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서재

아리아 - 괴물이 된 아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알리야
작품등록일 :
2020.05.11 22:38
최근연재일 :
2021.07.05 21:55
연재수 :
204 회
조회수 :
8,383
추천수 :
145
글자수 :
1,045,763

작성
20.05.12 23:30
조회
64
추천
3
글자
10쪽

'너와 나' 이야기 -3-

DUMMY

[???년, ??월 ??일, ??시 ??분, 아르타니아 서쪽 평원, 앱솔 광장(아리아)]


옛날, 누군가가 불타는 저택으로 홀로 뛰어 들었을 때였다. 나 역시 한 사람을, 나의 친구를 구하기 위해 불길로 뛰어 들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셰일즈는 달랐다. 셰일즈는 뛰어들려는 나를 붙잡았다. 더욱 넓은 그림을 본 거다. 누군가가 불타는 저택으로 뛰어든 순간, 그가 나의 친구를 구한 순간. 두 사람은 불길과 함께 사라졌다. 그때 셰일즈는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놓으라고 소리치는 나를 끝까지 붙잡았다. 안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 무너져내리는 내 심장과 뇌의 조각 하나하나. 불타오르는 눈물. 크게 열린 공허한 동공까지. 하지만 넌 끝까지 이성적이었다.


내가 너를 원망하게 되었을 때도. 너는 설명 대신 사과를 했다. 설명해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건 알기에. 내게 필요한 것은 위로였다는 걸 알기에. 그게 합리적이니까. 너는 나의 끊어진 이성을 묶었다. 심장과 뇌를 퍼즐처럼 맞춰 놓았다. 타오르는 눈물에 흙을 덮는 것이 너의 역할이란 것을 알았다. 너는... 너 역시 상처 받았으면서. 가슴 속에도 검붉은 앙금이 남았으면서. 너 역시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으면서. 태연하게 그랬다.


“너라도 살아야 해.”


너는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라도 지키는 것을 택했다. 딜레마였다. 나의 마음을 구하고 내 목숨을 버리느냐. 목숨을 구하고 마음을 부수느냐. 셰일즈의 선택은 후자였다.


결국, 두 사람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살았다. 사실 셰일즈에게 구원받은 거였다.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때의 나라면. 아니, 지금의 나라도 해도 그 불길로 뛰어들었을 테니. 그렇기에 너의 이성적인 모습. 너를 언제나 동경했었다. 네가 되고 싶었다. 네게 인정 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두렵다. 내가 동경하던 너의 그 모습 때문에 너를 잃게 될 까봐. 너에게 버림받을 까봐. 내가 동경하는 그 부분에게 철저하게 짓밟히게 될 까봐. 한번 짓밟히면 다신 일어서지 못하는 ‘인간’처럼. 잡초보다 못난 ‘인간’처럼.


종탑은 겉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낡아 보인다. 특별히 무너진 곳은 없다. 금이 간 곳이라면 모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방 무너질 것만 같은 위태로움이 서려 있었다. 벽 틈 사이의 이끼 때문일까. 분위기가 그랬다.


종탑 앞에 멈춰 서서 옷매무새를 바로한다. 의미 없는 행동이지만 왜인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와서. 정치적인 자리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왜인지 긴장으로 떨린다. 가슴에선 무언가 올라오려고 한다. 붉은 것이.


오는 길엔 우물이 있었기에 물을 받고 한 차례 몸을 씻어냈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태연하게 자기관리라니 웃길 지도 모르겠지만, 아까와 같은 불상사를 더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온몸이 굳은 피로 덮여 있었으니, 내 몸을 움직이기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고, 기회가 있을 때 씻어두고 싶었다. 덕분에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모든 것이 다 젖었다. 찝찝하고 불쾌한 감정이 떠오를까 싶었지만, 혹시나가 역시나,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무 문이 비명을 지른다. 살짝 밀었을 뿐이다. 한참을 쓰지 않은 것일까. 애초에 맞지 않는 문을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인가. 여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종탑 내부로 발을 내딛는다. 문은 조금 뜯겨져 있었지만 안쪽에 시체는 없다.


종탑의 1층 바닥. 풀이 꽤나 무성하게 자라 있다. 누군가 밟고 지나간 흔적은 없다. 네가 오지 않은 걸까? 마음 한편이 씁쓸하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발을 앞으로 딛는다.

