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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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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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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수 :
9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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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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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80,477

작성
21.05.30 20:22
조회
842
추천
30
글자
12쪽

9.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인다(3)

DUMMY

그 말을 들은 덕문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이 청년과 같이 움직인다면 사실상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사실일 거였다.


그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두 눈으로 직접 본 그의 무위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으며 인간범주를 벗어났다고 할 만한 것이었으니까.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다.


도대체 왜?


그들이 얼굴을 마주한 지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이런 호의를 베풀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은 동기가 있어야 행위 하고 그것은 대부분 이타(利他)보다는 이기(利己)에 기인한다.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인간이란 그렇다.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푼 동기는 과연 어떤 것일까? 덕문이 대답할 말을 바로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옆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이 연민을 느껴 호의를 베푸는데, 의회(疑懷)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자네가 마음에 품고 있는 병 때문이 아닌가."


"에첵!"


덕문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들려온 말의 내용보다 그 목소리에 놀란 모양이었다. 한쪽 구석에 죽은 듯 쓰러져있던 노인이 뒷머리를 주무르며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덕문이 얼른 달려가 노인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아직 조금 어지럽긴 하구만. 그보다 자네 얼굴이 밝은 것을 보니 우리가 곤경에서 벗어난 모양일세."


"그렇습니다."


덕문이 에첵이라 부른 노인에게 어제부터의 사정을 간추려서 이야기해 주었다. 노인은 별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래도 이렇듯 일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진정 보르항께 감사드릴 일입니다."


덕문은 생각 이상으로 흥분한 듯 보였다. 한층 높아진 어조로 그들의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노인은 검고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띠더니 덕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자네 신심이 이렇듯 깊은 줄 이전엔 미처 알지 못했네. 그러나 보르항께 감사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은인께 먼저 감사를 전하는 게 도리 아니겠는가."


말을 마친 후 노인이 창현을 향해 돌아앉았다. 창현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돌연 노인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깜짝 놀랐다.


"나는 성은 없고 그저 에첵이라 불리는 쓸모없는 노인이라오. 우리를 살려주셔서 진정 감사드리오."


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앉은 채로 허리를 숙여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까지 인사를 하는 것을 보니 그 진심이 느껴졌다. 창현은 늙은 사람을 존중하도록 배웠기에 차마 앉아서 그 인사를 받지 못하고 얼른 서서 같이 허리를 숙였다.


"저는 이창현이라 하며, 귀 일행을 도운 것은 순전히 하늘의 운이 닿았기 때문입니다. 너무 큰 인사는 제게 과하니 이만 거두어 주시지요."


에첵은 껄껄 웃더니 그제야 허리를 펴고 편하게 앉았다. 그러다가 아직도 옆에 누워있는 여인에게 시선이 닿자 즉시 얼굴색이 굳어졌다.


"공주님은 보살펴 드렸는가?"


덕문에게 하는 말이었다.


"예. 뒷머리에 상처가 있는 것으로 봐서 머리에 충격을 받은듯합니다. 어제부터 정신을 차리지 못하십니다."


덕문도 침중한 안색으로 답했다. 그때 하르착과 이르웨스가 조용히 다가와 에첵에게 고개를 숙였다.


"에첵!"


"에첵!"


"너희 무사하였구나! 잘된 일이다."


그들은 별다른 말 없이 그의 이름만을 연신 불러댔다. 본래 에첵이란 이름이 아니다. 에첵은 아버지란 뜻이고, 대양에서 에첵은 각 세대마다 있어 왔다.


예부터 대양의 사람들은 평생 두 명의 아버지를 두고 섬겼는데 첫째는 낳아준 아버지요, 둘째는 그들의 정신적인 아버지였다. 에첵은 대양이 혈육 중심의 조그만 부락 사회일 때부터 존재했다고 알려진다.


