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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ㅇ

아, 귀찮게 좀 하지 마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드라마

휴학생P
작품등록일 :
2020.05.14 19:41
최근연재일 :
2022.05.1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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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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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기사, 최선의 기사 (3)

안녕하세요~




DUMMY

“으흠... 이제야 보는 거지만 상당히 험한 꼴이군.”


화끈거리는 안면부에 손을 가져다댔다. 통증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느껴지는 위화감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스스로 볼 수는 없었지만 지금 란에게 보이는 모습은 처참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갑옷은 본래의 형태만 간신히 유지한 상태로 곳곳이 금이 가고 그을려 있었으며 부러진 칼날과 화살들이 한눈에 세기 힘들 정도로 꽂힌 상태였다.


“죽음에 이른 순간이 상당한 사연을 품고 있군. 뭐, 말 못하는 미물도 감정이라는 게 있을 진데 사연 없는 생명이 어디에 있겠냐만은.”


천천히 생각했다. 허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만 어딘가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공허했다.


“그래도 자아가 이 정도로 강하다는 건 긍정적이야. 그 손 좀 치워보지? 이상하게 파장이 겹치는군. 분석하기 힘들어.”


“보기에 역겨울 거라 생각됩니다. 은인에게 추한 꼴을 보일 수는...”


“씁,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람. 대체 뭔 상관이야.”


터업.


란은 주저하던 손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자 무형의 힘에 의해 손이 자연스레 내려갔다. 흐릿하게만 느껴지던 한쪽의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왜 그대들은 그렇게 외관에 신경을 쓰나 모르겠어. 정작 진짜 중요한 건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말이지. 그래서 몸의 상태는?”


할 말이 없다. 자연스레 고개가 떨궈진다.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망자가 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일단 네... 육체라고 하지. 아직까지는 표현할 방법이 없군. 결손을 파악해야 널 빼낸 의미가 완성이 된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의 대부분이 흐릿합니다. 뭔가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것들이 잡힐듯하지만 상조차 맺히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눈이 절로 찡그려질 정도로 무거운 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잊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좋은 기억이든, 안 좋은 기억이든 되찾고 싶습니다.”


란은 그런 반응을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봤다.


“흐음, 그대는 목숨을 살려준 은인에게 참으로 많은 걸 요구하는군? 원래 인간들은 그대처럼 자기중심적인 생물인가?”


순간적으로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는 상상 이상의 괴짜였다.


“그래도 앞으로 10년 정도는 될 거다.”


“무엇이 말입니까?”


“내가 얼추 이 대륙에 머무르려고 계획했던 시간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하찮은 짐승들도 죽음의 공포를 아는데 지성체의 정점이라고 여겨지는 드래곤은 그와는 너무나 상반된 초연한 반응을 보였다.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대는 내 종속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좋든, 싫든 앞으로 대륙을 누비게 되겠지.”


그 말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많은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겠군요.”


“그렇지 이해가 빠르군. 정말 드물지만 드래곤들도 간혹 기억의 소실을 겪고는 하지. 그래서 망각하지 않도록 기억을 저장하는 뭔가를 지정하고는 한다.”


“따르겠습니다.”


“그럼 일단 그 거추장스러운 육체부터 버리지. 그런 나약한 육신으로 날 따르기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만.”


란은 영혼을 담을 그릇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에고. 허나 명확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흐음. 이유는? 그런 넝마보다야 내가 조합해주는 육체가 훨씬 강할 거다. 실력이라면 믿어도 좋다. 다른 놈들은 천시하긴 하지만 나는 기술 쪽에도 관심이 많으니까.”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제 모습을 기억해줄 누군가가 아직 이 세계에 살아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기에 전 변할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그대들의 감정은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로 가득하군.”


“분명 란님에 비해서는 찰나의 시간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허나 그 시간이 저희에게는 전부입니다.”





◎◎◎◎◎





그로부터 정확히 9년의 시간이 지났다.


“오늘로 딱 10번째 성광의 달이 시작됩니다.”


