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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P9 님의 서재입니다.

게임 속 방랑 성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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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P9
작품등록일 :
2021.02.26 22:37
최근연재일 :
2021.03.13 23:55
연재수 :
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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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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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글자수 :
89,395

작성
21.02.26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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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화

DUMMY

오늘따라 퇴근하는 몸놀림이 가벼웠다.

매일 상사가 주는 스트레스도, 중간 관리직이라 겪는 비애도 오늘만큼은 견딜만했다.

새로운 확장팩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둘러 집에 도착해서 들뜬 마음으로 게임기의 전원을 켰다.


검은 성전.

신에게 사명을 부여받은 플레이어가 묵시록의 예언을 막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난다.

나는 그 이야기에 매료되어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피곤함에 찌들어 출근하다가 지각을 면치 못한 날도 많았었다.

6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할 사람만 남아버린 고인물 게임이 되었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설치를 진행하는 동안, 추가 사항들을 샅샅이 훑어봤다.

그중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는 문구가 있었다.


- 신규 직업 ‘성전사’를 추가했습니다!

- 성전사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타고난 육체를 바탕으로 부정하고 타락한 존재들을 쓸어버립니다.

- 성전사는 아군을 보호하며 어둠 속에서 희망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 성전사의 위세 앞에 신을 등진 자들은 결코 제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 성전사의 고결한 정신은 악마의 유혹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기쁜 마음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안 그래도 다른 직업들은 모두 만렙을 찍어서 할 게 없었으니까.

신규 직업 추가 업데이트 소식은 다시 한번 내 마음에 불을 지폈다.


[설치가 완료되었습니다.]


게임에 접속하자 음울한 음악 소리가 들리며, 전체적으로 칙칙한 배경 화면이 나타났다.

곧장 캐릭터 생성 버튼을 눌러 신규 직업을 골랐다.


[기적이 그대와 함께할 것이오.]


성전사는 성능 면에서 전반적으로 균형 잡힌 직업이었다.

초반 능력치도 다른 직업에 비해 모난 부분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았다.

육성하는데 큰 까탈스러움은 없을 것 같았다.


더듬거리며 대충 멋들어지게 외형을 설정하자, 호쾌하게 적들의 대가리를 쪼개버릴 상남자 스타일이 만들어졌다.

굉장히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다.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당연한 소리를.

나는 머릿속으로 최적의 육성 루트를 그리며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성전사 프롤로그가 흘러나왔다.


[교황을 폐위하라!]


웅장하고 호화스러운 알현실.


그곳을 가득 채우는 필사의 함성.


칼을 머리 높이 들어 올리며, 황금 옥좌를 향해 돌진하는 비장한 분위기의 성전사들.


옥좌에 앉아 교활하게 웃는 교황.


그리고 암전하는 시야.


.

.

.


정신을 차려보니 난 시체 더미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교단 자체가 배교도로 몰려 몰살당한 와중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최후의 성전사.


그게 바로 나였다.


시발.


**


“흑흑.”


마을의 꼬마 숙녀 로라는 울었다.

엄마가 마녀였기 때문이다.

친절하고 자상했던 마을 사람들은 순식간에 나쁜 사람들로 돌변했다.


“저리 꺼져! 우리 엄마가 너랑 놀지 말라고 했어!”

“도망가자! 우리한테 사악한 저주를 걸지도 몰라!”

“가까이 오지 마!”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놀았던 마을 아이들은 돌을 던졌다.

살갗이 까지고 피부에 멍이 들었다.

피가 나가 시작했다.

로라는 아프고 서러웠다.


어린애들을 말려야 할 어른들은 마녀재판에 참석했다.

아니, 그들이 있었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이미 로라는 마녀의 딸로 낙인 찍혔으니까.

되려 아이들에게 잘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어린 로라는 어찌할 줄을 몰라 몸을 웅크리며 엉엉 주저앉았다.

누군가 동화 속의 왕자님처럼 나타나 도와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으악!”