하늘과 땅과 자연의 정신(精神)을 사람과 이어주는 역할을 도맡으며 부족장과는 다른 의미로 사람들을 이끄는 자. 그것이 에첵이었다. 대대로 에첵은 사람들의 마음속 큰 기둥이자 정신적 지주였고 당대의 에첵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이 율령을 반포하며 권력을 굳건히 세울 때, 차마 에첵을 그 아래에 포함 시키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왕에게도 에첵은 에첵으로서 마음속의 아버지이자 스승이기 때문이었다.


에첵은 왕의 집에 머물면서 왕에게 조언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을 내리곤 했다. 왕이 덕문과 딸을 탈출시키며 에첵을 동행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르착과 이르웨스 형제들은 과격하나 단순했으므로,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낸 에첵에게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거의 울듯이 소리치는 형제의 등을 에첵이 조용히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그러던 에첵이 다시 창현을 바라보았다.


"은인께서 같이하자 말씀하셨으니, 무언가 생각이 있는 걸로 보이는구려. 이 늙은이가 알 수 있겠소?"


에첵은 조그만 체구에 마치 돌아가신 촌장님을 연상시키는 낡고 볼품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루해 뵈는 그 모습 뒤에는, 천 년 주목이 내뿜는 것과 같은 현묘함이 숨어있었다. 그 힘에 압도당한 것일까. 창현은 저절로 언행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저라고 딱히 답이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한가지 희망이 있고, 지금 그것을 찾고 있는 중이죠. 그 와중에 귀 일행을 만난 것입니다."


"이 늙은이 귀를 씻고 들을 테니 그 희망이란 것을 말해 주시오."


창현은 이가촌 일행이 처한 상황을 어느 정도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먼저 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창현이 말을 하고 덕문과 나머지 사람들이 그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흘러나온 창현의 말은 대양 사람들에게 실로 충격이었다.


창현은 그의 내밀한 사정까진 밝히지 않았지만 그 밖에 최근 이가촌의 상황과 그들이 겪었던 괴물과의 싸움, 그리고 결국 그것을 피해 터전을 버린 채 떠도는 이가촌 사람들에 관해선 가감 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덕문들은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저는 제가 발견했던 지하의 안전한 곳으로 우리 마을 사람들을 인도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벌써 해가 지려고 하고 있군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땅을 파고 오늘 밤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낼까 전전긍긍하고 있을 겁니다. 날은 점점 추워질 것이고 입이 많으니 먹이를 구하기도 쉽지 않겠지요."


사실 창현은 속으로 애가 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을 버리고 훌쩍 떠날 수도 없었다. 어제 겪었듯 이 근방은 괴물로부터 전혀 안전하지가 않다. 하루를 더 버틸까? 아니면 이틀?


어제 한번 구해주었다고 해도, 이대로 떠나버린다면 다시 이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 꼴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같이 가자고 한 것은 창현으로서도 매우 고심한 후에 꺼낸 말이었다. 물론 이들과 같이 움직인다면 피곤한 것은 그 자신일 거였다. 생명의 책임, 이후에 그가 겪을지 모를 고난도 모두 스스로의 짐일 테다.


에첵은 창현의 말에서 지금 그가 생각하는 바를 대강 파악했다. 굳이 에첵의 노련한 눈썰미가 아니라 하더라도 창현은 심중의 기분과 생각이 얼굴로 잘 나타나는 편이었던 것이다. 에첵이 말했다.


"사실 민망한 말이지만, 은인의 고충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이 되는구려. 의당 본인의 품에 있는 사람을 먼저 살피는 것이 도리인 법이요, 세상 사는 이치라고 할 수 있소. 한번 은혜를 입었는데 또다시 손을 벌릴 정도로 우리는 뻔뻔하지 않으니 은인은 스스로의 필요를 돌보는 것이 어떻겠소?"


"말씀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그러나 제 일행에는 저 못지않은 사람들이 많고 저 역시 여러분과 함께한다고 특별한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심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창현의 말을 듣더니 에첵이 문득 탄식했다.