“그래?”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검은색과 백색이 교묘하게 배합된 이 갑옷도 이제 없으면 어색할 정도였다.


“그간의 동행은 란님의 탐구욕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습니까?”


고룡의 탐구욕, 망자의 미련과 기억.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다행이군요.”


“지금의 그대의 실력이라면 내가 마나로 돌아가더라도 오롯이 설 수 있을 거야. 얼마 안 남았지만 이 드래곤 하트에 맹세하지.”


평범한 인간의 삶에서는 차고 넘칠 정도로 방대한 일대기였다.


“차원의 회랑에서 봤던 거대한 짐승은 아직도 기억에서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루반나의 번견을 말하는 건가? 의외로군. 그래도 기사라고 생각했는데 검에 대한 기억은 뭐 없나?”


“글쎄요... 아, 산맥을 넘어 갔을 때 겨뤘던 동영의 야차왕 정도? 연구 때문에 겨루기야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넘어가신 겁니까?”


“함구하도록 하지. 아직 이 대륙에 동영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으니.”


어렴풋이 짐작은 가고 있었다. 갑자기 이야기를 푸는 걸 보니 이번 여행이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가장 거대한 기록을 위한 마지막 시간.


“다음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그가 등진 산맥을 타고 돌개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뭔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마지막은 늘 하나였어.”


“아신위를 찾아다니며 자웅을 겨루고, 대륙을 발아래에 두는 여행의 종착점이라...”


“용왕.”


“...그게 무슨?”


그간의 여행에서 본 게 있었다. 대륙의 존재들 중에서도 나름 대륙의 이면에 대해서 많은 걸 알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허나 그 두 글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태초의 용. 신에게 직접 격을 받았다는 어떤 의미로는 진정한 용. 그를 만나는 것으로 내 탐구심을 마무리할 거다.”


“정보는 있습니까? 뭐라도 짚이는 구석이 있으시기에 찾는다는 말을 하시는 거 아닙니까?”


자그마치 10년에 가까워오는 시간이었다.


“잊힌 존재를 만나려면 잊힌 땅으로 가야겠지. 우리는 고원으로 간다.”


이제 대륙은 굳이 지도를 펼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확 꿰고 있었다. 고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지형은 몇몇 짚이는 곳이 있었지만 그가 말하는 고원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의 생각을 공유했다.


“이곳. 우리는 이곳으로 간다.”


이방의 신들이 이 땅에 자리를 잡기 이전에.

천재라고 불리운 한 소년이 이 땅에 빛을 내기 이전에.

그러니까 아주 오래된, 기억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 ◎ ◎ ◎ ◎






“...이야기이다. 엥? 뭐야? 왜 뒷내용이 없는 거지?”


아직 상당히 두꺼운 분량이 남아있었음에도 뒷 페이지는 아무런 기록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책을 덮자 책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조사를 제외하고 단어 자체는 해석이 불가능한 글리프의 조합이었다.


『포네르 엔 오르비돈』


“흠... 처음 보는 문자네.”


“그 책은 재미로만 읽거라. 연구가 중단된 서적이란다. 소설 정도로 취급되고 있는데다가 해석 자체도 어려워서 먼지만 쌓이는 형편이지.”


“그래도 이거 마지막 페이지 필체가 다른 것 같은데요? 다른 사람이 손을 댄 것 같아요.”


로레인은 마지막 페이지에 꽂혀 있던 접힌 종이를 대략적으로 그려진 지도를 그에게 보였다. 허나 블렌하임은 이미 관심을 놓은 서적이었다.


“그래, 너라면 그 책에서 뭔가 찾아낼 수도 있을 일이지.”


몇몇 지형은 지금의 대륙도와 비교해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표기였다. 그녀는 스승이 자리를 비운 이후에도 대륙도와 비교하며 메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촤라락.


그녀의 책상에 잘 정돈되어서 쌓여있던 서류들이 누군가에 의해 쓰러졌다.


“킥킥.”


