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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람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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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람
작품등록일 :
2016.08.28 23:34
최근연재일 :
2016.09.0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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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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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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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02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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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지도자와의 만남 - 제 4화

DUMMY

그랬다.

황학동 풍물시장에서 이만 원을 주고 산,

이 고물 라디오가 뱉어냈던 황량한 사건이.

이제 눈앞에 현실이 돼서 나타난 것이다.


한성의 말대로, 수천억 분의 1의 확률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고.


태일은 방으로 들어와 라디오 앞에 다시 앉아,

책상위의 라디오를 들여다봤다.


1미터는 됨직한, 긴 로드 안테나를 외뿔처럼 달고,

고물 라디오는 그곳에 버티고 있었다.


태일은 독백했다.

“넌 요물단지야.

넌 내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거니?

넌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니? “


라디오는 대답이 없었다.

피곤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양팔을 머리 뒤로 돌린 채 눈을 감았다.

경기장 관중석에서 꿈틀대던 욱일 승천기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포연이 자욱했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미군의 포격은 쌓아놓았던

일본군 토치카를 부수고, 미 해병대는 산을 둘러싼 채

포위망을 좁혀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학도병으로 끌려온 전태일은, 다카키 중위가 이끄는,

살아남은 서른명의 대원들과 함께,

바다를 마주한 정상 절벽위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군복을 입고 있었고,

총알이 없는 빈총을 들고 있었다.


탄약은 바닥이 났고, 미군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오고 있었다.


다카키 중위가 외쳤다.

“우리는 패했다.

이 자리에 앉아서 패잔병의 모습으로

최후를 맞을 수는 없다!

절벽에 투신하여 황군으로서의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다! “


그들은 옥쇄를 택했다.


그리고 일제히 바다를 향해 절벽에서

몸을 던진다.


서른 개의 몸뚱아리가 허공에 일직선을 그으며 내려와,

절벽 밑, 바위에 부딪친다.


그리고 바다는 핏빛의 파도로 그들의 몸을 덮었다.


태일은 그들과 함께 뛰어내리지 못했다.

“난, 난 죽을 수 없어!”


다카키 중위가 물었다.

“조센징! 옥쇄를 거부하는가?”

“안 돼! 난 죽을 수 없어. 이건 무모한 짓이야! “

“개새끼! 조센징은 황군이 될 수 없어!”


그는 왼손에 욱일기를 든 채,

오른손으로 일본도를 빼들고 태일 앞으로 다가선다.


“도망쳐야 하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주저앉은 태일 앞으로 다가선 다카키는.

왼손에 들고 있던 깃발을 태일에게 내던졌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태일의 얼굴을 덮은,

젖은 욱일기가 눈과 코를 막았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다.

다카키는 두 손으로 일본도를 잡고 한껏 위로 치켜들었다.

일본도가 태일의 얼굴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악!”


태일은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아침 먹자.”

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을 먹으며,

TV는 어젯밤의 오물 투척 사건을 계속해서 내보내고 있었다.

“재특회 소속의 일본인 ‘구로다 다카하시’ 는 ......”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다.

“김시진 의원입니다.

10시에 같은 장소에서 뵙지요. “


태일은 녹음 내용이 담긴 USB를 갖고,

국회 도서관 구내식당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김시진과 다시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오늘은 제가 커피를 사지요.”

김시진은 일어나 커피 두 잔을 뽑아들고 자리에 앉았다.

태일은 입을 다문 채 그가 먼저 말하길 기다렸다.


“일본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김시진은 엉뚱한 방향에서 이야기를 풀고 있었다.


“그냥 일반사람들이 알고 있는 정도지요.

그저 막연한 적대감 같은 게 있다고 할까요? “


“전 오랫동안 일본에 있었습니다.

그들을 잘 알지요.


그 사람들은 개인의 존재감 보다는 대의에 목숨을 겁니다.

그래서 명예를 소중히 여기지요. “


전태일이 말을 끊었다.

“그 대의란 게 뭐냐가 문제지요.”


“예, 그들의 대의는 자존심입니다.

그들이 속해있는 집단,

가족이던 조직이던, 나아가서 사회든 국가든,

그들이 숙명적으로 속하게 된 집단의 자존심입니다.

그 집단적 자존심이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우리가 그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패전 이후 잠들어있던 그들의 자존심이

이제 다시 왜곡된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첨병에 ‘재특회’가 있습니다. “


그는 논리가 정연했고, 사태를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김 의원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이상훈 대표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도와주시겠습니까? “


“그러겠습니다. 그분을 만나시면, 태일 씨가 하고 싶은 말을

주저 없이 모두 하십시오.

그분은 상대가 누구든지, 상대의 말을 들을 줄 아시는 분입니다.

약속이 잡히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길지 않은 대화였지만, 김시진은 호감이 가는 남자였다.

잘생긴 외모도 그러려니와, 그의 맑은 목소리와 차분한 태도는, 상대로 하여금 그의 말을 경청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틀 후, 전태일은 성수동 자택에서 김시진 의원과 함께 이상훈 대표를 만날 수 있었다.


성수동 주택가에 위치한 이상훈 후보의 자택은,

80평이 조금 더 되어 보이는 대지에, 구식 양옥으로 지은 단층주택이었다.


앞마당의 작은 정원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한켠에 가꾸어 놓은 작은 텃밭에는, 여름 햇볕에 고추가 익어가고 있었다.


부인, 임선옥 여사는 우리를 거실로 안내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대표님께서 나오십니다. “

얼굴에 환한 미소로 손님을 맞은 임 여사는 주방으로 가, 손수 차를 끓여 내왔다.


“저희 시골서 딴 유자로 직접 담근 차입니다.

