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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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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9.20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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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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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용살(龍殺)의 검(4)

DUMMY

외경(畏敬)할 존재.


일순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먼 옛적부터 내려온 설화와 이야기들에는 그리 전해진다. 영수(靈獸)들은 항시 경원시 되는 대상이었으며, 간혹가다 신과 같이 떠받들어지는 것들도 존재했다고.


설화가 인간의 세상에 거닐던 때의 이야기다.


그 잔재는 이제 거의 사라졌고, 백연 또한 설화의 흔적은 오래되어 다 삭아버린 백골로밖에 마주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쿠구구구구구구구궁-!


설화의 편린이 눈앞에 재림했다.


한없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듯 보이는 교룡(蛟龍)의 머리.


석좌 아래로 펼쳐진 백골의 형상 위로, 핏빛 진기가 휘몰아치며 흐릿한 용의 형상을 그려낸다. 혈기로 이뤄진 비늘이 수천 자루의 무형검마냥 돋아나고, 길쭉하게 이어지는 진기가 휘몰아치며 육신 전체를 타고 휘돈다.


‘대체 얼마나 커야......?’


머리만 해도 석좌가 놓인 공동 바닥의 절반을 뒤엎는다. 동시에 그 아래 분진 사이로 끊임없이 뻗어있는 교룡의 몸통이 어렴풋이 보이는데, 어디까지 이어진지 끝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지극히 느릿하게만 보이는 교룡의 움직임. 머리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순간에 일어나는 압도적인 풍압(風壓)이 그것이 착각임을 일깨워준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가히 태풍과 같은 바람이 소년의 육신을 거칠게 밀어낸다. 운룡대팔식으로 허공을 딛고 있음에도 단번에 밀려나갈 것 같은 감각. 실제로도 조금씩 떠밀리고 있었다.


단순히 저 거체를 움직이는 것 만으로도 저 정도다. 너무나 거대해 외려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교룡의 머리통이 천천히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비상(飛上)해 하늘로 오르기라도 할 듯이.


‘그게 목적인가.’


생각이 스친 찰나에 백연은 안법 구결에 힘을 더했다. 북명신공의 묘리로 사방 외기를 빨아들이며 눈에 막대한 진기를 덧댄다.


겹겹이 휘몰아치는 진기의 파도가 세맥에 파고들다 못해 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


투둑.


막대한 부하에 세맥 일부가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귀 안쪽으로 들렸으나,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외기를 더욱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 만큼은 흡수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육신에 욱여넣어야만 했다.


동시에 초월의 영역에 다다른 자령안의 공능으로 인지한다.


그리고, 보았다.


개벽(開闢).


하늘이 찢어지고, 용해곡이 무너지며 온전히 풀려난 교룡이 하늘을 누빈다. 기백년만에 다시 이 땅에 강림한 재해(災害). 핏빛으로 꿈틀거리는 적색 교룡.


“......백연!”


주륵.


뜨거운 감각이 입가에서 느껴졌다. 허나 백연은 힘겹게 입을 열 따름이었다.


“풍백! 막아야 합니다!”

“괜찮......”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혈마가 용의 육신에 스스로의 혼백을 전이시켜......!”


그 순간이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


귓가를 파고드는 거대한 울림. 맥동하는 교룡의 낮은 울음소리가 그의 내력을 진탕 뒤흔든다. 단순히 울음을 흘리는 것 만으로 사방의 진기를 뒤틀리게 만드는 압도적인 위력.


“커헉......!”


핏물을 한움큼 뱉어낸 백연이 입술을 베어물었다. 그 여파로 인해 휘몰아치던 자령안의 구결이 잦아들며 자색으로 빛나는 눈가를 따라 붉은 방울이 투둑 흘러내렸다.


하지만 충분했다.


찰나에 전부 깨달았다. 혈마는 스스로의 육신을 포기하고 용의 유해에 그의 혼백을 때려박은 것이었다. 크게는 하령이 알려주었던 혼백전이의 술법과 다를게 없었다.


다만.


‘교룡의 영성이 유해에 남아있다.’


초월적인 생물인 까닭일까.


