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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이런 서재는 처음이지?

낙성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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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가別歌
작품등록일 :
2012.11.27 07:38
최근연재일 :
2016.12.10 22:14
연재수 :
16 회
조회수 :
5,725
추천수 :
32
글자수 :
39,679

작성
13.12.27 05:15
조회
170
추천
2
글자
5쪽

사기沙記

DUMMY

사기沙記 - 모래의 기억




천막은 크고 넓되 꾸밈은 간소했다. 그러나 천박하거나 초라하진 않았다. 세월에 가려 있을 뿐, 놓인 모두가 귀했다. 하나하나 명품이요, 이모저모 비범하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었다. 분명, 천막의 주인 역시 이럴 터다.


“……눈[雪] 또한 그렇거늘.”


실로 소년의 겉은 수수했다. 몸의 털은 죄 검고, 눈코입귀는 큼직하며, 팔다리는 길었다. 하물며 그 위에 걸친 건 흔한 단색單色의, 길쭉한 「막장幕裝」. 그야말로 어디서나 볼 법한 「호상豪像」의 도령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니 달랐다. 눈빛이 맑고 턱이 다부지며, 옷의 재질이 비범하고 마무리가 잘 된 것이 속으로 귀태貴態가 흘렀다.


“예?”


종從이 물으나 답하지 않았다. 상념에 빠진 탓이다. 하긴, 말해도 모를 터였다. 눈을 본 적이 없을 테니.

물론 듣긴 했을 것이다. 상단商團은 무릇 온갖 소문이 도는 곳이니까. 하지만 여태껏 모래와 자란 이가 눈을 봤을 리는 만무했다. 그러니 모를 터였다. 눈이 얼마나 위험한지.

흔히 말한다. 드넓게 쌓인 눈은, 그 자체로 장관이라고. 순백한 모습이 꼭 처녀의 그것과 같다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눈은…… 절대 감미롭지 않다. 모래가 그렇듯. 즉 사막沙漠과 설원雪原은 근본적으로 같았다. 둘은 모두 혹독했다.


그 탓이다. 이들이 「백명白鳴」을 무시하는 건. 이는 그른 판단. 하여 도령은 마저 입을 열었다.


“……앞장서거라. 단주께 아뢸 말이 있느니라.”


*


천막은 혼란했다. 욕설이 오가고 고성이 터져 나왔다. 멱살잡이는 흔했고, 어느 곳은 몸싸움마저 벌어지려 했다.

하지만 모든 건 도령이 들어서며 끝났다. 단주가 멈출 것을 명했기 때문이었다. 비로소 소란이 잦아들었다.


“아뢰옵니다.”


나직하되 올곧은 소리가 천막을 채웠다. 단주, 노인은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표시다. 이를 본 도령이 마저 입을 열었다.


“여쭙겠습니다. 백명은 무엇입니까?”

“미微다.”


말은 짧되 가볍지 않았다. 앞뒤는 이러했다. 도령은 상단 전체의 생각을 물었고, 단주는 대표로서 답했다. 그것은 ‘작고 보잘 것 없다’고.

예측대로였다. 모두 소문에 눈이 멀었다. 상인은 무릇 치밀해야 하는 법이거늘……. 이대로면, 반드시 손해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하여 도령은 수를 던졌다. 뱀이 꼬리를 물듯, 틈 없이 되묻는 노인의 하나 남은 왼눈이 횃불처럼 일렁였다.


“그들은 미薇입니다.”


도령은 단주의 말을 되돌렸다. 덕분에 뜻은 더욱 명확해졌다. 실로 소년이 생각건대, ‘백명은 작은 게[微] 아니라, 고비[薇]’였다. 하지만, 이를 위해 어른의 말을 비꼬았다. 결례를 범한 것이다. 굉장한.


“이놈, 호정아!”


아니나 다를까. 당장 왼편의 사내가 호통을 쳤다. 외모만큼 빼어난 충심으로 이름 높은 포충이었다.

그는 단주의 호위답게 그 기세가 대단했다. 같이 온 호정의 시종이 그 바람에 덜컥 주저앉을 정도로, 사내는 위압감을 뿜어냈다. 하지만 정작 호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익숙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리고, 단주의 대응도.