로라에게 발길질을 하던 아이가 허공을 날았다.

흙먼지에 구른 아이는 치밀어 오르는 격통에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으으··· 엄마아아아!”


다른 아이들은 머리 위로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에 고개를 돌렸다.


“아저씬 뭐, 뭐야!”

“아파요! 하지 마세요!”

“아악!”


로라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었다.

왕자님이 나타났다.

아니, 잘생기고 멋진 왕자님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머리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아이들을 패고 있었다.

로라가 보기에 저 사람은 왕자보다 공주님을 괴롭히는 야수가 어울렸다.

돌을 던지던 아이는 팔이 부러졌고, 로라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던 아이는 코피를 흘렸다.

로라와 로라의 엄마를 욕 한 아이는 입술이 터졌다.


남자는 자비가 없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

아이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도망쳤다.

마을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자 남자가 주먹질을 멈췄다.

그리곤 로라를 돌아봤다.

로라는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


“때리지 마세요······.”

“마을 사람들은 어디 있지?”


남자가 무뚝뚝한 얼굴로 물었다.

로라는 피멍이 들어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서쪽을 가리켰다.


“내가 이곳 지리를 잘 몰라서 말이야. 안내해 줄 수 있니?”


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하면 다른 아이들처럼 때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자.”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로라는 그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투박하고 거친 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따스하기만 했다.


**


“지금부터 메리가 마녀인지 아닌지 판단하겠소!”


달리아 신부가 마을 사람들에게 외쳤다.

그들은 작은 호수에 모여 있었다.


“메리가 마녀였다니!”

“시발. 하마터면 마녀의 농간에 놀아날 뻔했군!”

“지금까지 우리를 잘도 속이고 있었구나!”


마을 사람들은 흉흉한 얼굴로 여성에게 침을 뱉었다.

여성은 쇠사슬로 꽁꽁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흑흑. 전 마녀가 아니에요.”

“달리아 신부님! 마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 간사한 혀를 잘라내야 합니다!”

“기다리시오. 저년이 마녀인지 아닌지 기적께서 판단해 주실 겁니다!”


달리아 신부가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마녀는 하늘을 날기 때문에 몸이 가볍지. 만약 진짜 마녀라면 물에 빠졌을 때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오!”

“만약 가라앉으면요?”

“마녀의 술수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오! 마녀는 자기의 몸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을 테니! 확신이 설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야 하오!"

“오오, 달리아 신부님! 기적의 이름으로 마을에 해악을 끼칠 마녀를 심판해 주십시오!"


메리는 억울하면서도 집에서 울고 있을 로라가 생각났다.


오늘도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딸 로라에게 먹일 수프를 끓였다.

로라의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마을에 없었다.

순례의 길을 걷는다며 마을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후로 벌써 십 년이 지났다.

순례를 떠난 남편은 감감무소식.

메리는 남편에 대한 걱정을 접어두고 태어난 로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매일 밤 그이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갑자기 달리아 신부가 집에 들이닥치면서 평화가 깨졌다.

메리는 절대 자기는 마녀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달리아 신부님! 어서 마녀를 심문하십시오!”


마을 사람들이 달리아 신부를 재촉했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메리를 쳐다봤다.

마녀라고 확신하는 듯한 태도였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달리아 신부님은 왜 자신을 마녀라고 하는 것인가.

메리는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자, 자넨 누군가?”

“외지인이 함부로 우리 마을의 일에 관여하지 말게!”


그때, 뒤에서 마녀재판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무슨 일이오?”


달리아 신부가 의아한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을 돌아봤다.

성인 남자보다 머리가 하나 더 큰 사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몸집도 어마어마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기세에 눌려 자리를 비켜주고 말았다.

홍해가 갈라지듯 길이 열렸다.


“엄마!”

“로라!”


남자는 로라의 손을 꼭 쥔 채 천천히 메리 쪽으로 다가왔다.

달리아 신부가 그 앞길을 막았다.