계단 첫 머리에 발이 닿는다. 계단 가장자리가 부스럭 거리며 자기 몸의 일부를 때어낸다. 흙먼지도 함께 일어난다.


그런데, 내가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문득 회의감이 든다. 이곳에 올라간다고 해서 너를 찾을 수 있을까? 이렇게 넓은 지역에서? 분명 고지대에서 너를 찾아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온 거다. 아. 어느새 바뀐 모양이다. 고지대에서 그를 찾길 바란 것이 아닌, 이곳 꼭대기에서 네가 기다리길 바란 모양이다. 그렇지만 주변의 무흔이 남겨주듯 너는 여기 없다. 아니, 없을 것이다.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기로다. 올라가느냐 마느냐. 실낱 같은 희망을 위해 올라가야 할까. 아니면 에너지 소비를 막기 위해 올라가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 합리, 이성, 정상은 날 더러 내려오라고 말한다. 하지만...


희망. 언제부터 내가 희망 같은 거에 기대었다고. 그런데...


몸은 어느새 두번째 계단을 오르고 있다.


그래. 가끔은 ‘나’보다 몸이 더 솔직하니까.


한 걸음. 한 걸음.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올라가는 거야. 그렇게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희망 앞에 닿겠지. 언젠가.


갈라진 벽돌 틈새, 희미한 주홍빛이 새어 들어온다. 초원... 이 도시는 새벽 어둠이 드리운다. 길은 불길로 인해 볼 수 있다. 그랬었다. 인간의 불. 하지만 이 빛은 끔찍한 화염이 내보내는 빛이 아니다. 좀 더 거대한 불빛. 어느새 일출이 시작되고 있다. 벽 틈 사이로 태양을 바라본다. 틈새가 작아서 잘 보이진 않는다. 그럼에도 알 수 있다. 분명 적색 태양이 이글거리며 떠오르고 있다.


태양 주변으로 V자 모양의 선이 보인다. 아지랑이에 젖어 흔들리지만, 저것은 분명 새 때다. 새 때가 이곳을 향해 날아 오고 있다. 이곳이 어떤 지 본다면 저들은 어떤 느낌이 들까. 황폐화된 이곳을 보며 어떤 기분이 들까. 답은 모른다. 나는 ‘겪은 사람’이고 저들은 ‘보기만 하는 새’에 불과 하니까. 만일 비참함이라든지 뭐라든지. 부정적인 감정을 떠올릴 수 있다면 저들은 최대한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도 눈이 있고, 뇌가 있으니.


어느새 원형 계단의 막바지에 다다른다. 위쪽엔 사각형으로 뚫린 하얀 구멍, 거기서 이어지는 사다리가, 그리고 그 앞에 계단의 끝이 놓여 있다. 하나, 둘, 셋, 넷. 마지막까지 계단을 오른다. 폐에선 가늘게 빠져나가는 숨소리가, 위쪽의 구멍에선 시원한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나름대로 높은 종탑이었던 것을 생각하니, 젖은 몸으로 저곳에 올라간다면 꽤나 추울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죽진 않겠지. 가을에 저체온증으로 죽다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사다리에 손을 얹는다. 고동색 계열의 나무 재질인 사다리. 구태여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아도 군데 군데 썩은 곳이 눈에 띈다. 설마하니 올라가다가 무너질까 두려웠지만, 여러번 힘을 주어 보니 제법 튼튼한 사다리다. 이젠 어느정도 안심이 된다. 올라가서부터는 앞으로 있을 일들에 각오를 다지며 새로운 목표를 정해야 한다.


하얀 구멍이 가까워진다. 언제부터 저리도 밝게 빛났던 것일까. 세상이 하얗게 보여서, 구멍 위의 세계는 천국일 것만 같다. 종, 하얀색, 사다리, 높은 곳을 종합시키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은 천국 뿐이다.


천국. 이 위가 그런 세계였으면 좋겠어. 오색찬란한 구름이 내 몸을 받혀주는, 그런 꿈의 나라였으면. 등에 짊어진 무거운 악업을 모조리 내려놓고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죄책감이란 게 이런 것일까.