원의 마지막에 쓰러져 명을 다한 고룡(古龍)이라 했다. 고룡이라 불릴만큼 오랜 기간 살아가며 원을 수호한 영수인데, 그 정도에 이르면 어떤 경지에 닿았을지 가늠키가 어려웠다. 더불어 그 강대한 영성이 얼마나 강하게 남아 있을지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백연을 비롯해 이곳에 있는 무인들이 아직까지 이렇게 멀쩡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온전한 합일이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쯤 저 거대한 유해에 담긴 혈마와 교룡의 영성은 각기 꿈결을 거니는 듯한 감각일 터.


반쯤 몽혼(夢魂)한 상태에서 이지 없이 솟구쳐 오르고자 하는 본능만 남은 상태다.


허나 이 상태가 얼마나 갈지 알 수 없다. 혈마는 한낱 인간의 혼백에 불과하지만 그 또한 강대한 무위를 손에 쥐었던 괴물. 더해 그 스스로의 영성을 교룡의 유해와 합일시키기 위해 무슨 조치를 취해 두었겠지.


작금의 상태가 언젠가 깨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 시점은 아마-


“육신이 온전히 재생되고, 완전히 날아오르는 순간부턴 장담할 수 없겠군.”


그때부턴 어느 한쪽이 주도권을 잡고 합일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원을 수호하던 용의 정신이건, 아니면 혈교의 초대 교주건 간에.


‘그 전에 막아야 해.’


백연은 검파를 비틀어쥐었다. 비릿한 혈향을 삼키면서였다.


완전히 깨어난 교룡이 어떠한 재앙이 될지는 그 또한 짐작이 어려웠다. 직전 자령안의 공능으로 어렴풋이 엿본 바로는, 항거하기 어려운 재해로 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정도만 예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쿠구궁! 콰르르르르릉!


기둥이 쩌적 갈라져 바닥으로 붕괴하고, 대지가 뒤틀리며 사람들이 휩쓸린다. 무너지는 지반 사이를 따라 제각기 신묘한 보신경으로 버텨내는 절세고수들의 모습이 눈에 엿보인다.


우호법마저 한층 물러나 온몸에 화염을 두른채로 상황을 살피고 있는데, 백연은 이제 그들에게서 신경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풍백, 예린, 그리고 검왕 어르신.”


바람에 실린 음성이 날아올랐다.


창을 투웅-튕겨 그나마 아직 무너지지 않은 바닥으로 몸을 굴린 악예린과, 풍신의 진기 여파를 휘감고 곡예하듯 무너지는 파편들 사이를 밟아내는 풍백.


그리고 이제는 바닥을 짓누르기 위해 펼쳐뒀던 제왕검형을 거두고, 종리군과 허공에서 찰나에도 수십차례 합을 겨루는 검왕의 모습까지.


한순간 그들의 귓가에 소년의 목소리가 한없이 또렷하게 내려앉았다.


“지금부터 저는 저것을 저지하고자 합니다.”


곧장 돌아오는 것은 풍백의 음성이었다. 무형검을 역수로 쥔 그가 곤란한 듯한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저 괴물을 혼자 말입니까? 가불가의 여부는 제쳐두고......그 신공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텐데요.”

“그 안에 끝낼 생각입니다. 저것은 온전히 깨어나서는 안됩니다.”

“확실히 동의하는 바지만.”


일렁이는 바람결 아래로 풍백의 시선이 그를 향하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가능하겠습니까?”

“해야되는 일입니다.”


백연은 담담히 답했다. 뒤이어 귓가에 날아와 꽂히는 전음이 재빨랐다.


[조심해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몸을 날리는 악예린. 창광이 어둑하게 가라앉는 공동의 아랫부분을 일순 환히 밝혀낸다.


검왕에게서는 별다른 답도 없었다. 막 푸른 잔영으로 화하고 있는 그의 움직임이 더욱 빠르게 이지러졌는데, 이제 종리군은 검왕과 근접전을 시도하지 않았다.


한순간 거대한 보신경 여파가 공간마저 일그러뜨리며 후욱 멀어지더니, 다음 순간 단숨에 거리를 벌린 종리군이 초월적인 궁격을 숨쉬듯이 발출. 묵빛 화살 다발과 검왕의 푸른 무형검이 충돌하며 투확-충격파를 일으켰다.


허나 그 거대한 충격파조차 곧 흐릿하게 짓이겨지며 사라진다. 솟구치는 교룡의 머리통이 마침내 혈마의 미궁을 벗어나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무너진 천장 틈을 끝없이 거대한 용의 머리가 비집고 솟아오른다. 이제는 더욱 짙게 휘몰아치는 혈기가 백골을 감싸고 그 위에 실재하는 육신의 형상을 덧대어낸다.