“멈추시오! 지금 기적의 이름으로 신성한 재판을 진행 중이오!”


남자의 무기질적인 회색 눈동자가 달리아 신부를 향했다.

등골을 타고 내려오는 오싹한 기분.

머리까진 쓴 로브 때문에 음영이 드리워져 더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는 불현듯 죽음을 떠올렸다.


“만약 재판을 방해하려 한다면 기적의 천벌을 받을······!”


서걱!


“꺄아악!”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달리아 신부의 목이 반쯤 덜렁거렸기 때문이었다.

피거품을 물던 그는 갸우뚱거리더니 호수에 빠져버렸다.


“이게 무슨 짓이오!”

“외지인이 달리아 신부님을 죽였다!”

“마녀가 저 남자를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하오!”


그들은 저 남자가 마녀한테 조종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달리아 신부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메리가 마녀라는 걸 확신하게 해줬으니.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저마다 무기를 들었다.


“자, 잠깐! 저길 봐!”


마을 사람 몇몇이 다른 곳에 관심을 가졌다.

호수 위로 뽀글뽀글 거품이 올라왔다.

혹시 아직 달리아 신부가 살아있지 않을까 하고, 희망적인 관측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저게 뭐야!”


그들의 생각을 배신하듯이 호수에서 괴물이 튀어 올랐다.

그런데 그 외형은 누군가와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달리아 신부님?”

“크르륵······.”


달리아 신부가 으르렁거렸다.

앞으로 길게 튀어나온 입.

붉은 피부.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파충류의 눈동자.

등 뒤로 딱딱하게 솟아난 꼬리.

마치 악어와도 같은 모습.

붉은 눈동자가 뒤룩뒤룩 구르다가 가까이 있던 마을 사람의 팔을 물어뜯었다.


“으아악!”


뾰족한 수십 개의 이빨이 단숨에 팔을 절단했다.

한쪽 팔을 잃은 남자가 어깨를 부여잡으며 바닥을 뒹굴렀다.

달리아 신부는 입 속에 넣은 팔을 으적으적 씹었다.

인육을 맛본 그의 눈은 반달처럼 곱게 휘어졌다.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다!”


혼비백산한 마을 사람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메리도 악마의 마수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온몸이 묶여 움직일 수 없었다.


“로라! 너라도 어서 도망치렴!”

“싫어! 엄마랑 같이 있을 거야!”


메리가 엄마의 품에 꼭 안겼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모녀를 발견한 달리아 신부가 괴성을 내지르며 네발로 뛰어왔다.

로라는 메리를 감싸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가 그 중간에 끼어들었다.

달리아 신부는 앞을 가로막는 인간의 목을 뜯어먹기 위해 아가리를 벌렸다.


사각-!


그러기도 전에 남자의 칼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달려오던 악어의 머리가 단숨에 잘려 나갔다.

잘린 단면 위로 붉은 분수가 솟구쳤다.

목을 잃은 몸이 휘청거리다가 호수 밑으로 가라앉았다.

남자는 들어오는 경험치에 놈이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아 신부가 악마였다니······.”


마을 사람들이 허망한 눈빛으로 호수에 둥둥 떠다니는 목을 바라봤다.

남자는 칼을 몇 번 휘둘러 메리를 묶은 쇠사슬을 풀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나 받으시오.”


남자가 품속에서 피 묻은 편지를 전했다.

메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았다.


“이, 이건!”

“엄마. 그게 뭐야?”


로라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메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편지에 쓰인 이름을 확인했다.

도리스. 남편의 이름이 쓰인 편지.

그녀는 황급히 편지지를 뜯어 편지를 읽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남자는 몸을 돌려 떠나갈 채비를 하였다.


[레벨이 상승했다.]


퀘스트는 끝이 났다.

더 이상 이 마을에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등 뒤로 여성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좆같은 세상이야.'


쓴웃음을 지은 남자가 다음 여정을 위하여 마을을 떠났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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