"은인의 말은 참으로 고마운 것이오. 우리의 사정이 이러하니 은인의 말을 더는 거절하지 않으리다."


에첵이 그렇게 결론지어 버렸지만 덕문은 아무런 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동안 아무리 일행을 인솔해 왔다고 해도 에첵은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정신적 `에첵`이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이미 하루가 다 지났으니 몸을 추스르고 내일 떠나도록 하시지요. 그런데 혹시 걸을 순 있겠습니까?"


창현이 묻자 에첵은 아직까지 그 앞에 앉아있는 하르착과 이르웨스 형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확실히 아직까진 무리인 것 같구려. 그래도 우리에겐 매와 표범이 있으니 걱정할 건 없소. 자네들의 신세를 조금 져야겠군. 괜찮겠지?"


형제 둘이 동시에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하르착! 내가 한다!"


"이르웨스! 내가 한다!"


에첵이 조용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 아무나 하려무나."


* * *


그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땅속으로 파고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숲을 쭉 가로질러 내달리고 곧 하늘로 날아올랐다. 푸른 하늘 가운데 떠 있는 구름 속을 들락날락하며 미세한 구름 입자들이 온몸에 와 부딪히는 기분을 만끽했다. 달을 지나 해까지 가보기도 하고 다시 돌아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흐려지고 오직 의식 하나만이 오롯이 자유로웠다. 한동안 돌고래와 같이 놀던 그녀는 다시 자신만의 안식처로 돌아왔다. 안식처에서 그녀는 김무을 박사를 만났다. 그녀를 만들고 정신을 넣어 준 그녀의 창조자를.


어떻게 지내셨나요?


그럭저럭 잘 지냈지. 너는 어때?


겨울이라 조금 춥긴 하지만 괜찮아요.


여기도 춥지. 심심하지는 않니?


겨울이라 동물들이 다 잠을 자는지 요즘엔 움직이는 걸 찾기도 힘들어요. 꽤 심심하죠.


....


박사가 입을 벌리며 무언가 말을 했지만 잘 들리지가 않았다.


뭐라구요? 다시 한 번 말해주세요.


....


그가 다시 말을 하는데도 그녀에겐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김박사의 모습마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사라져 가는 김박사의 모습은 그녀에게 큰 슬픔이었다. 그녀의 능력으로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이것은 꿈이고, 실체가 없는 환상이기에.


그녀 역시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매번 겪어야 하는 이별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눈을 뜨자 어둡게 내려앉은 천장이 보였다. 그녀는 안드로이드 프로그램의 집합체로서 원래 대로라면 꿈을 꾸지 않는다.


하지만 꿈이란 무엇인가? 잠을 자는 동안 깨어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에서 보고 듣고 겪는 정신현상을 꿈이라고 정의한다면, 사실 그녀가 보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꿈이 아니다. 애초에 그녀는 잠을 자지 않기에 꿈을 꾸기 위한 조건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의 이면, 무의식에 투영된 그 영상을 꿈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단지 기억의 반복재생, 아니면 차라리 신경성 노이로제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영상을 스스로의 머릿속에 투영하는 것뿐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키며 힘없이 웃었다.


한번 메모리에 저장된 데이터는 잊혀지지 않기에 그녀에게 망각이란 없다. 그래서 예전의 감정과 기억은 한 올도 빠짐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지금에 이르러 다른 어떤 프로그램보다 강한 제어력으로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동인(動因)이 되어 버렸다.


한백이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어디선가 밝은 빛이 새어 나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옅은 스크린을 만들어 띄웠다. 스크린엔 쉘터를 중심으로 직경 100Km 범위의 지도가 표시되어 있었다. 쉴 새 없이 반짝이는 붉은 점이 그 지도 한곳에 나타나 있었는데 쉘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이었다.


"아직인가요?"


붉은 입술이 살짝 열리며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그녀는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떠나갔던 연약하고 고집스럽던 한 명의 인간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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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인다(3) +1 21.05.30 843 3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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