“모래는 여유를 모릅니다. 하여 엄혹합니다. 낮이면 달아오르고, 밤이면 식어내리길 반복합니다. 하루도 연련硏鍊을 거르지 않지요. 그러니 어찌 순하고 부드러울 수 있겠습니까? 자연 거칠고 매서워질 수밖에요. 하물며 그곳에 사는 이라면 더 말할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살기 위해 우리는 모래보다 더 독해졌습니다. 그렇기에 강합니다. 그러나 아셔야 합니다. 눈 또한 모래 못지않다는 것을. 단주. 저 「중원中園」의 대식자大識者 허성이 말하길, ‘모래는 자랄 수 없게 하나 눈은 자랄 순 있게 하되 찾을 수가 없게 덮고, 모래는 물이 귀하나 눈은 물은 흔하되 쓸 수 없게 얼리며, 모래는 먹을 수 없으나 눈은 먹을 수 있되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아니하게 녹아 사라지니 이 둘을 묶어 「학지虐地」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다만 하나는 누렇고[黃] 뜨거우며[暑], 다른 하나는 하얗고[白] 차가울[寒] 뿐 근본은 거칠고 매섭기 매한가지인바. 그러니 우리가 강한 만큼 그들도 강할 터. 고로 결코 백명은 작지 않습니다.”


호정은 단숨에 설명했다. 길지만 한 번도 멈추거나, 더듬지 않았다. 그만큼 생각하고 또 연습했던 덕이다.

역시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모두의 얼굴색이 변할 즈음, 마침내 단주가 결정을 내렸다.

배가倍加, 즉 지원하는 양을 늘리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황번黃幡」은 그 기치를 더욱 드높일 수 있게 됐다.


작가의말

* 막장幕裝 : 존재하지 않는 명칭입니다. 다만 가장 가까운 것을 찾자면, 망토 쯤이 되겠습니다. 이곳 사막에서 모래와 추위를 막기 위해 두꺼운 천으로 만든 외투를 간단한 옷 위에 걸친 것을 뜻합니다.


* 호상豪像 : 사전에 없는 단어입니다. 필요하여 만든 말로 호탕하다, 호쾌하다 할 때의 豪 자와 사람의 외모를 나타내는 像 자를 더했습니다. 즉 도령은 미남보단 호걸에 가까운 외모란 얘기.


* 백명白鳴 : 역시 없는 단어입니다. 하얀 울음이란 뜻으로, 작중에서 동토의 전사를 달리 일컫는 말입니다.


* 중원中園 : 이번에도 없는 단어입니다. 네? 있는 거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는 중원은 中原이라고 씁니다. 즉 中園은 전혀 다른 장소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죠. 뭐, 위치는 비슷하지만. 어쨌든 中園도 대륙 중앙의 국가거든요.


학지虐地 : 물론 없는 단어입니다. 혹독한 땅이란 뜻입니다. 다만 혹지라 하지 않고 학대 할 때 쓰는 사나울 虐 자로 대신한 것은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여러분은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을 게 분명하므로 따로 적지 않겠습니다.


황번黃幡 : 또 없는 단어입니다. 백명과 대비되는 말입니다. 뜻은 황색 깃발로, 즉 사막의 전사를 달리 일컫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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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남협 고검 괴탁주 16.12.10 196 1 7쪽
15 동유 관천맹풍 한굉 16.12.04 110 1 5쪽
14 강일백 매무기 +1 15.02.24 251 1 5쪽
» 사기沙記 13.12.27 171 2 5쪽
12 입타상루立唾上樓 13.04.23 255 2 10쪽
11 Race Syndrome -0- 13.04.22 184 1 4쪽
10 황해(荒海) 13.03.09 305 1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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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콜라주Collage +1 12.12.13 410 1 7쪽
7 으 아니……. +1 12.12.03 351 1 5쪽
6 오르골(Orgel) +4 12.12.01 668 3 20쪽
5 청소왕의 Clean&Clear - 부제 : 본격진지뻐ㄹ글 +2 12.11.29 499 3 8쪽
4 홍란(1) +2 12.11.29 359 3 5쪽
3 토선생총전, 여는 마당 +2 12.11.27 312 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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