그렇게 솟구치는 교룡의 형상을 보며 백연은 지그시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초월의 벽을 막 베어낸 무인(武人).


살아오며 어느 한 순간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적은 없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여 벽을 넘고자 내달렸고, 언제나 더 강대한 적을 상대하려 들었다. 허나 지금만큼은 그보다 더 앞서야 한다.


몸 속의 호흡으로 스스로에게 남은 시간을 감각한다. 아직은 충분하다.


‘이제부터.’


모든 무공을 극성에 닿게.


생각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수십으로 쪼개진 간극의 찰나, 허공을 딛고 서 있는 백연의 주변으로 무채색 파문이 거대한 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그 속에 담긴 진기의 성질이 가늠키가 어려울 정도였다. 북명으로 합일된 거대한 진기의 파문이었던 까닭에.


“......!”


일순 검왕과 종리군, 두 초월자의 시선마저 한순간 서로를 벗어나 그를 향했다. 절세에 달한 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막대한 진기 파문을 느낀 탓이었는데, 그들로써는 숫제 교룡이 한마리 더 솟아오르기라도 하는 감각이었을 터다.


주변의 모든 외기(外氣)를 마구잡이로 빨아들이더니, 옅은 파문을 길다란 호흡처럼 토해낸 여파. 그 형태가 사방의 모든 진기를 흡수해 교룡의 부활에 이용해먹은 혈마의 작태와 더없이 닮아 있었으니까.


그러나.


‘달라.’


백연은 찰나에도 생각했다. 세맥 전체를 찢어버릴 듯이 휘몰아치며 맥동하는 진기를 온전히 제어하면서였다.


‘이쪽이 근원이다.’


태허무극결(太虛無極結).


[성휘북명(星輝北冥)의 장(章).]


검은 바다에 무수한 별빛이 깃들었다.


끝없이 휘몰아치는 사방의 외기를 모조리 빨아들여 제각기의 형태로 가공한 형국. 이 순간 소년의 육신에는 이곳에 자리한 모든 절세고수들의 진기 여파가 서려 있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빙공 여파부터, 창공과 같은 남궁의 푸른 진기까지도. 여기까지는 원래도 태허무극결이 지닌 공능이다. 허나 백연은 본래라면 즉각적으로 내보내 무공에 써먹었어야 할 진기를 몸속에 가뒀다. 무수한 바다에 박힌 별빛처럼.


육신을 진기의 통로로써 쓰지 않았다.


이 찰나의 순간을 얼려붙인듯 그대로 끌고간다.


‘절반으로 줄었군.’


그나마 남아있던 태허무극결의 지속 시간이 반으로 깎여나갔다. 그의 육신이 그 이상은 더 버터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 순간에도 부상당했던 그의 오른팔 근맥이 투둑-끊어지는 과부하가 가해지고 있었는데, 더욱 압도적인 재생력으로 이어붙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허공에 선 채로 걸음을 내딛는다. 발끝을 따라 흐릿한 운무같은 기파가 휘감기더니, 다음 순간, 소년은 네번째 발걸음을 태연히 이끌어 내고 있었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제 사식(四式).


사박-


시야 사위가 찢어졌다.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도 모자라 다음 순간 풍경이 뒤바뀌었다.


백연은 용해곡의 위, 구름 언저리에 서 있었다. 단 한걸음에 주변의 풍광이 광활하게 넓어졌다. 뒤에 남기고 온 잔상은 저 아래 무너지는 미궁의 사이 허공에서 일렁이며 흩어지고 있는 상황.


위로는 구름이 자욱하게 펼쳐져 하늘을 틀어막고 있다. 흐릿한 구름이 뒤집어진 바다마냥 거꾸로 세상을 짓누르고, 아래에서 솟구치는 교룡의 머리통은 붉은 기운을 폭풍처럼 휘감고 느릿하게 승천한다.


그로 인해 일어난 풍압이 백연에게까지 치솟는 파도처럼 밀려온다. 흡사 하늘을 밀어내기라도 할 듯한 압력.


좌우로 산맥 너머의 사방 평지가 눈에 들어온다. 시야 저편 멀리에서 이곳을 향해 진격하는 어떤 무리의 경공 여파가 일으킨 자욱한 분진이 엿보이고, 뒤이어 무너지는 용해곡의 풍광이 단번에 눈에 들어온다.