‘넌 이기적이야.’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자의식 과잉 등이겠지.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다시 구멍을 올려다 본다. 종루의 입구였지만, 차라리 천국의 입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그런데 갑자기 구멍에서 시커멓고 길쭉한 기둥 같은 것이 내려온다. 천국의 기둥인가? 천국으로 향하는 사다리? 애초에 왜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이건 검은 손이야. 지옥의 사자일 수도 있지. 지옥도 밝아. 위쪽에 있다고 천국이라고 생각한 거야? 우매하구나. 나.


끝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 이것. 분명 팔이다. 그리고 손이다. 문득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까의 팔. 내 손으로 묻어버린 주인 없는 팔. 하지만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봤을 때, 아. 그렇구나. 지금 이 손은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이다. 옷소매와 장갑 사이의 하얀 피부. 혈관이 움찔 거리고, 손 끝이 떨리는 것이 보인다. 즉 저승은 아니라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손은 천국의 사자가 내민 손일까. 아니면... 그것도 아니라면...


“얼른 잡아. 멍청아. 팔 빠지겠다.”


그래. 종탑 위의 세계는 역시나 천국이다.


“셰일즈.”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그 이름을 부르자, 하얀 구멍이 차츰 눈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거대한 황동 종과 그 아래에 위태롭게 몸을 내밀고 있는 한 사람. 항상 시커멓게 입고 다니는 악질적인 옷차림. 귀찮음에 머리조차 자르지 않아, 눈썹을 전부 가리는 장발. 뒤로 묶은 머리카락, 손가락 하나가 모자란 오른손까지.


그 모자란 오른손을 굳게 잡는다. 서로의 심장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손바닥 사이에서 교환되도록. 너의 손에 남은 온기가 내 손에 전달되도록. 그리고 누군가에게 뻗은 손을 놓는 만큼 후회스런 짓을 하지 않도록.


“다녀왔어.”


오랫동안 못 한 인사를 건낸다. 심장이 떨려와.

곧 모자이크가 내 시야를 뒤덮는다.




작가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openobserver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 글 설정에 의해 댓글을 쓸 수 없습니다.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리아 - 괴물이 된 아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하루 휴재해요. 몸이 굉장히 안 좋아서요... 21.07.07 38 0 -
204 나름대로의 스타일로 21.07.05 32 0 10쪽
203 이해할 수 없는데 존중하라고? 21.07.02 25 0 10쪽
202 의외의 장소, 의외의 인물 21.06.11 27 0 7쪽
201 네가 조금이나마 안심하도록 21.06.09 32 0 7쪽
200 난 또 왜 이런 거야 21.06.07 34 0 8쪽
199 소원은 개뿔이 21.06.02 29 1 7쪽
198 오늘 기도할 걸 정했어 21.05.31 27 0 9쪽
197 듣고 잊든가, 기억하든가. 21.05.26 27 0 8쪽
196 바라는 이야기 -2- 21.05.12 27 0 9쪽
195 바라는 이야기 -1- 21.05.10 33 1 16쪽
194 들어가는 이야기 -9- 21.05.05 28 0 8쪽
193 들어가는 이야기 -8- 21.05.03 32 0 13쪽
192 들어가는 이야기 -7- 21.04.30 29 0 12쪽
191 들어가는 이야기 -6- 21.04.28 33 0 12쪽
190 들어가는 이야기 -5- 21.04.26 41 0 10쪽
189 들어가는 이야기 -4- 21.04.09 35 0 10쪽
188 들어가는 이야기 -3- 21.04.07 33 0 10쪽
187 들어가는 이야기 -2- 21.04.06 38 0 8쪽
186 들어가는 이야기 -1- 21.03.31 40 1 9쪽
185 불씨 이야기 -5- 21.03.29 60 0 9쪽
184 불씨 이야기 -4- 21.03.24 52 0 10쪽
183 불씨 이야기 -3- 21.03.22 47 2 9쪽
182 '빛깔' 이야기 -에필로그- 21.03.17 41 0 8쪽
181 '빛깔' 이야기 -13- 21.03.15 37 0 12쪽
180 '빛깔' 이야기 -12- 21.03.11 45 0 12쪽
179 '빛깔' 이야기 -11- 21.03.08 36 0 12쪽
178 '빛깔' 이야기 -10- 21.03.03 33 1 10쪽
177 '빛깔' 이야기 -9- 21.02.26 49 0 11쪽
176 '빛깔' 이야기 -8- 21.02.24 39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