그를 뒤따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구원의 교단은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듬성듬성 있던 사람들이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행렬을 이루었다.


“어제 보았소? 니콜라스 주교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소.”

“죽은 새를 살렸다면서?”

“성지 순례를 돌며 죽은 자들을 살렸다는 것이 사실이었어!”


순례자들은 격한 태도로 떠들어댔다.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구원의 교단에 다다르자 인원을 분류하던 성직자가 보였다.


“오. 로버트 경. 기적이 그대와 함께하길. 여기는 무슨 일이오?”

“기적이 그대와 함께하길. 혹시 오늘 진행될 행사에서 자리가 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흠?”


성직자가 눈썹을 치켜 올랐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요?”

“여기 이자는 제 지인인데 내일 중으로 급히 돌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구원의 교단을 순례하러 왔다가 빈손으로 가게 생겼죠.”

“허. 그래서 자리 하나를 만들어 달라?”

“부탁드립니다.”

“자네가 이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구만.”


성직자의 눈초리가 로드릭을 훑었다.


“원래라면 안 되지만··· 로버트 경을 봐서라도 들어드려야지.”

“감사합니다. 마이한 사제님.”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로드릭이오.”


마이한이라 불린 사제는 기다란 양피지에 이름을 새겼다.


“그럼 난 가보도록 하겠소.”

“고맙소.”

“훗. 기적이 그대와 함께하길.”


경비대장 로버트가 성호를 그었다.

멀어져 가는 등을 바라보던 로드릭이 고개를 돌렸다.


“따라오시오.”


마이한 사제가 로드릭을 교단 안쪽으로 이끌었다.

거대한 문이 열리자 통곡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통고의 성모시여! 우리의 죄를 짊어주소서!”


한 순례자가 여신상 앞에서 자해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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