아직 쪼개진 찰나다. 소리 없이 우그러드는 협곡의 기둥과 절벽들.


전부 살아있는 양 움직인다.


용해곡(龍骸谷).


한치의 틀림 없는 진실이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협곡 전체가 움직이며 꿈틀거리고 있었으니까.


솟구치는 교룡의 머리를 중심으로, 여태껏 몸을 칭칭 휘감고 있었던 한마리의 용이 천천히 그 육신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단번에 미궁의 구멍을 뚫고 몸을 일으킨다. 한순간에 백연의 근처까지 와 닿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울음 소리가 낮게 울리는 것과 동시였다. 막대한 진기의 파도가 백연의 육신을 휩쓸듯 덮쳤으나, 소년은 이미 다음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운룡 사식. 일신에 온전한 자유를 부여하는 걸음이었다. 천지 삼십육방의 방향을 무용케 하는 걸음걸이는, 원형으로 투확-퍼져나가는 진기의 파문 속에서도 백연의 육신을 완전하게 이끌었다.


단숨에 진기 파문을 파훼하고 접근. 곧장 혈기로 뒤덮인 용의 머리까지 다가가는 순간.


[......감히.]


잠에 취한듯한 음성이었다. 혈마와는 다르게,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음에도 곧장 의미가 뇌리에 새겨졌다. 분노와 비통함이 뒤섞인 굉음이 찰나지간 백연의 머리를 크게 뒤흔들었고.


콰콰콰콰콰콰콰!


저편 하늘에서부터 시리게 깎인 칼바람이 유성처럼 낙하한다.


한순간 백연은 허공에서 회피 보법을 밟을 수 밖에 없었다. 용의 머리에 접근하다가 그대로 허공을 박차는 것이 순간이었다.


일순 섬짓하게까지 느껴지는 칼바람의 여파. 숨쉬듯이 자연지기를 휘둘러 허공에서 무형검을 엮어낸 격이다.


별안간 발현된 술법에 가까운 무공 초식이다.


눈앞의 교룡이 뿜어낸 것이 분명한데, 인간을 상대하기 위한 수법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아직은 정신의 합일이 이뤄지지 않아 몽혼한 상태에서도.


반쯤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흐릿한 폭풍이 백연의 신형을 찰나 집어삼킨다. 허나 그 속에서도 푸른 별빛을 입은 백연의 걸음은 이미 십전완미(十全完美)에 가까웠다.


운룡 사식의 여파가 구름처럼 부풀며 그의 신형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 회피의 찰나가 길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용의 머리가 백연을 지나쳐 솟구친다. 구름 사이를 뚫어내며 솟아오르는 속도가 항거할 수 없는 압도적인 전진이었다. 거대한 회백색의 바다에 후욱 들어가는 듯한 풍경.


백연이 거꾸로 뒤집어져 하늘을 딛고 있는 탓에 그리 보이기도 했다.


한순간 구름이 찢어지며 거대한 원형의 파문이 생긴다. 회백색의 구름 사이로 핏빛 적룡이 승천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반쯤 풀려나온 육신을 용해곡에 걸친 채로.


너무 빠르다.


이대로 솟구치면 막을 수 없는 까닭에. 어떻게든 머리 위에 올라타야 했는데, 그만한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 순간 백연을 향해 짓쳐오던 칼바람에는 뇌광마저 서리기 시작했으니까.


그때였다.


“피하거라.”


별안간 시야가 푸르게 물들었다. 한순간 하늘과 땅에 푸른 선이 새겨졌다. 그리고 직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투확!


굉음과 함께 구름이 푸확 찢어졌다.


단숨에 운해(雲海)가 반으로 갈라지며 솟구치던 교룡의 머리통이 무언가에 가로막힌듯 주춤하며 멈춰섰다. 그 여파로 인해 거대한 파문이 횡으로 원을 그리며 뻗어나간다. 여파만으로 몸이 잘려나갈 듯한 절세의 발경력 충돌.


검왕의 천주검(天柱劍).


백연의 시야에 곧장 보인다. 창공까지 주욱 뻗어나간 푸른 무형검이 거대한 기둥마냥 교룡의 머리를 찍어내리는 광경. 고개를 들어올리던 적색 용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들지 못하며 주춤 멈춰선다.


아주 잠깐이지만, 교룡의 승천을 멈춰세웠다.