시야를 가리던 종이들이 사라지자 책상 위에서 움찔대는 갈색의 동그란 게 눈에 들어왔다.


“이 못된 꼬맹이가... 어디에 있을까? 찾아서 혼을 내줘야 하는데.”


“흡.”


짐짓 못찾는 척을 하던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숙여 작은 동생을 바라봤다.


“하아. 로닌, 언니가 여기에 따라와도 좋다고 한 조건이 뭐지?”


그녀는 애써 웃음기를 지우고 물었다. 로닌은 품에서 수첩을 꺼내서 뭔가를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조용히 책 이끼 읽기」


“씁, 잘 알고 있네. 그럼 로닌이 지금 한 행동은요?”


「잘못해써」


로레인이 짐짓 화난 표정을 풀지 않자 로닌은 수첩을 돌렸다. 잠시 고민을 하나 싶더니 다시 돌린 수첩에는 작게 ‘요’가 적혀 있었다.


책상 위로 눈과 손만 빼꼼 내민 그 모습에 로레인은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으유, 이러니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해? 밀렌, 자요?”


〈듣고 있단다.〉


“그럼 로닌 좀 데리고 바람 좀 쐬고 오실래요? 많이 답답해 하는 것 같아서요.”


로닌의 손목에 걸려있던 약간은 투박한 팔찌가 시원한 물보라의 형상을 뿜기 시작했다.


〈왜 안 되겠니? 나만 믿으렴.〉


물보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이제 갓 17살 정도나 되었을 것 같은 하늘하늘한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여왕 언니! 안녕!」


“로닌이 반갑단다. 오늘은 나랑 같이 노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로닌이 밀렌의 손을 잡고 열람실을 빠져나가자 그제야 다시금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아무도 모르는 그녀만의 명당이었다. 서고에 머무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보면 지평선 너머의 햇빛이 세상을 양분하는 걸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기도 했다.


평민 거주구가 있는 곳도 눈에 들어올 정도니 조금만 집중한다면 아는 얼굴을 보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펜을 비스듬히 입에 문 그녀는 생각했다.


‘마땅히 방도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이 장소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가끔이라도 좋으니까.”


남쪽이 보이는 방향.


“연락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도 싶은데...”




제 글이 여러분에게 어떤 방향으로라도 영향을 끼쳤기를 바랍니다.


작가의말

더 쓴 게 있는데 여기서 끊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좀 짧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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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182. 종막 (3) 22.05.03 14 0 11쪽
182 181. 종막 (2) 22.04.30 25 0 11쪽
181 180. 종막 (1) 22.04.26 23 0 11쪽
180 179. 기사, 최선의 기사 (10) 22.04.23 17 0 11쪽
179 178. 기사, 최선의 기사 (9) 22.04.19 16 0 12쪽
178 177. 기사, 최선의 기사 (8) 22.04.16 35 0 12쪽
177 176. 기사, 최선의 기사 (7) 22.04.12 21 0 11쪽
176 175. 기사, 최선의 기사 (6) 22.04.09 16 0 11쪽
175 174. 기사, 최선의 기사 (5) 22.04.05 27 0 12쪽
174 173. 기사, 최선의 기사 (4) 22.04.02 35 0 12쪽
» 172. 기사, 최선의 기사 (3) 22.03.29 27 0 10쪽
172 171. 기사, 최선의 기사 (2) 22.03.26 30 0 12쪽
171 170. 기사, 최선의 기사 (1) 22.03.22 43 0 11쪽
170 169. 왕이 잠든 땅 (13) 22.03.19 2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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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167. 왕이 잠든 땅 (11) 22.03.12 36 0 11쪽
167 166. 왕이 잠든 땅 (10) 22.03.08 24 0 12쪽
166 165. 왕이 잠든 땅 (9) 22.03.05 26 0 12쪽
165 164. 왕이 잠든 땅 (8) 22.03.01 25 0 12쪽
164 163. 왕이 잠든 땅 (7) 22.02.26 3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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