시중에서 파는 것 보다는 향기가 좋아요. “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 대표의 부인은,

가는 몸에 새치가 많은 회색의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고,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고운 피부를 갖고 있었다.


잠시 후 서재에서 이 대표가 거실로 나왔다.

난 소파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편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어, 집으로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스물여덟 살의 낯선 청년에게, 이 남자는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김시진 의원으로부터 대충 얘기를 들었습니다.

내용의 가능성보다도 젊은 분의 진정한 접근방식에 호감을 느꼈지요. 이제, 제게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시지요. “


태일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예, 먼저 보잘 것 없는 저에게 어려운 시간을 내어주신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내년 대선을 통한 정권 교체를 위해, 이 대표님께 기대를 걸고 있는 평범한 한국인중 한사람입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치를 떠나, 세상이 바뀌기를 원하고 있지요.


풍요롭지는 않아도, 풋풋한, 사람 사는 세상을 원한다는 겁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이 원하는 직장을 잡아 급여를 쪼개 저축을 하고, 저축을 모아 결혼해서 작은 아파트를 장만해 가정을 꾸리는 꿈을 꿉니다.


정권연장을 위한 부의 편중으로, 바닥으로 내 몰린 국민들은 자괴감에 몸부림 쳐보지만, 갖은자를 위한 사회구조 속에서 한계를 느끼고 절망합니다.


지금 그들의 절망 속에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그건 이상훈 대표님입니다.


그들 중 하나인 제가, 어느 날 우연히 대표님의 신상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


이 대표는 이 젊은이의 말을 통해,

자신이 국민들과 마주앉아, 국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국민들에게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불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건 정부의 경제 정책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개혁으로 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상충된 개념입니다.

지난 정권은 권력연장을 위한 수단으로 재벌을 키웠습니다. 저급한 자본주의의 롤 모델을 따라간 것이지요.


그건 전후 복구를 위한 한시적 방편일 뿐,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독버섯 같은 것이었지요.


자본주의는 부의 편중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이 어느 선을 넘게 되면, 사회는 몰락하게 되지요.

다시 봉건주의로 돌아가는 겁니다.

경제적 봉건주의지요.

0.01%의 재벌이 99.99%의 국민을, 자본으로 지배하여 노예처럼 부리게 됩니다. “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친일 청산이 자본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한국 자본주의 발달과정의 근간은 친일세력입니다.

그들이 권력과 결탁해서, 자본을 무기로 새로운 정권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형성된 재벌은 정권에게 자본을 통해 권력을 주고, 권력은 다시 재벌에게 자본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 가운데에 국민이 있습니다.

이 권력과 재벌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 친일 청산입니다. “


그는 이 낯선 젊은 청년에게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성의껏 얘기하고 있었다.

태일이 질문했고 이 대표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이제 나를 찾아온 용건을 말해 보세요.”


태일은 명료하게 말했다.

“전 일본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재특회’란 단체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알고 있고, 우리는 저들을 모릅니다.

그게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나서, 2017년 대선에서, 이 대표님을 쏜 ‘구로다’를 찾을 겁니다.


그들의 목표가, 과연 이 대표님을 제거하는 것으로 끝나는 건지,

아니면 더 큰 목적이 있는 건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


“내가 도울 일은 뭔가?”

“도와 주셔야합니다. 혼자서는 못합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


한동안 이상훈의 눈은 전태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이 전태일이라고 했나?”

“예, 전태일입니다.”


“가게. 가서 그들을 알아보게.

하지만 그림을 크게 그려야 하네.

재특회만 알아서는 안 되지.

그들과의 연결고리가 중요하다는 거네.


일본 자민당이 어디까지 그들과 연계되어 있는지, 그들의 진정한 목표가 어디까지 인지를 알아봐 주게. “


“명심하겠습니다.”


“돌아가게. 곧 김 의원이 연락 할 걸세.”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태일은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이 대표의 집을 나왔다.


전태일이 나가고 이상훈은 김시진에게 말했다.

“그 친구, 내 어렸을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자네 생각은 어떤가? “


김시진은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한일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면 한국의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한국을 연구해 왔지요.

현재 일본 내 한국 전문 연구기관만 200개가 넘습니다.

반면 우리는 기껏해야 몇몇 대학 교수들이 고작이지요.

그리고 그들 중 70%가 친일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암울한 일이지!”


“제가 그를 돕겠습니다.

대표님께서는 뒤에서 지원해 주십시오. “


“자네는 일본통이지. 하지만 자네는 국회의원이야.

자네가 전면에 나서면 외교문제를 일으킬 수 있어.

그 젊은 친구를 통해 민간 차원에서 일을 추진해보게. “


“계획서를 올리겠습니다.”


그날 저녁, 태일은 라디오에서 가까스로 미래의 전파를 잡을 수 있었다.


“오늘 새벽 4시에 이상훈 후보가 운명하셨는데요,

이렇게 되면, 이틀 앞으로 다가온 선거는 여당 후보인,

‘김택수 후보의 독주가 예상되지 않겠습니까? “


패널이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정권교체를 기대했던 야당과 지지자들에겐 절망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선거가 이틀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후보를 내세울 수도 없는 것이고요,

한편엔 여러 가지 음모설도 난무하고 있습니다. “


“......, ......”


라디오 소리는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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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권의 심장 속으로 -제 6화 +2 16.09.05 321 1 11쪽
5 소리새의 탄생 - 제 5화 +4 16.09.04 338 7 12쪽
» 지도자와의 만남 - 제 4화 +4 16.09.02 461 8 12쪽
3 벌어진 사건 -제 3화 +4 16.08.31 483 6 10쪽
2 사건의 전개 - 제 2화 +2 16.08.30 539 7 11쪽
1 시공간을 넘어온 라디오 전파 - 제 1화 +6 16.08.28 1,032 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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