오래갈 상황은 아니다. 이 찰나에도 푸른 무형검은 그 형태를 소실하며 흩어지는 중이었다. 저 막대한 크기의 검은 극히 찰나 이상 유지할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허나 그것이면 충분했다.


흩어져오는 발경력 여파마저 그의 발끝에 휘감는다. 동시에 깃털같은 파문이 백연의 발치에서 일었고.


파아아아앙!


다음 순간 그는 구름의 위에 올라서 있었다. 운해의 너머로는 푸른 창공과 저무는 햇살의 빛이 시야 가장자리에서 일렁인다.


‘지금.’


정확히 교룡의 머리 위.


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공간에, 푸른 검이 내리찍힌 여파가 선명했다. 반쯤 찢어진 혈기의 폭풍 사이로 아직은 핏빛 진기에 뒤덮인 백골에 불과한 교룡의 머리통과, 그 정 가운데에 자리잡은 석좌가 눈에 들어온다.


그 위에 앉은 혈마의 시체와 펄럭이는 적혈보의의 모습까지도.


‘저기까지.’


이제는 묵직하게 느껴지는 대기를 발끝으로 느릿하게 밀어낸다. 수천으로 쪼개진 간극 탓에 그리 느껴졌다. 홀로 다른 시간선을 걷는 듯한 감각.


화악-!


세상이 얼어붙는다.


다음 순간 백연은 교룡의 코끝에 올라 있었다. 드넓은 백골의 위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그 끝을 타고 쩌적-갈라지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기백년을 버텨왔을 영성이 서린 유해에 새겨진 옅은 금.


운룡대팔식의 여파는 이제 그만큼 강대했다.


소리는 없었다. 그의 시간을 따라오지 못한 탓이다.


흩어지는 천주검의 푸른 진기가 꽃잎처럼 낙하하며 주변에 떨어지는데, 그것마저 허공에 못 박힌듯이 한없이 느릿하게 일렁인다.


그 속에서.


백연은 검을 휘둘렀다. 느릿하게 휘어진 검끝이 백연의 뒤편 사각으로 향했다. 물 속에서 유영하는 듯한 감각이었는데, 검끝에 걸리는 느낌만큼은 똑같았다. 그를 향해 떨어지던 교룡의 칼바람이 단숨에 짓이겨진다.


그 여파로 인한 무채색의 파문이 후욱 번져나가는데, 그것마저도 얼어붙은 듯 보일 지경이었다.


동시에 사방을 따라 무형의 검초가 솟구쳤다. 수풍지화(水風地火)의 형세. 시린 뇌광과 뼛속까지 얼릴듯한 냉기의 칼바람, 종국에는 혈기로 이뤄진 검격까지.


인간의 검술에 능한 교룡이다. 하나하나가 절세의 영역에 달해 있는데, 마치 수십명의 검객이 펼친 절초를 동시에 상대하는 감각이었다.


허나.


‘검(劍)은, 내가 위다.’


그의 신형이 이지러졌다. 꽃잎같이 흩날리는 움직임의 뒤편 허공을 따라 검로가 뒤늦게 백색 빛살을 그리며 새겨졌다.


동시에 백연은 석좌의 코앞에 발을 딛고 있었다.


뒤편을 따라서는 짓쳐들던 교룡의 모든 일격이 하나의 검로에 관통당해 산산히 부서지는 와중이었다. 흩날리는 진기 파편이 불티처럼 허공에 새겨진다.


그 순간 별안간 혈마의 육신이 솟구치듯 움직였다. 막대한 장력을 휘감고 그의 가슴을 노리는 형국. 찰나 백연의 가슴에 혈마의 장법이 틀어박혔으나, 성라청휘극은 제 역할을 다하고 부서지며 푸른 별빛을 흩날릴 따름이었다.


이미 백색 뇌광이 혈마의 목을 가른 뒤였다. 머리 잃은 시체가 간극 속에서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한 순간, 백연은 손을 내뻗어 붉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찰나.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길다란 머리칼을 꿈결처럼 흩날리는 무인. 온통 피로 물든 적혈보의를 걸치고, 백색의 신예검을 휘두르는 자안(紫眼)의 청년.


옆모습만이 엿보인다.


검을 쥐고 선 천마(天魔) 무연의 시선이 힐끗 움직이는 듯한 감각이 닿았으나, 정작 정확하게 눈을 마주칠 수는 없었다.


아직은 한발 뒤에 있는 탓에.


“마침내 여기까지 닿았군요.”


허나 그 음성만큼은 똑똑하게 귓가에 틀어박혔고.


“이미 오래전에 실패한 저는 무엇도 그대에게 전해줄 수 없으나.”


돌아보지도 않고서였다.


투명한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는데, 어느새 백연은 머나먼 과거의 풍광을 보고 있었다.


하늘로 솟구치는 생전의 교룡. 그리고 그 위에 선 천마의 모습을.


“검(劍) 만큼은, 당신의 연에 닿을 수 있으니.”


용의 머리를 딛고 선 가냘픈 청년이 물기 섞인 웃음을 흘렸다. 투명한 풍경처럼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백연에게 닿았다.


“보고 새기시지요. 마지막 조각으로써.”


말과 함께 휘두르는 검격. 어떠한 기교도 없는 담백한 검로는, 마치 문사(文士)가 휘두르는 묵필마냥 부드럽게 떨어져 내릴 따름이었다. 허나 백연은 그 속에 깃든 수천가지의 검을 일순 엿보았다.


교룡의 머리에 틀어박히는 단 일검(一劍).


그 여파가 하늘의 구름을 지우고, 반경 일백장의 대지를 초토화시켜 평원으로 만든 직후.


용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일순 겹친다. 현실과 환상의 풍경이.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저민다. 어느새 그는 다시 적혈보의를 붙잡은채로 서 있었다. 머리 잃은 혈마의 시체가 아직 바닥에 닿지도 않은 상황. 쪼개진 간극 속에서 백연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고.


“......이해했다.”


태허무극결을 거두었다. 손에 쥔 여휘에 온전히 남은 모든것을 실어내면서였다.


용살(龍殺)의 검.


그를 초월로 이끈 이름 없는 검에 마지막 한 조각이 더해졌고.


백연은 검을 휘둘렀다.


검흔이 새겨진 심상의 벽을 향해서, 그리고 그의 발밑에 솟구치는 교룡의 유해를 향해서.


일순 운해가 출렁였다. 심상의 벽이 완전히 무너짐과 동시였다. 구름의 바다가 새털처럼 갈라지며 하늘을 뒤덮었던 북방의 구름들이 흩어져 사라졌다.


태허도룡검법(太虛屠龍劍法).


흐릿한 검로가 스쳤다.


직후.


용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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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격랑(激浪)(5) +6 24.08.09 1,381 38 14쪽
331 격랑(激浪)(4) +5 24.08.08 1,318 39 14쪽
330 격랑(激浪)(3) +4 24.08.07 1,376 39 15쪽
329 격랑(激浪)(2) +7 24.08.06 1,352 44 16쪽
328 격랑(激浪) +6 24.08.05 1,367 43 15쪽
327 별하늘이 지는 밤에(4) +6 24.08.03 1,421 44 12쪽
326 별하늘이 지는 밤에(3) +5 24.08.02 1,343 43 13쪽
325 별하늘이 지는 밤에(2) +6 24.08.01 1,425 44 17쪽
324 별하늘이 지는 밤에 +6 24.07.31 1,463 45 15쪽
» 용살(龍殺)의 검(4) +8 24.07.29 1,575 45 20쪽
322 용살(龍殺)의 검(3) +8 24.07.27 1,440 46 13쪽
321 용살(龍殺)의 검(2) +5 24.07.26 1,434 44 18쪽
320 용살(龍殺)의 검 +6 24.07.25 1,428 45 14쪽
319 초월(4) +5 24.07.24 1,437 42 13쪽
318 초월(3) +6 24.07.23 1,400 43 15쪽
317 초월(2) +7 24.07.22 1,482 40 14쪽
316 초월 +8 24.07.20 1,486 45 17쪽
315 용해곡(龍骸谷)(7) +7 24.07.18 1,566 47 17쪽
314 용해곡(龍骸谷)(6) +6 24.07.17 1,444 42 14쪽
313 용해곡(龍骸谷)(5) +6 24.07.16 1,422 43 14쪽
312 용해곡(龍骸谷)(4) +5 24.07.15 1,443 43 13쪽
311 용해곡(龍骸谷)(3) +6 24.07.13 1,574 48 14쪽
310 용해곡(龍骸谷)(2) +3 24.07.12 1,524 4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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